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인벤토리 안에 장비들을 바리바리 집어넣고, 램프 안에 지니가 잘 잠든 것까지 확인한 데다 스펙터까지 데리고 이동했으니 몸에 부담이 없을 리가 없었다.
지금 시각은 밤. 다행히 던전을 빠져나오면서 스펙터를 밖으로 이동시켜도 문제가 없었기에, 이리 가르나르에 무사히 당도할 수 있었다.
“후우······ 다 왔어, 스펙터! 무사하지?”
[던전 밖 풍경을 다시 보게 될 날이 오다니.]
이건 또 새로운 발견이었다. 스펙터는 무사했다. 인벤토리 안에서도 바깥세상이 보이는 건 지니와 비슷한 원리인 듯 보였다.
“여기가 나의 영지야. 꽃밭이 찬란하지? 한밤중이니까 나와 봐. 마력도 풍부할 거야.
하마터면 이가 부러질 정도로 악물며 욕설을 삼켰다. 역시나 눈앞의 이 자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미친놈이 틀림없었다.자신과 지니, 그리고 스펙터까지 미궁 깊은 곳으로 끌어들여 놓고는 겨우 한다는 소리가 ‘놀아 달라’며 떼를 쓰는 것이라니.인간의 기억을 능욕하고 가장 아프고 그리운 파편을 헤집어 놓아 영원히 환상 속을 헤매게 만드는 가학적인 악취미.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너 뭐 하는 자식이냐? 던전에 발을 들인 자들에게 절망이나 퍼붓는 게 네놈의 취미인가?”스틸의 쏘아붙이는 일갈에 하데스의 말간 얼굴 위로 냉랭한 침묵이 스쳤다.“글쎄.”속내가 비틀린 신이 번개처럼 손을 뻗어 허공을 갈랐다.쉬이—!주변의 공간이 기형적으로 일그러지더니, 공기 자체가 증발하듯 사라져 버렸다.순식간에 형성된 절대 무중력의 공간 속에서 스틸의 몸이 둥둥 떠올랐다. 허공을 차며 발버둥 칠수록 아득한 공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에 전신의 근육이 파르르 경련했다.“컥—!”목구멍을 찢고 터져 나온 신음은 공기를 잃은 진공 속에서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흩어졌다. 시간이 초침을 잃고 기이하게 늘어졌다.폐부가 바짝 타들어 가는 듯한 참혹한 갈증과 압박에 전신을 비틀었다. 눈앞이 희게 탈색되어 갈 무렵, 하데스의 입가에 걸린 오만한 냉소가 귓가를 서늘하게 파고들었다.“역시 인간은 하나같이 우둔하군. 그래서 짓밟고 구경하는 재미가 있지만.”‘이 망할 자식이…….’역시 평범한 신 따위가 아니었다.“주인님! 조금만 참아!”
칠흑 같은 어둠이 사위를 삼켰다.광활한 실내 강당을 방불케 하는 공간이었으나, 공허가 맴도는 적막만이 지배적이었다. 저편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왕좌의 윤곽이 눈에 띄었다.그 위에 우뚝 선 존재는 마치 조각상처럼 굳건했으나, 그 눈동자만은 살아있는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이 상황이 흥미롭다는 듯 왕좌의 주인은 스틸과 지니만 지켜보고 있었다.지니의 떨리는 목소리가 어둠을 가르며 흘러나왔다.“주인님, 늦었잖아.”정신을 흔들리게 하는 환각이나 정신 조종을 하는 흑마법의 기운이 아닐까 싶었는데, 용케 스틸은 그것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미안, 지니. 환상 속에 있었어. 기분 좋은 꿈이었는데······ 네가 등장했지만, 너만의 향기가 없었어. 그래서 알아차렸어.”스틸의 환상 속에 지니가 있어서 하마터면 그곳에 안주하며 살 뻔했는데, 이리 돌아올 수 있었던 건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네가 있는 이곳이 내게 천국이야. 끝까지 함께해야지.”“주인님, 현실은······ 지옥이야. 오기 싫었을 텐데······. 와줘서 고마워.”스틸은 그 말에 울컥하여 지니를 품에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이미 한번 죽은 데다 이런 일까지 겪으니 스틸은 이곳의 주인을 꼭 만나고 싶었다. 인간의 기억을 가지고 감히 시험에 들게 하다니.슬슬 속내가 뒤틀리기 시작했다.***스틸은 지니의 손을 잡고 당당하게 왕좌에 앉아 있는 존재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여전
작은 허름한 외갓집 낡은 방에서 스틸은 드디어 지니를 품고 있었다.외할머니와 한참 대화를 나누고, 사관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느라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물론 이것이 꿈이고 환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래도 깨어나고 싶지 않고, 어쩌면 지금까지 자신이 힘겹게 복수를 꿈꾸며 살아온 그것이 꿈이 아닌가 시간이 지나니 그리 착각하게 되었다.무엇이 중요한가. 현실이 중요하지.이곳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 봤자 다가오는 것은 질척한 고통뿐이 아니겠는가.