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첫 번째 주인이 대체 얼마나 지독한 놈이었기에 이토록 상처를 입은 걸까.
하긴, 이리도 곱고 어여쁜 생명체니 나쁜 마음을 품은 사내라면 흉한 짓을 저지르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런 그녀가 제 눈앞에 나타나 이렇게 인연이 닿다니. 아무래도 자신과 이 엘프는 보통 인연이 아닌 게 분명했다.
현생에 그 어떤 기대도 품지 않던 스틸이었지만, 주춤거리며 기죽어 있는 그녀를 보니 타인에게 정체를 드러내는 걸 극도로 꺼린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눈치채게 되었다.
“너, 사람들 앞에서는 차라리 그냥 인간인 척해야 하는 거 맞지?”
“······응. 마탑에 끌려가면······ 내 마력을 강제로 뽑아갈 거야. 첫 번째 주인님처럼······. 끔찍한 실험만 당할 것 같아서 그건 정말 싫어······.”그녀의 미려하고 맑은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스틸의 팔을 잡은 작은 손에 미세한 떨림이 일었다.
과거에 지독하게 아픈 기억이 있는 게 분명했다. 비록 램프에서 나온 존재라 해도 인간처럼 따스한 온기를 품고 있었고, 감정도 풍부하며 물리적으로 실체가 존재하는 생명체였다. 스틸에게 거짓말을 해서 얻을 이득도 없어 보였지만, 문득 호기심이 생겨 목에 걸린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아라비안나이트라는 이야기 들어봤어? 거기 나오는 램프의 요정은 덩치 큰 파란색 남자에, 거처하는 램프도 이 펜던트보다 훨씬 크던데.”
“램프의 형태는 제각각이야. 엘프들도 외형이나 성향이 전부 다르고.”소원을 들어주고 주인을 온전히 따르는 이런 강력한 존재가 내 편이라면. 어쩌면 이번 생의 가장 강력한 치트키는 이 엘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스틸의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고동쳤다.
“너, 이름은······ 지니라고 하자.”
그 순간 엘프의 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이름을 지어준 게 그렇게나 놀랄 일이었을까. 이게 그리 깜짝 놀랄 일인가 싶었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이번 생에는 자신도 아쳐에게 깔끔하게 복수를 완성하여 원한을 풀고, 제 곁에 선 이 불쌍하고 어여쁜 엘프도 구원해 주겠노라고 스틸은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이름을······ 지어주는 거야?”
“그래야 서로 조금 더 친해지지 않겠어?” “너무 좋아! 고마워, 주인님!”지니는 세상 전부를 얻은 것 같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스틸의 손을 꼬옥 쥐었다. 그게 그리 좋아할 일인가 싶어 스틸은 머릅쓸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달콤한 분위기와는 달리, 옆에서 둘러싸고 가던 기사들의 표정은 점점 더 흉흉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어차피 닥쳐온 현실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당당하게 즐기는 편이 나았다. 그리 결심한 스틸은 지니의 귀에 입술을 바짝 대고 다시 귓속말로 물었다.
“지니, 너 마구간에서 떨어진 목걸이 속에 있었으면 상황을 다 알고 있지?”
“뭐······ 대충은.” “그럼 아까 거기에 진짜 불을 지른 놈이 누구야?”지니는 골똘히 생각하는 듯 긴 속눈썹을 까딱거리더니, 스틸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대고 작게 속삭였다.
“타바를 피우려고 나타난 금발의 남자가······ 있었는데, 갑자기 불이 붙었어. 그 뒤로 주인님이 들어오자마자 불을 끄려다가 연기를 마시고 기절했고.”
‘타바’라는 단어는 문맥상 담배 같은 기호품을 뜻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전생의 제국에는 없던 물건이었지만 말이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것은 질색이었지만, 증인이 확실하니 어떻게든 해결되겠지 싶어 스틸은 한결 당당해진 눈빛으로 주변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언젠가 진실을 해명할 기회는 오겠지, 뭐.”
스틸이 나지막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이, 기사단은 그를 끌고 아카데미 외곽의 육중한 석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지나다니던 귀족 학생들이 스틸을 발견하고는 하나같이 눈살을 찌푸리며 흉흉한 반응을 쏟아냈다.
“윽, 저 망나니 스틸 대공 또 무슨 큰 사고를 저질렀나 봐.”
