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어찌 또 그것을 물으십니까?”수련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유승헌이 천천히 눈을 감으며 무심하게 물었다. “그저 물어본 것이다.”그해 수련이 옥패를 들고 그를 찾아왔을 때, 그는 이 질문을 했었다.그녀는 그때 나이가 어리고, 또 중상을 입어 놀란 나머지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고, 그는 더 캐묻지 않았다.그러나 그 한마디는 그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이번 생에 네게 목숨을 빚졌으니, 앞으로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너를 지키겠다.” 며칠 전, 그는 은밀히 윤지후를 불러 강소연이 어렸을 적 어떻게 상처를 입은 것인지 물었다.윤지후는 경멸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독설도 마다하지 않았다.“왕야, 때로는 왕야께서 정말 어리석으신 것인지, 아니면 어리석은 척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알 일이 아닙니까. 고작 몸종 하나 다친 거로, 강씨 가문의 호위 무사들이 움직였겠습니까?”그렇다. 이토록 간단한 이치를, 그는 왜 그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을까.그러나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유승헌은 당황한 나머지 변명을 찾았다.“수련이 정말 선영원후의 서녀라면, 호위무사가 있은들 이상할 것도 없지 않으냐?”“농이지요?”윤지후가 비웃음을 흘렸다.“호위무사를 거느린 강씨 가문의 서녀가 어찌 후부를 떠나, 왕야의 곁에서 이름을 감추고 외실로 지낼 수 있겠습니까?”윤지후의 짧은 몇 마디에 애써 가다듬은 침착함이 산산조각이 났다.윤지후가 계속 말을 이었다.“저희 가문과 강씨 가문은 대대로 사이가 좋았습니다. 왕비마마께서 상처를 입었을 때, 제 아버지께서 치료했습니다. 태의원의 기록을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그 무렵 아버지께서 석 달 동안 자리를 비웠으니.”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가슴을 무겁게 두드렸다. 유승헌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져, 탁자 모서리를 짚고서야 겨우 몸을 가눌 수 있었다.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한없이 어리석고 우습게 여겨졌다.삼 년 동안 그는 허점투성이인 거짓말 하나 때문에,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
유승헌이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걸어 올려, 억지로 눈을 마주하게 했다.수련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문득 물러서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빌어먹을, 눈동자가 강소연과 너무나 닮았구나!’더 보다가는 마음이 흐트러질 것 같았다.“저는…”수련이 우물쭈물하며 어쩔 줄 몰랐다.이렇게 묻는 것은 앞서 한 말을 믿지 않으니, 사실을 대라는 뜻임을 그녀도 알았다.그러나 진실을 털어놓은 뒤에도, 그의 곁에 남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걱정 마라. 네가 진실을 말하기만 하면, 나도 더는 네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유승헌은 그녀의 갈등을 꿰뚫어 본 듯, 직설적으로 말했다.“다만, 네가 계속 나를 속인다면, 진실을 밝혀낸 뒤에 이 일을 결코 가볍게 넘기지 않겠다.”그는 평소 옥에서 죄수를 다루던 솜씨로,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베풀며, 은근히 압박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살기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등골이 서늘하게 했다.이런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수련은 바로 혼비백산했다.이익과 손해를 저울질한 끝에, 이를 악물고 시인했다.“태자전하입니다. 그분께서 약을 주셨습니다!”수련은 유승헌의 곁에서 호의호식하며 지낸 지도 어느덧 여러 해였다. 이런 일 때문에 그간 쌓은 공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유승헌의 눈 밖에 나면, 그녀는 태자에게도 버려질 것이고, 결국 양쪽 모두에게 미움을 살 터였다.차라리 승부를 걸어 보기로 했다. 어쨌든 유승헌은 자신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고 있었고,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목숨줄이었다!“태자전하와는 언제부터 접촉하였느냐?”유승헌의 웃음에는 온기라곤 없이 서늘한 한기가 배어 있었다.수련이 말했다.“옷을 갈아입으러 갔을 때, 태자전하께서 사람을 보내 약을 쥐여 주셨습니다. 제가 태자전하의 명대로 하지 않으면 제 신분을 증명하는 증거가 가짜라고 말을 바꾸어, 제가 족보에 오르지 못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저 사람을 잠시 잠들게 하는 약이라 했습니다. 왕야를 잠시 떼어 놓을 수 있을 것이라 하였는데
