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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비에 젖은 여자

Autor: 이레나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06-05 18:16:15

축 늘어진 설화를 품에 안은 채, 강현은 빗속을 가로질렀다. 걸음은 평소보다 조금 느렸다. 의식 없는 몸 하나쯤 옮기는 일에 버거움을 느낄 남자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품 안에 닿은 체온이 신경을 거슬렀다. 그런데도 그 작고 힘없는 무게가 불쾌할 만큼 선명하게 남았다.

강현은 설화를 조수석에 눕힌 뒤 안전벨트를 매어 주었다. 벨트가 가느다란 몸 위로 걸리는 순간,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마치 그 멈칫거림조차 허락할 수 없다는 듯 그는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 뒷좌석의 재킷을 집어 들었다.

축축하게 젖은 상체 위로 재킷을 덮어 주는 손길에는 다정함보다 짜증에 가까운 조심성이 배어 있었다. 공조를 켜자 미지근한 바람이 차 안을 채웠다.

그 바람에 그녀의 창백한 얼굴이 조금씩 풀리고, 물기 어린 속눈썹 끝이 잘게 흔들렸다.

강현은 가죽 핸들을 강하게 쥔 채 한동안 차를 출발시키지 않았다. 와이퍼가 유리창을 격렬하게 긁어대는 소리만이 차 안의 정적을 깰 뿐이었다.

유설화.

그 이름 석 자가 자꾸만 단단하게 닫혀 있던 그의 의식 가장자리를 날카롭게 긁어대고 있었다. 강현은 낮게 혀를 차고는 신경질적으로 액셀을 밟았다. 검은색 세단이 빗길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저택의 외등이 쏟아지는 여름비로 얼룩진 마당 위로 희미하게 번져나가고 있었다. 강현은 차에서 설화를 다시 안아 들고 현관문을 지나 넓은 거실로 들어섰다.

거실 소파 위에 눕히는 순간, 흠뻑 젖은 설화의 머리카락 끝에서 맺힌 작은 물방울들이 뚝, 뚝 소리를 내며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강현은 바닥에 번지는 물 자국을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젖은 이마를 쓸어 올리며 욕실로 향했다. 두껍고 마른 수건을 몇 장 들고 돌아온 그는 낮게 가라앉은 소파 곁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설화의 머리카락에 남은 차가운 물기를 조심스럽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푹신한 수건이 그녀의 이마와 뺨, 그리고 가늘게 떨리는 입가를 조심스레 지나갈 때마다, 강현의 단단한 미간은 조금씩 더 깊게 좁혀졌고 표정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런 짓을 자처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가 지독하게 우스웠다. 길바닥에서 비에 젖어 쓰러져 가던 채무자 여자를 사적인 공간에 데려와 눕히고, 수건질까지 하면서 빗물을 닦아주고 있는 자신의 꼴이라니.

"지금 뭐 하는 거냐, 서강현."

스스로를 다그치듯 낮게 내뱉은 서늘한 목소리가 거실의 눅눅한 공기 속으로 허무하게 흩어졌다.

강현은 물기 젖은 수건을 바닥으로 툭 내려놓고는 소파에 누운 설화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내렸다. 물기가 걷힌 피부는 희었고, 옅은 조명 아래 드러난 입술은 필요 이상으로 선명했다. 긴 속눈썹, 아무런 방어도 하지 못한 채 잠겨 있는 얼굴.

그 지독한 무방비함이 이 어두운 밤, 사람 안의 가장 바닥에 숨겨진 지저분하고 노골적인 충동을 교묘하게 건드린다는 것을 강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가엾다는 말로 포장되는 오만.

지켜 주고 싶다는 말 뒤에 숨어 있는 소유욕.

건드려도 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비열한 확신.

강현은 세상의 음지에서 구르며 그런 인간들의 썩은 냄새를 뼈저리게 맡아왔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아주 미세하게나마 그 혐오스러운 냄새가 자신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이 역겨움으로 남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설화의 입가 가까이에 멈췄다. 돌아서야 한다는 판단이 손끝까지 도착하기 전에 이미 늦어 있었다.

