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철컥- 삐빅.
오전 7시, 서울 용산구 한남동 서경 펜트하우스 45층.
이탈리아 코모 호수에서 날아온 전용기가 인천공항에 닿자, 시후는 대기 차량으로 은서를 한남동에 데려왔다. 그는 은서를 안아 올려 45층 ‘창문 없는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육중한 삼중 티타늄 방음 도어가 닫히며 붉은색 전자 잠금장치가 차갑게 맞물렸다.
외부의 햇빛도, 세상의 어떤 소음도 닿지 않는 짙은 암흑과 정적. 시후는 집무실 책상 위에 은서의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올려두더니, 전원을 끄고 서랍 깊숙이 넣어 잠갔다.
은서는 처음에는 휴식을 시키려는 줄 알았다. 비행 내내 시후는 착륙하면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자라고 했다. 그 말대로 짐을 풀기도 전에 끌려 들어왔지만, 잠깐만 쉬고 나가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화기까지 가져갔다. 아틀리에에 무사히 돌아왔다고 알릴 수 있게 잠깐 달라고 했을 때도 시후는 들은 척하지
감금 사흘째, 펜트하우스 45층 ‘창문 없는 방’.식사가 들어오는 횟수로 하루를 셌다. 처음에는 문이 열릴 때마다 밖을 보았지만 곧 그만뒀다. 트레이를 든 사람 뒤로 늘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아틀리에 소식은 인쇄된 보고서로만 들어왔다. 은서가 질문을 적어 내보내면 몇 시간 뒤 답이 돌아왔다. 직원의 목소리를 한 번 듣는 데 필요한 일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첫날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둘째 날에는 손이 굳는 것 같아 도구를 꺼냈다. 마음이 편해서 작업하는 것은 아니었다. 원석을 쥐고 단면을 살피는 동안만큼은 시후의 표정 대신 자신이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있었다.남자의 반지를 만들기로 한 것은 그가 잠든 손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자기 마음대로 만들고 싶은 물건이 떠올랐다. 크기는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장식의 모양을 정하는 데 오래 걸렸다.얇은 고리를 여러 개 이어 붙인 스케치를 그렸다가 지웠다. 끊어질 것처럼 약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서로 맞물린 부분이 무게를 나누도록 다시 그렸다. 그가 그 차이를 알아볼지는 몰랐다.한은서의 ‘EUN’이 밀라노 비엔날레 대상을 석권했다는 뉴스가 연일 나갔다. 은서는 그 소식을 보고서로 받았다. 축하하는 사람들의 표정도 목소리도 이 방까지 오지는 않았다. 은서는 촛불 조명 아래, 프라이빗 스튜디오의 세공 작업대 앞에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녀의 섬세한 손가락 끝에서 마터호른 에메랄드 원석이 깎여나가며, 쇠사슬을 형상화한 백금 밴드 중앙에 박힌 매혹적인 반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영원한 족쇄(Eternal Shackle).’벅, 벅.묵직한 구두 소리가 함께 문이 열리고, 시후가 최고급 프렌치 만찬 트레이와 와인을 들고 들어왔다. 단추를 세 개 풀어헤친 블랙 실크 셔츠 사이로 조각 같은 가슴 근육이 드러나
철컥- 삐빅.오전 7시, 서울 용산구 한남동 서경 펜트하우스 45층.이탈리아 코모 호수에서 날아온 전용기가 인천공항에 닿자, 시후는 대기 차량으로 은서를 한남동에 데려왔다. 그는 은서를 안아 올려 45층 ‘창문 없는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육중한 삼중 티타늄 방음 도어가 닫히며 붉은색 전자 잠금장치가 차갑게 맞물렸다.외부의 햇빛도, 세상의 어떤 소음도 닿지 않는 짙은 암흑과 정적. 시후는 집무실 책상 위에 은서의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올려두더니, 전원을 끄고 서랍 깊숙이 넣어 잠갔다.은서는 처음에는 휴식을 시키려는 줄 알았다. 비행 내내 시후는 착륙하면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자라고 했다. 그 말대로 짐을 풀기도 전에 끌려 들어왔지만, 잠깐만 쉬고 나가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전화기까지 가져갔다. 