“무어라 하셨습니까?”강소연이 홱 고개를 돌려, 믿기지 않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유승헌은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면서, 손으로 수련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 일은 여기서 끝이라 했다. 왕비는 듣지 못하였느냐?”강소연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기억 속의 유승헌은 이리도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수련의 앞에서만큼은 거듭거듭 이성을 잃었다.이번 일은 단순히 그가 약을 먹은 것만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더 파고들면 필시 더러운 속내가 숨어 있을 터였다.‘그런데 여기서 끝내자니? 수련을 보호하기 위해서인가? 자신을 배신한다 해도?’“왕야, 이 일은 사안이 중대하니, 폐하께 아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총관 내시가 한마디했다.그러나 유승헌은 개의치 않았다.“내가 직접 아바마마께 아뢸 것이니, 대감은 신경 쓰지 마시오.”“하오나…”“약을 먹은 내가 더는 캐지 않기로 하였으니, 대감도 그만두시오.”유승헌은 수련을 일으켜, 제 무릎에 앉혔다.“고맙습니다, 왕야.”수련이 그의 어깨에 엎드려 나직이 감사를 드렸다.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에 곁을 지키고 있던 궁녀들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사신 하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왕야께서 이리 너그러우시니, 실로 감탄스럽습니다. 이제 오해도 풀렸으니,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사신들이 예를 올리고 나갈 채비를 했다.“멈추세요!”강소연이 갑자기 소리치는 바람에, 사신들이 움찔 놀랐다.그녀는 유승헌을 뚫어지게 응시했으나, 그는 수련의 눈가에 맺힌 눈물만 닦아줄 뿐,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왕야, 정말로 이렇게 놓아주실 작정이세요?”강소연이 또박또박 물었다.그는 여전히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귀찮은 기색으로 말했다.“같은 말을 몇 번 되풀이해야 하느냐? 왕비는 귀가 어두운 것 같으니, 태의에게 진찰을 받아 보는 것이 좋겠다.”화가 치민 강소연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그녀는 지금처럼 눈앞의 사람이 이토록 낯설게 느껴진
다른 사신들이 희롱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강소연이 코웃음을 쳤다.“해독제가 없군요. 그렇다면 폐하께 그대들이 혜왕을 음해했다고 아뢸 수밖에 없겠습니다. 과연 이 궁을 걸어 나갈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당치 않습니다! 양국이 교전할 때도 사신의 목을 친 전례는 없습니다! 하물며 화평한 때에 가당키나 합니까!”그들은 애써 태연한 척했으나, 강소연의 위압적인 눈길에 살짝 당황했다.얼굴 가리개 아래에 있는 그녀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올라갔다.“규칙을 먼저 어긴 것은 남강입니다.”왜소한 체격의 사신이 미간을 찌푸렸다.“독약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왕비마마야말로 해독법을 알면서… 저희에게 죄를 돌리지 않습니까.”강소연이 유승헌 곁으로 걸어가, 그의 왼쪽 어깨에 걸쳐진 옷을 헤쳐 화살 상처를 보여주었다.잘 아물어 가던 상처가, 오늘 약기운을 돋우는 바람에 다시 벌어져, 핏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이런 몸으로,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그녀가 냉랭하게 말했다.“이런…”사신이 다가가 유승헌의 몸에 난 상처를 한 번 보더니, 망설임 끝에 결국 해독제를 내놓았다.대경 땅을 밟고 있는 이상, 아무리 사신이라 해도 너무 방자하게 굴 수는 없었다.유승헌이 해독제를 먹고 향이 반쯤 타들어 갈 동안 쉬자,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무통에서 몸을 일으킨 그는, 온몸이 흠뻑 젖은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궁인이 올린 겉옷을 걸치고, 상석에 앉았다.그는 서늘한 눈길로 사신들을 한 번 훑었다. 그러고는 입꼬리를 올려 냉소했다.“내게 약을 먹이라고 지시한 자가 누구인지 말하시오.”“남강의 약은 맞으나, 저희가 한 짓이 아닙니다.”유승헌의 기세에 눌린 사신들은 겁에 질린 듯 온몸을 떨며 연신 부인했다.강소연이 물었다.“그럼, 누구란 말입니까?”그때 수련이 문 쪽에서 나타나, 큰 소리로 대답했다.“접니다.”그녀는 눈물을 머금은 채 종종걸음으로 유승헌 앞에 이르러, 무릎을 꿇고 그의 무릎에 엎드려 낮게 흐느꼈다.
