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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or: 매화야담
임씨 부인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역시 속 깊은 건 친딸이었다.

지난 일 년 동안 몸은 나날이 쇠약해졌다. 이제는 말 몇 마디만 해도 숨이 가쁠 지경이었다. 다행히 임서월이 돌아왔으니, 집안 살림을 맡기고 자신은 한시름 놓아도 될 듯했다.

임씨 부인은 딸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돌아가자.”

운방각.

임태겸은 임하연을 침상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자 여러 생각이 스쳤다.

그녀가 뱀을 무서워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뱀뿐만 아니라 꿈틀거리는 벌레라면 무엇이든 질색했으니, 제 손으로 국공부에 들여올 리 없었다. 더구나 붉은꼬리 죽엽청은 도성은커녕 다른 지역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뱀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데, 침상 위의 임하연이 갑자기 발작하듯 소리를 질렀다.

“오지 마! 물지 마! 붉은꼬리 죽엽청은 남강에 사는 뱀인데, 왜 도성에 있는 거야! 내가 데려온 게 아니야. 억울하게 뒤집어씌우지 마! 살려 줘…… 어머니! 오라버니!”

남강이라고?

임태겸은 눈을 내리깐 채 생각에 잠겼다.

임하연은 무언가를 피하려는 듯 침상 위에서 이리저리 몸을 뒤틀었다. 임태겸이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눌러 붙잡았다. 손등에는 푸른 힘줄이 도드라졌고, 그 손길은 꼼짝도 할 수 없을 만큼 단호했다. 그러나 목소리만은 저도 모르게 한결 부드러워졌다.

“겁낼 것 없다. 뱀은 이미 죽었어.”

“아니에요! 저를 물려고 하잖아요!”

임하연이 번쩍 눈을 뜨더니 그대로 임태겸의 가슴에 머리를 부딪쳤다.

임태겸은 가느다란 허리를 움켜쥐고 떼어 내려 했다. 손가락에 조금 힘을 주며 그녀를 달랬다.

“왕길이 이미 치웠다. 집 안에 뱀은 더 없을 것이다.”

임하연은 아픔에 숨을 들이켰다. 남자의 손아귀 힘이 이렇게 셀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물러날 수는 없었다. 기껏 살아났는데 다시 염라대왕을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썩어 빠진 망나니에게 몸을 내맡기는 건 더더욱 사양이었다.

임하연은 임태겸을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코알라처럼 그의 몸에 매달린 채 흐느꼈다.

“오라버니, 가지 마세요. 무서워요. 뱀은 제가 데려온 게 아닌데…… 어머니는 제 말을 믿어 주지도 않으시고…… 흐윽.”

서늘한 눈물이 맨가슴을 타고 흘러내렸다. 작은 벌레가 기어가는 듯 축축하고 간지러운 감각에, 임태겸은 그제야 옷을 여미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창밖에서 스며든 옅은 달빛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빈틈없이 포개져 있었다. 문득 주위의 공기가 묘하게 달라졌다.

바닥에 드리운 그림자를 내려다보던 임태겸의 목울대가 저도 모르게 움직였다. 그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겉옷을 여몄다.

“그 뱀이 정말 남강에서 온 것이냐?”

임하연은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한참 뒤에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방의 동식물을 다룬 책에서 본 적이 있어요. 남강에만 사는 뱀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오라버니는 모르셨어요?”

핏기 없는 작은 얼굴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꼬리에는 눈물 한 방울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임태겸은 손을 뻗어 닦아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몰랐다. 이 일은 내가 알아볼 테니, 너는 일찍 쉬어라.”

결국 손을 뻗지 않은 채 돌아섰다. 그러나 임하연이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오라버니, 정말 저를 여동생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으세요? 몸을 데울 약조차 주기 싫으실 만큼요? 이제 심청운에게 시집가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그러니까 저 미워하지 않으시면 안 돼요?”

임하연은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눈에는 두려움과 막막함이 가득했다.

