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축 늘어진 설화를 품에 안은 채, 강현은 빗속을 가로질렀다. 걸음은 평소보다 조금 느렸다. 의식 없는 몸 하나쯤 옮기는 일에 버거움을 느낄 남자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품 안에 닿은 체온이 신경을 거슬렀다. 그런데도 그 작고 힘없는 무게가 불쾌할 만큼 선명하게 남았다.
강현은 설화를 조수석에 눕힌 뒤 안전벨트를 매어 주었다. 벨트가 가느다란 몸 위로 걸리는 순간,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마치 그 멈칫거림조차 허락할 수 없다는 듯 그는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 뒷좌석의 재킷을 집어 들었다.
축축하게 젖은 상체 위로 재킷을 덮어 주는 손길에는 다정함보다 짜증에 가까운 조심성이 배어 있었다. 공조를 켜자 미지근한 바람이 차 안을 채웠다.
그 바람에 그녀의 창백한 얼굴이 조금씩 풀리고, 물기 어린 속눈썹 끝이 잘게 흔들렸다.
강현은 가죽 핸들을 강하게 쥔 채 한동안 차를 출발시키지 않았다. 와이퍼가 유리창을 격렬하게 긁어대는 소리만이 차 안의 정적을 깰 뿐이었다.
유설화.
그 이름 석 자가 자꾸만 단단하게 닫혀 있던 그의 의식 가장자리를 날카롭게 긁어대고 있었다. 강현은 낮게 혀를 차고는 신경질적으로 액셀을 밟았다. 검은색 세단이 빗길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저택의 외등이 쏟아지는 여름비로 얼룩진 마당 위로 희미하게 번져나가고 있었다. 강현은 차에서 설화를 다시 안아 들고 현관문을 지나 넓은 거실로 들어섰다.
거실 소파 위에 눕히는 순간, 흠뻑 젖은 설화의 머리카락 끝에서 맺힌 작은 물방울들이 뚝, 뚝 소리를 내며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강현은 바닥에 번지는 물 자국을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젖은 이마를 쓸어 올리며 욕실로 향했다. 두껍고 마른 수건을 몇 장 들고 돌아온 그는 낮게 가라앉은 소파 곁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설화의 머리카락에 남은 차가운 물기를 조심스럽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푹신한 수건이 그녀의 이마와 뺨, 그리고 가늘게 떨리는 입가를 조심스레 지나갈 때마다, 강현의 단단한 미간은 조금씩 더 깊게 좁혀졌고 표정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런 짓을 자처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가 지독하게 우스웠다. 길바닥에서 비에 젖어 쓰러져 가던 채무자 여자를 사적인 공간에 데려와 눕히고, 수건질까지 하면서 빗물을 닦아주고 있는 자신의 꼴이라니.
"지금 뭐 하는 거냐, 서강현."
스스로를 다그치듯 낮게 내뱉은 서늘한 목소리가 거실의 눅눅한 공기 속으로 허무하게 흩어졌다.
강현은 물기 젖은 수건을 바닥으로 툭 내려놓고는 소파에 누운 설화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내렸다. 물기가 걷힌 피부는 희었고, 옅은 조명 아래 드러난 입술은 필요 이상으로 선명했다. 긴 속눈썹, 아무런 방어도 하지 못한 채 잠겨 있는 얼굴.
그 지독한 무방비함이 이 어두운 밤, 사람 안의 가장 바닥에 숨겨진 지저분하고 노골적인 충동을 교묘하게 건드린다는 것을 강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가엾다는 말로 포장되는 오만.
지켜 주고 싶다는 말 뒤에 숨어 있는 소유욕. 건드려도 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비열한 확신.강현은 세상의 음지에서 구르며 그런 인간들의 썩은 냄새를 뼈저리게 맡아왔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아주 미세하게나마 그 혐오스러운 냄새가 자신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이 역겨움으로 남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설화의 입가 가까이에 멈췄다. 돌아서야 한다는 판단이 손끝까지 도착하기 전에 이미 늦어 있었다.
손끝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짧은 접촉이었다. 그런데도 부드러운 감촉이 살갗을 타고 번지는 순간, 오래 묻어 두었다고 믿었던 무언가가 안쪽에서 희미하게 흔들렸다.