손끝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짧은 접촉이었다. 그런데도 부드러운 감촉이 살갗을 타고 번지는 순간, 오래 묻어 두었다고 믿었던 무언가가 안쪽에서 희미하게 흔들렸다.

강현은 낮게 숨을 들이쉬었다.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동작으로 고개가 숙여졌다. 입술 표면이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길지도, 깊지도 않았다. 그러나 짧았다고 해서 아무 일도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입술을 떼어내자마자 자신을 한심하게 비웃고 거친 숨을 삼켰다. 눈앞의 설화는 세상이 뒤집혀도 모를 만큼 깊은 혼절 속에 빠져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고, 그런 방어권 없는 여자를 상대로 자신 안의 견고했던 벽에 금이 가는 것을 확인한 꼴이었다.

"……기분 한번 더럽네."

아주 낮게, 빗소리에 묻혀 스스로에게도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짓씹어 뱉듯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조소를 흘리면서도 강현은 곧장 소파를 벗어나 물러나지 못했다. 갈 듯 말 듯 멈춘 채, 그러나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감정들이 머릿속에서 지저분하고 복잡하게 엉켜버렸다.

이것이 연민인지, 과거에 대한 집착인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어떤 이름도 붙이고 싶지 않은 쪽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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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는 너를 보고 싶었다.   10화 세상은 언제나 문을 닫았다.

    뭐가 이렇게 불편한 건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여자 하나가 방 안에 잠들어 있을 뿐인데, 그런데도 손끝에 닿았던 설화의 부드러운 살결과 입술의 촉감이 기어이 잔상처럼 달라붙었다.아주 오래전 닫아 둔 문 안쪽에서, 누군가 조용히 손잡이를 건드리는 것처럼.비가 내렸다. 회색 하늘 아래, 굵은 빗방울이 낡은 식당 문을 쉼 없이 때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우산을 쓰고 바쁘게 스쳐 지나갔다. 누구도 그 작은 식당 앞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열 평 남짓한 식당은 젊은 여자와 어린 소년이 몸을 누일 수 있는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엄마는 평생 단 한 번도 강현을 그 남자에게 데려간 적이 없었다. 자존심 때문이었고, 어쩌면 마지막까지 놓지 못한 품위일지도 몰랐다.하지만 그날은 달랐다.아홉 살의 강현이 학교에서 눈이 퉁퉁 부은 채 돌아온 날이었다. 작은 운동화는 흙탕물에 젖어 있었고, 책가방 끈을 움켜쥔 손가락 끝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울음을 참느라 턱 끝만 자꾸 떨렸다."엄마."아이가 겨우 입을 열었다."나도 아빠 있지?"엄마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무슨 뜻인지, 어린 강현은 다 알지 못했다. 다만 그날 학교에서 들었던 말들이 다시 목구멍을 긁고 올라왔다."애들이 나보고 없는 애라고 해."끝내 강현의 볼을 타고 눈물이 떨어졌다."근데 나…… 없는 애 아니잖아."그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울먹이던 아이의 손을, 엄마는 끝내 놓지 못했다.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여자는 낡은 우산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고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여기서 기다리면…… 아마 들어오라고 할 거야."엄마는 젖은 우산을 강현의 어깨 쪽으로 바짝 기울였다. 자신은 거의 비를 맞고 있으면서도, 아이가 젖는 것만은 막으려 애썼다.소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손가락은 자꾸 우산 손잡이에서 미끄러졌다. 차가운 빗물이 틈새로 스며들어 손등을 때렸고, 어깨는 이미 절반쯤 젖어 있었다. 엄마의 손도, 아이의 손도 조금씩 식어 갔다.얼마 뒤 문이

