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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스틸 반 가드 캔도르 (20세)
★ 가문 : 캔도르 대공가의 유일한 생존자 (황위 계승 서열 4위) ★ 주소 : 레투카 아카데미 기숙사 C동 지하 1층 109호 ★ 재산 : 가르나르 영지 소유 (1골드 미만의 재산은 추정 불가) ★ 빚 : 황태자 아쳐에게 2골드를 빌린 상태 (1골드 미만의 빚은 추정 불가) ★ 기타 1 : 전쟁으로 인해 10년 전부터 가신 및 영지민 0명 ★ 기타 2 : 아카데미 입학생 300명 중 300등*************************
비명을 넘어서 저절로 거친 욕설이 튀어나오는 순간이었다.스틸은 자신의 허울뿐인 정체를 똑똑히 확인하고 나자, 희망이라는 단어는 깃털 하나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와, 주인님 대단하다! 대공이래, 무려 황위 계승 서열 4위잖아!”
아무리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엘프라지만, 어쩜 이렇게 관점이 달어도 다를 수가 있을까. 대단하긴 개뿔이 대단해!
“너 다른 수치는 안 보여? 이 몸뚱이는 지금 완벽한 거지에 심지어 아카데미 꼴찌야. 게다가 황태자 아쳐 녀석과는 지독한 원수지간인데 빚까지 지다니.”
황당함에 속에서 열불이 솟구쳐 올라 깊은 한숨만 뱉어졌다.
“그게 뭐 어때? 어쨌든 지위는 높잖아. 경제력이야 앞으로 차차 극복해 나가면 되는 문제 아닌가? 와, 우리 주인님 진짜 대단하다! 대공 전하라니!”
이 대책 없는 초긍정 사고방식을 대체 어쩌면 좋을까. 극복도 상황을 봐가면서 해야지.
“대공이라는 타이틀이 밥을 먹여주진 않아.”
“인간들도 참 잔혹하네. 명색이 대공 전하인데 함부로 입을 놀리다니 말이야.” “무시당할 만하니까 그렇겠지. 얼굴만 문제인 줄 알았더니 머리까지 나쁜 건가. 진짜 돌아버리겠네.”결국 스틸의 입에서는 깊은 곡소리가 새어 나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엘프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는, 성적이 꼴찌인 게 뭐 그리 대수냐는 듯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시야 끝에서 어수선한 기운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화려한 갑주로 무장한 20여 명의 기사들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오고 있었는데, 그 기세가 자못 수상했다.
“게 섰거라, 스틸 대공! 저 마구간 방화범을 당장 체포해라!”
“이 아카데미의 원흉! 스틸 대공을 잡아라!”그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쫓아오는 대상은 다름 아닌 스틸 자신이었다.
*** 죽음과 동시에 이세계로 떨어진 것도 모자라, 회귀를 거듭하면서 단 한 번도 기사들에게 끌려가 본 적 없던 스틸이었다. 참으로 대단한 경험을 이 꼴로 하게 될 줄이야.스틸을 체포하러 왔을 때만 해도 살기등등하던 기사들은, 그가 순순히 양손을 들고 항복하자 오히려 머쓱한 표정으로 거리를 좁혀 따라붙었다. 그래도 나름 고위 귀족의 신분이라 그런지 쇠사슬로 포박하진 않고, 수 미터 간격을 둔 채 양옆을 둘러싸고 걷는 수준이었다.
전생에도 죄를 짓고 산 적이 없어 이런 자들과 엮일 일도 없었는데, 현생은 첫날부터 참 지독하게 꼬여가고 있었다.
스틸은 자신이 방화범으로 몰려 있긴 하지만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아까 본 현장은 건초 더미나 조금 탔을 뿐 건물 외벽이 무너지지도 않았고, 말들도 사지 멀쩡했기에 피해는 미미해 보였다. 게다가 정작 이 몸은 불을 지른 게 아니라 끈 은인이 아니던가.
‘그나저나, 아카데미의 원흉이라니. 쳇, 그 소리는 진짜 거슬리네.’
