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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화. 한 번의 거절

Author: 에이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3 09:29:14

도현이 오랜만에 먼저 보관함을 열었다.

“오늘 원합니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의 손이 멈췄다.

“알겠습니다.”

그뿐이었다.

보관함을 닫고 돌아섰다.

“끝?”

“네.”

“왜 안 물어봐요?”

“싫다고 했으니까.”

“이유도?”

“말하고 싶으면 들을 겁니다.”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내가 이상해졌다.

“서운하지 않아요?”

“조금.”

“그런데?”

“당신의 거절을 바꾸려고 하면 안 됩니다.”

도현은 침대 반대편에 앉아 책을 펼쳤다.

나는 한동안 그를 보다가 옆으로 갔다.

“이유는 그냥 피곤해서예요.”

“알겠습니다.”

“주인님이 싫어서 아니고.”

책장이 멈췄다.

“그 말은 조금 고맙습니다.”

“많이는 아니고?”

“많이.”

그제야 웃음이 났다.

“안아 주는 건 괜찮아요.”

도현은 책을 내려놓았다.

“확실합니까?”

“네.”

그가 품을 열었다.

나는 스스로 들어갔다.

“이런 것도 매번 물을 거예요?”

“당신이 싫다고 말한 직후니까 더.”

“진짜 많이 변했네.”

“좋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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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240화. 다음 명령은 내일

    다음 날 아침, 도현은 먼저 일어나 있었다.식탁 위에는 커피 두 잔과 작은 카드 한 장이 놓여 있었다.“또 카드?”“읽어 보십시오.”앞면에는 숫자가 없었다.뒷면에는 한 줄만 적혀 있었다.[다음 명령은 내일도 선택한 뒤에.]나는 카드를 뒤집어 봤다.“이게 뭐예요?”“어제 생각했습니다.”“피곤하다며.”“그래서 더.”도현은 내 맞은편에 앉았다.“우리가 관계에 익숙해질수록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늘어납니다.”“뭘요?”“당신이 원할 거라는 것.”그가 잠시 멈췄다.“제가 원할 거라는 것.”어제의 거절이 떠올랐다.“그래서 매일 다시 묻자?”“네.”“좀 귀찮은데.”“알고 있습니다.”“그래도 해야 해요?”“저는 하고 싶습니다.”나는 카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그럼 오늘은?”도현의 시선이 깊어졌다.“지금 묻습니까?”“네.”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잠시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오늘은 원합니다.”“뭘요?”도현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이번에는 내가 그가 하던 질문을 돌려줬다.“구체적으로 말해요.”입가에 작은 미소가 생겼다.“당신이 제 앞에서 스스로 선택하는 것을.”“그건 늘 하잖아요.”“오늘은 조금 더 명확하게.”“어떻게?”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에 섰다.“침실 문까지는 제가 가지 않겠습니다.”“또 제가 와야 돼요?”“네.”“안 가면?”“오늘은 끝입니다.”그는 먼저 침실로 들어갔다.문은 닫지 않았다.나는 혼자 식탁에 남았다.일어나지 않아도 됐다.누가 잡으러 오지도 않을 것이다.몇 초.십 초.도현은 돌아오지 않았다.나는 결국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침실 문 앞에 도착하자 그는 안쪽에 서 있었다.손 하나 뻗지 않았다.“여기까지 왔어요.”“알고 있습니다.”“이제요?”그가 물었다.“들어올 겁니까?”나는 문턱 앞에서 잠시 멈췄다.그리고 한 걸음 들어갔다.“네.”도현의 눈빛이 짙어졌다.“확실합니까?”“네.”“오늘의 색깔.”“초록색.”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239화. 도현의 거절

