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일상적인 며칠이 지나갔다. 여름 햇살의 열기는 여전했고, 매미 소리도 여전히 귀가 따가울 만큼 울어댔다. 골목을 채운 낡은 빌라들, 담벼락 위로 엉켜 늘어진 전선, 쓰레기봉투 옆을 지나쳐가는 고양이까지. 어제와 다르지 않은 아침이었다.
다른 건 하나뿐이었다. 현관문이 거칠게 열리고, 낯선 사람들이 집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압수수색영장입니다. 협조해 주십시오." 낮고 딱딱한 목소리가 좁은 현관을 파고들었다. 설화는 처음에는 그 뜻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압수수색. 영장. 협조. 뉴스에서나 들었을 법한 단어들이, 갑자기 자신의 집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그들은 ‘검찰’이라고 적힌 신분증을 들이밀었다. 손에는 파란 압수물 박스가 들려 있었다. 지시에 따라 거실장을 열었고, 누군가는 아버지 방으로 들어갔다. 미처 치우지 못한 빨래 바구니 옆을 지나 거실 위로 구둣발 자국이 어지럽게 찍혔다. "잠깐만요. 신발은, 신발은 벗고……." 엄마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아버지 방에서 서랍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서류철이 뒤지는 소리, 컴퓨터 본체가 바닥에서 끌리는 소리, 짧고 건조한 지시가 거실까지 쿵쿵 울렸다. 좁은 집 안이 순식간에 남의 손에 넘어간 것처럼 느껴졌다. 설화는 현관 옆에 선 채 움직이지 못했다. "하아…… 이게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엄마는 거실 위에 주저앉아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사람처럼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고개를 숙이고 울었다. 소리는 크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집 안 전체를 채웠다. 그제야 설화는 본능처럼 알았다. 무언가 끝났다는 것을. 뺨을 타고 미지근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해 목이 콱 메어왔다. 엄마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엄마. 뭐라고 말 좀 해봐." "나도 몰라, 설화야. 이게 무슨 일인지." 엄마는 같은 말만 반복했다. 모른다. 모른다.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인지, 알고도 모른 척하고 싶은 말인지 설화는 구분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집에 자주 들어오는 사람이 아니었다. 항상 바빴고, 예민했고, 늘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설화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다정한 사람이라기보다, 집 안에 들어오는 순간 공기부터 무겁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에게서 받은 건 따뜻한 말보다 날 선 침묵이 더 많았다. 칭찬보다 꾸중이 먼저였고, 설명보다 짜증이 익숙했다. 학업에 집중해야 시기에 설화를 아르바이트 전선으로 내몬 사람도 아버지였다. 가진 것들을 하나둘 팔게 만들고, 결국 관악구의 이곳은 허울만 남은 가족의 마지막 주소였다. 그런데 그마저 이렇게 헤집어 놓다니. 아버지의 방에서 파란 박스가 봉인되어 나왔다. 서류와 외장하드, 오래된 수첩 몇 권이 그 안에 담겼다. 설화는 멍하니 그 상자를 바라보다가, 입술 사이로 참지 못한 말이 새어 나왔다. "씨발 새끼……." 할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쌍욕을 한다고 경을 치고도 남았을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차라리 다행인지 몰랐다. 할머니가 이 지옥을 보지 않아도 되어서. 압수수색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낯선 사람들이 빠져나간 뒤에도 집 안은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열린 서랍, 뒤집힌 서류 더미, 밀린 의자, 구둣발 자국만이 현실임을 일깨웠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지 않았나. 엄마의 간헐적인 흐느낌만 간간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해가 저물어가고 각자의 방에서 서로를 외면했다. 하지만 이 비극은 겨우 전주곡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날 저녁 뉴스를 통해 알게 되었다. TV 화면 속 앵커의 차분한 목소리가 내 안을 거칠게 흔들었다. "생생물산 차명 자금 의혹과 관련해 검찰 조사를 받아오던 페이퍼컴퍼니 대표 유 모 씨가 오늘 오후 한강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순간 화면 아래로 붉은 속보 자막이 지나갔다. "검찰은 유 씨가 모 국회의원의 차명 자금 관리에 관여했을 가능성을 두고 수사를 이어가던 중…." 귀 안에서 길게 삐— 하는 소리가 울렸다. 앵커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지만, 문장들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단어들이 제각각 흩어져 설화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아빠가 죽었다고? 자살……? 손에 쥐고 있던 리모컨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탁, 하는 소리가 지나치게 또렷했다. 설화는 그 소리에 스스로가 놀라 눈을 깜빡였다. 조금 전,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으며 집을 뛰쳐나간 엄마의 뒷모습이 이제야 떠올랐다. 엄마는 이미 알고 있었을까.서강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몇 걸음 물러서서 눈치를 보던 최 과장이 나직하게 목을 가다듬었다. 건조한 헛기침 소리가 정적을 가른 뒤에야 강현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희고 빳빳한 종이 가장자리에 서늘한 손끝이 닿았다. 사르륵,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두어 번 고요를 깨다 어느 한 페이지에서 흐름이 뚝 끊겼다. 