  • 우는 너를 보고 싶었다.   9화 닫힌 문 안쪽에서

    설화가 차가운 기운을 느꼈는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더 둥글게 웅크렸다. 강현의 커다란 재킷 아래로 가냘픈 어깨가 파묻히고, 젖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뺨 위로 흘러내렸다.강현은 그 위태로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강제로 시선을 뚝 끊어냈다. 그런데도 의지는 배신하듯 다시 고개가 돌아갔다.확인하듯, 아니면 상황을 부정하려는 사람처럼.……이건 아니야.그는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 눈물처럼 붙어 있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걷어냈다. 닿는 순간마다 감각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고, 단단히 손끝에 들어가 있던 통제력은 허무하게 풀려버렸다.강현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파와의 거리를 두는 것이 지금 이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처럼 느껴졌지만, 발걸음은 곧장 떨어지지 않았다. 한 박자 늦게 바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장식장 선반 위에 놓여 있던 싱글몰트 위스키 병을 꺼내 유리잔에 거칠게 따랐다. 커다란 원형 얼음이 잔바닥에 부딪혀 내려앉으며 쨍하는 파찰음을 낮고 맑게 울렸다. 그는 그 소리를 덮어버리듯 잔을 들어 단숨에 목구멍 속으로 삼켜버렸다.독한 술이 식도를 강하게 긁고 내려갔지만, 뜨거워진 속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 텁텁하고 거칠게 말라붙어 갈 뿐이었다.창밖의 빗소리 위로 재즈 선율이 낮게 감겨들었다.거실에는 낮은 조명과 술 냄새, 젖은 공기와 뒤섞여 무겁게 깔렸다. 강현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은빛 지포라이터를 꺼냈다. 틱, 짧은 금속음과 함께 불꽃이 일었고, 입술 사이로 길게 흘러나온 연기가 열어둔 거실 창문 틈으로 느리게 번져나갔다.흘끗 뒤를 돌아보니 소파 위 설화를 덮고 있던 재킷이 아래로 흘러내려 있었다. 그녀는 추운 줄도 모르고 수면 아래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연기가 눈앞에서 피어올랐다 사라지는 사이로, 그녀의 얼굴이 희미하게 겹쳐졌다. 고른 숨, 뺨에 드리운 머리카락, 웅크린 몸. 그 모든 것이 밤의 습기와 음악 속에 섞여 강현의 신경을 잡아당겼다.그는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위스키 잔을 가득 채워 단숨

  • 우는 너를 보고 싶었다.   8화 비에 젖은 여자

    축 늘어진 설화를 품에 안은 채, 강현은 빗속을 가로질렀다. 걸음은 평소보다 조금 느렸다. 의식 없는 몸 하나쯤 옮기는 일에 버거움을 느낄 남자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품 안에 닿은 체온이 신경을 거슬렀다. 그런데도 그 작고 힘없는 무게가 불쾌할 만큼 선명하게 남았다.강현은 설화를 조수석에 눕힌 뒤 안전벨트를 매어 주었다. 벨트가 가느다란 몸 위로 걸리는 순간,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마치 그 멈칫거림조차 허락할 수 없다는 듯 그는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 뒷좌석의 재킷을 집어 들었다.축축하게 젖은 상체 위로 재킷을 덮어 주는 손길에는 다정함보다 짜증에 가까운 조심성이 배어 있었다. 공조를 켜자 미지근한 바람이 차 안을 채웠다.그 바람에 그녀의 창백한 얼굴이 조금씩 풀리고, 물기 어린 속눈썹 끝이 잘게 흔들렸다.강현은 가죽 핸들을 강하게 쥔 채 한동안 차를 출발시키지 않았다. 와이퍼가 유리창을 격렬하게 긁어대는 소리만이 차 안의 정적을 깰 뿐이었다.유설화.그 이름 석 자가 자꾸만 단단하게 닫혀 있던 그의 의식 가장자리를 날카롭게 긁어대고 있었다. 강현은 낮게 혀를 차고는 신경질적으로 액셀을 밟았다. 검은색 세단이 빗길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저택의 외등이 쏟아지는 여름비로 얼룩진 마당 위로 희미하게 번져나가고 있었다. 강현은 차에서 설화를 다시 안아 들고 현관문을 지나 넓은 거실로 들어섰다.거실 소파 위에 눕히는 순간, 흠뻑 젖은 설화의 머리카락 끝에서 맺힌 작은 물방울들이 뚝, 뚝 소리를 내며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강현은 바닥에 번지는 물 자국을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젖은 이마를 쓸어 올리며 욕실로 향했다. 두껍고 마른 수건을 몇 장 들고 돌아온 그는 낮게 가라앉은 소파 곁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설화의 머리카락에 남은 차가운 물기를 조심스럽게 닦아내기 시작했다.푹신한 수건이 그녀의 이마와 뺨, 그리고 가늘게 떨리는 입가를 조심스레 지나갈 때마다, 강현의 단단한 미간은 조금씩 더 깊게 좁혀졌고 표정은 어둠 속으