유승헌이 강소연의 손목을 붙잡았다. 붉게 충혈된 두 눈은 이성을 잃은 듯하였으나, 끝내 완강히 입을 열었다.“싫다…”‘참말로 손이 많이 가는구나!’강소연은 팔을 빼내고, 궁인에게 찬물을 가져와 그의 약기운을 잠시 완화하라고 명한 뒤 밖으로 나갔다.유승헌에게 이만저만으로 실망한 것이 아니었지만, 죽어가는 꼴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태의의 말대로 미약이 남강에서 온 것이라면, 사신 일행에게 그 해독제가 있을 터였다. ‘남강의 사신이 어찌하여 왕야에게 미약을 쓴 것일까? 혹 대경에 남강의 사신과 내통하는 자가 있는 것인가? 그런데 이런 일을 꾀한 연유가 무엇일까?’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아, 잠시 생각을 접어두기로 했다.궁인들에게 사신 일행의 행방을 물으려는 찰나, 마침 그들이 황제의 총관 내시를 따라 궁을 나서는 것을 보았다.“잠시 멈추십시오.”강소연이 앞을 가로막았다.맨 앞에 선 사내는 키가 작고 몸집이 왜소했으나, 눈빛만은 매서웠다.“혜왕비마마 아니십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혹 남강 무희들과 사사로이 겨뤄 보시려는 것은 아니겠지요?”강소연은 그를 외면한 채 곧장 본론을 꺼냈다.“대경의 궁에서 독을 풀어 혜왕을 음해한 죄, 어찌 감당하시겠습니까?”“정말입니까, 왕비마마?”총관 내시의 안색이 순간 어둡게 변했다. “말도 안 됩니다!”사신이 눈을 부릅떴다.“왕비마마의 원한을 산 적이 없는 듯한데, 어찌 우리를 이리 모함하시는 겁니까?”강소연이 냉소했다.“왕야께서 지금 편전에서 혼수상태에 빠져 계십니다. 함께 가서 한번 보시겠습니까?”그녀는 일부러 미약이라 하지 않고, 독에 중독되었다고만 했다.보는 사람이 많아 유승헌이 미약에 중독됐다는 말이 퍼진다면, 황실의 체면이 깎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강에서 온 사신들이 이 일을 아는지 떠보고 싶은 마음도 컸다.사신들은 잠시 당황했으나, 눈짓을 나눈 뒤 다시 기세를 올려 어깨를 폈다.“하지도 않은 짓을 어찌 겁내겠습니까? 혜왕께 가시지요.”그들의
다만 이것이 그의 뜻인지, 수련의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를 불러 이런 꼴을 보게 한 까닭도 알 수 없었다.강소연의 얼굴에 경멸이 스쳤다. 그녀는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소연아…”내실에서 유승헌이 힘없이 그녀를 불렀다. 무언가를 억지로 참고 있는 듯했다.고개를 돌리자, 여기까지 안내한 궁녀는 어느새 사라지고, 주위에도 다른 사람은 없었다.오늘은 어디나 궁인들로 분주했다. 하필 이곳만 텅 비어 있으니, 참으로 이상했다.유승헌은 여전히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부르는 목소리가 점점 약해졌다.강소연은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물었다.“왕야, 또 무슨 꾀를 부리시는 겁니까?”내실에 발을 들이기도 전, 큰 힘이 그녀를 덮쳐왔다. 그녀는 뜨거운 품에 끌려 들어갔고, 얼굴의 얼굴 가리개가 벗겨졌다.이어 유승헌이 미친 듯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여느 때와 달랐다. 이번 입맞춤은 걷잡을 수 없이 뜨거워,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빼앗으며, 참을 수 없다는 듯 파고들었다. 그녀의 머리가 하얘졌다. 이내 정신을 차리곤 분노에 몸을 떨었다.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온 힘을 썼지만, 그를 떼어내지 못했다. 도리어 그가 기세를 더해, 손이 옷 위로 올라가 그녀의 몸을 훑고 다녔다.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손은 버릇처럼 움직였다. 그녀의 민감한 곳을 아는 듯 일부러 어루만졌다. 그녀는 온몸에 힘이 빠져 서 있기도 버거웠다.그가 이윽고 입술을 떼고,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자기 몸에 밀착시켰다. 그는 눈에 힘을 줬지만, 눈앞의 사람이 누군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낮게 중얼거렸다.“이건 분명 꿈일 거다.”꿈속에서만, 그는 이렇게 거리낌없이 그녀를 가까이할 수 있었다.“대체 무슨 헛소리입니까? 정신 좀 차리십시오!”마침내 상체를 움직일 수 있게 된 그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팔을 휘둘러 그의 따귀를 날렸다. 짝 하는 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 유승헌의 왼쪽 뺨에 바로 새빨간 손자국이 생겨났다.유승헌은 고통에 살짝 정신이 들었다.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