아직 양심이 조금은 남아 있다는 걸 확인한 뒤로 임하연의 자신감은 부쩍 커졌다. 조금 전 악몽에 시달린 것도, 물론 연기였다.

눈물로 젖은 얼굴을 바라보던 임태겸은 잠시 말을 잃었다.

문득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했다. 임아연이 대여섯 살이던 시절에도 저렇게 옷자락을 잡고 응석을 부리곤 했다.

그러나 지난 일 년 동안 그녀 때문에 어머니가 수차례 쓰러졌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그의 얼굴은 다시 차갑게 굳었다.

“내가 너를 여동생으로 여기지 않는 게 아니다. 네가 온 집안을 적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지.”

임하연은 원래 주인을 위해 한마디라도 변명해 보려 했다. 하지만 임태겸은 이미 문을 열고 나간 뒤였다.

문 앞에서는 왕길이 뱀을 든 채 기다리고 있었다.

“도련님, 묻을까요?”

임태겸은 죽은 뱀을 받아 들었다. 겁에 질려 어쩔 줄 모르던 임하연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자 질긴 뱀의 몸이 두 동강 났다.

“가져가서 토막 내거라.”

뱀을 왕길에게 던져 준 임태겸은 흰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을 꼼꼼히 닦았다. 그러고는 다시 명했다.

“최근 도성에서 누가 이런 뱀을 샀는지 알아보아라.”

“오라버니.”

옆에서 임서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에 바람막이 등불을 든 임서월이 사뿐사뿐 다가왔다. 몸가짐은 어느 모로 보나 반듯한 명문가 규수였다.

“이 늦은 시각에 어쩐 일이냐?”

임태겸이 길고 가느다란 눈을 들었다. 그 시선에는 전보다 조금 더 상대를 살피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임서월이 부드럽게 답했다.

“언니가 걱정돼서요. 어머니께 들으니 어릴 때부터 뱀을 무서워했다더라고요. 오늘 많이 놀랐을 테니, 운방각에 가서 곁에 있어 주려고요.”

임태겸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내 옅은 웃음이 입가에 걸렸다.

“그럴 것 없다. 이미 잠들었어.”

“아, 그래요? 그럼 내일 가 봐야겠네요. 오라버니도 편히 주무세요.”

임서월은 몸을 살짝 굽혀 인사한 뒤 시녀와 함께 떠났다.

임태겸은 한동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왕길에게 다시 지시했다.

“헛간을 지키는 조복에게 물어보거라. 임아연이 정말 한기를 풀어주는 약을 먹었는지.”

*

이튿날.

임하연은 날이 훤히 밝도록 자고 나서야 흡족한 얼굴로 이불 밖에 나왔다.

월세를 낼 필요도 없고, 일자리 걱정도 없었다. 거기에 시중을 들어 주는 사람까지 있으니, 옛날 부잣집 아가씨로 사는 것도 제법 괜찮았다.

길게 기지개를 켜며 침상에서 일어나던 임하연은 어젯밤의 붉은꼬리 죽엽청을 떠올렸다. 그러자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온몸이 귀한 약재인데, 아깝게 됐네.

그렇게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채의가 밖에서 들어왔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왕길이 안신약을 가져왔어요. 식기 전에 드세요.”

임하연은 약을 받아 한 모금 맛보더니 곧바로 뱉었다.

주사와 산조인. 마음을 안정시키는 약재가 맞기는 했다. 하지만 주사의 양이 지나치게 많았다. 며칠만 계속 마셔도 위장에 구멍이 날 판이었다.

임하연은 의과대학을 졸업했고, 할아버지 역시 의술에 조예가 깊었다. 그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소문(素問: 의서)』과 『영추(靈樞: 의서)』를 읽었으며, 다섯 살에는 이미 백 가지 약재를 구별했다. 흔히 쓰는 약재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검은 약탕을 내려다보자 가슴이 철렁했다.

어제는 약을 안 주더니, 오늘은 아예 독을 넣어 보냈네.

기어이 내가 죽어야 끝나겠다는 거지?