강현은 낮게 숨을 들이쉬었다.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동작으로 고개가 숙여졌다. 입술 표면이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길지도, 깊지도 않았다. 그러나 짧았다고 해서 아무 일도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입술을 떼어내자마자 자신을 한심하게 비웃고 거친 숨을 삼켰다. 눈앞의 설화는 세상이 뒤집혀도 모를 만큼 깊은 혼절 속에 빠져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고, 그런 방어권 없는 여자를 상대로 자신 안의 견고했던 벽에 금이 가는 것을 확인한 꼴이었다.
"……기분 한번 더럽네."
아주 낮게, 빗소리에 묻혀 스스로에게도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짓씹어 뱉듯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조소를 흘리면서도 강현은 곧장 소파를 벗어나 물러나지 못했다. 갈 듯 말 듯 멈춘 채, 그러나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감정들이 머릿속에서 지저분하고 복잡하게 엉켜버렸다.
이것이 연민인지, 과거에 대한 집착인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어떤 이름도 붙이고 싶지 않은 쪽에 가까웠다.
기광의 구둣발이 옆구리를 걷어찼다. 둔탁한 소리가 좁은 슈퍼 안에 울렸다. 과자 봉지가 짓눌리고, 빈 유리병이 바닥을 굴렀다. 강현은 신음하지 않았다. 차가운 바닥에 뺨을 댄 채 가게 형광등을 바라봤다. 의식이 한 번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정리해. 장부는 저쪽으로 넘기고, 현장은 그대로 둬.”서기광의 말에 조직원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정만수가 봉투를 계산대 아래로 밀어 넣었고, 다른 조직원이 슈퍼 주인의 손에 억지로 장부를 쥐였다. 강현은 바닥에 엎어진 채 그 모든 걸 봤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머리는 차갑게 깨어 있었다.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바람 소리 같았다. 곧 붉고 푸른 불빛이 깨진 유리창 너머로 번갈아 스며들었다. 조직원들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슈퍼 안에는 쓰러진 주인과, 피 묻은 입술로 바닥에 엎어진 강현만 남아 있었다.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그의 어깨를 짓눌렀고, 팔을 뒤로 꺾었다. 차가운 금속이 손목을 파고들었다.철컥.그 소리는 이상하게 선명했다. 오래된 문이 닫히는 소리처럼, 무언가가 완전히 끝나는 소리처럼.강현은 끌려 나가며 고개를 들었다. 겨울 밤공기가 허파 깊숙이 박혔다. 가로등 불빛이 얼어붙은 아스팔트 위에 희멀건 원을 만들고 있었다. 그 안에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직은 깨끗하게 사라졌고, 남은 죄는 그의 손목에 채워져 있었다.호송차 뒷좌석에 밀려 앉는 순간, 강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창밖으로 겨울눈이 내렸다. 하얀 눈은 타이어 자국 위를 빠르게 덮었다. 더러워진 바닥도, 발자국도, 방금 전의 흔적도 잠깐은 깨끗해 보였다.구치소의 첫날 밤은 차가웠다. 회색 벽은 축축하게 식어 있었고, 얇은 담요에서는 오래된 먼지 냄새가 올라왔다. 강현은 벽을 마주한 채 앉아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손목에는 수갑 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다.어쩌다 여기까지 왔지.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숨이 가라앉고 온몸의 감각이 무뎌질 즈음, 복도 끝에서 쇠문이 끌리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누군가 잠깐 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늘 눅눅했다. 곰팡이 냄새와 오래 묵은 담배 연기가 벽지처럼 들러붙은, 시장통 뒤편의 사채 사무실. 