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지니, 너는 명색이 램프의 요정이잖아? 소원 같은 거 당장 못 들어주나?”
슬그머니 사심이 깃든 질문이 스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당연히 내 마력이 한층 더 높았다면 주인님이 바라는 소원을 얼마든지 많이 들어줄 수 있었지!”
옛날이야기나 아라비안나이트 같은 전설 속 이야기들이 아주 터무니없는 허구는 아닌 모양이었다.
“지니, 이왕 힘을 써볼 거라면 돈이나 이 볼품없는 외모부터 어떻게 좀 해봐야겠어.”
인간 세상에 살아가는 데 있어 그보다 더 간절하고 절실한 게 어디 있겠는가.
“어머, 드디어 우리 주인님한테도 기분 좋은 욕망이라는 게 생긴 거야?”
지니는 너무나 뜻밖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입가에 상큼한 미소를 머금고 스틸을 향해 의자를 바짝 다가붙였다.
“그래. 너와 힘을 합쳐서 이번 생은 제대로 한번 잘 살아보고 싶어. 내 복수도 이루고 널 요정계로도 돌려보내 줄게.”
이왕 이세계로 환생하여 삶을 다시 시작한 이상, 화끈하게 끝장을 봐야 하지 않겠는가.
“······주인님! 역시 시원시원해서 마음에 쏙 드네!”
지니는 뭐가 그리 신나고 기쁜지 꺄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벌떡 일어나더니, 스틸의 허벅지 위로 털썩 올라앉아 그의 목덜미를 꼭 끌어안았다.
“으윽!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잠깐만, 가만히 있어 봐.”지니는 작고 부드러운 몸을 숙여 스틸의 입술을 단숨에 덮쳐 왔다.
동시에 그녀의 매끄러운 손길이 가슴골을 슬그머니 스치며 제복의 옷깃을 헤집었고, 순간 찬란한 황금빛 연기가 두 사람의 주변을 몽환적으로 감싸 안았다. 스틸은 지니의 아찔한 체온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온몸을 관통하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어찌나 손길이 농밀하고 달콤하던지, 이성을 차리고 당장 미쳐버린 귀여운 악마를 떼어내야 마땅했지만 스틸은 도무지 거부하지 못한 채 그 미칠 듯한 자극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말랑하고 따스한 감촉에, 방금 정갈하게 씻어내어 은은히 퍼지는 비누 향까지. 찌릿한 자극이 척추를 타고 올라오며 순간 온몸에 뜨거운 열기가 확 달아올랐다.
그때 지니의 손끝에서 피어오른 황금빛 안개가 스틸의 피부 밑으로 차갑고도 뜨겁게 스며들었다. 열기와 냉기가 동시에 온몸을 휘감는 신비로운 감각 속에, 심장과 혈관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포근하고 따스한 기운이 몸 안쪽에서 피어오르더니.
쨍그랑, 쨍그랑!
목제 테이블 위로 묵직한 은화 5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지니는 후우, 후우, 하며 몹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지, 지니!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눈앞에서 일어난 현실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광경에 스틸이 문장을 더듬자, 지니는 별일 아니라는 듯 피식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은화가 떨어진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주인님······ 미안해, 연성 마력으로 돈을 조금 만들어 봤어. 그리고······.”
아니, '금 나와라 뚝딱' 같은 기적이 정말 동화책이 아닌 현실에서 일어난단 말인가. 하지만 지니는 조악하게 은화 몇 개를 만들어 내고도 영혼이 빠져나간 듯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모습으로 헉헉거리며 숨을 내쉬었다.
“······여러 의미로 참 대단하긴 한데, 넌 좀 쉬는 게 낫겠다. 생각 좀 해볼게.”
기분 좋은 일이지만, 전생과 현생을 겪어본 합리적인 강철신의 입장에서 시중의 돈을 직접 만들어내는 행위는 결국 화폐 위조나 다름없는 법. 갑자기 출처 불명의 돈이 생기는 것도 찜찜한 구석이 많았다.
스틸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지니를 소중하게 안아 들고는 짚더미 침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지니는 상체를 일으키려는 스틸의 목덜미를 놓지 않고 꼭 끌어안은 채,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실은 주인님의 키를 5cm 정도 더 키우고······ 눈, 코, 입도 1mm씩 살짝 손봐서 제자리에 다듬어 놨거든.”
어? 어라?