왕길이 임태겸의 가장 가까운 심복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어젯밤의 연기는 헛수고였던 모양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 짚었는지도 몰랐다.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이 임서월이 아니라, 여동생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임태겸일 수도 있었다.

그 애지중지하는 친동생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국공부에 악인밖에 없다면, 제 목숨은 정말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그러나 채의는 그저 기뻐했다.

“도련님은 겉으로만 차가우시지, 마음은 여리세요. 아가씨께서 잘못을 고치려 하신다는 걸 아셨으니, 이제 더는 모질게 대하지 않으실 거예요.”

임하연은 속으로 혀를 찼다.

독약을 입 앞까지 갖다 놓았는데 마음이 여리다고? 직접 붙잡고 들이붓지만 않았을 뿐이지. 점잖은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아주 몹쓸 인간이네!

“약은 버려. 앞으로 남이 가져온 건 함부로 먹지 마.”

채의의 눈이 커졌다.

“누가 저희를 해치려는 건가요? 당장 도련님께 말씀드릴게요.”

임하연이 얼른 채의를 붙잡았다.

“가지 마. 이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돼. 우리끼리 조심하면 돼. 지금 국공부는 예전과 달라. 방심했다가는 영문도 모르고 죽을 수 있어.”

채의는 늘 아가씨의 말이라면 군말 없이 따랐다. 이번에도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임하연은 콧등을 꾹 눌렀다.

아무래도 임태겸의 마음을 돌리는 건 어려울 듯했다. 그렇다면 목표를 바꿔, 이번에는 임씨 부인에게 다가가 보는 편이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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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라버니, 여동생에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30화

    임태겸은 시선을 거두고 담담히 말했다.“아니다. 네가 이런 이야기를 좋아할 줄은 몰랐구나. 글은 언제부터 배웠느냐?”임하연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사실 남몰래 배운 지 이 년쯤 됐어요. 그래도 비웃으시면 안 돼요. 책에 나온 이야기도 겨우 뜻만 짚어 가며 읽는 거지, 글자를 전부 아는 건 아니거든요.”그건 사실이었다. 한자는 획수가 많고 복잡해서, 임하연도 몇몇 글자는 앞뒤 문맥을 보고 짐작하며 읽어야 했다.“그럴 수 있지. 앞으로 모르는 글자가 나오면 붓으로 표시해 두거라. 내가 알려 주마.”말을 마친 임태겸이 다시 눈을 들었다.“그런데 아까 채의가 그러더구나. 밖에 나가 살고 싶다 했다지?”임하연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채의가 괜한 소리를 한 거예요. 그런 생각 한 적 없어요. 집이 이렇게 좋은데 제가 왜 나가겠어요?”임태겸은 임하연의 얼굴을 잠시 살피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뒷짐을 진 어깨 위로 맑은 달빛이 은빛 비단처럼 흘러내렸다. 훤칠한 몸을 감싸는 빛이 서늘하고도 고요했다.“집에 있는 것이 답답하면 가끔 나가 바람을 쐬어도 좋다. 다만 너무 오래 머물지는 마라. 어머니 심기를 거슬러 또 책잡힐 일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몸에 밴 냉랭한 분위기와 달리, 목소리는 꽤 부드러웠다.임하연은 뜻밖이라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선뜻 짐작되지 않았다.“오라버니도…… 제가 이 집에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짐짓 서운한 얼굴을 하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허튼소리.”임태겸이 못마땅한 듯 돌아서더니, 예스러운 모양의 황동 열쇠 하나를 탁자 위에 던졌다.“영안가 끝자락에 작은 집이 있다. 문 앞에 백양나무 두 그루가 있고, ‘발묵헌’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니 쉽게 찾을 게다.”임하연은 놀라 입을 벌렸다.이건…… 집을 쓰라는 뜻인가?눈빛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밤하늘의 별보다도 반짝이는 눈이었다.임태겸은 정말 필요할 때마다 나타나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오라버니가

