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축 늘어진 설화를 품에 안은 채, 강현은 빗속을 가로질렀다. 걸음은 평소보다 조금 느렸다. 의식 없는 몸 하나쯤 옮기는 일에 버거움을 느낄 남자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품 안에 닿은 체온이 신경을 거슬렀다. 그런데도 그 작고 힘없는 무게가 불쾌할 만큼 선명하게 남았다.
강현은 설화를 조수석에 눕힌 뒤 안전벨트를 매어 주었다. 벨트가 가느다란 몸 위로 걸리는 순간,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마치 그 멈칫거림조차 허락할 수 없다는 듯 그는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 뒷좌석의 재킷을 집어 들었다.
축축하게 젖은 상체 위로 재킷을 덮어 주는 손길에는 다정함보다 짜증에 가까운 조심성이 배어 있었다. 공조를 켜자 미지근한 바람이 차 안을 채웠다.
그 바람에 그녀의 창백한 얼굴이 조금씩 풀리고, 물기 어린 속눈썹 끝이 잘게 흔들렸다.
강현은 가죽 핸들을 강하게 쥔 채 한동안 차를 출발시키지 않았다. 와이퍼가 유리창을 격렬하게 긁어대는 소리만이 차 안의 정적을 깰 뿐이었다.
유설화.
그 이름 석 자가 자꾸만 단단하게 닫혀 있던 그의 의식 가장자리를 날카롭게 긁어대고 있었다. 강현은 낮게 혀를 차고는 신경질적으로 액셀을 밟았다. 검은색 세단이 빗길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저택의 외등이 쏟아지는 여름비로 얼룩진 마당 위로 희미하게 번져나가고 있었다. 강현은 차에서 설화를 다시 안아 들고 현관문을 지나 넓은 거실로 들어섰다.
거실 소파 위에 눕히는 순간, 흠뻑 젖은 설화의 머리카락 끝에서 맺힌 작은 물방울들이 뚝, 뚝 소리를 내며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강현은 바닥에 번지는 물 자국을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젖은 이마를 쓸어 올리며 욕실로 향했다. 두껍고 마른 수건을 몇 장 들고 돌아온 그는 낮게 가라앉은 소파 곁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설화의 머리카락에 남은 차가운 물기를 조심스럽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푹신한 수건이 그녀의 이마와 뺨, 그리고 가늘게 떨리는 입가를 조심스레 지나갈 때마다, 강현의 단단한 미간은 조금씩 더 깊게 좁혀졌고 표정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런 짓을 자처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가 지독하게 우스웠다. 길바닥에서 비에 젖어 쓰러져 가던 채무자 여자를 사적인 공간에 데려와 눕히고, 수건질까지 하면서 빗물을 닦아주고 있는 자신의 꼴이라니.
"지금 뭐 하는 거냐, 서강현."
스스로를 다그치듯 낮게 내뱉은 서늘한 목소리가 거실의 눅눅한 공기 속으로 허무하게 흩어졌다.
강현은 물기 젖은 수건을 바닥으로 툭 내려놓고는 소파에 누운 설화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내렸다. 물기가 걷힌 피부는 희었고, 옅은 조명 아래 드러난 입술은 필요 이상으로 선명했다. 긴 속눈썹, 아무런 방어도 하지 못한 채 잠겨 있는 얼굴.
그 지독한 무방비함이 이 어두운 밤, 사람 안의 가장 바닥에 숨겨진 지저분하고 노골적인 충동을 교묘하게 건드린다는 것을 강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가엾다는 말로 포장되는 오만.
지켜 주고 싶다는 말 뒤에 숨어 있는 소유욕. 건드려도 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비열한 확신.강현은 세상의 음지에서 구르며 그런 인간들의 썩은 냄새를 뼈저리게 맡아왔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아주 미세하게나마 그 혐오스러운 냄새가 자신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이 역겨움으로 남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설화의 입가 가까이에 멈췄다. 돌아서야 한다는 판단이 손끝까지 도착하기 전에 이미 늦어 있었다.
손끝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짧은 접촉이었다. 그런데도 부드러운 감촉이 살갗을 타고 번지는 순간, 오래 묻어 두었다고 믿었던 무언가가 안쪽에서 희미하게 흔들렸다.