이번 생의 이 몸은 대체 얼마나 악명을 떨치며 살았기에 다들 저런 눈으로 바라보는지. 스틸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 와중에 엘프는 한결같이 스틸의 옆에 딱 붙어서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엘프야, 넌 나 따라와 봐야 좋은 꼴 못 봐. 얼른 딴 데로 도망쳐.”
그러자 그녀는 스틸의 귀에 입술을 바짝 대고는, 기사들이 들을세라 아주 작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쉿! 이제 겨우 주인님을 만났는데 계속 몸을 밀착하고 있어야 내 마력이 커진단 말이야.”
그녀의 스치는 숨결이 목덜미를 간질이자 스틸은 흠칫하며 어깨를 떨었다. 간지러운 목소리도 목소리지만, 묘하게 자극적인 대사 때문이었다.
“······쭉 같이 붙어 있어야 한다고?”
스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엘프는 주변 기사들의 눈치를 살피더니 한층 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맞아. 같이 지내면서 인간을 도와줘야 내 요정력이 커지거든. 그래야 나도 엘프들이 사는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 있어.”
회귀를 거듭하는 동안 엘프라는 존재는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었는데, 이번 생은 세계관 자체가 깊게 뒤틀린 모양이었다.
“혹시 너 말고 다른 엘프들도 인간 세상에 많아?”
“1000년 동안 인간과 계약한 엘프는 겨우 77명이 전부라고 알고 있어. 나도 엘프 치고는 어린 편이라 세상물정은 잘 몰라. 첫 번째 주인한테 조금······ 무섭게 당했던 게 전부라서······.”말을 끝맺는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먼 곳을 향하더니, 맑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자드키엘이 흠칫 놀라며 잠시 몸을 굳히는 것이 골타르의 눈에 들어왔다.그녀가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인지.묘한 분위기를 감지하긴 했지만, 골타르는 모른 체하며 마르바스에게 명령을 내렸다.“마르바스 경, 내가 그대를 아직 100% 믿는 건 아니네. 나를 믿게 만들어 보게.”그러자 마르바스는 환하게 웃으며 그 자리에 마력을 활활 피워 올렸다.그리고 갈색 연기가 골타르와 아쳐의 주변을 감싸게 하더니 묘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자유와 생명의 여신이시여, 그 이름을 빌려 씨앗의 본래 그릇인 시초를 찾고자 하니 응답해 주소서.”그 영창을 수회 반복하던 그는 골타르의 손에서 톡! 하고 피 한 방울을 받아내더니, 아쳐의 손에서도 다시 톡! 하고 핏방울을 거두어 갔다.그 핏방울들은 실처럼 가늘게 늘어나더니, 각각 사람 얼굴만 한 크기의 마법진을 그려 내었다.붉은 불꽃 같은 기운이 활활 타오르더니 두 마법진이 서로 천천히 맞물려 갔다.그러고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것을 겹쳐 들었다.완벽하게 일치하는 모습을 확인시킨 그는 골타르에게 말을 건넸다.“두 분은 핏줄로 연결된 부자지간이 확실하십니다. 노여움을 푸시고, 황태자 전하를 거두어 주십시오. 리노는 악랄한 흑마법사일 뿐입니다.”그 말이 떨어지자 아쳐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골타르 역시 의외라는 표정으로 아쳐를 바라보며 밭은숨을 내뱉었다.아무리 봐도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 없지만, 어쨌든 신하들 앞에서 화풀이를 마쳤기에 골타르는 화를 누그러뜨리고 몸을 돌렸다.“그래? 그렇다면 리노를 숨겨 준 자들까지 모두 반역으로 몰아붙여라!”마르바스는 환하게 웃으며 아쳐를 바라보았다.아
