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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화. 목소리만 남긴 밤

Author: 에이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30 03:28:37

며칠 뒤.

내가 먼저 말했다.

“오늘은 눈 감을게요.”

도현의 표정이 바로 달라졌다.

“안대는 싫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안대 말고.”

나는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내가 그냥 눈 감는 거.”

그는 잠시 나를 봤다.

“언제든 뜰 수 있고?”

“네.”

“좋습니다.”

“그리고.”

“네.”

“오늘은 최대한 손 안 써요.”

도현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럼 무엇을 원합니까?”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거.”

잠깐 정적.

“목소리.”

도현의 눈빛이 짙어졌다.

“확실합니까?”

“네.”

“색깔.”

“초록.”

나는 정말 눈을 감았다.

안대가 없으니 아무것도 막혀 있지 않았다.

원하면 바로 뜰 수 있었다.

그 차이가 컸다.

도현이 가까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닿지 않았다.

“일어나십시오.”

나는 일어났다.

“한 걸음 앞으로.”

움직였다.

“멈춰.”

내가 멈췄다.

어디에 있는지 대충 알 수 있었지만.

정확한 거리는 몰랐다.

“눈 뜨고 싶습니까?”

“아니요.”

“좋습니다.”

낮은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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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밤이 지나고.나는 아침에 상자를 열었다.도현이 물었다.“무엇을 찾습니까?”“어제 기억.”“물건이 있습니까?”나는 웃었다.“없네.”이름 한 번.목소리.기다림.그건 상자에 넣을 수 없었다.“기록할까?”“어디에?”“종이에 써서.”도현은 잠시 생각했다.“원하면.”나는 종이를 꺼내려다 멈췄다.“아니.”“왜?”“그냥 안 남길래.”도현이 나를 봤다.“좋았던 밤인데?”“응.”“잊을 수도 있습니다.”“그래도.”나는 상자 뚜껑을 닫았다.“잊으면 잊는 거죠.”도현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변했다.“아쉽지 않습니까?”“조금.”“그런데?”“모든 좋은 걸 다 기록하면.”나는 생각하다 말했다.“기억하는 게 숙제 될 것 같아서.”도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맞습니다.”그날 상자에는 아무것도 추가되지 않았다.오히려 그게 마음에 들었다.우리가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반드시 증거가 남아야 하는 건 아니었다.사진도.카드도.기념품도.필요하지 않았다.기억은 변할 수도 있었다.언젠가 세세한 부분은 잊힐 것이다.무슨 옷을 입었는지.몇 시였는지.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지.그래도 괜찮았다.모든 순간이 영구 보존될 필요는 없었다.점심 무렵 도현이 물었다.“그럼 어제 일은 상자에 아무것도 안 들어갑니까?”“네.”“정말?”“아쉬워요?”“조금.”“그럼 도현 씨는 넣고 싶은 거 있어요?”그가 잠시 고민했다.그러다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왜?”“당신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어떤 거?”“그냥 있었던 밤으로 두는 것.”나는 웃었다.“좋네.”상자는 점점 채워졌지만.모든 변화가 상자에 들어가지는 않았다.일부는 물건이 됐고.일부는 사진이 됐고.일부는 그냥 지나갔다.그리고 지나간 것 역시.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았다.우리 관계에는 기록되지 않은 날이 훨씬 더 많았다.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았던 저녁.말없이 같은 소파에 앉아 있던 시간.서로 이름 한 번 부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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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316화. 아무 계획 없는 토요일