“왜 또 기사단에 끌려가는 걸까? 이제는 알고 싶지도 않다. 입학하고 겨우 한 달 동안 대체 사고를 몇 번째 치는 거야?” “3월 초부터 아주 제국 역사에 남을 기행을 써 내려가는군.” “쯧쯧, 무슨 짓을 저질러도 뒷감당할 재산조차 없을 텐데. 망나니 스틸 대공, 진짜 귀족 가문의 수치라니까.”명색이 대공가 가주인데 최소한의 존칭조차 쓰지 않고 스틸 대공, 스틸 대공이라며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꼴이 참으로 무엄하기 짝이 없었다. 전생보다 주변 평판과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해 보였다.
턱 근육이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스틸은 입술을 꽉 다물고 순순히 지하 감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하나씩 내려갈 때마다 주변의 공기도 짓눌리듯 무겁게 가라앉았다.
*** 지하 감옥에 도착하자, 지니가 주저 없이 스틸과 함께 가둬 달라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결국 한 공간에 같이 갇히게 되었다. 이 세계에서는 고위 귀족의 신분을 감안하여 수발을 들 하녀나 시종을 동행시키는 것이 관례였던 모양인지, 기사들도 군말 없이 지니를 함께 지하 감옥에 넣어주었다.감옥 내부는 차가운 습기가 감도는 돌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중앙에는 그나마 푹신한 짚더미가 깔린 침대가 놓여 있었다. 녹슨 쇠창살 너머로는 간이 세면대와 낡은 목제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고위 귀족이라는 껍데기 덕분에 씻을 수 있는 시설과 테이블까지 제공받은 셈이니, 감지덕지 여겨야 할 판이었다.
어차피 죄가 없으니 조사가 끝나고 판결이 내려지면 무죄로 풀려날 터였다.
잠시 후 간수가 건네준 은쟁반 위에는 갓 구워낸 따스한 빵 두 덩이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 수프 그릇이 놓여 있었다. 지칠 대로 지쳐 허기가 진 탓에, 스틸과 지니는 의외로 근사한 식사를 말없이 깔끔하게 비워냈다.
음식 맛은 생각보다 훌륭했고, 식사를 마친 뒤 세면대에서 정갈하게 씻고 양치질까지 마친 두 사람은 테이블 의자에 서로 맞은편으로 붙어 앉아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철창 너머로 간수가 둘이나 감시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스틸의 대화나 안위에는 터럭만큼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볼품없는 외모, 마이너스인 재정 상태, 바닥을 치는 인성과 평판. 거기에 이제는 건사해야 할 엘프까지 하나 늘어난 상황. 단시간 내에 무너진 자신감을 회복하고 이 판국을 뒤집으려면, 무언가 극단의 조치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었다.
스틸이 지니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외모부터 바꿔 볼까?”
잠시 뒤, 얼떨결에 내놓은 술이 통했던 것일까.“아! 제법이군!”“향긋하네! 처음 맡아보는 술 내음이야!”“초월자이니 본인 세계에 존재했던 술을 연금술로 펼쳐낸 모양이지. 달콤한 술이로군!”뭘 저렇게 잘 아는 건지.초월자니 뭐니 부르면서 대체 왜 이리 시련과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일까.바닥에 커다란 와인 통 세 개가 케르베로스의 세 머리 앞에 놓이자, 녀석들은 길쭉한 혀를 할짝거리며 맛을 보기 시작했다.세 개의 개 머리가 달린 괴물은 술맛을 나름대로 품평하더니 잠시 잠잠해졌다.잠시 찾아온 소강상태였다.마력이 자유롭게 발현된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스틸은 순식간에 온 힘을 다해 연금술로 와인을 더 잔뜩 만들어 인벤토리 가득 채워 넣었다.하지만 스틸은 묘하게 이상하고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나 싶어 유심히 살펴봐도 케르베로스는 너무 멀쩡해 보였다.그렇다 한들 여기까지 온 본래 목적만큼은 달성해야 하지 않겠는가.“이제 시작해 볼까?”스틸은 잠시나마 마법을 자유로이 피워 올릴 수 있는 이 순간을 활용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치유 스킬을 시전하고자 검붉은 연기를 피워 올렸다.아픈 자는 고통을 없애 주면 아무리 까칠하게 굴다가도 유순해지는 법이다.지니 역시 스틸이 성장한 만큼 마력이 크게 발전한 상태였기에, 망설임 없이 치유 마법을 펼쳐 들었다.“주인님! 나도 도울게!”지니는 기분 좋게 술을 마시던 케르베로스를 향해 황금빛 마력을 피워 올렸다. 옆에 서 있던 스펙터 역시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주변의 오염된 공기를 정화하기 시작했다.마력이 폭풍처럼 미궁 내부를 휘몰아치며, 케르베로스