스틸은 머쩍은 표정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침상에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내라면 누구나 외모에 긍정적인 변화가 생겼다고 할 때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당연한 본능 아니겠는가. 그는 서둘러 세면대로 다가가 거울 속에 비친 제 얼굴과 체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어? 똑같은 것 같은데?”
대체 기존의 상태가 얼마나 절망적이었기에, 키 5cm와 이목구비 1mm의 수정 따위로는 티조차 나지 않는단 말인가. 여전히 자유분방하고 민주적인 이목구비였기에, 엘프의 신비로운 힘으로 손을 댔음에도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래? 내 눈에는 아까보다 훨씬 나아 보이는데?”
그건 순전히 착각이자 기분 탓이라고 지니에게 짚어주고 싶었으나, 스틸은 그냥 입안의 말을 삼켰다. 제법 깊은 아쉬움이 남았던 탓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채 터덜터덜 침상으로 돌아왔다. 좁디좁은 짚더미 위에 벌렁 누워 천장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네가 고생하긴 했는데······ 아무런 보람이 없네.”
“뭐야, 그럼 고생한 나를 다시 좀 따뜻하게 안아줘.”스틸은 그래도 자신을 위해 온 힘을 쥐어짜 낸 지니의 어깨를 가만히 다독거려 주었다. 그러자 감옥 철창을 지키던 호위 기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이쪽을 빤히 노려보다가 시선이 딱 마주쳐버렸다.
정신적인 알맹이는 34세의 순정 사내인 데다, 이 몸의 껍데기 역시 연애 경험이라고는 전무하다시피 한 상태가 아니던가. 기사들의 흉흉한 눈빛을 피해 스틸이 몸을 살짝 물리려던 그 순간, 그의 전신에 다시 한번 따스하면서도 포근한 금빛 마력이 몽환적으로 감돌기 시작했다.
기특한 지니는 감은 눈에 힘을 주며 스틸의 몸 위로 은은한 연기를 씌워 주었고,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온몸의 뼈마디가 틀어지며 반응이 일어나는 명확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몇 초의 시간이 흐른 뒤.
“주인님, 후우······ 끝났어. 한 번 더 해봤어, 외모 손보기.”
“그래?”스틸은 침상에서 일어나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거울을 향해 내달렸다. 이번에는 확실히 시야의 눈높이가 아까보다 조금 더 올라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려 10cm가 커진 위엄이란 이런 것인가. 피부로 느껴지는 공기부터가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그리고 기대에 차서 거울을 들여다본 순간.
안타깝게도 그의 눈, 코, 입은 아까와 비슷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듯 보였다.
“하긴 이 얼굴이 고작 2mm 수정된다고 해서 드라마틱하게 변할 리가 없나?”
다시금 깊은 아쉬움을 품고 침상으로 돌아왔는데······ 이런.
“지니?”
온 힘을 다해 마력을 쥐어짜 낸 지니는 그만 정신을 잃고 침상 위에 스르르 기절해 있었다.
스틸은 아쳐와 서늘한 시선을 주고받은 뒤, 곧바로 밀로투스에게 집중했다.“피 냄새가 전혀 나지 않으니 참 신기하군. 마력의 향이 이토록 진할 줄이야.”밀로투스는 확실히 뛰어난 마력 감지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비릿한 피 냄새 대신 향긋한 마력의 향만 감돌고 있었기에 정작 지니조차 상처를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그가 나직한 영창을 거듭하며 찢겨 나간 살점을 말끔히 치유해 주니 스틸로서는 더없이 고마울 따름이었다.생각지도 못했던 순간에 부담 없는 호의를 받자, 스틸은 부끄러운 듯 쓱쓱 머리를 쓸어 넘겼다.“스틸 대공께서 검술 훈련도 게을리하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기특합니다.”“감사합니다, 교수님.”타인의 묵직한 관심이 쏠리자 스틸은 오히려 민망한지 귓바퀴가 비죽 붉어졌다.“대체 얼마나 고통에 무뎌졌기에 이 정도로 큰 상처를 입고도 그리 무던할 수 있단 말입니까.”사실 하도 수없이 찔리고 베이다 보니 아픔에는 이미 이골이 난 스틸이었다.곁에 있던 지니는 가슴이 아릿해졌다. 스틸의 몸에서 향긋한 마력의 향만 뿜어져 나오는 바람에, 피 냄새를 맡지 못하고 지나친 것이 몹시 안타깝고 아차 싶었다.하데스는 가차 없는 신이었다. 목만 싹 베지 않았다 뿐이지, 어지간히 살벌하게 검을 휘둘러 댄 게 틀림없었다.“다가오는 검술 대회에서 망신이나 안 당하려고 연습 좀 했습니다.”그 순간, 강의실 내부가 술렁이기 시작했다.이미 스틸이 아쳐와 검을 맞대겠노라 선포한 사실을 알고 있던 귀족 학생들이라, 이 좁은 아카데미 안에서 소문이 일파만파 퍼진 듯했다.“안 그래도 『운동학 개론』 수업이 시작되니, 우리도 야외로 나가 실전 수업을