강현이 손을 뻗어 두꺼운 철문을 밀자, 기름칠이 말라붙은 경첩이 날카롭게 울었다. 문틈 사이로 탁한 열기가 먼저 쏟아져 나왔다.“왔네, 서강현.”검붉은 패딩 조끼를 걸친 차기광이 가죽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주황색 조명 아래서 그의 눈이 강현의 얼굴에서부터 어깨, 손끝까지 천천히 훑고 내려갔다.“요즘 손끝이 굼뜨다며. 돈 받으러 다니는 놈 손이 그렇게 느려서야 쓰겠냐.” “죄송합니다.”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변명도, 분노의 기색도 없었다. 그 무색무취한 반응이 오히려 기광의 신경을 긁은 듯했다. 그는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짧게 웃었다.“넌 늘 그 말뿐이지.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알겠습니다.”옆에 있던 정만수가 강현의 뒷통수를 툭 쳤다.“저러다 언젠가 우리 팔아먹는 거 아닙니까.”옆에 있던 조직원 하나가 전표를 뒤적이며 피식거렸다. 강현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조용히 구석진 테이블 앞으로 걸어갔다. 전표와 구겨진 지폐들이 뒤엉킨 자리 앞에 서서 손을 움직였다.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지폐는 축축했고, 손끝마다 끈적한 기름때가 묻어났다. 역겨움조차 오래 버티면 일상이 되었다.“제대로 세. 할당 못 맞추면 네 손가락부터 세게 될 줄 알아.”강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고무줄로 지폐를 묶자 팽팽한 탄성이 손목을 툭 쳤다. 기광은 묶인 돈을 집어 들어 대충 무게를 가늠했다.“그래도 오늘은 모자라진 않았네.”그의 시선이 다시 강현에게 꽂혔다.“내일 3번가 슈퍼. 장부대로 받아 와. 또 울면 진열대 하나 엎고. 그래도 버티면 팔을 꺾어. 알아듣지?”“알겠습니다.”강현이 몸을 돌리자, 뒤에서 웃음이 따라붙었다.“난 저 새끼 눈이 싫어.”차기광의 목소리가 문 닫히기 직전까지 따라왔다.“독한 것도 아니고, 빈 것도 아니고. 꼭 아직 뭘 고르고 있는 사람 눈이야.”골목의 찬 공기가 얼굴을
통화를 마친 강현은 스마트폰을 책상 위로 밀어냈다. 탁, 짧은 마찰음이 대표실의 정적을 갈랐다. 이마를 짚은 손끝이 뜨거웠다.“이런 씨발.”낮게 새어 나온 욕설 뒤로 더는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설화를 보고 그 사람이 단번에 알아챘다고 했다. 눈이 닮았다고, 아주 오래전 잊었다고 믿은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고. 그 한마디가 기분 나쁘게 정확했다.강현은 유리창 앞으로 걸어갔다. 구두 소리가 서늘하게 울렸다. 통유리 너머의 도시는 한여름이었다. 얽히고설킨 빌딩 숲 아래로 무표정한 행인들의 어깨가 쉼 없이 흘러갔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버티고, 견디고, 또 흘러가고 있었다.오늘따라 그 모습이 유난히 거슬렸다. 나만 멈춰 서 있는 것 같은 기분. 가장 단단하게 봉인해 두었던 안쪽이 통째로 들켜 버린 듯한 불쾌감에 입안이 썼다.“돌아버리겠네, 진짜.”혼잣말이 유리창에 닿자마자 흩어졌다. 창틈으로 비스듬히 스며든 오후의 햇살 속에서 먼지들이 조용히 반짝였다. 따뜻해야 할 빛이었지만, 강현의 살결에 닿는 온기는 기분 나쁠 정도로 차가워 눈을 감았다.***그 빛 사이로 오래된 냄새가 먼저 돌아왔다. 기름 냄새, 젖은 행주 냄새, 좁은 식당 안에 눌어붙은 매캐한 연기 냄새. 그 위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고막을 긁었다.“아들, 그만하고 들어가 자.”물기 젖은 고무장갑이 물기를 끌고 테이블을 스치는 소리가 났다. 강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뚝뚝한 얼굴로 어머니 손에 들린 행주를 빼앗아 기름진 테이블을 거칠게 닦아낼 뿐이었다. 어머니의 손등은 퍼석했고, 굳은살은 손마디마다 층처럼 박혀 있었다.“숙제는 다 했어?” “예.” “거짓말하지 말고.” “저 못 믿어요? 서예린 여사님?” “아이고, 또 시작이네.”그렇게 말하면서도 어머니는 웃었다. 설거지통 앞에서는 거칠고 빠르던 손이, 강현의 뺨에 닿을 때만 유난히 조심스러워졌다.어머니는 늘 웃고 있었지만, 그 눈 깊은 곳에는 가끔 닿을 수 없는 어딘가가 남아 있었다. 강현은 묻지 않았다.