강현은 낮게 숨을 들이쉬었다.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동작으로 고개가 숙여졌다. 입술 표면이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길지도, 깊지도 않았다. 그러나 짧았다고 해서 아무 일도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입술을 떼어내자마자 자신을 한심하게 비웃고 거친 숨을 삼켰다. 눈앞의 설화는 세상이 뒤집혀도 모를 만큼 깊은 혼절 속에 빠져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고, 그런 방어권 없는 여자를 상대로 자신 안의 견고했던 벽에 금이 가는 것을 확인한 꼴이었다.
"……기분 한번 더럽네."
아주 낮게, 빗소리에 묻혀 스스로에게도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짓씹어 뱉듯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조소를 흘리면서도 강현은 곧장 소파를 벗어나 물러나지 못했다. 갈 듯 말 듯 멈춘 채, 그러나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감정들이 머릿속에서 지저분하고 복잡하게 엉켜버렸다.
이것이 연민인지, 과거에 대한 집착인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어떤 이름도 붙이고 싶지 않은 쪽에 가까웠다.
설화의 이름이 들리는 순간, 강현은 먼저 손안의 감각부터 확인했다. 말려 있던 손가락이 손바닥을 깊게 누르고 있었다.이재영이 특정한 사람을 입에 올리는 데는 늘 이유가 있었다. 호기심처럼 던진 말 뒤에는 사람을 끌어들이거나 밀어내려는 계산이 붙었다.“다음에 자리를 마련해 보겠습니다.”이재영은 만족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그래. 눈도 그렇고 분위기도 그렇고, 볼수록 신기하더군.”강현의 시선이 차갑게 굳었지만, 그는 더 묻지 않았다. 지금 설화를 감싸는 순간 그 이름은 곧바로 약점이 됐다.“다른 지시가 없으시면 가보겠습니다.” “오늘 만나는 아이도 잘 좀 밀어줘. 내가 특별히 눈여겨보는 애니까.” “알겠습니다.”강현은 흐트러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나왔다. 박 보좌관이 따라붙으려 했지만, 손을 들어 저지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뒤에야 턱에 들어가 있던 힘이 풀렸다. 낡은 철제 벽에 비친 얼굴은 여전히 차분했지만, 손목 아래로 도드라진 핏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건물 밖으로 나오자, 강현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스무 살짜리 배우를 뒤에서 밀어주면서도 겉으로는 서민을 위하는 정치인인 척하는 인간이었다. 아무리 오래 봐도 역겨움에 익숙해지지는 않았다.손목시계는 오후 다섯 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쉴 틈도 없네.”짧게 혀를 차고 차에 올랐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스마트폰 액정위로 메시지가 떠올랐다.[오 실장: 다음 일정은 오후 7시입니다. 카르테시아, 용산 F타워 37층.]강현이 화면을 운전석 쪽으로 들이밀었다. 김 기사는 말없이 핸들을 돌렸다.북부간선도로를 달리는 동안 한강의 불빛이 차창 밖으로 길게 흘렀다. 강현은 눈을 감았지만, 이재영이 불렀던 이름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유설화.그 이름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무엇을 확인하려는지 아직 판단할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하나였다. 이재영의 눈이 닿은 순간부터 설화는 더 이상 자신만 아는 변수가 아니었다.***용산 F타워 37층, 카르테시아.프라이빗 룸의 문이
여름을 밀어낸 선선한 가을바람이 블라인드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고요한 창가를 맴돌았다. 낮게 스며든 오후의 볕이 대표실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길게 긁고 지나갔다.서류 위를 겉돌던 서강현의 시선은, 어느새 북악에 서 있던 그날 유설화의 얼굴에 멎어 있었다. 입술 끝에 매달려 있던 여자의 희미한 미소와 귓가로 파고들던 목소리가 뇌리에서 좀처럼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대표님이 사라지는 게, 저한테는 더 무서울 것 같거든요.가볍게 던진 농담이라 치부하기엔 얕게 끝날 무게가 아니었다. 당돌한 고백이었을까, 아니면 경계를 허무는 위험한 무장 해제였을까. 짧은 순간 강현은 그 말의 끝을 집요하게 좇아가 보고 싶었지만, 이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처음엔 그 얼굴이 싫지 않은 정도였다. 