스틸은 요즘 지니가 밤마다 램프 속에서 기절하듯 깊은 잠에 빠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몰래몰래 요정력을 퍼부어 주느라 마력을 다 탕진한 탓이었다.최근 하데스와 검을 맞대는 시간이 늘어난 데다, 홀로 체력을 끌어올리겠다며 무리하게 훈련을 감행했던 게 원인이었다.진짜 마지션이 등장했음에도 예상외로 마음이 크게 동요하지 않은 것은 스틸이 곁을 굳건히 지키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서인지 확실치 않았다.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언제 어떻게 틀어질지 모르니, 경계심만큼은 최고조로 끌어올린 채 조심하기로 했다.밤새도록 하데스와 검격만을 주고받느라 잠 한 자락 자지 못하고 돌아온 스틸은, 아침조차 거른 채 곧장 『군사학 개론』 강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주인님,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스틸이 아무리 초인적인 힘을 가졌다 한들 본질은 인간이었다.지니는 눈을 흘기며 부지런히 요정력을 쏟아부어 주었지만, 스틸이 워낙 몸을 사리지 않고 굴린 탓에 회복 속도가 봄눈 녹듯 더디기만 했다.“맞아. 무리하고 있지. 이번 검술 대회는 무조건 우승할 거거든. 아쳐 놈도 본때를 보여주고.”지어 보이는 헛웃음 속에는 호승심이 짙게 배어 있었다. 지니 역시 제논에게 자신을 바치려 드는 아쳐의 추악한 꼴이 끔찍하게 싫었기에 굳이 말리지 않았다.“난 언제나 주인 편이야. 하지만 너무 무리하지 마.”“그래, 선을 넘지는 않게 조심할게.”강의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수업을 준비하던 바로 그때.아쳐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그런데 평소와 달리 차분한 긴 은발의 여학생과 함께 가면을 쓴 채 자리에 앉는 것이 눈에 띄었다.‘설마 아니겠지.’
역시 신이라는 존재는 다른 걸까.하지만 스틸에게 그 따위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명줄이 다 되어 죽을 날이 오면 그때 가서 알게 되겠지 생각하며 덤덤히 검을 맞대었다.“자, 덤벼라! 실력도 좀 끌어올리고, 너와의 약속도 깔끔하게 지키고 싶으니까!”“풋,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다!”챙! 챙챙!챙챙챙! 챙채채챙!인간이 아닌 신성(神性)의 존재와 검을 맞대니, 눈으로 그 궤적과 속도를 따라가는 것조차 벅찰 지경이었다.그러나 지난번 수명을 대가로 검술 실력을 획기적으로 올려놓은 데다, 조만간 아카데미 검술 대회도 앞두고 있었기에 망신은 당하지 말아야겠다는 일념으로 검을 휘둘렀다.세상에 노력 없이 공짜로 얻어지는 결실 따위는 없는 법이었다.아무리 스킬이 발동된다 한들, 몸에 온전히 익히려면 그만큼의 혹독한 훈련이 필요했다.“난 이번 검술 대회에 나갈 거다!”“그럼 수명을 더 깎아서 그 실력으로 바꾸든가!”챙챙! 챙! 챙챙!“지니를 지키는 일이 아니라면 편법이나 능력은 쓰지 않을 거야!”스틸은 자신의 순수한 노력으로 실력을 쌓을 수 있는 부분은 직접 부딪쳐 이루어 내겠다고 마음먹었다. 목숨을 허투루 탕진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챙! 챙챙!“풋, 고작 엘프 하나 건사하겠다고 고생이 많구나.”고생은 무슨. 스틸은 하데스의 비꼬는 말에 대답 대신 싱거운 실소를 흘렸다.“하지만 그런 로맨스가 네 명줄을 한층 더 앞당기게 될 거다!”챙! 챙챙! 챙! 챙챙!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니를 지켜내려면 제논이라는 거물과도