    며칠 뒤 반대 상황이 찾아왔다.이번에는 내가 먼저 보관함을 열었다.도현은 문 앞에서 내 손을 바라봤다.“오늘은 안 됩니다.”“…뭐?”예상하지 못했다.“왜요?”“피곤합니다.”“도현 씨가요?”“네.”나는 괜히 당황했다.그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한 적이 거의 없었다.“진짜 피곤해서?”도현의 눈빛이 변했다.“다른 이유가 있어야 합니까?”“아니, 그냥…”말을 하다 멈췄다.내가 지금 그가 나에게 했던 일을 똑같이 하고 있었다.거절을 개인적인 거부로 받아들이고 이유를 찾는 것.“미안해요.”나는 보관함을 닫았다.“쉬어요.”도현은 침대에 앉았다.“서운합니까?”“조금.”“말해도 됩니다.”“제가 원할 때 도현 씨도 항상 원하는 줄 알았어요.”“대부분은 그렇습니다.”“오늘은 아니고?”“몸이 지쳤습니다.”그는 솔직했다.“억지로 시작하면 제가 집중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알겠어요.”나는 옆에 누웠다.도현이 물었다.“안아도 됩니까?”“응.”그의 팔이 허리를 감쌌다.“이상하네요.”“뭐가?”“거절당하면 불안해지는 기분.”“이제 알겠습니까?”“네.”도현이 아주 작게 웃었다.“좋은 학습이군요.”“놀리지 마요.”“미안합니다.”나는 그의 가슴을 가볍게 쳤다.“내일은?”“내일 상태를 보고 다시 선택하겠습니다.”그 말도 맞았다.미리 약속할 필요는 없었다.원하는지 그때 다시 묻는 것.결혼한 뒤에도, 오래 함께한 뒤에도.그 기본은 달라지지 않았다.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238화. 한 번의 거절

    도현이 오랜만에 먼저 보관함을 열었다.“오늘 원합니까?”나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아니요.”그의 손이 멈췄다.“알겠습니다.”그뿐이었다.보관함을 닫고 돌아섰다.“끝?”“네.”“왜 안 물어봐요?”“싫다고 했으니까.”“이유도?”“말하고 싶으면 들을 겁니다.”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내가 이상해졌다.“서운하지 않아요?”“조금.”“그런데?”“당신의 거절을 바꾸려고 하면 안 됩니다.”도현은 침대 반대편에 앉아 책을 펼쳤다.나는 한동안 그를 보다가 옆으로 갔다.“이유는 그냥 피곤해서예요.”“알겠습니다.”“주인님이 싫어서 아니고.”책장이 멈췄다.“그 말은 조금 고맙습니다.”“많이는 아니고?”“많이.”그제야 웃음이 났다.“안아 주는 건 괜찮아요.”도현은 책을 내려놓았다.“확실합니까?”“네.”그가 품을 열었다.나는 스스로 들어갔다.“이런 것도 매번 물을 거예요?”“당신이 싫다고 말한 직후니까 더.”“진짜 많이 변했네.”“좋습니까?”“가끔은 너무 조심해서 답답해요.”도현의 눈썹이 올라갔다.“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제가 괜찮다고 한 다음에는 좀 자신 있게.”“기억하겠습니다.”말이 끝나자 허리를 감싼 팔이 조금 더 단단해졌다.“이 정도?”“응.”“더?”“조금.”그는 내가 말한 만큼만 힘을 더했다.거절은 그날 밤 아무것도 끝내지 않았다.오히려 그 뒤에 무엇이 가능한지 더 분명하게 만들었다.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237화. 파리의 경고장

    다음 날 파리 센터에 공식 경고장이 도착했다.프랑스 노동당국이 일부 직원들의 초과근무 기록을 조사하겠다는 통보였다.문제는 내 총괄실이었다.조직 축소 이후 남은 직원들이 업무를 떠안으며 주당 근무시간이 급증한 것이다.“제가 줄인 조직 때문에 생긴 거네요.”마르틴이 말했다.“맞지만, 관리자가 막지 못한 책임도 있습니다.”“총괄 책임입니다.”나는 바로 인정했다.도현에게 말하자 그는 첫마디부터 달랐다.“사람을 다시 늘리십시오.”“아직 조사도 안 끝났어요.”“기록만 봐도 과도합니다.”“조직 줄인 지 한 달밖에 안 됐는데 다시 늘리면 실패 인정이잖아요.”도현의 표정이 굳었다.“사람이 지쳐 있는데 체면을 먼저 생각합니까?”말이 세게 들어왔다.“체면 때문만은 아니에요.”“그럼?”“또 조직이 커지면 예전으로 돌아갈까 봐.”“인원을 늘리는 것과 권한을 가져오는 것은 다릅니다.”그는 정확히 구분했다.나는 총괄실 인원을 일부 복원하되 결재 권한은 늘리지 않는 구조를 만들었다.초과근무 수당도 소급 지급했다.노동당국 조사는 경고 없이 종결됐다.직원 간담회에서 한 사람이 말했다.“총괄님이 사람을 줄이면서 효율을 강조했을 때 솔직히 버티라는 뜻으로 들렸습니다.”가슴이 아팠다.“미안합니다.”이번에는 ‘대표니까 책임진다’는 말 대신 구체적으로 약속했다.“앞으로 조직 개편 후 한 달 동안 근무시간을 주 단위로 확인하겠습니다.”집으로 돌아오자 도현이 물었다.“힘듭니까?”“네.”“오늘은 뭘 원합니까?”나는 한참 고민했다.“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요.”그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좋습니다.”“진짜 아무것도?”“네.”“주인님도 쉬어요?”“오늘은 남편입니다.”그 말이 이상하게 편했다.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236화. 보이지 않는 거리