“그래서 우리 모두 이렇게 무사히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었나 봐.”지니의 말은 명확한 정답이었고, 스틸과 스펙터 역시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우리가 죽을 각오로 여기까지 왔다는 걸 알고서 저렇게 격렬하게 반기는 건가?”“스틸, 저들은 당연히 네가 살아서 이곳을 나가지 못할 거라 확신하기에 마중까지 나온 모양이다.”스틸과 스펙터의 예상대로, 현재 대치 상황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케르베로스는 영혼을 저승으로 안식하게 하는 일에는 관대할지 몰라도, 저승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영혼은 사정없이 짓씹어 삼키는 잔혹한 본성을 지녔음을 스틸은 신화를 읽어서 대충은 알고 있었다.“일단 죽이는 게 낫지 않겠어?”“감히 플로럴 스피릿의 마력이 우리에게 닿지 못하도록 방해까지 했으니 말이다.”“저 셋이 품은 영혼의 무게감이 실로 상당하니, 하데스 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시겠지.”순간, 던전 내부의 공기가 서늘하게 얼어붙었다.케르베로스는 흥분으로 눈을 번뜩이며 본능적인 공격 자세를 취했다.그 찰나, 폭풍 같은 마력의 일갈과 함께 거대한 불길이 지니와 스틸, 스펙터가 서 있는 곳을 향해 무자비하게 덮쳐왔다.“어머나!”“이 자식들이!”“스틸, 이곳에서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어서 흙으로 장벽을 세워라!”스틸은 마법을 활용할 수 있어서 다행이기는 했지만, 치유해 주러 온 호의를 무시하고 다짜고짜 공격부터 퍼붓다니 어이가 없었다.고집스러운 괴수들에게는 약간의 매운맛과 따끔한 교훈이 필요한 순간이라 판단되었다.***&nb
스틸이 자리를 비운 대공저.리나와 마티어스는 영지의 가신들을 도와 귀빈들의 배웅을 다정하게 도왔다.미궁 순찰을 이유로 주인이 자리를 비웠음에도,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분위기였다.“어머, 이 술은 향이 어쩜 이리 그윽한지요. 스틸 대공에게 직접 인사도 못 전하고 떠나게 되어 아쉽군요.”“던전을 넘나드는 게 저 친구에게는 일상이 된 모양이군. 군대를 이끌고 미궁으로 당당히 입성하는 광경이라니, 대단하네.”“신비로운 빛의 기운이 던전 주변을 은은하게 감싸다니······ 레투카 제국의 방패라는 칭송이 결코 괜한 말이 아니었네요.”속 편한 귀족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스틸을 향한 찬사를 내뱉으며 유유히 발길을 돌렸다.시간이 흐르고 초대받은 하객들이 하나둘 떠나자, 넓은 연회장에는 스틸과 깊은 인연을 맺은 지인들만 남게 되었다.“오늘 정말 여러모로 대단한 하루였네. 아까는 정말 고마웠어, 마티어스.”마티어스와 은밀한 눈빛을 주고받은 리나는, 주변에 시선이 많음에도 차분하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오늘 꽤 당황했을 텐데 잘 견뎌 줬어. 넌 이제 엄연한 로테 여공작이다.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마.”리나는 오늘 황태자로 인해 너무 놀라 하마터면 정체를 들킬 뻔했기에 간담을 쓸어내렸다.“그리고 후작님 내외분께서 날 따뜻하게 맞아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 돌아가시기 전에 정식으로 인사부터 드리고 싶어.”“그래, 따라와라.”리나는 마티어스의 곁에서 그의 가족들을 우아하게 배웅했다.단란한 후작가가 작별