마지리안은 제 오라버니가 자신을 대신해 무대에 등장하고, 수업을 매끄럽게 이끌어 나가는 모습을 보자 가슴 한구석이 벅차오르고 뜨거워졌다.수업을 은밀히 참관한 보람이 있었다. 마지션은 숙련된 솜씨로 학생들을 좌지우지했고, 처음에 스틸을 도발하는가 싶더니 도리어 그에게 결정적인 명분을 쥐여주는 완벽한 판을 짜주었다.사실 아쳐와는 이제 더는 얽히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이리 숨어 다니다 그의 기척을 느끼니 차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그래도 자신의 첫 남자이고,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그에게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결국 사방의 눈치를 살피며 투명화 마법을 뒤집어쓴 채 마구간으로 향했다.자신을 보자 부드럽게 반겨줄 줄 알았지만, 아쳐는 스틸에게 당한 수치심과 분노가 식지 않았는지, 연신 씩씩거리며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그 스틸 자식! 사사건건 거슬리게 구는군요!”“전하, 너무 대립하지 마세요. 스틸 대공은 이제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만큼 성장했으니까요.”거짓이 아닌 사실이었다. 지금의 스틸은 대충 훑어보아도 소환술의 경지가 까마득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 한들 인간의 감각으로 먼 곳에 있는 주군의 위기까지 알아채고 곧장 순간이동으로 나타날 리 만무하지 않은가.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기사단이 주군의 위험을 감지해 순간이동했다고 믿을지 몰라도, 마지리안이 보기엔 스틸이 그들을 직접 소환했거나 처음부터 투명화 마법으로 동행시켰을 확률이 훨씬 높았다.어쨌든 지금은 아쳐가 자신의 오라버니를 풀려나게 한 장본인이기에 고마움은 표현하고 싶었다.이유가 어찌 되었든 제논에게 아쳐가 언급한 것은 사실이었기에 사지에 있으면서도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려 한 것은 인정하고 싶었다.진짜 오라버니를 데리고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그때 마지션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스틸을 향해 결연한 의지를 담아 입을 열었다.“역시, 이 정도 기개가 되시니 제논이 그토록 의식하는 것이겠지요.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제논은 저의 원수입니다. 제게 지옥을 선사한 그에게 처절하게 복수하는 것에 제 전 인생을 걸었습니다.”마지션이 들끓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온몸에서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자, 스틸조차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압박감이 전해졌다.지니 역시 어깨를 으쓱 움츠리며 스틸의 옆에 꼭 붙어서서 말을 받았다.“마지션 교수님, 전 예전의 제가 아니에요. 우리 주인님은 더욱 대단해지셨고, 엄청난 존재가 뒤에서 지켜주고 계시니까요. 지금 하신 말씀이 부디 진실이길 바랍니다.”제논에게 두 번 다시 잡히지 않을 만큼 플로럴 스피릿이 지니를 견고하게 지켜주고 있었고, 스틸의 힘 또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기에 지니의 말에 부정하지 않았다.“지니 옆에는 내가 있습니다. 마지션 교수님은 그저 앞으로도 평범하게 수업이나 진행하시면 됩니다. 제논에 대한 복수도 제가 합니다.”스틸이 비밀을 알아챘음에도 아카데미 내에서는 교수와 학생이라는 본분에 충실하겠다는 듯 말하자, 마지션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단상 위 마도구를 들어 올렸다.“믿음이 가는군요. 어쨌든 결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스틸 대공과 지니 양이 제논의 철저한 표적이 되어 있다는 사실만큼은 결코 잊지 마십시오. 황태자 역시 두 분을 사로잡아 바치려 할 것이고, 도른의 마르바스나 수많은 마법사들이 앞으로도 끊임없이 공격해 올 겁니다. 조심하십시오.”잠시 오해를 살 뻔했고 난데없이 마도구를 던진 상황도 당황스러웠지만, 결과적으로 명분을 얻어 이득이 되었기에 스틸은 가만히 상황을 주시했다.아쳐에게 방어 무기 생산 및 판매 허가권