  • 우는 너를 보고 싶었다.   7화 비 속으로 걸어온 남자

    설화는 다리 위에 멍하니 서 있었다. 빗방울이 머리카락을 타고 목덜미 아래로 축축하게 흘러내렸다. 손끝은 점점 차가워지고, 온몸이 젖어들수록 오한이 몸을 감싸 안았다. 가로등 불빛마저 거센 빗속에서 흐릿하게 번져 눈앞을 어지럽혔다.그 순간, 머리 위로 툭— 소리와 함께 암전처럼 검은 우산이 펼쳐졌다."그래서… 여기서 끝낼 생각이야?"낯설지만 낮고 묵직하게 깔리는 남자의 목소리. 설화는 무거워진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리며 천천히 남자를 응시했다.우산 아래 서 있는 남자는 빗물에 젖은 검은 셔츠 사이로 단단한 어깨를 드러낸 채 설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매를 걷어 올린 팔뚝 위로 빗물이 천천히 흐르고, 이마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눈빛만은 장대비 속에서도 유난히 또렷했다."나는 빚 안 갚고, 죽음으로 퉁 치려는 인간들을 제일 경멸해."'빚'이라는 단어가 귓가를 때리자, 설화는 떨리는 입술을 짓이기듯 꾹 다물었다. 아빠가 남긴 굴레가 결국 이곳까지 쫓아왔다는 절망감과 함께, 이 지독한 채권자들이 결국 사람을 붙여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설화는 빗물을 삼키며 조용히, 그러나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안 죽어요."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엉망으로 들러붙고 턱 끝을 타고 빗방울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전…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남자는 그런 설화의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 비웃음처럼 번진 입가. 하지만 그 냉정함 이면에는 자신조차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이 잠깐 스쳤다."그래? 약하지 않다며 호기를 부리는 것치고는, 지금 꼴이 말이 아니네." "신경 쓰지 마세요."잘게 떨리면서도 묘한 독기가 서린 설화의 목소리는 작지만 단단했다. 두 사람 사이를 세차게 메우는 빗소리 탓에, 순간적으로 세상의 모든 소음이 아득히 멀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남자는 우산을 살짝 기울이며 설화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커다란 검은 우산이 빗줄기를 가로막으며, 순식간에 두