스틸이 손님맞이를 위해 정성껏 꾸며 둔 준의전실(Semi-State Room)의 소파 위에서는, 아슬아슬한 스릴을 즐기며 밀로투스와 메스메리아가 은밀하고 질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어머, 밀로투스 교수님. 무시무시한 가르나르 미궁을 바로 앞에 두고 목숨을 걸고 나눌 때의 이 열기가 너무 짜릿하네요.”“이곳은 더 이상 무시무시하지도, 목숨을 걸 만큼 위험하지도 않으니…… 내게만 집중하십시오, 메스메리아 교수님.”소파 위에서 서로의 뜨거운 숨결을 탐닉하던 두 사람은 은밀한 열기를 드레스 자락 속에 감춘 채 농염한 입맞춤을 이어 갔다.스틸의 초대석에서 펼쳐진 화려한 광경과 입안을 가득 채우던 와인의 그윽한 풍미를 떠올리자, 메스메리아의 붉은 입술 끝에 절로 유혹적인 미소가 번졌다.밀로투스의 손길이 그녀의 매끄러운 허리선을 따라 미끄러지며 드레스 아래로 은밀하게 파고들자, 메스메리아의 숨소리가 한층 가늘고 낮게 잦아들었다.격정이 고조될수록 그들의 움직임은 더욱 치밀하고 대담해졌으며, 피부 위로 피어오른 열꽃은 은은한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하아…… 우리 스틸 대공은 참으로 멋진 제자가 아닐 수 없어요. 이번 학기 수학 시험에서도 무려 만점을 받았지 뭐예요. 심지어 제가 수식을 배워야 할 정도로 고차원적인 풀이 과정을 선보여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군사학 역시 만점이었습니다. 수업 시간 내용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완벽히 외웠더군요. 게다가 방어술은 이미 전문 기사의 경지를 훌륭히 넘어섰습니다.”절정에 다다른 교밀의 순간에도 두 사람의 대화 속에는 스틸을 향한 찬사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메스메리아의 날카로운 손끝이 밀로투스의 턱선을 스치자, 둘 사이로 묘하고 팽팽
시간은 흘러 마침내 연회가 끝나고 귀족들이 하나둘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황족인 안젤루스가 먼저 자리를 터주자, 고위 귀족들 역시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아쳐는 독기가 오른 술에 가득 취해 비틀거렸고, 결국 마지션 교수에게 끌려가듯 저택을 나섰다.“전하, 발을 디딤에 넘어지실까 두렵습니다. 천천히 걸으십시오.”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스틸의 영지는 정비가 어찌나 완벽한지, 아쳐에게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조리 거슬리는 것뿐이었다.볼룸(Ballroom)을 나와 웅장한 복도를 지나치자, 귀족들이 쉬어 가도록 마련된 준의전실(Semi-State Room)이 눈에 들어왔다.“쳇,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제 주제에 황제라도 된 줄 아나?”“스틸 대공은…… 연금술이나 독자적인 건축 스킬을 터득한 듯합니다. 참으로 경탄스러운 양식이군요……”아쳐는 그 칭찬마저 듣기 싫어 홧김에 마력을 피워 올렸다. 순간이동으로 단번에 황궁 침실로 돌아갈 셈이었다. 하지만 마력이 지지직거리며 불꽃을 튀기더니 허무하게 사그라들고 말았다.“전하! 마력을 억지로 끌어쓰지 마십시오! 타바로 채운 흑마법이 정화되는 과정에서 전하의 잔여 마력까지 모조리 사라지는 수가 있습니다!”“뭐? 쳇, 번거롭긴!”아쳐는 마지션을 대동한 채 어수선하게 비틀거리며 성 밖으로 걸어 나갔다.이상하게도 제 주변에 늘 늘어서 있던 호위 기사나 피닉스조차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회색 망토를 두른 호위대의 숫자가 부쩍 줄어든 것은 결코 기분 탓이 아니었다. 자신을 향한 충성심이 식어 버린 것 같았다.황태자인 자신이 이렇게 홀로 비틀거려도 신경 쓰는 자 하나 없다니.&
휘청휘청, 건들건들.추태를 부리며 비틀거리는 아쳐의 뒤를 따르는 것은 다름 아닌 마지션 교수였다.“다들 전하께서 취해 그러신 것이니 괘념치 마시고 즐겁게 연회를 즐기십시오. 하하, 그런데 이 성은 볼수록 훌륭하군요. 새로운 건축 양식이라 제국 역사에 유서 깊게 남을 듯합니다.”마지션이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자, 사람들도 그제야 스틸이 구축한 이 화려한 저택으로 관심대를 옮겼다.아쳐는 마지션의 손에 이끌려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하객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 것은 자존심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모욕이었기 때문이다.