옆에 있던 세도르 역시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받았다.“주군을 보호하기 위해 달려온 것이라면 아무런 문제도 없겠지요.”“다만 아카데미 외부에서 주둔하고 있었을 터인데, 이곳까지 곧바로 순간이동을 해 올 정도라니 상당한 실력자들이군요.”세도르와 이버의 나직한 말에 주변에 둘러선 이들 사이에서 가벼운 탄성과 함께 웅성거림이 일었다.그 순간 스틸은 허공에 주둔한 군대를 향해 손짓하며 덤덤히 명령을 내렸다.“그렇습니다. 다만 계속 머물러 있으면 분위기가 흉흉해질 테니, 이들은 다시 영지로 돌려보내겠습니다.”스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 많던 무장한 기사단은 흔적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겉보기에는 완벽히 자취를 감춘 것처럼 보였으나, 마지션은 그들이 그저 은밀하게 투명화 마법을 뒤집어썼을 뿐임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눈에 보이는 전력보다 안 보이는 존재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에 온몸의 털이 서늘하게 일어서는 순간이었다.“멀리서 모시는 주군의 마력 파동만 감지하고도 이처럼 정확하게 좌표를 찍고 찾아오다니, 나중에 군사 훈련에 관한 조언은 스틸 대공에게 꼭 들어야겠습니다.”세도르는 연신 대단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스틸을 높이 추켜세웠다.“별말씀을요. 다른 학생들에게 괜한 공포심을 주었을 수도 있으니 자중시키겠습니다.”스틸이 여유로우면서도 겸손하게 굴자, 옆에서 지켜보던 아쳐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물들인 채 콧바람을 씩씩 내뿜었다.상황이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스틸은 세도르와 이버에게 수고 많았다며 가볍게 목례를 건넸다.곧이어 소란이 정리되고 다시 수업이 재개되었다.학생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평범하게 마도구를 제작하는 실습에 들어갔다.
30대 중반의 노련한 호위 기사단장, 세도르는 한쪽 눈을 가린 검은 안대를 거칠게 휘감은 채 말을 달리던 중이었다. 묵직한 말발굽 소리를 뚫고 은발의 젊은 부하 기사가 다급하게 다가와 앞을 가로막자,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고삐를 홱 잡아챘다. “세도르 단장님! 방금 이스트 마구간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이런 황당할 데가. 세도르는 황망함에 굵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황실의 심장부나 다름없는 아카데미 안에서 화재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이버 경, 지금 뭐라고 했나?” “진화는 방금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인명 피
자신이 알고 있는 ‘소원을 말해 봐!’라고 하는 램프의 요정이 그건가?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어서 빨리 이 소녀를 전문가에게 보여줘야 하는데.“어이, 내가 나이가 많아 보이니 말은 좀 편히 할게. 엘프야, 일단 내가 눈 떠보니 다른 세상에 소환되어 환생한 것 같아서 얼른 적응해야 하거든? 그러니 그쪽도 정신 차려.”넋두리하듯 그리 스틸이 말을 내뱉고 몸을 돌리라 하자, 엘프는 제 두 어깨를 꼭 부여잡더니 밝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어머!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 초월자인가? 나 횡재했잖아? 초월자를 주인님으로 맞이하다니!”
주인님은 무슨. 불이 난 연기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스틸은 우선 잠시 목걸이를 들여다보았다.3초 잠깐 고민한 그였다. 누가 봤나? 참 CCTV는 없는 세상이지? 하지만 목숨까지 내던지며 대한민국 영공을 지키던 천하의 파일럿 강철신이 이런 목걸이 하나의 움찔하다니.게다가 망한 영지기는 해도 고위 귀족 대공 인생에 뭘 주워서 넙죽- 꿀꺽할 수 없는 법.일단 이 화재부터 진압하고 주인이나 찾아줘야겠다 싶어 주변을 훑었다.강철신은 일단 구유통이 아닌 우물을 찾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불길에 쫓겨 물을 찾던 그의 눈에 목걸이가 들어
한 달 전, 20XX년 4월 1일 오전. 인생 2번째라 공군 소령 강철신은 오늘이 당연히 올 줄 알았다. 그리고 당연히 적국기 등장으로 출격 명령을 받았다. 전생의 기억이 혈관 속을 맴돌았다. 오늘, 그는 죽을 각오로 전투기에 올라가야 하는 날이다. 분명 적국의 전투기에는 망할 아쳐가 타고 있을 터.정밀유도폭탄(SDB)까지 무장하고 스텔스 전투기로 출격 30분 만에, 지금 그는 사선을 넘나들게 되었다. 여전히 그는 대한민국 영공을 휘저어 놓았고, 심지어 서울 한복판에 미사일을 터트릴 요량으로 북방 한계선을 넘었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