건드리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 조금 더 벼랑 끝으로 밀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기어코 울렸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지독하게 파고들어 그녀를 안았다. 그때만 해도 이 모든 감정을 날 선 욕망 하나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하지만 설화는 자신이 지나온 시간과 지나치게 닮아 있었다. 그래서 지키고 싶다가도, 보고 있으면 이유 없는 분노가 올라왔다.곁에 두고 싶다는 욕심도 결국 또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에서 시작된 것인지 모른다. 그 사실을 자각한 강현의 입꼬리가 자조적으로 비틀려 올라갔다.똑, 똑.짧은 노크 소리에 강현은 얼굴에 걸려 있던 서늘한 웃음기를 단숨에 지워내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대표실 문이 열리며 결재판을 든 오 실장이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들어왔다.“대표님, 오늘 일정 보고드리겠습니다.”올려진 보고서를 다 읽기도 전에 강현의 미간이 서서히 좁혀졌다. 서류 최상단에 박힌 문장 하나가 신경을 거슬렀다.“이건 뭡니까.”짧은 물음에 오 실장이 마른침을 삼켰다.“이재영 의원님께서 오늘 지역구 사무실로 들르라고 하셨습니다.”강현은 말없이 관자 놀이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폐부에 맺힌 깊은 숨을 한 번 내뱉고는 다시 무감한 시선을 내리깔았
퇴근길, 백화점 건물 뒤편의 좁은 출입구를 나서자 차가운 밤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낮 동안 정유라가 던지고 간 말들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 덤덤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긁힌 자국은 생각보다 깊었다.“하필이면 여기서 또 그 여자를 보냐고.”꿍얼거리며 걷던 설화의 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어스름한 가로등 불빛이 내려앉은 주차 라인 끝에 검은 오토바이 한 대가 서 있었다. 시트에 걸터앉아 헬멧을 들고 있는 남자. 조명 아래 드러난 얼굴은 서강현이었다.늘 반듯한 슈트와 정돈된 머리, 감정을 지운 얼굴로 나타나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짙은 가죽 재킷 아래로 넓은 어깨가 드러났고, 헬멧에 눌린 머리카락은 평소보다 더 거칠게 흐트러져 있었다.그가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이질적인 분위기에 설화는 말이 막혔다. 강현은 아무 설명도 없이 턱짓으로 오토바이 뒷자리를 가리켰다.“끝났어?”설화가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대표님이 여긴 왜…….”강현은 대답하지 않고 여분의 헬멧을 들어 보였다.“타.”짧고 단호한 말이었다. 설화가 선뜻 움직이지 못하자 그가 직접 다가왔다. 헬멧을 씌우고 버클을 채우는 긴 손가락이 턱 끝을 스쳤다. 접촉은 잠깐이었지만 설화는 숨을 한 번 늦게 내쉬었다.“어디 가는 건데요?” “가 보면 알아.”강현은 먼저 오토바이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엔진음이 낮고 거칠게 울렸다.“잡아.”설화는 조심스럽게 뒷자리에 앉았다. 처음에는 가죽 재킷 끝만 붙잡았지만, 오토바이가 도로로 빠르게 진입하자 결국 두 팔로 강현의 허리를 감았다. 단단한 체온이 손바닥에 닿았고, 차가운 바람 속에서 정유라 때문에 눌려 있던 답답함이 속도감에 밀려 조금씩 뒤로 흩어졌다.도심의 불빛이 길게 번졌다. 강현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속도를 올릴 때마다 설화의 손이 풀리지 않도록 몸을 낮췄다. 설화는 그의 등에 얼굴이 닿지 않을 만큼만 거리를 두고 앉아 있다가, 급한 커브에서 팔에 힘을 주었다.오토바이가 멈춘 곳은 서울이 한눈에
알람 소리에 눈을 뜬 설화는 한동안 천장을 바라봤다. 전날 백화점에서 보낸 하루와 진우와의 저녁, 그 자리에서 들었던 말이 뒤엉킨 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협탁 위를 더듬었지만, 스마트폰은 잡히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기기를 주워 화면을 열었지만, 너무도 조용했다. 부재중 전화도, 알림 숫자 하나도 없었다.왜 아무 연락이 없지.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설화는 입술을 다물었다. 단순히 빚으로 엮인 사이라면 이런 조바심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일주일째 이어지는 강현의 부재는 생각보다 선명하게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출근이나 하자. 