귓가를 울리는 건 전부 스틸에 대한 찬사뿐이었다. 스틸이 대단하다, 그의 마력이 경이롭다, 등등. 하나같이 피가 거꾸로 솟구칠 만큼 듣기 싫은 소리뿐이었다.그때, 세도르가 귀족들에게 나누는 대화가 아쳐의 귀에 가시처럼 박혀 들었다.“전 실은 스틸 대공 전하 덕분에 시력을 거의 회복했습니다.”세도르의 말에 안젤루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스틸 대공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황궁에 드리웠던 저주까지 거두어 주신 덕에 어머니께서 지금은 기적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셨답니다.”아쳐의 발길이 오뚝 멈춰 섰다.저주를 거두고, 치유를 행하고. 아무도 고치지 못하는 자신의 이 비참한 몸을 고칠 수 있는 자가 오직 스틸뿐이라는 현실이 절망처럼 그를 짓눌렀다.이제는 마지션 교수마저 뛰어넘어 버린 것이 스틸이었다.제발 살려 달라고 그에게 무릎을 꿇고 빌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차라리 죽어 버리고 싶은 참담함에 아쳐는 이를 악물었다.***살다 살다 저승의 입구를 지키는 괴수를 치료하러 가게 될 줄이야.죽
30대 중반의 노련한 호위 기사단장, 세도르는 한쪽 눈을 가린 검은 안대를 거칠게 휘감은 채 말을 달리던 중이었다. 묵직한 말발굽 소리를 뚫고 은발의 젊은 부하 기사가 다급하게 다가와 앞을 가로막자,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고삐를 홱 잡아챘다. “세도르 단장님! 방금 이스트 마구간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이런 황당할 데가. 세도르는 황망함에 굵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황실의 심장부나 다름없는 아카데미 안에서 화재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이버 경, 지금 뭐라고 했나?” “진화는 방금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인명 피
자신이 알고 있는 ‘소원을 말해 봐!’라고 하는 램프의 요정이 그건가?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어서 빨리 이 소녀를 전문가에게 보여줘야 하는데.“어이, 내가 나이가 많아 보이니 말은 좀 편히 할게. 엘프야, 일단 내가 눈 떠보니 다른 세상에 소환되어 환생한 것 같아서 얼른 적응해야 하거든? 그러니 그쪽도 정신 차려.”넋두리하듯 그리 스틸이 말을 내뱉고 몸을 돌리라 하자, 엘프는 제 두 어깨를 꼭 부여잡더니 밝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어머!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 초월자인가? 나 횡재했잖아? 초월자를 주인님으로 맞이하다니!”
극단의 조치!“지니, 너는 요정이잖아? 소원 같은 거 당장 못 이뤄주나?”이건 사심을 품고 물어 보게 되었다.“당연히 마력이 높으면 주인님 원하는 것을 많이 들어줄 수 있지.”어쨌든 옛날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든 천일야화 판타지든 간에 아주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지니, 이왕이면 돈이나 외모를 어찌해 봐야겠어.”인간에게 가장 필요한게 아니겠는가.“어머, 드디어 주인님! 욕망이 생긴 거야?”지니는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스틸에게 더욱 바짝 의자를 붙였다. 보통 다들 그렇지 않나? “그래. 너와 힘을
스틸은 군중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카데미 광장을 둘러싼 대리석 건물들은 마정석의 푸른 빛으로 반짝였고, 학생들은 걸어서 이동하는 반면 귀족들은 마차에 올라탄 채 지나갔다.이곳 건물은 현대 건축 양식처럼 꽤 잘 정비된 데다가 전기라는 개념은 없는 대신 마정석이라는 마력을 이용하여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확실히 자신이 기억하는 전생의 레투카 제국과는 차이가 있었다. 눈앞의 풍경에서 낯선 위화감을 느꼈다.현생의 이 몸이 지닌 기억 따윈 전혀 없었기에 스스로 이 상황을 살펴야 하니 그건 머리가 복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