리노는 잠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손을 휘휘 저었다.전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그는 의연하게 굴었다.“저도 S급 모험가입니다. 제 몸 하나쯤은 충분히 건사할 수 있습니다.”“리노 사장님, 그냥 여기 머무세요. 가르나르는 그들이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니까요.”스틸은 리노가 뛰어난 마법적 능력을 갖춘 자라는 사실을 믿었지만, 그래도 이 제국의 황위 계승 1위는 아쳐였기에 그리 만만하게 당해 줄 것 같지 않아 염려스러웠다.“하지만 저 때문에 괜히 이곳까지 위험해지면 안 됩니다. 종종 연락을 올리겠습니다. 당분간은 잠시 떠나 있겠습니다.”“아, 잠시만요.”그때 인벤토리 안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스펙터와 케르베로스들을 떠올린 스틸은 긴급하게 머리를 맞댔다.“너희들, 무슨 좋은 생각 없어?”그러자 인벤토리 안에서 껄껄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별 시답잖은 일로 걱정한다는 듯 한마디씩 터져 나왔다.-하데스 님의 기사들을 좀 붙여 줘야겠군.-저 모험가는 제법 강하다.-정말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점점 흥미진진해지는군.뭐 그리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난 것인지 아주 여유만만이었다.스펙터 역시 크게 동요하지 않은 채 합리적인 의견을 내놓았다.-하데스의 데스 나이트와 나의 듀라한이 주변을 호위해 주면 좋겠군.하긴 요즘 스펙터의 듀라한이 스틸의 곁에서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자리를 지켜 주어 든든하긴 했다.그래도 리노 혼자 도망치는 것보다는 데스 나이트나 듀라한들이 밀착 호위해 주는 편이 정보 수집에도 유용하고 여러모로 좋아 보였다.“그래. 괜찮은 방법이야.”“주인님, 그거 진짜 좋네!
스틸이 결계 안의 은밀한 공간으로 리노를 초대하자, 잠시 뒤, 초록색 연기가 피어났다.“리노 사장, 식사부터 하세요.”결계 속으로 불러들인 탓에 스틸은 바로 연금술로 식탁을 가득 채웠다.리노는 이 상황에서 민망하게 웃더니 자리를 잡았다.“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틸 대공 전하.”지니가 그의 앞으로 그릇을 밀어 주며 음식을 권해도 여유롭게 웃었다.“오셨어요? 이건 제가 만든 디저트예요. 나중에 팔아도 좋고요.”“감사합니다. 전하, 그리고 지니 양. 대단하군요. 하하! 다가올 레스토랑 오픈이 기대됩니다.”그때 지니는 방긋 웃으며 종이 상자를 꺼내 들었다.“리나 선배님과 마티어스 선배님께도 선물로 드렸더니 좋아하시더라고요. 이거 다른 분 들하고 나눠 드세요. 쿠키예요.”“하하, 고맙습니다. 계속 굶었더니 배가 고프군요.”스틸은 그의 잔에 와인을 채워주며 본격적으로 오늘 있었던 일에 관해 대화를 이끌었다.“한잔 하면서 식사부터 하십시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대단한 일을 벌일 수가 있습니까?”그러자 리노는 느긋하게 굴며 와인으로 목을 축이더니 대답을 건넸다.“최근에 계속 황태자에게 시달려 벼랑 끝에 몰려 있었습니다. 어차피 타바도 안 팔고 협조도 안 하면 죽음이 가까울 거라는 협박도 받고 있었기에 터트린 겁니다.”역시 리노가 극단적으로 행동하는 연유를 또 아쳐가 제공한 것 같았다.사람이 궁지에 몰리니 그럴 수밖에 없으니 다 이해가 되었다.“