  • 오라버니, 여동생에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29화

    운방각으로 돌아오자 채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부인께서 먼저 잘해 주시는데, 아가씨는 왜 여전히 기분이 안 좋으세요?”임하연은 턱을 괸 채 대꾸했다.“이유 없이 잘해 주는 사람은 속셈부터 의심하라는 말도 못 들어 봤어?”잠시 임하연을 바라보던 채의가 뜻밖의 발견이라도 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런데 아가씨는 언제 그렇게 많이 배우셨어요? 노래도 지으시고, 어려운 말도 척척 하시잖아요. 언제 공부하신 거예요? 정말 대단하세요!”채의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얼굴에는 감탄과 동경이 가득했다.임하연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대체 이야기가 왜 그쪽으로 흘러가는 건데?“대단하면 뭐 해. 그걸로 배가 부르는 것도 아닌데.”겨우 허기만 달랜 배를 쓰다듬으며 임하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만 더 이렇게 먹었다가는 저혈당으로 쓰러질 판이었다. 옛날 규수들의 허리가 한 줌밖에 안 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죄다 제대로 못 먹어서 그런 거였다.그렇다고 음식점에 가서 배불리 먹을 수도 없었다. 임아연의 악명은 도성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또 밖에서 눈에 띄게 돌아다녔다가는 여기저기서 손가락질을 받을 게 뻔했다.차라리 몰래 집 한 채를 사 두는 편이 낫겠다. 가끔 들러 제대로 된 식사도 하고, 나중에 임씨 가문을 정말 떠나게 되면 자신만의 보금자리로 삼을 수도 있으니까.“채의야, 도성에서는 집값이 비싸?”채의가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자리 좋은 곳에 우리 저택만한 집을 장만하려면 팔구천 냥은 있어야 할 거예요. 그보다 더 비쌀 수도 있고요.”임하연은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비싼 대저택을 살 형편은 못 됐다.“외진 곳은? 그냥 평범한 살림집 말이야.”“그런 집은 훨씬 싸지요. 조용한 곳에 있는 작은 집이라면, 따로 마당이 딸려 있어도 팔십 냥에서 백 냥 정도면 살 수 있을 거예요.”“아, 그렇구나.”현대 돈으로 어림잡으면 400만 원쯤이었다. 그 정도면 가격도 나쁘지 않았다.그렇게 따져 보니, 임씨 가문은 생각보다 훨씬

  • 오라버니, 여동생에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28화

    운방각으로 돌아온 임하연은 기분이 더없이 좋았다.아이들에게는 이미 유재휘의 생김새와 특징까지 알려 두었다. 이제 유재휘와 심청운이 서로 물고 뜯게 만들 수 있을 터였다. 설령 유재휘가 돈을 받아 오지 못하더라도, 심청운은 날마다 자신을 깎아내리는 노래를 듣고 견디지 못할 게 분명했다.어느 쪽이든 자신이 손해 볼 일은 없었다.임하연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햇볕을 쬐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옛날의 생활은 참 단순하면서도 심심했다.방으로 들어가 한숨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임하연은 채의를 데리고 저녁을 먹으러 앞채로 향했다.오솔길을 막 벗어나는데, 이복이 의원 한 명을 안내해 정청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임하연은 일부러 발소리를 죽이고 문가에 몸을 숨겼다. 안에서는 의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부인께서는 마음의 근심 때문에 몸이 상하신 겁니다. 크게 염려하실 일은 아니니, 마음을 편히 가지시면 머지않아 회복하실 것입니다.”임씨 부인은 임태겸을 가볍게 나무라는 눈으로 바라보았다.“내가 괜찮다고 하지 않았느냐. 태겸이가 영 마음을 놓지 못해서 말이지.”의원이 웃으며 거들었다.“임 대인께서 효성이 지극하셔서 그렇지요. 어머님께서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급하실 수밖에요. 이런 효자를 두셨으니 부인께서는 참으로 복이 많으십니다.”칭찬에 임씨 부인의 눈가에 잡힌 웃음 주름이 한층 깊어졌다. 그녀는 임태겸을 곁눈질하며 슬쩍 말을 돌렸다.“그렇지요. 아들은 효성이 지극하고, 딸도 어미 마음을 살뜰히 헤아려 준답니다. 이제 떡두꺼비 같은 손자만 하나 있으면 되겠어요.”의원은 약상자를 챙기며 아첨을 이어 갔다.“소인이 도성에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임 대인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큰일을 맡으신 데다 재주도 출중하시고, 용모 또한 훤칠하시니, 어느 집 규수가 국공부로 시집오든 조상님 덕을 톡톡히 보는 셈이지요.”임씨 부인은 그런 말을 무엇보다 좋아했다. 더욱 흡족해진 그녀는 곁의