이제 일주일도 안 남았으니까.”보름이라는 시간도 어느새 절반을 넘겼다. 설화는 몸을 일으켜 옷장을 열었다. 고깃집 냄새가 밴 오래된 티셔츠 대신 잘 다려 둔 셔츠를 꺼내 입고, 거울 앞에서 입술에 옅은 색을 얹었다.거울 속 얼굴은 전보다 조금 단단해 보였다. 강현이 없는 시간 동안에도 하루는 굴러갔고, 자신은 제 몫을 해내고 있었다.오늘도 버티자.***W백화점 정문 앞에 도착한 설화는 차가운 가을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5층 버튼을 누른 뒤에는 습관처럼 주머니 속 스마트폰으로 손이 갔다. 화면은 여전히 어두웠다.“바보 같이.”허탈한 실소가 입술 틈으로 새어 나왔다. 대단한 연락이라도 기다렸던 사람처럼 구는 자신이 우스워 고개를 작게 저었다. 미련처럼 목을 조여 오는 낯선 감정을 억지로 바닥으로 욱여넣었다. 매장에 들어서자,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설화 씨, 좋은 아침이에요.” “안녕하세요. 오늘도 잘 부탁드릴게요.”의류 상자를 안고 지나가던 동료가 이마의 땀을 훔쳤다.“오늘 물량 엄청나게 들어왔어요. 오픈하자마자 정신없을 것 같아요.” “옷만 갈아입고 바로 도울게요.”설화는 직원 대기실에서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처음에는 뒤꿈치를 까지게 만들던 구두도 이제는 제법 익숙했고, 포스기 조작과 손님에 따라붙는 입담도 늘어있었다.오픈과 동시
팽팽하게 이어지던 하루는 오후 여섯 시가 지나서야 느슨해졌다.설화는 직원 대기실에서 땀과 먼지가 밴 유니폼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거울 속 얼굴에는 피로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가방에서 립밤을 꺼내 입술 위에 덧바르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했다.누군가와 저녁을 먹기 위해 퇴근 준비를 하는 일이 낯설었다. 업무도 거래도 아닌 약속이었다.매니저와 동료들에게 인사를 건넨 뒤 정문으로 나가자, 난간에 기대선 진우가 보였다. 설화를 발견한 그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오래 기다렸어요?” “여섯 시라더니 삼십 분은 더 지난 것 같은데요.”진우의 투정 섞인 말투에 설화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죄송해요. 마감 정리가 늦어져서요. 뭐 드실래요?” “일단 걸어요. 배고픈 사람이 메뉴 고르는 게 제일 빠르니까.”진우가 앞장섰고, 설화는 그의 옆에 맞춰 걸었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하루 종일 달아올랐던 얼굴을 식혀 줬다. 백화점 안의 기계음과 안내 방송이 멀어질수록 발걸음도 조금씩 가벼워졌다.“저는 검사님처럼 지갑이 두둑하지 않아서 비싼 곳은 안 돼요.” “제가 그렇게 속물처럼 보입니까?”진우가 웃으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저도 평범한 사람입니다. 오늘은 삼겹살 먹고 싶네요.”삼겹살이라는 말에 설화의 걸음이 잠깐 느려졌다. 불판 앞에 서서 손님들의 고기를 뒤집고, 기름 냄새가 밴 옷으로 집에 돌아가던 날들이 떠올랐다. 진우는 그 변화를 알아차리고도 모른 척 계속 걸었다.“근처에 아는 곳 있으세요? 저는 이 동네를 잘 몰라서요.” “자주 가는 데가 있어요. 분위기는 기대하지 말고.”백화점 뒤편 골목으로 들어서자 낡은 네온 간판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진우가 멈춘 곳은 ‘생삼겹살 전문’이라는 환한 간판이 걸린 식당 앞이었다.문을 열자 고기 굽는 냄새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설화는 잠시 입구에 서 있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냄새였지만, 오늘은 앞치마를 두르지 않아도 됐다.직원이 물병과 물수건을 내려놓으며 진우
W백화점 5층 직원 대기실.유니폼 상의의 마지막 단추를 채운 설화는 거울 속 자신과 잠시 눈을 맞췄다. 면접을 통과하고 출근한 지 벌써 일주일째였다. 어색한 유니폼은 아직 몸에 겉돌았고, 구두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뒤꿈치를 파고들었다. 그래도 매장 입구에서 숨부터 고르는 일은 줄었다.“유설화 씨, 오늘은 이쪽 매장 서브로 붙어요. 점심은 한 시부터고, 중간 대기는 없습니다.”한아름 의류 상자를 끌어안고 움직이던 선배가 일정표를 내밀었다.“네, 알겠습니다.”설화는 짧게 대답하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오늘 하루만 버티자. 속으로 한 번 되뇌고 매장 문을 열었다.후끈한 열기와 소음이 동시에 밀려왔다. 이른 시간부터 계산대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아이를 달래는 손님과 옷을 들고 매장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끼리 동선을 뒤엉켰다.