황제의 의심까지 한몸에 받게 된 그의 얼굴은 수치심과 분노로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손끝을 달달 떨던 아쳐는 주변의 모든 것을 부숴버릴 듯한 사나운 기세로 아지트 안을 서성였다.마지리안은 그가 느끼는 몸과 마음의 극심한 고통을 알기에, 조용히 다가가 숨을 가다듬으며 그를 달랬다.“전하, 우선 냉정을 되찾으시고 대책을 세워 봐요.”“대책은 무슨 놈의 대책! 난 완전히 억울하게 누명을 쓴 거란 말입니다! 당장이라도 단두대에 목을 얹어야 할 판국이라고요!”그의 고함에는 벼랑 끝에 몰린 절망과 살기가 뒤섞여 있었다. 황제 골타르의 냉혹한 성정을 떠올렸는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마지리안은 그의 떨리는 손을 잡아채며 나직하게 속삭였다.“마음을 가라앉히세요. 지금 도망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함께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봐요.”그러나 아쳐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가 거칠게 발을 구르자 바닥에서 묵직한 갈색 마력이 솟아오르며 주변 공기를 요란하게 진동시켰다. 바로 그때, 정체불명의 갈색 마력이 아지트 전체를 기이하게 감싸 안으며 휘감았다.“어?”“이, 이게 뭐야!”“큰일 났습니다, 전하! 이곳 위치가 들통난 것 같습니다!”놀란 마지리안이 아지트의 결계를 급히 확인해 보았으나, 이미 겹겹이 쳐 두었던 방어막이 완전히 산산조각 난 뒤였다. 아무리 마력을 끌어올려 복구하려 해도 도저히 회복되지 않아 식은땀을 흘렸다.갈색 마력이 점차 걷히자, 그 중심에서 한 남자가 유유히 모습을 드러냈다.마지리안과 아쳐가 굳어버린 채 그 남자를 주시하자, 그는 도로 아쳐의 아지트를 흥미롭다는 듯 둘러보더니 활활 타오르는 압도적인 결계를 한 층 더 단단하게 쳐버렸다.
지금 이 『던전의 세계』 수업을 듣는 학생은 족히 200명에 육박했다.리노가 틀어 두고 자리를 비운 이 마도 스크린은, 제어할 술자가 강의실에 없으니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영상을 출력하고 있었다.“세상에! 그럼 여태까지 황태자 전하는 다 꼼수로 덕을 본 거였어?”“스틸 대공처럼 직접 던전을 구르며 노력으로 레벨을 올린 게 아니었잖아!”“맙소사, 저잣거리 한복판에서도 타바를 피웠나 봐!”“저것 봐! 불법 행위를 아무 죄의식도 없이 저지른 정황이 고스란히 다 찍혀 있잖아!”강의실은 삽시간에 황태자의 타바 사건과 비위 의혹으로 폭발하듯 술렁이기 시작했다.던전에서 참혹한 죽음을 맞이한 모험가들의 기록을 통해 학생들의 집중력이 극대화된 순간이었는데, 갑자기 아쳐의 적나라한 만행과 민낯을 목격하게 되었으니 반응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은 당연했다.게다가 이곳에 모인 학생들은 대부분 하위 귀족이나 평민 출신이 다수였다.화면 속 아쳐의 추악한 민낯을 본 학생들은 혀를 찰 틈도 없이 야유를 내뱉었다.[······어휴, 누가 주워갔지? 인벤토리만 있었어도 타바 100개쯤은 깔끔하게 숨겨 놓을 수 있었을 텐데······.][······인벤토리 스킬이라도 발현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이 보검 때문에 중압감으로 죽겠습니다.][······스틸 같은 레벨도 낮고 마력도 변변찮아 보이는 녀석이 대체 어떻게 순간이동도 훌륭하고 인벤토리까지
고블린과 오크, 흉포한 몬스터들이 인간들을 잔혹하게 살육하고 불태우며 갈가리 찢어 잡아먹는 참혹한 광경이 스크린에 띄워지자, 지니는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서늘한 식은땀을 흘렸다.“너무 무서워······!”“램프 안이나 인벤토리로 들어올래?”지니가 아직 어린 엘프여서인지 마물들의 지독한 흉악함에 본능적인 공포감을 느끼는 듯했다.“그냥 눈을 꼭 감고 있으면 돼.”스틸은 지니의 차가워진 손을 꼭 감싸 쥐었다. 그리고 판타지 세계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잔혹한 어둠이라 여기며 마도 스크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던전이 생겨났다는 것은 그 주변의 마력이 기이하게 일렁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영지인 가르나르가 의식되어서인지 결코 허투루 넘겨볼 수가 없었다.