  • 오라버니, 여동생에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27화

    그 시각, 심청운은 근처 찻집에서 나오고 있었다. 아이들 몇이 깡충깡충 뛰며 노래를 부르는 소리에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저 아이들, 심 공자라고 부르는 것 같지 않느냐?”하인이 귀를 기울이더니 목을 움츠렸다.“도련님 이야기가 맞는 것 같습니다만…… 썩 좋은 말은 아닌 듯합니다.”바로 옆에서 밀떡을 파는 장사꾼이 쉴 새 없이 손님을 부르는 통에, 심청운에게는 노랫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한 명 데려와서 물어보거라.”하인은 곧장 아이들을 뒤쫓아가 사탕 하나로 한 아이를 달랜 뒤, 심청운 앞으로 데려왔다.“무슨 노래를 부르고 있었니? 나한테도 들려주겠느냐?”심청운이 다정하게 웃으며 물었다.눈앞의 사내가 노래 속 심 공자인 줄 모르는 아이는 임하연에게 배운 노랫말을 그대로 읊었다.심청운은 분노에 이를 악물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유지했다.“얘야, 그 노래는 누가 가르쳐 주었니?”“유씨 성을 가진 공자님이요.”아이는 대답을 마치자 다시 깡충깡충 뛰어갔다.심청운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게 누구야. 청운 도련님 아니신가? 한참 찾아다녔잖아.”다가오는 사람을 확인한 심청운의 속이 불편해졌다.“유재휘? 나한테 무슨 볼일이지?”백성들은 두 사람을 똑같이 망나니라 불렀지만, 실상은 꽤 달랐다.심청운은 풍류를 즐기고 돈을 물 쓰듯 쓰기는 해도, 양갓집 여인에게 함부로 손을 대지는 않았다. 도성에 온 뒤 몇 년 동안 그와 가까이 지낸 여인은 임아연뿐이었다.반면 유재휘는 악명이 자자했다. 상인들을 괴롭히고 시장을 제멋대로 휘어잡는 데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납치하는 등 못 하는 악행이 없었다. 뒤를 따르는 몇몇 앞잡이를 제외하면, 누구나 그를 보는 즉시 멀찍이 피했다.유재휘는 능글맞게 웃으며 심청운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임씨 가문의 큰소저 대신 볼일 좀 보러 왔지. 그동안 그 소저 돈을 꽤 많이 썼다며? 마음을 받아 줄 생각이 없으면 돈이라도 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뒤따라온 하인들도