    안대를 한 상태에서 가장 어려운 건 도현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일이었다.손목을 잡았던 손이 사라졌다.발소리도 멀어졌다.“주인님?”대답이 없었다.“도현 씨.”그제야 목소리가 들렸다.“여기 있습니다.”“왜 대답 안 했어요.”“당신이 먼저 무엇이 필요한지 말하기를 기다렸습니다.”“어디 있는지.”“두 걸음 앞.”숨이 조금 풀렸다.“가까이 와요.”“명령입니까?”“부탁.”한 걸음.또 한 걸음.체온이 느껴졌다.“손대도 돼요.”도현의 손이 허리에 닿았다.강하게 해 달라고 했지만 그는 처음부터 힘을 주지 않았다.서서히.내 몸이 긴장할 때마다 멈췄다.“색깔.”“초록색.”이번에는 손목을 등 뒤로 모았다.“이 정도?”“더.”조금 강해졌다.“이 정도?”“네.”내가 직접 강도를 고르는 과정이 오히려 더 아찔했다.“오늘은 왜 안대가 좋습니까?”도현이 물었다.“주인님 목소리만 들려서.”“좋습니까?”“…네.”“그러면 들으십시오.”목소리가 귀 가까이 내려왔다.“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당신은 언제든 멈출 수 있습니다.”“알아요.”“그래서 제가 더 강하게 해도 됩니까?”심장이 뛰었다.“네.”손목을 잡은 힘이 한 단계 더 단단해졌다.나는 숨을 짧게 들이켰다.도현이 즉시 멈췄다.“노란색?”“아니요.”“확실합니까?”“네.”잠시 뒤 안대가 풀렸다.“왜 벌써 풀어요?”“당신 얼굴을 봐야 해서.”“아깐 목소리만 들으라며.”“제가 확인해야 합니다.”도현은 내 눈을 오래 살폈다.“괜찮습니까?”“네.”“다시 가릴까요?”나는 고개를 저었다.“이제 봐도 돼요.”그는 리본을 내려놓았다.“잘했습니다.”“또 칭찬.”“좋아하지 않습니까?”나는 대답 대신 그의 셔츠를 잡았다.이번에는 그가 웃었다.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235화. 열세 번째가 없는 이유

    나는 결국 물었다.“왜 열세 번째는 안 해요?”도현이 책에서 시선을 들었다.“숫자를 없앴으니까.”“그래도 열두 번째까지 했잖아요.”“그건 당신이 원했습니다.”“열세 번째도 궁금한데.”도현은 한동안 나를 바라봤다.“열세 번째라는 숫자를 기다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그냥 다음이니까.”“그게 문제입니다.”“뭐가.”“당신이 숫자 때문에 원하는지, 정말 원하는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또 정확한 말을 했다.나는 소파에 턱을 괴었다.“그럼 제가 진짜 원한다고 하면?”“무엇을 원합니까?”“…강하게.”“구체적으로.”“또 시작.”“필요한 질문입니다.”나는 생각했다.“손목 잡는 거.”“네.”“자세 통제.”“네.”“목소리 좀 세게.”도현의 눈빛이 달라졌다.“그 이상은?”“오늘은 안대도 괜찮아요.”“왜?”“이번에는 안 보고 싶어요.”“무서워서?”“아니.”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더 집중될 것 같아서.”도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숫자는 붙이지 않습니다.”“그래도 해요?”“당신이 원하는 것이 명확해졌으니까.”검은 리본이 꺼내졌다.그는 바로 눈을 가리지 않았다.“마지막 확인.”“네.”“색깔.”“초록색.”“손목.”“괜찮아요.”“안대.”“네.”“강도.”나는 도현의 눈을 마지막으로 바라봤다.“강하게.”검은 리본이 시야를 가렸다.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그런데 도현의 목소리는 더 선명해졌다.“이제 숫자를 잊으십시오.”손목이 잡혔다.“오늘 필요한 것은 하나뿐입니다.”“뭔데요?”“지금 원하는지.”나는 망설이지 않았다.“네, 주인님.”열세 번째는 없었다.그래서 오히려 다음이 더 자유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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