아틀리에에 무사히 돌아왔다고 알릴 수 있게 잠깐 달라고 했을 때도 시후는 들은 척하지 않았다. 노트북이 서랍에 들어가고 열쇠가 돌아가는 순간, 은서는 침대에서 일어났다.“직원들이 기다려요. 아직 연락도 못 했어요.”“내가 전했다.”“제가 직접 말해야죠.”은서가 손을 내밀자 시후는 열쇠를 지닌 채 서랍 앞에서 비켜섰다. 그녀가 책상 쪽으로 움직이려 하자 그가 돌아서서 앞을 막았다.은서는 방 안을 다시 봤다. 작업대에는 새 확대경과 원석이 놓여 있었다. 전용기에 오르기 전부터 누군가 이곳을 준비했을 것이다. 코모 호수에서 나온 그날부터, 시후는 자신을 다시 밖으로 내보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오빠, 지금 뭐 하는 거예요?”은서는 다가오는 시후를 바라봤다.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는 동안에도 그의 눈은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코모 호수에서 데려온 뒤 줄곧 저런 얼굴이었다. 잠깐 한눈을
해발 800m, 코모 호수 절벽 위에 버려진 중세 고성의 지하 와인 저장고.축축한 석벽에 밧줄로 결박된 채 눈을 뜬 은서의 시야에, 은빛 턱시도를 입은 가브리엘의 비열한 얼굴이 들어왔다.눈을 뜨고도 한동안 몸의 방향을 알 수 없었다. 볼에 닿은 벽이 축축했고, 발끝은 바닥을 제대로 짚지 못했다. 은서는 숨을 들이마시려다 기침했다. 가브리엘이 그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손목을 당기자 줄이 살을 파고들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이를 물었다. 기억나는 마지막 얼굴은 차 문 쪽으로 몸을 돌리던 윤 실장이었다. 그가 살아 있는지조차 몰랐다.“같이 있던 사람들은요?”가브리엘은 대답하지 않고 의자를 끌어왔다. 한쪽 손목에 감긴 붕대가 눈에 들어왔다. 은서는 그가 루프탑에서 겪은 일을 자신에게 돌려주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울면 그 얼굴이 더 기뻐할 것 같았다. 그래서 먼저 발끝을 조금씩 움직여 감각이 남아 있는지 확인했다. 드레스 위에 걸친 재킷 소매 안쪽에 단단한 것이 닿았다. 시상 전 작품의 마감 상태를 확인하고 넣어 둔 작은 도구였다.그것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눈앞이 조금 또렷해졌다. 은서는 손이 움직이는 것을 들키지 않도록 고개를 들어 가브리엘을 봤다.“드디어 깨어났군요, 은서 아가씨.”가브리엘이 은서의 턱을 만지려 손을 뻗었다.“강시후 그 오만한 괴물에게 널 미끼로 5,000억 마터호른 광산을 요구할 겁니다. 넌 이제 내 새장에 갇힌 인형이야.”“나한테 그럴 권한 없어요.”“상속받은 여자가 서명만 하면 되지 않나?”“그러니까 제가 살아 있어야 한다는 거네요.”말끝이 떨렸지만 은서는 멈추지 않았다. 가브리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으면
밤 10시, 이탈리아 밀라노 피에라 밀라노(Fiera Milano) 컨벤션 홀.수상자 대기석에서 은서는 마지막으로 발표 순서를 확인했다. 손에 든 안내지가 접혔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함께 온 직원이 물을 건넸지만 입술만 적셨다.시후에게서는 출발했다는 짧은 연락이 와 있었다. 서울의 주총이 길어지면서 비행편도 늦어졌다. 동행을 취소하고 자신이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 시후는 화면 너머로 한참 그녀를 보다가 시상식은 마치라고 했다.그 말이 쉬웠을 리 없었다. 윤 실장이 현지 경호를 직접 확인하고도 여러 차례 보고를 해야 했다. 은서는 그가 어렵게 참아 준 하루를 무사히 끝내고 싶었다.무대 위에서 전날 촬영한 작품 영상이 재생됐다. 확대 화면에는 작은 세공 자국까지 선명했다. 직원과 밤새 다시 다듬었던 부분이 지나가자 은서는 저도 모르게 옆 사람의 손을 쥐었다.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는 처음 몇 음절을 놓쳤다. 옆에서 일어나라고 알려 주고서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통로를 걸으며 무대 끝에 놓인 계단 수를 세었다. 실수 없이 올라가 인사하고, 작품을 만든 사람들의 이름을 잊지 않고 말하는 것. 지금 해야 할 일은 그만큼이었다.수상 소감을 마친 뒤 박수 소리가 들렸을 때 비로소 목이 메었다. 시후에게 보여 주려고 무대 뒤에서 상패 사진을 찍었다. 답장은 아직 오지 않았다. 비행 중일 것이다. 은서는 화면을 잠그며 웃었다.세계 최고 권위의 밀라노 주얼리 비엔날레에서, 한은서의 독자 브랜드 ‘EUN’이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대상을 수상했다. 수백 개의 카메라 플래시와 기립 박수가 쏟아지는 가운데, 은서는 호텔로 이동하기 위해 전용 방탄 리무진에 올랐다. 서울 본사의 긴급 주총 안건을 처리하느라 전용기를 타고 밀라노 상공으로 날아오고 있는 시후를 만나기 직전이었다.상패는 직원의 차에 실었다. 은서는 뒷좌석에서 굽 높은 구두를 조금 벗고