“직원분, 이거 다른 색상 있어요?” “이건 교환은 가능한 거죠?” “얼마나 기다려야 해요?”질문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설화는 입가에 미소를 걸고 차례로 응대했지만, 몇 번이나 창고와 매장을 오가는 사이 발등은 벌겋게 부어올랐다. 포스기 옆에는 정리하지 못한 영수증이 쌓였고, 한 손님이 물러나기도 전에 다음 손님이 옷을 내밀었다.설화는 바코드 스캐너를 다시 쥐었다. 숨이 가빠질 때마다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생각할 틈이 없는 건 오히려 나았다. 강현의 연락도, 보름 뒤의 일도 떠올릴 시간이 없었다.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설화는 매장 밖 벤치에 몸을 기대듯 앉았다. 구두를 살짝 벗어 보니 뒤꿈치가 붉게 짓물러 있었다. 손끝으로 상처 주변을 눌러 보던 설화가 짧게 숨을 내뱉었다.“아, 진짜….”스마트폰을 켜자, 달력 위로 보름의 절반이 지나 있었다. 강현이 허락한 시간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지만, 그동안 그의 연락은 한 번도 없었다. 보름을 달라고 한 건 자신이었으니 그가 찾지 않는 동안은 홀가분해야 했다. 그런데 퇴근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알림창을 확인하는 버릇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뜨지 않은 화면을
뭐가 이렇게 불편한 건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여자 하나가 방 안에 잠들어 있을 뿐인데, 그런데도 손끝에 닿았던 설화의 부드러운 살결과 입술의 촉감이 기어이 잔상처럼 달라붙었다.아주 오래전 닫아 둔 문 안쪽에서, 누군가 조용히 손잡이를 건드리는 것처럼.비가 내렸다. 회색 하늘 아래, 굵은 빗방울이 낡은 식당 문을 쉼 없이 때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우산을 쓰고 바쁘게 스쳐 지나갔다. 누구도 그 작은 식당 앞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열 평 남짓한 식당은 젊은 여자와 어린 소년이 몸을 누일 수 있는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엄
설화가 차가운 기운을 느꼈는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더 둥글게 웅크렸다. 강현의 커다란 재킷 아래로 가냘픈 어깨가 파묻히고, 젖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뺨 위로 흘러내렸다.강현은 그 위태로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강제로 시선을 뚝 끊어냈다. 그런데도 의지는 배신하듯 다시 고개가 돌아갔다.확인하듯, 아니면 상황을 부정하려는 사람처럼.……이건 아니야.그는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 눈물처럼 붙어 있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걷어냈다. 닿는 순간마다 감각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고, 단단히 손끝에 들어가 있던 통제력은 허무하
설화는 다리 위에 멍하니 서 있었다. 빗방울이 머리카락을 타고 목덜미 아래로 축축하게 흘러내렸다. 손끝은 점점 차가워지고, 온몸이 젖어들수록 오한이 몸을 감싸 안았다. 가로등 불빛마저 거센 빗속에서 흐릿하게 번져 눈앞을 어지럽혔다.그 순간, 머리 위로 툭— 소리와 함께 암전처럼 검은 우산이 펼쳐졌다."그래서… 여기서 끝낼 생각이야?"낯설지만 낮고 묵직하게 깔리는 남자의 목소리. 설화는 무거워진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리며 천천히 남자를 응시했다.우산 아래 서 있는 남자는 빗물에 젖은 검은 셔츠 사이로 단단한 어깨를 드러낸 채
밖으로 나오자 낮의 열기는 간데없이 습하고 차가운 밤공기가 훅 끼쳐왔다. 오늘따라 유독 부치는 몸에 남은 것은 뼈마디를 파고드는 피로와 공허함뿐이었다.조금만 더. 진짜 조금만 어떻게 버티면…….그렇게 되뇌면서도, 정작 버티고 난 끝에 자신에게 뭐가 남아 있을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텅 빈 미래를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툭 꺼져 내리듯 아팠다.가방끈이 젖은 어깨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 무게보다 마음 한구석에 뚫린 구멍이 더 무겁고 저릿하게 가라앉았다.어느새 멈추었던 비가 다시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하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