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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화. 카렐의 반란

Autor: 에이르
last update Data de publicação: 2026-08-27 19:27:00

어젯밤보다.

‘무게’라는 단어가 조금 더 편하게 들렸다.

그리고 며칠 뒤.

이번에는 실패보다 훨씬 사소한 일이 내 기분을 건드렸다.

유럽 총괄실 정례회의.

파리 물류센터 추가 투자 안건을 내가 직접 올린 날이었다.

지난 두 분기 동안 파리 지역 매출이 꾸준히 늘었고, 내년 예상 물동량까지 고려하면 지금부터 시설 확장을 준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화면에 예상 성장률 자료를 띄웠다.

“기존 시설 옆 부지를 장기 임차하는 방식으로 검토하려고 합니다. 당장 전면 확장하는 게 아니라 1단계로—”

“반대합니다.”

말이 끊겼다.

카렐이었다.

회의실이 순간 조용해졌다.

나는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봤다.

“어느 부분을요?”

“투자 자체입니다.”

카렐은 자기 자료를 화면에 띄웠다.

“파리 물류센터 추가 투자는 필요 없습니다.”

“매출이 늘고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그럼?”

“기존 시설 가동률이 74%입니다.”

나는 바로 대답했다.

“평균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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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363화. 문턱을 넘기 전

    도현이 집에 들어온 건 밤 아홉 시가 가까워서였다.나는 침실 바닥에 앉아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현관문이 닫히고.재킷을 벗는 소리.잠시 뒤 침실 문이 열렸다.“아직 일합니까?”“끝났어요.”나는 화면을 닫았다.도현은 문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흰 셔츠.검은 슬랙스.넥타이는 이미 풀어 한쪽 손에 들고 있었다.그런데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나는 고개를 기울였다.“왜 거기 있어요?”대답 대신.도현이 나를 한참 바라봤다.그 시선 때문에 괜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도현 씨.”“일어나십시오.”목소리가 낮았다.나는 바로 알았다.노트북을 옆으로 밀고 일어났다.“주인님?”“네.”그는 여전히 문밖이었다.“여기로.”나는 침실 문 쪽으로 갔다.그런데 문턱 바로 앞에서.“멈추십시오.”한 걸음을 남겨두고 멈췄다.도현은 복도 쪽.나는 침실 안.문턱 하나가 우리 사이에 놓였다.“왜요?”도현이 손에 들고 있던 넥타이를 의자 위에 툭 내려놨다.“오늘은 먼저 나오지 마십시오.”“방에서?”“네.”“주인님이 들어올 거예요?”“그것도 제가 정합니다.”나는 피식 웃었다.“또 기다리게 하려고?”도현의 눈빛이 조금 짙어졌다.“웃지 마십시오.”그 한마디에.웃음이 바로 멈췄다.강하게 말한 것도 아니었다.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목소리 하나가 더 선명했다.나는 입술을 다물었다.도현이 아주 천천히 한 걸음 가까이 왔다.하지만.문턱은 넘지 않았다.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려 했다.“손.”멈췄다.“내리십시오.”천천히 내렸다.“제가 먼저 닿을 때까지.”“네.”도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그냥 나를 봤다.시선이 얼굴에서.어깨.허리.다시 얼굴로 올라왔다.옷을 벗기지도 않았는데.괜히 피부까지 드러난 기분이 들었다.“왜 그렇게 봐요.”“보고 싶어서.”“뭘.”도현이 낮게 말했다.“제가 못 들어오게 하면.”잠깐.“당신이 얼마나 먼저 오고 싶어지는지.”심장이 조금 빨라졌다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362화. 비 오는 밤의 규칙