외할머니와 청국장찌개도 먹고 지니까지 있으니 그저 완벽했다. 그래서 그냥 믿고 싶었다.“지니, 너 진짜 맞지?”“당연히 진짜지.”“너 요정계 가야지.”“여기가 더 좋아.”그저 진짜인가 살짝 건드려 보니, 그녀는 여전히 폭신하게 굴었고 가슴이 여전한가 싶어 만져보자 역시 몰캉몰캉 똑같은 감촉을 선사해 주었다.“주인님, 간지러워.”“잠깐만.”스틸은 천천히 그녀의 제복 단추를 하나씩 풀어내며 진찰이라도 하듯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평소처럼 장난기 어린 웃음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지니의 뺨에는 살짝 홍조가 피어올랐다.이토록 생생한 감각이 현실이라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녀는 살짝 몸을 뒤틀며 고개를 갸웃했다.단추가 풀리자 브래지어 윤곽 위로 부드럽게 도드라진 곡선이 드러났다. 스틸은 숨을 죽인 채 두 손으로 그 온기를 감싸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전해지는 말랑한 탄력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경이로웠다. 그는 손끝으로 가볍게 원을 그리며 탐닉하듯 그 감촉을 음미했다.“아읏, 주인님도 참.&rdquo
제논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어차피 스틸은 살아서 나올 확률은 낮아 보였다. 그럼 지니는 주인 없는 엘프이니 자신이 취해도 될 일 아니던가.그저 가르나르는 그저 버려도 되고 레투카 자체를 집어삼키면 되니 행운이 넝쿨째 온 것 같다고 생각하자 그저 입꼬리만 계속 올라갔다.“폐하, 으읏······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샤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반듯이 누운 채, 제논의 움직임을 응시했다.그의 손길이 목선을 따라 미끄러지듯 내려가 쇄골에 머물렀다가, 다시 가슴 계곡을 스치는 순간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떨림이 번졌다.제논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탐닉하듯 입 맞추고 애무하며, 점차 깊어지는 호흡과 함께 몸을 밀착시켰다. 어느새 단단해진 욕망이 은밀하게 맞닿은 순간,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확인하며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음······. 그렇지. 기분이 최근 들어 제일 괜찮은 날이지.”“다행이네요, 주인님.”제논은 어둠의 요정(Dǫkkálfr)이라 그런지, 첫 번째 빛의 요정 지니에 비해서 성숙한 분위기를 풍겼다.대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제 감정을 잘 표현하지도 않는 그녀였다.이미 500살은 넘어 그런가. 원숙미가 흘러서인지 엘프로 태어나 얼마 지나지 않았던 지니와 비교되는 것이 많았다.“너의 이전 주인은 어떠했느냐.”자신도 몇 번째 주인인지 그녀가 인간을 대하는 게 익숙해 이제야 묻게 되었다.“비슷하게 대하셨습니다. 요정력을 취하거나 침대를 달구는 용도
울컥한 스틸은 자신도 모르게 그곳을 향해 달려 나갔다.몇 번의 인생을 사는 동안 그래도 늘 등장한 외할머니였다. 자신을 늘 돌봐 주시다 돌아가셨는데, 늘 애잔한 마음뿐이었다.부모보다 더 오래 자신을 돌봐주신 분이었는데.“외할머니! 이런······. 이럴 수가······.”이곳은 지옥이 아닌 천국이 확실했다. 그리고 스틸은 아무 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스틸이 발걸음을 내디뎌 집 안으로 들어가자 전경은 바로 외할머니댁 그대로였다.낡고도 허름한 집안 내부도 그렇고, 자신의 키가 커져서인지 나지막한 천장은 어린 시절 보았던 집 자체가 축소된 느낌이었다.세상 제일 푸근하고 안정적이었던 그 시절.학교에 갔다 돌아오면 들판엔 외할머니가 계셨고 동네 아이들과 뛰어놀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 되어 밥 먹으라고 알려주었던 그때.작은 상을 보자, 고봉밥과 청국장. 그리고 갓 무쳐낸 겉절이와 더불어 청양고추와 부추가 들어간 지짐이 한가득 스틸을 반겼다.“잘 먹어야 나라에 큰일꾼이 되지.”그 말씀도 똑같네.“외할머니, 잘 먹겠습니다!”“그래, 오냐. 내 강아지.”울컥. 스틸은 그리 외할머니의 깊게 파인 주름이 가득한 얼굴을 보고는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들었다.청국장 한술 크게 뜬 뒤 밥과 비비자, 외할머니는 스틸을 보며 세상 다 가진 듯 행복한 미소를 지으시면서 손으로 겉절이를 쭉쭉 찢어 그의 밥 위에 놓아주셨다.한입 크게 벌리고 소박한 밥상을 만끽하기 위해 한술 먹자 천상의 행복이 밀려왔다.