밤 8시, 한남동 ‘EUN’ 플래그십 루프탑 가든.남산 타워와 한강의 화려한 야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테라스 위로 감미로운 재즈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와인 잔을 든 은서의 곁으로, 은빛 턱시도를 차려입은 프랑스 보석 평론가이자 로스웰 가문의 방계 거물, 가브리엘이 다가왔다.“정말 찬란하도록 아름다운 밤입니다, 은서 아가씨.”은서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손님을 맞았다. 초청 명단에서 읽었던 이름이었다. 파리의 사건 이후 로스웰이라는 성만 보면 먼저 경계하게 됐지만, 행사장에서 곧바로 적의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작품은 보셨나요?”“작품보다 만든 사람이 인상적이더군요.”그 말에 은서는 미소를 조금 거뒀다. 가브리엘은 진열장 쪽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가 설명을 이어 갈 때마다 말을 끊고, 누구와 친분이 있는지 어떤 자리에 초대할 수 있는지를 늘어놓았다.은서는 그가 권한 별도 만찬을 거절했다. 상담은 아틀리에의 공식 창구로 해 달라고 했다. 손님들 사이에서 환하게 웃던 가브리엘의 입술이 잠깐 굳었다.“이런 기회는 매일 오지 않습니다.”“제 일정도 제가 정해요.”남자가 잔을 든 손을 느슨하게 흔들었다. 농담을 못 알아들었다는 듯 웃었지만 눈은 차가웠다. 은서는 옆으로 몸을 돌려 직원이 있는 방향을 확보했다.가브리엘의 눈빛 속에는 노골적인 탐욕과 매혹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는 은서에게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서더니,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샴페인 잔을 건네며 은서의 하얀 손등을 향해 제 손을 뻗었다.“방돔 광장이라면 당신 이름을 더 크게 걸 수 있지요. 내 손을 잡으세요. 파리 사교계가 누구를 기다렸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개점 준비가 마무리되는 동안 은서는 매일 잠깐씩 아틀리에를 찾았다. 오래 서 있으면 복도에서 들었던 총성이 생각나 다리에 힘이 풀리곤 했다. 그럴 때는 직원들이 차를 가져오는 동안 의자에 앉아 주문서를 읽었다. 모두가 모른 척해 주는 것이 오히려 고마웠다.문을 여는 날 아침에는 가장 먼저 도착했다. 출입문 옆 스위치를 누르자 비어 있던 홀에 불이 차례로 들어왔다. 유리에 비친 얼굴이 조금 낯설었다.“대표님, 이쪽 배치 한번 봐 주세요.”직원이 부르는 호칭에 고개를 돌렸다. 뒤를 돌아봐도 자신 말고는 없었다. ‘대표님’이라는 호칭에 얼른 대답하고 직원이 가리키는 쪽으로 갔다. 오늘 배치부터 자신이 봐야 했다.은서는 조명을 조금 낮춰 달라고 했다. 보석보다 유리 반사가 먼저 보였다. 안내판의 어려운 감정 용어 두 개도 바꿨다. 손님이 처음 보는 단어에서 멈추면 그 뒤의 설명은 읽지 않을 것 같았다.마지막으로 계산대 뒤에 서 보았다. 성수동에서 잃었던 돈을 생각하면 통증이 없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 실패가 오늘 문을 여는 자기 손까지 빼앗지는 못했다.은서는 비어 있는 접수장을 폈다. 첫 칸에는 아직 아무 이름도 없었다. 오늘 누가 찾아와 어떤 일을 맡길지 모른다는 사실이 오래간만에 두렵지만은 아니었다.시후가 도착했을 때 은서는 직원의 명찰을 바로 달아 주고 있었다. 그의 손을 잡으러 바로 달려가지 않았다. 끝낸 뒤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오전 11시, 서울 용산구 한남동 유엔빌리지 초입.백색 대리석과 투명한 통유리로 웅장하게 지어진 지상 4층 규모의 하이엔드 부티크, ‘EUN’ 글로벌 플래그십 아틀리에. 명품 패션지 편집장들과 유럽 및 중동 왕실 바이어 수백 명이 홀을 채운 가운데, 은서가 샴페인 골드 실크 드레스를 유려하게 차려입고 단상에 올랐다. 5,000억 마터호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