  • 우는 너를 보고 싶었다.   6화 그가 보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 낮의 열기는 간데없이 습하고 차가운 밤공기가 훅 끼쳐왔다. 오늘따라 유독 부치는 몸에 남은 것은 뼈마디를 파고드는 피로와 공허함뿐이었다.조금만 더. 진짜 조금만 어떻게 버티면…….그렇게 되뇌면서도, 정작 버티고 난 끝에 자신에게 뭐가 남아 있을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텅 빈 미래를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툭 꺼져 내리듯 아팠다.가방끈이 젖은 어깨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 무게보다 마음 한구석에 뚫린 구멍이 더 무겁고 저릿하게 가라앉았다.어느새 멈추었던 비가 다시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굵어졌다. 설화는 낡은 우산을 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걸었다. 빗속을 헤치던 걸음은 점점 느려졌고, 결국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다리 위에 멈춰 섰다.설화는 젖은 손으로 가방을 뒤적여 낮에 편의점에서 받았던 내용증명 서류를 꺼냈다. 지독한 채무의 굴레. 설화는 이를 악물고 종이를 갈가리 찢어 다리 아래로 던져버렸다. 조각난 하얀 종이들은 빗물에 무겁게 젖어들며 시커먼 강물 위로 휩쓸려 흔적도 없이 떠내려갔다."아빠 거니까, 가져가."목구멍을 찢고 나온 나지막한 속삭임은 거센 빗소리에 묻혀 금세 흩어졌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하늘은 온통 숨이 막힐 듯한 회색빛이었다. 강물도, 도로도,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 자신만 남겨둔 채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세상 전체가 저 멀리 밀려나는 듯한 고립감 속에서 결국 참았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뺨을 적시는 것이 차가운 빗물인지, 속에서 터져 나온 감정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거긴 어때, 아빠? 그렇게 다 던지고 떠나버리니까, 속이 후련해?"원망과 슬픔이 뒤섞인 질문이 허공에 맴돌았다. 세상에 철저히 홀로 남겨진 듯한 외로움과 끝없는 불안이 칠흑 같은 밤어둠 속으로 깊게 스며들었다.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도로변. 검은 세단 안에는 낮은 재즈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조금 열린 창문 틈으로 담배 연기가 천천히 빠져나가 빗물 섞인 밤공기와 엉켰다.남

  • 우는 너를 보고 싶었다.   5화 오늘도 버티는 밤

    비 오는 거리를 걷고 또 걸어, 마침내 목적지인 고깃집 앞에 도착했다. 설화는 낡아빠진 우산을 접고, 눅눅해진 옷을 추슬렀다. 기름진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후끈한 열기와 고기 냄새, 연기가 한꺼번에 얼굴을 덮쳤다.사장님이 설화를 보고 눈짓으로 인사했다. 가게 안은 이미 손님들로 북적였고, 빈 테이블 위에는 아직 치우지 못한 굳은 고기와 빈 소주병, 흩어진 쌈 채소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불판을 들고 움직이던 지원 언니가 설화를 보자 장난스럽게 볼을 한 번 잡아당기며 피식 웃었다."왔어? 오늘따라 손님 오지게 많다. 각오해." "새삼스럽게요." "설화, 왔나? 비 한번 징그럽게 온다."주방 이모가 고무장갑 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설화는 조금 전 편의점에서 있었던 일을 잠시라도 잊어보려고 입가를 끌어올렸다."네, 이모. 우산을 써도 소용없네요." "맞다. 빨리 빠진 테이블부터 정리 해줘."검은 앞치마를 허리에 단단히 둘러매고 손님이 빠진 테이블부터 돌기 시작했다. 빈 접시와 널브러진 쌈 채소를 쟁반에 담고, 소주병 목을 한 손에 움켜쥐었다. 손안에 빈 병 세 개가 가볍게 잡혔다.이마저도 익숙한 일이었지만, 편의점에서 받았던 그 기분 나쁜 시선이 아직 가시지 않아 몸이 조금 더 무겁게 느껴졌다.그때 취기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최 사장이 설화의 손목을 낚아채고 히죽거렸다. 근처에서 나름 큰 규모의 인테리어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다."이쁜아, 여기 물 좀 줘." "네, 알겠습니다."설화는 언제나처럼 미소를 짓고 손목을 빼냈다.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가져다주었다. 이내 몸을 돌려 다른 테이블을 정리했다. 주방 쪽에서는 설거지 소리가 더 빨라졌고, 계속해서 손님이 밀려들었다.좁은 테이블 사이를 설화는 곡예를 하듯 오가며 저녁 피크타임을 버텼다.쌓여 있는 그릇을 주방으로 옮기고, 테이블에 흘린 소스를 행주로 닦았다. 홀 구석에는 설화의 손목을 낚아챘던 최 사장이 같이 온 직원들과 소곤거리며 설화를 보고 입맛을 다셨다."매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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