    비가 왔다.아침부터 내리던 비는 퇴근 시간이 지나도 멈추지 않았다.유리창 밖으로 번지는 빛을 보다가.나는 노트북을 닫았다.한예린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늘은 진짜 바로 가.”“왜.”“비도 오고.”“그게 무슨 상관이야.”“이럴 때 또 회사에 남아 있으면 집 가기 더 싫어져.”나는 웃었다.“오늘은 안 남아.”카렐도 이미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나는 괜히 물었다.“다 했어?”그가 고개를 들었다.“네.”“진짜?”“왜 또 확인하십니까.”“그냥.”“오늘 제 승인 건 없습니다.”“알아.”“그럼 가셔도 됩니다.”이제는 카렐까지 나를 내보냈다.나는 가방을 들었다.“다들 왜 이래.”한예린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네가 집에 가야 우리도 마음 편하니까.”“무슨 논리야.”“총괄이 남아 있으면 괜히 다들 늦게까지 있어야 할 것 같잖아.”그 말에는 반박하기 어려웠다.나는 결국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다.집에 도착했을 때.바지가 조금 젖어 있었다.우산을 썼는데도 바람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현관문을 열자 도현이 바로 나왔다.“많이 젖었습니까?”“조금.”“코트.”나는 벗어 건넸다.그는 바로 욕실 근처 건조대에 걸었다.“수건 가져다줄까요?”“됐어요.”“머리 젖었습니다.”“이 정도는.”도현이 내 앞에 섰다.“가만히.”나는 웃었다.“왜.”그가 수건을 가져와 머리끝을 먼저 눌렀다.세게 문지르지 않고.물기만 천천히 닦았다.“이렇게까지?”“감기 걸리면 제가 귀찮습니다.”“내가 아픈데 왜 도현 씨가 귀찮아.”“간호해야 하니까.”“진짜 낭만 없어.”도현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그래도 합니다.”나는 웃었다.그가 머리를 닦는 동안.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따뜻했다.저녁은 뜨거운 국물이었다.나는 한입 먹고 바로 말했다.“좋다.”도현이 물었다.“맛이?”“응.”“다행입니다.”“도현 씨가 끓였어요?”“배달.”나는 바로 웃었다.“역시.”“왜 웃습니까.”“아까 분위기 너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361화. 오늘은 끝까지 맡겨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부터 평소와 달랐다.도현은 먼저 들어와 있었고.거실 불은 켜져 있었지만 텔레비전도.음악도 없었다.나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그를 봤다.“오늘 일찍 왔네요.”“네.”도현은 소파에 앉아 있지 않았다.식탁 옆에 기대 서 있었다.검은 셔츠.소매는 손목까지 내려와 있었고.평소 집에서처럼 편하게 풀어진 모습도 아니었다.나는 구두를 벗다 말고 물었다.“왜 그렇게 봐요?”도현이 천천히 내 쪽으로 왔다.“오늘은.”목소리가 낮았다.“제가 조금 세게 하고 싶습니다.”손이 멈췄다.요즘 도현은 자기 욕심을 숨기지 않았다.하지만 이렇게 먼저.명확하게 강도를 말하는 날은 많지 않았다.나는 그를 올려다봤다.“어느 정도?”“평소보다 확실하게.”“아프게?”“통증은 중간 이상 안 갑니다.”“묶어요?”“네.”이번에는 대답이 빨랐다.나는 잠시 생각했다.“손목?”“손목만.”“발목은 싫어요.”“안 합니다.”“목도.”“건드리지 않습니다.”“눈은?”도현은 잠시 나를 봤다.“가리고 싶습니다.”나는 숨을 한번 천천히 들이마셨다.“괜찮아요.”“확실합니까?”“네.”“중간에 바꾸고 싶으면.”“말할게요.”“색깔.”“초록.”그제야 도현의 눈빛이 완전히 달라졌다.“좋아.”그리고.“구두 다시 신으십시오.”나는 눈썹을 올렸다.“왜?”“제가 아직 벗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심장이 바로 뛰었다.조금 전까지 벗으려던 구두.나는 말없이 다시 발을 넣었다.도현은 그 모습을 끝까지 봤다.“일어나십시오.”나는 섰다.“가방은 그대로 두고.”“네.”“저 보십시오.”시선을 맞췄다.도현이 가까이 왔다.이번에는 바로 손을 대지 않았다.몇 초 동안.정말 보기만 했다.“오늘 회사에서 힘들었습니까?”“보통.”“피곤합니까?”“조금.”“그래도 계속 가능합니까?”“네.”“좋습니다.”그는 더 이상 회사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손이 내 허리에 닿았다.처음부터 힘이 확실했다.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셔츠를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360화. 보고하지 않은 저녁

    오후 네 시. 파리 쪽에서 두 번째 진행 보고가 올라왔다. 새 외주 업체가 첫 현장 일정까지 문제없이 맞췄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파일을 열어 끝까지 읽었다. 특이사항 없음. 비용 초과 없음. 일정 지연 없음. 그게 전부였다. 예전 같으면 담당 팀장에게 한 번쯤 메시지를 보냈을 것이다. ‘현장 반응은?’ ‘다른 후보와 비교하면?’ ‘다음 일정도 같은 업체로 갈 건가요?’ 그런데 이번에는 하지 않았다. 파일을 닫았다. 한예린이 맞은편에서 물었다. “끝?” “응.” “아무 말도 안 해?” “뭘.” “네가 처음에 다른 업체가 낫다고 했잖아.” “그랬지.” “지금은 잘하고 있고.” “응.” “그럼 인정한다든지.” 나는 잠깐 생각했다. “굳이?” 한예린의 눈썹이 올라갔다. “웬일.” “내가 선택 안 한 업체가 잘한다고 매번 내가 인정 도장 찍어줘야 해?” “그건 아니지.” “그 사람들이 이미 결과 내고 있는데.”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그냥 잘 돌아가면 됐지.” 한예린이 나를 한참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제일 낫겠다.” “뭐가?” “이제 모든 결과를 네 판단이랑 비교하지 않는 거.” 나는 바로 반박하려다가 멈췄다. 완전히 안 하는 건 아니었다. 파일을 처음 열었을 때도. 속으로는 분명 생각했다. ‘내가 고른 업체였으면 어땠을까.’ 그런데 거기까지만 했다. 비교할 수는 있었다. 다만. 그 비교를 다시 팀의 결정 위에 올릴 필요는 없었다. 그때 카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총괄님.” “왜?” 그가 태블릿을 내밀었다. “바르샤바 쪽 운영안입니다.” “결재?” “아닙니다.” 나는 화면을 봤다. “그럼 왜 나한테 줘.” 카렐이 아주 담담하게 대답했다. “참고용입니다.” “참고?” “결정은 현지 책임자가 합니다.” 나는 다시 화면을 봤다. 자료 상단에도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참고 공유 / 승인 불필요] 괜히 웃음이 나왔다. “이런 표시까지 해야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359화. 장갑을 낀 손