  • 오라버니, 여동생에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26화

    “제가 여자를 납치하는 도적도 아니고, 흉악한 강도도 아닌데 무슨 나쁜 짓을 하겠어요? 어머니 마차가 돌아오는 걸 봤단 말이에요.”임하연은 응석 부리듯 가볍게 콧소리를 내고는 치맛자락을 들어 뒷마당으로 달려갔다. 허둥지둥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임태겸의 입가에 엷은 웃음이 번졌다.이제는 제 말을 들을 줄도 알고, 성격도 한결 밝아졌다. 좋은 변화였다.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임씨 부인의 마차가 대문 앞에 도착했다. 임태겸은 얼른 다가가 어머니가 내리는 것을 부축했다.“오늘은 햇볕이 좋아 나들이하기에 알맞겠습니다. 몸은 좀 나아지셨습니까?”임씨 부인이 기분 좋은 얼굴로 답했다.“절의 종소리를 듣고 은은한 단향을 맡으니, 마음이 한결 고요해지더구나.”“그러셨다니 다행입니다. 예부의 방 대인께 들으니, 얼마 전 도성에 온 이 의원이라는 분의 의술이 뛰어나다고 합니다. 오늘 신시에 어머니를 진찰하러 오도록 청해 두었습니다.”임서월의 안색이 미세하게 변했다. 슬쩍 임태겸을 살피는 눈에 의문이 스쳤다.갑자기 왜 의원을 바꾸는 거지?반면 임씨 부인은 아들의 정성에 흐뭇해졌다. 임태겸의 손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날마다 공무로 바쁠 텐데, 어미 몸까지 신경 쓰느라 애쓰지 말거라. 앞으로 이런 일은 서월이에게 맡기면 된다.”임태겸이 담담히 웃었다.“서월이는 아직 도성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처녀가 밖에 나가 알아보기 어려운 일도 있고요.”임씨 부인은 사뿐히 다가오는 임서월을 바라보았다. 눈길에는 숨길 수 없는 편애가 묻어 있었다.“여자는 혼인 전까지 집 안에서 얌전히 지내는 게지. 온종일 밖으로 쏘다니면 그게 무슨 꼴이겠니.”당연히 임하연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다행히 오늘 유씨 노부인을 만났으니, 임씨 가문의 뜻도 곧 유 승상의 귀에 들어갈 터였다.임태겸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어렸다.“한 가지 모습만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하실 수는 없습니다. 아연이도 이제는 달라지고 있으니, 어머니께서도 선입견을 거두어 주십

  • 오라버니, 여동생에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25화

    “아가씨, 정말 대단하세요! 말 몇 마디로 유 공자를 속이시고, 심청운에게 돈까지 받아 오게 하셨잖아요. 이거야말로 일석이꿩 아닌가요?”조금 전 유재휘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사람을 강제로 끌고 갈 기세였다. 채의는 몇 번이나 식은땀이 날 만큼 겁에 질려 있었는데, 이렇게 쉽게 위기를 넘긴 데다 뜻밖의 소득까지 생겼으니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임하연은 채의처럼 낙관할 수 없었다. 유재휘는 몹시 집요한 인간이었다. 한번 눈독을 들인 여인은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으니, 오늘은 둘러댔다 해도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서둘러 돈을 모으고, 미리 살길을 마련해야 했다.유 승상은 세 황제를 섬긴 원로로, 지금도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반면 자신은 임씨 가문의 양녀일 뿐이었다. 정말로 가문의 이익이 걸린다면, 임태겸도 집안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버릴 터였다.“이 멍청아, 그럴 땐 일석이조라고 하는 거야. 일단 전장부터 가자.”은표를 잔돈으로 바꾼 임하연은 채의에게 다시 일렀다.“채의야, 사탕을 몇 봉지 사 와. 아까 그 아이들도 데려오고.”채의는 무슨 생각이신지 알 수 없었지만, 군말 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잠시 뒤, 옆 골목에 아이들 열댓 명이 모였다. 임하연은 사탕을 나누어 주며 웃었다.“누나가 노래 하나 가르쳐 줄게. 이걸 부르고 다니면 사탕도 주고, 동전도 줄 거야.”아이들이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빨리 가르쳐 주세요! 저희 부를래요!”임하연은 몸을 낮추고 아이들 곁에서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두 번 들려주었다.“다 외웠어?”“네!”“좋아. 한 사람씩 사탕 한 봉지에 동전 두 닢이야. 사흘 뒤에 누나가 거리로 나와 볼 테니까, 잘 부르고 다니면 그때도 사탕이랑 동전을 줄게.”한창 먹을 것에 마음이 끌릴 대여섯 살 아이들이었다. 사탕만 받아도 기쁜데 동전까지 생겼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아이들은 제 몫을 챙기자마자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골목을 빠져나가는 작은 등 뒤로 노랫소리가 따라붙었다.“후작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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