“던전 내부의 마력이 안정화되지 못하고, 마수의 수장이 지나치게 강력해 내부 결계를 부수고 밖으로 쏟아져 나오게 되면 이렇게 마물들이 인간계를 아수라장으로 덮치게 됩니다.”강의실 내부의 공기가 순식간에 숙연하게 침착해졌다. 스틸 역시 던전 자체가 마물들을 가둬 두는 일종의 억제제이자 봉인 역할을 한다고 되새기며, 스펙터와 하데스의 존재를 떠올렸다.그들은 스틸에게 호의적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명확한 이성과 지성을 갖추고 있어 판단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 다행스러웠다.그러나 지성이 결여되었거나 오직 살의와 악의만 가득한 마족, 혹은 흉포한 짐승의 본능만 남아 핏빛 욕망을 좇는 마물이 인간계를 습격한다면 그것은 끔찍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여러 끔찍한 실상들이 마도 스크린을 통해 구현되는 긴장감 넘치는 수업이 이어졌다.리노 역시 긴장감에
마구간 아래, 공기가 무겁게 감도는 비밀스러운 지하 공간.황태자의 은밀한 아지트인 침대 위에서, 아쳐는 억눌린 짐승 같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리나를 제 육체 아래로 뜨겁게 가두었다. 그는 옷가지가 채 다 벗겨지지도 않아 날것의 살결과 옷감이 뒤엉킨 그녀의 몸을 거칠게 뒤돌려 세웠다. 매끄러운 척추 라인이 쾌락의 예감으로 잘게 떨렸다.질척, 찌걱.밀폐된 정적을 깨는 노골적인 파찰음과 함께 리나의 하얀 둔덕이 아쳐의 손자국대로 붉게 달아올랐다. 아쳐의 뜨거운 손길에, 그녀의 가녀린 신음은 축축한 지하의 공기 중으로 애처롭게 흩어졌
극단의 조치!“지니, 너는 요정이잖아? 소원 같은 거 당장 못 이뤄주나?”이건 사심을 품고 물어 보게 되었다.“당연히 마력이 높으면 주인님 원하는 것을 많이 들어줄 수 있지.”어쨌든 옛날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든 천일야화 판타지든 간에 아주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지니, 이왕이면 돈이나 외모를 어찌해 봐야겠어.”인간에게 가장 필요한게 아니겠는가.“어머, 드디어 주인님! 욕망이 생긴 거야?”지니는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스틸에게 더욱 바짝 의자를 붙였다. 보통 다들 그렇지 않나? “그래. 너와 힘을
스틸은 죽음과 동시에 이세계로 떨어졌다. 환생을 겪으면서 이렇게 기사들에게 끌려가 본 적은 없었는데 그 대단한 경험을 지금 하게 되었다. 스틸을 체포하러 왔을 때만 해도 살기등등하던 기사들은 그가 순순히 항복하자 머쓱한 듯 거리를 좁히며 따라붙었다.나름 고위 귀족이라 그런지 포박은 안 하고 수 미터 거리만 둔 채 걷는 수준이었다.전생에는 죄짓고 산적이 없어 이런 자들도 만난 기억이 없었다.스틸은 현재 자신이 마구간 방화범으로 몰려 있긴 하지만, 사실 별로 걱정은 되지 않았다. 딱 봐도 건초만 탄 정도지 어디가 무너져 내린
30대 중반의 노련한 호위 기사단장, 세도르는 한쪽 눈을 가린 검은 안대를 거칠게 휘감은 채 말을 달리던 중이었다. 묵직한 말발굽 소리를 뚫고 은발의 젊은 부하 기사가 다급하게 다가와 앞을 가로막자,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고삐를 홱 잡아챘다. “세도르 단장님! 방금 이스트 마구간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이런 황당할 데가. 세도르는 황망함에 굵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황실의 심장부나 다름없는 아카데미 안에서 화재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이버 경, 지금 뭐라고 했나?” “진화는 방금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인명 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