설화는 화면을 밀어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지금 끝났어?“네, 방금 나왔습니다.”— 별일은 없었고?“네. 지시하신 대로 가방만 내려놓고 나왔습니다.”설화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덧붙였다.“…그분이, 제가 어떤 사람의 눈을 닮았다고 하더군요.”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숨소리조차 낮게 가라앉았다. 강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침묵은 생각보다 길었다. 설화는 스마트폰을 귀에 댄 채 나무 그늘 아래 서 있었다. 담장 너머에서 잎이 흔들리는 소리만 작게 들렸다.— 수고했어.짧은 한마디가 늦게 도착했다. 더 묻지도, 설명하지도 않는 목소리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손끝에 힘이 풀렸다.“네.”통화가 끊겼다. 설화는 한참 동안 꺼진 화면을 내려다봤다. 그 한마디가 마음 어딘가를 건드렸다. 칭찬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짧고 사무적인 말투. 그런데도 오늘은 그 말이 싫지 않았다.설화는 화면을 조작해 메시지 보관함을 열었다. 오래된 메시지 아래쪽에 한 달 동안 감정 쓰레기처럼 남아 있던 기프티콘 하나.[STB 달콤한 디저트 세트 교환권]처음 받았을 때는 그냥 넘겼다. 발신자도 없는 쿠폰 하나가 불쾌했고, 동시에 무서웠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그걸 써도 될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아닌 하루에 작은 구멍 하나를 내고 싶었다.설화는 지도 앱을 켜고 가장 가까운 S매장을 찾았다. 신호등 앞에 멈춰 선 채 화면을 내려다보니, 유효기간과 교환처가 초록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여름빛은 아직도 강했고, 아스팔트 위로 올라오는 열기 때문에 공기가 묘하게 눅눅했다. 바람이 살짝 불어왔지만 금세 지나가 버렸고, 블라우스 소매 끝이 손목을 스칠 때마다 땀기 어린 피부가 잠깐씩 드러났다.매장 앞에 도착하자 유리창 너머로 익숙한 초록빛 로고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바깥의 무더운 공기가 잘려 나가고 서늘한 냉기가 피부를 감쌌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은 차가웠고, 그 뒤를 따라 볶은 원두의 쌉쌀한 향이 천천히 번졌다. 안쪽에서는 음악
다음 날 저녁, 설화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샤워를 마친 설화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감싸 쥔 채 냉장고 문을 열었다. 차가운 생수를 들이키는 동안에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물기가 서늘하게 식어 갔다. 밤은 깊었고, 오래된 빌라 안은 지나치게 고요했다.딩동. 딩동.정적을 깨고 현관 초인종이 두 번 울렸다. 설화는 마시던 물병을 내려놓고 그대로 멈춰 섰다. 잠시 망설임 끝에 문을 살짝 열어 밖을 확인한 뒤, 천천히 잠금장치를 풀었다.문 앞에는 한두 번 본 적 있는 미래드림 직원이 서 있었다. 단정한 차림으로, 손에는 지퍼를 끝까지 잠근 검은색 보스턴백이 들려 있었다. 설화는 그걸 보는 순간, 말보다 먼저 무게부터 느꼈다.“대표님께서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남자는 짧게 말하고 주소가 적힌 메모지 한 장을 내밀었다. 설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건네받았다. 손끝에 걸리는 묵직함에, 더 묻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았다.문이 닫힌 뒤에도 설화는 한동안 현관에 서 있었다. 보스턴백을 발치에 놓여 있었고, 메모지에는 삼청동 주소 하나가 반듯하게 적혀 있었다.어제는 말없이 와주더니, 오늘은 또 이런 식으로 나오네.설화는 낮게 헛웃음을 흘리고는, 가방을 한 번 내려다봤다. 손끝에 남은 묵직함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밤은 그렇게 지나갔다.현관에 남은 정적도, 마음 한구석에 걸린 찜찜함도 완전히 가시지 않은 채.다음 날 아침, 설화는 옷장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삼청동이라는 단어 하나가 이상하게 사람을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티셔츠를 꺼냈다가 넣고, 청바지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거울 앞에서 옷을 대어 보던 설화가 결국 작게 웃었다.“이젠 옷까지 신경 써야 하고.”혼잣말은 방 안에 낮게 떨어졌다. 옷장 안쪽에서 대학 시절에 입던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꺼냈다. 옷을 털자, 묵은 냄새와 먼지가 희미하게 일었다. 설화는 손바닥으로 천을 눌러 주름을 폈다.택시에 오른 뒤에는 창밖만 봤다. 메모지에 적힌 주소는 삼청동.