    토요일 아침.우리는 정말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그게 오히려 계획이었다.하지만 이번에는 ‘아무 계획 없음’조차 규칙으로 만들지 않기로 했다.눈을 뜬 시간이 열 시가 넘었다.나는 옆을 봤다.도현도 깨어 있었다.“뭐 해요?”“누워 있습니다.”“오늘 뭐 해요?”“모르겠습니다.”“진짜?”“네.”나는 웃었다.“그럼 점심?”“모릅니다.”“나가요?”“모릅니다.”“집에 있어요?”“그것도.”“도현 씨 요즘 모른다는 말 너무 편하게 써.”“명령 아닙니까?”“내가 괜히 만들었나.”우리는 결국 점심때까지 침대에 있었다.뭔가 특별한 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각자 휴대폰을 보고.가끔 대화하고.잠깐 다시 자고.정오쯤 내가 말했다.“배고파.”“저도.”“나갈래요?”“당신은?”“나가고 싶어요.”“그럼 나갑시다.”우리는 옷을 대충 입고 집 근처를 걸었다.예약 없이 들어간 식당.메뉴를 고르고.밥을 먹었다.그다음 계획도 없었다.“어디 갈까요?”도현이 물었다.“모르겠는데.”“그럼 걸읍시다.”“어디까지?”“가고 싶은 데까지.”그게 생각보다 오래 갔다.한 시간.두 시간.중간에 서점에 들어갔다.도현은 건축 책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나는 그를 멀리서 봤다.“또 보고 싶어요?”“무엇을?”“건축.”그가 책 표지를 손끝으로 만졌다.“가끔.”“지금 시작해도 되잖아요.”“직업으로?”“꼭 직업이어야 해요?”도현이 멈췄다.나는 웃었다.“그냥 좋아하면 보면 되지.”그는 책 하나를 샀다.집에 돌아온 뒤.상자에 넣지 않았다.책장에 꽂았다.“이건 안 넣어요?”내가 물었다.도현이 말했다.“읽을 겁니다.”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기억으로 보관하는 것보다.지금 계속 쓰는 것.그게 더 잘 어울리는 물건도 있었다.그날 밤.도현은 침대에서 건축 책을 읽었다.나는 옆에서 노트를 썼다.우리 사이에는 별 대화가 없었다.그래도 좋았다.아무 계획도 없던 토요일은.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이 아니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315화. 대답하지 않을 권리

    차명희가 어느 저녁 우리를 불렀다.이유는 별것 아니었다.새로 그린 그림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그림은 이번에는 바다가 아니었다.작은 창문.그 너머의 정원.나는 한참 봤다.“이것도 좋아요.”차명희가 물었다.“뭐가?”“전보다 색이 밝아졌어요.”도현도 그림을 보고 있었다.그러다 내가 무심코 물었다.“준호 씨는 이거 봤어요?”차명희가 나를 봤다.도현도 동시에 나를 봤다.나는 바로 웃었다.“왜 둘 다.”차명희는 한 박자 늦게 말했다.“봤어.”도현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나는 알아챘다.“또 궁금하죠?”“조금.”차명희가 아들을 봤다.“뭐가.”도현이 잠시 입을 열었다가 멈췄다.“아닙니다.”“물어봐.”“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차명희의 눈썹이 올라갔다.“그럼 해봐.”도현이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요즘 자주 만나십니까?”차명희는 잠시 그를 봤다.그리고 말했다.“그건 말 안 할래.”도현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나는 옆에서 참았다.차명희가 덧붙였다.“싫어서가 아니라.”“네.”“내가 아직 말하고 싶지 않아서.”도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리고.“알겠습니다.”그걸로 끝냈다.차로 돌아오는 길.내가 먼저 물었다.“안 궁금해요?”“많이.”“근데?”“어머니가 대답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서운해요?”“조금.”“화는?”도현은 생각했다.“아닙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우리도 할까요?”“무엇을?”“대답하지 않을 권리.”도현이 나를 봤다.“원래 있었습니다.”“있었는데 잘 안 썼잖아요.”맞는 말이었다.우리는 질문을 하면 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길었다.특히 가까운 관계일수록.부부니까.연인이니까.서로 숨기면 안 된다고.그런데 모든 질문에 즉시 답해야 친밀한 건 아니었다.집에 돌아와 내가 시험 삼아 물었다.“도현 씨.”“네.”“대학교 때 연애 몇 번 했어요?”그가 나를 봤다.“왜 갑자기?”“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고.”도현은 잠시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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