철컹!쇠사슬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스틸과 스펙터는 미궁의 철문에 부딪혔다.“어? 지니는 아직인가?”스틸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평소라면 순간이동으로 동시에 도착했을 텐데, 미궁의 이상한 공간 왜곡 때문인지 지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스펙터가 의아해하며 그 역시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그대의 엘프가 좀 늦는군.”“그러게. 뭐 곧 오겠지. 지니의 마력도 회복되었으니까.”스틸은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며 주변을 경계했다. 미궁의 벽면에서 희미한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의 손가락이 검 손잡이에 파고들었다.저승의 입구라기에는 너무 이른 장소에 거대한 돌문이 등장했다. 사람 키의 네 배는 됨직한 그 문은 마치 산을 깎아 만든 것처럼 위압적인 모습으로 앞을 가로막았다. 스틸은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위험한지 아닌지 먼저 확인해야겠어.”스펙터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하지만 듀라한과 벤시도 늦는군. 준비를 마치고 하데스를 만나는 게 안전하겠지.”스틸은 아직 이곳이 하데스가 있는 마지막 층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원래 목표는 탑층이었지만, 중간 지점인 이곳에서 좌표가 지정되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그는 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여기서부터 달려가면 탑층까지는 금방이겠지.”“안을 한번 미리 봐야겠군.”“그래, 뭐가 불안하다면 도로 이곳으로 나오면 되니까.”스틸은 힘껏 스펙터와 같이 문에 손을 대고 밀어 보았다.그러자, 돌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세 쌍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극단의 조치!“지니, 너는 요정이잖아? 소원 같은 거 당장 못 이뤄주나?”이건 사심을 품고 물어 보게 되었다.“당연히 마력이 높으면 주인님 원하는 것을 많이 들어줄 수 있지.”어쨌든 옛날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든 천일야화 판타지든 간에 아주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지니, 이왕이면 돈이나 외모를 어찌해 봐야겠어.”인간에게 가장 필요한게 아니겠는가.“어머, 드디어 주인님! 욕망이 생긴 거야?”지니는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스틸에게 더욱 바짝 의자를 붙였다. 보통 다들 그렇지 않나? “그래. 너와 힘을
스틸은 죽음과 동시에 이세계로 떨어졌다. 환생을 겪으면서 이렇게 기사들에게 끌려가 본 적은 없었는데 그 대단한 경험을 지금 하게 되었다. 스틸을 체포하러 왔을 때만 해도 살기등등하던 기사들은 그가 순순히 항복하자 머쓱한 듯 거리를 좁히며 따라붙었다.나름 고위 귀족이라 그런지 포박은 안 하고 수 미터 거리만 둔 채 걷는 수준이었다.전생에는 죄짓고 산적이 없어 이런 자들도 만난 기억이 없었다.스틸은 현재 자신이 마구간 방화범으로 몰려 있긴 하지만, 사실 별로 걱정은 되지 않았다. 딱 봐도 건초만 탄 정도지 어디가 무너져 내린
스틸은 군중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카데미 광장을 둘러싼 대리석 건물들은 마정석의 푸른 빛으로 반짝였고, 학생들은 걸어서 이동하는 반면 귀족들은 마차에 올라탄 채 지나갔다.이곳 건물은 현대 건축 양식처럼 꽤 잘 정비된 데다가 전기라는 개념은 없는 대신 마정석이라는 마력을 이용하여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확실히 자신이 기억하는 전생의 레투카 제국과는 차이가 있었다. 눈앞의 풍경에서 낯선 위화감을 느꼈다.현생의 이 몸이 지닌 기억 따윈 전혀 없었기에 스스로 이 상황을 살펴야 하니 그건 머리가 복잡
30대 중반의 노련한 호위 기사단장, 세도르는 한쪽 눈을 가린 검은 안대를 거칠게 휘감은 채 말을 달리던 중이었다. 묵직한 말발굽 소리를 뚫고 은발의 젊은 부하 기사가 다급하게 다가와 앞을 가로막자,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고삐를 홱 잡아챘다. “세도르 단장님! 방금 이스트 마구간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이런 황당할 데가. 세도르는 황망함에 굵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황실의 심장부나 다름없는 아카데미 안에서 화재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이버 경, 지금 뭐라고 했나?” “진화는 방금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인명 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