신호음이 이어지는 동안 설화는 테이블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작은 진동이 손끝에서 어깨까지 번졌다. 술기운 탓인지, 기다림 탓인지 속이 울렁거렸다.한참 뒤, 낮고 느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대표님… 어디세요?”설화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혀끝에 술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흔들리는 걸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왜. “그냥… 시간 되시면, 저랑 술 한잔, 하실래요?”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거절도 허락도 아닌 침묵이었다. 설화는 그 침묵 속에서 숨을 삼켰다. 손가락이 휴대전화 모서리를 더 세게 붙잡았다.— 거기 어디야.마침내 들려온 대답은 짧고 낮았다. 설화는 그제야 눈을 감았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여기, 고깃집 바로 옆 포장마차예요.” — 끊어.전화는 그렇게 끝났다. 귓가에는 그의 목소리만 희미하게 남았다. 설화는 헛웃음을 삼키며 잔에 남은 소주를 한 번에 털어 넣었다.과연 올까.나 같은 전화 한 통에 움직일 사람이었나.기대와 체념이 뜨거운 공기 속에 섞였다. 우동은 젓가락에 한 번 건드려진 채 식어 가고 있었다. 누군가 포장마차 입구를 지나갈 때마다 설화는 고개를 들었다. 대부분은 취객이거나 길을 묻는 사람이었다.기다린다는 감정이 얼마나 비루한지, 설화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은 그 비루함조차 필요했다. 누군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장면 하나가 절실했다.테이블이 하나둘 비고, 포장마차 안이 조금 한산해질 무렵이었다. 설화는 잔을 내려다본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때 밤공기를 맞으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회색 셔츠에 재킷을 걸친 남자였다. 큰 키, 넓은 어깨, 한 손에 무심히 쥔 자동차 키. 서강현이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좁은 공간의 공기가 달라졌다. 떠들던 사람들의 시선이 짧게 그에게 닿았다가 흩어졌다.시원한 머스크 향 사이로 담배 냄새가 희미하게 스쳤다. 강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설화 맞은편 의자를 빼고 앉았다. 설화는 그 움직임을 멍하니 좇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비 오는 거리를 걷고 또 걸어, 마침내 목적지인 고깃집 앞에 도착했다. 설화는 낡아빠진 우산을 접고, 눅눅해진 옷을 추슬렀다. 기름진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후끈한 열기와 고기 냄새, 연기가 한꺼번에 얼굴을 덮쳤다.사장님이 설화를 보고 눈짓으로 인사했다. 가게 안은 이미 손님들로 북적였고, 빈 테이블 위에는 아직 치우지 못한 굳은 고기와 빈 소주병, 흩어진 쌈 채소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불판을 들고 움직이던 지원 언니가 설화를 보자 장난스럽게 볼을 한 번 잡아당기며 피식 웃었다."왔어? 오늘따라 손님 오지게 많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낯선 남자의 사무적인 목소리. 정중한 척했지만, 그 안에 숨기지 못한 냉랭함이 섞여 있었다. 설화는 허리를 들고 돌아서 남자를 올려다봤다. 서류가방을 든 남자가 슈트 차림 그대로 서 있었다. 딱 봐도 용건이 무엇인지 말해 주는 얼굴이었다."네, 맞는데요.“남자는 설화를 위아래로 훑어본 뒤 입안 볼을 혀로 밀었다.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가방에서 하얀 종이를 꺼내 설화 앞으로 내밀었다."내용증명입니다. 확인해 보시죠.“흰 종이 위에는 채무자 유설화라는 이름이 박혔고, 그 아래로 선명하게 찍힌 주식회사
경기도 외곽에 자리한 사설 장례식장은 한산했다. 빈소 안에는 향 냄새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조문객보다 빈 곳이 더 많았다. 한때는 아버지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어 안달 나던 사람들조차 아무도 없었다. 이름도 낯선 몇 명만이 어색한 얼굴로 다녀갔다. 설화는 영정 사진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사진 속 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생전에 집 안에서 쉽게 보여주지 않았던 얼굴이었다. 온화한 미소가 이상하게 낯설어서, 설화는 헛웃음만 나왔다. 이렇게 허무하게 갈 거면서. 이렇게 다 놓고 갈 거면서. 그동안 엄마와 나를 왜
일상적인 며칠이 지나갔다. 여름 햇살의 열기는 여전했고, 매미 소리도 여전히 귀가 따가울 만큼 울어댔다. 골목을 채운 낡은 빌라들, 담벼락 위로 엉켜 늘어진 전선, 쓰레기봉투 옆을 지나쳐가는 고양이까지. 어제와 다르지 않은 아침이었다. 다른 건 하나뿐이었다. 현관문이 거칠게 열리고, 낯선 사람들이 집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압수수색영장입니다. 협조해 주십시오." 낮고 딱딱한 목소리가 좁은 현관을 파고들었다. 설화는 처음에는 그 뜻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압수수색. 영장. 협조. 뉴스에서나 들었을 법한 단어들이, 갑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