    오전 보고는 예상보다 빨리 끝날 줄 알았다. 문제도 크지 않았다. 파리 팀이 새 외주 업체를 선택했고. 계약 금액도 권한 범위 안이었다. 법무 검토도 끝났다. 절차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마지막 페이지에서 손을 멈췄다. “이 업체로 확정했어?” 담당 팀장이 화면 너머로 대답했다. —네. 어제 계약서까지 전달했습니다. “다른 후보가 하나 더 있었잖아.” —있었습니다. “거기가 조건은 더 좋지 않았어?” 잠깐 침묵. —총액은 조금 낮았습니다. 대신 현장 대응 속도가 늦었습니다. 나는 자료를 다시 넘겼다. 숫자만 보면 내가 골랐을 업체는 다른 곳이었다. “그래도 연간으로 보면 차이가 꽤 나는데.” 카렐이 옆에서 말했다. “파리 팀 판단으로는 현재 업체가 운영 리스크가 낮습니다.” “알아.” “그러면 문제 있습니까?”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내가 골랐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 뿐. 한예린이 내 얼굴을 보고 눈치를 챘다. “서윤아.” “응.” “반려하려고?” “아니.” “그런 표정인데.”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화면 속 담당 팀장에게 물었다. “결정한 사람이 누구예요?” —저와 현장 책임자입니다. “둘 다 이 업체가 낫다고 판단했고?” —네. “그럼 됐어요.” 상대가 잠시 멈췄다. —추가 검토 필요 없으십니까? “없어요.” 통화를 종료했다. 카렐이 나를 봤다.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조금.” “그런데 그대로 두셨고.” “권한 줬으니까.” “결과가 나빠지면?” “그때 보면 되지.” 나는 자료를 덮었다. “내 선택이랑 다르다고 잘못된 건 아니잖아.” 한예린이 웃었다. “그 말을 네 입으로 하는 날이 오네.” “왜.” “예전에는 네 선택이 제일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잖아.” “지금도 꽤 합리적이라고 생각해.” 카렐이 바로 말했다. “그 부분은 변하지 않으셨군요.” 나는 그를 노려봤다. “나가.” “다음 회의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358화. 정답 없는 그림

    도현이 건축 스케치 수업에서 돌아온 건 오후 네 시쯤이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나는 소파에서 고개를 들었다. “왔어요?” “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대답이었는데.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도현은 가방을 내려놓고도 한동안 서 있었다. 나는 노트북을 덮었다.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얼굴로?” 그가 나를 봤다. “무슨 얼굴인데요.” “마음에 안 드는 결과 나온 얼굴.” 몇 초 침묵. 정답이었다. 나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보여줘요.” “싫습니다.” 이번에는 바로 거절했다. “진짜?” “네.” “망쳤어요?” “망친 건 아닙니다.” “그럼?” 도현은 한숨을 한번 내쉬고 서재로 들어갔다. 나는 따라가지 않았다. 몇 분쯤 지나자. 결국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서윤.” “왜요?” “와보십시오.” 역시. 나는 웃으며 서재로 갔다. 책상 위에는 오늘 그린 스케치가 펼쳐져 있었다. 작은 카페 내부 같은 공간이었다. 창문. 테이블. 벽. 사람이 앉을 자리 몇 개.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확실히 나아졌다. 그런데 종이 한쪽에 강사가 적은 메모가 있었다. [너무 정확하게 그리려고 하지 마세요.] 나는 그 문장을 읽고 바로 도현을 봤다. “이거 때문에?” “네.” “왜.” “제가 정확하게 그린 게 문제라니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진심으로 억울한 표정이었다. 나는 웃음을 참았다. “뭐라고 설명했는데요?” 도현은 의자에 앉았다. “선은 정확한데 공간이 답답하답니다.” “아.” “그리고.” 그가 다른 부분을 가리켰다. “사람이 실제로 움직일 것 같지 않다고.” 나는 그림을 한참 봤다. “조금 그런 것 같기도.” 도현이 바로 고개를 들었다. “당신도?” “응.” “어디가.” “여기.” 나는 테이블 두 개 사이를 가리켰다. “도현 씨는 간격 맞추려고 딱 맞춰놨는데.” “네.” “사람은 꼭 정중앙으로만 걷지는 않잖아요.” 그의 표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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