검은 활자들 위로 그의 손끝이 걸린 채 멈춰 있었다.“이대로 진행하면 됩니까?”강현의 물음에 최 과장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큰 틀은 그렇습니다. 세부는 대표님께서 보시면 됩니다.”강현은 대답 대신 집게손가락 끝으로 하얀 종이 표면을 눌렀다. 종이 위로 얕은 자국이 생겼다.“나가보시죠.”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최 과장은 더 말을 얹지 못했다. 서류철을 고쳐 잡은 그가 소리 없이 물러나자 묵직한 문이 부드럽게 닫혔다. 대표실 안에는 오직 에어컨 바람만 공간에 감돌았다. 잠시 후, 문 너머로 다시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들어오세요.”오정민 비서실장이 정장 매무새를 가다듬고 단정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내일 일정이 빽빽하게 정리된 태블릿을 책상 한쪽에 조용히 내려놓았다.“대표님, 내일 VIP 자선 파티 동반 파트너는 어떻게 하실까요. 늘 하시던 대로 태성건설그룹 정유라 씨 쪽으로 안내할까요.”태블릿 화면을 넘기던 강현의 손이 잠깐 멈췄다. 화면에 두고 있던 시선이 천천히 오 실장에게로 옮겨갔다. 짧게 눈이 마주친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이번에는 유설화 씨로 하죠. 그렇게 정리해 주세요.”그 이름이 강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자, 오 실장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 반응은 금세 사라졌다.“대표님.”오 실장이 마른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유설화 씨는 그 자리가 조금 버거우실 것 같습니다.”강현은 두 손을 깍지 낀 채 입가로 가져갔다. 다문 입술 끝에 비웃음 같은 기색이 잠깐 스쳤다가 사라졌다. 그의 목소리는 아무 감정도 담
기광의 구둣발이 옆구리를 걷어찼다. 둔탁한 소리가 좁은 슈퍼 안에 울렸다. 과자 봉지가 짓눌리고, 빈 유리병이 바닥을 굴렀다. 강현은 신음하지 않았다. 차가운 바닥에 뺨을 댄 채 가게 형광등을 바라봤다. 의식이 한 번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정리해. 장부는 저쪽으로 넘기고, 현장은 그대로 둬.”서기광의 말에 조직원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정만수가 봉투를 계산대 아래로 밀어 넣었고, 다른 조직원이 슈퍼 주인의 손에 억지로 장부를 쥐였다. 강현은 바닥에 엎어진 채 그 모든 걸 봤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머리는 차갑게 깨어 있었다.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바람 소리 같았다. 곧 붉고 푸른 불빛이 깨진 유리창 너머로 번갈아 스며들었다. 조직원들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슈퍼 안에는 쓰러진 주인과, 피 묻은 입술로 바닥에 엎어진 강현만 남아 있었다.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그의 어깨를 짓눌렀고, 팔을 뒤로 꺾었다. 차가운 금속이 손목을 파고들었다.철컥.그 소리는 이상하게 선명했다. 오래된 문이 닫히는 소리처럼, 무언가가 완전히 끝나는 소리처럼.강현은 끌려 나가며 고개를 들었다. 겨울 밤공기가 허파 깊숙이 박혔다. 가로등 불빛이 얼어붙은 아스팔트 위에 희멀건 원을 만들고 있었다. 그 안에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직은 깨끗하게 사라졌고, 남은 죄는 그의 손목에 채워져 있었다.호송차 뒷좌석에 밀려 앉는 순간, 강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창밖으로 겨울눈이 내렸다. 하얀 눈은 타이어 자국 위를 빠르게 덮었다. 더러워진 바닥도, 발자국도, 방금 전의 흔적도 잠깐은 깨끗해 보였다.구치소의 첫날 밤은 차가웠다. 회색 벽은 축축하게 식어 있었고, 얇은 담요에서는 오래된 먼지 냄새가 올라왔다. 강현은 벽을 마주한 채 앉아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손목에는 수갑 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다.어쩌다 여기까지 왔지.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숨이 가라앉고 온몸의 감각이 무뎌질 즈음, 복도 끝에서 쇠문이 끌리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누군가 잠깐 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늘 눅눅했다. 곰팡이 냄새와 오래 묵은 담배 연기가 벽지처럼 들러붙은, 시장통 뒤편의 사채 사무실. 강현이 손을 뻗어 두꺼운 철문을 밀자, 기름칠이 말라붙은 경첩이 날카롭게 울었다. 문틈 사이로 탁한 열기가 먼저 쏟아져 나왔다.“왔네, 서강현.”검붉은 패딩 조끼를 걸친 차기광이 가죽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주황색 조명 아래서 그의 눈이 강현의 얼굴에서부터 어깨, 손끝까지 천천히 훑고 내려갔다.“요즘 손끝이 굼뜨다며. 돈 받으러 다니는 놈 손이 그렇게 느려서야 쓰겠냐.” “죄송합니다.”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변명도, 분노의 기색도 없었다. 그 무색무취한 반응이 오히려 기광의 신경을 긁은 듯했다. 그는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짧게 웃었다.“넌 늘 그 말뿐이지.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알겠습니다.”옆에 있던 정만수가 강현의 뒷통수를 툭 쳤다.“저러다 언젠가 우리 팔아먹는 거 아닙니까.”옆에 있던 조직원 하나가 전표를 뒤적이며 피식거렸다. 강현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조용히 구석진 테이블 앞으로 걸어갔다. 전표와 구겨진 지폐들이 뒤엉킨 자리 앞에 서서 손을 움직였다.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지폐는 축축했고, 손끝마다 끈적한 기름때가 묻어났다. 역겨움조차 오래 버티면 일상이 되었다.“제대로 세. 할당 못 맞추면 네 손가락부터 세게 될 줄 알아.”강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고무줄로 지폐를 묶자 팽팽한 탄성이 손목을 툭 쳤다. 기광은 묶인 돈을 집어 들어 대충 무게를 가늠했다.“그래도 오늘은 모자라진 않았네.”그의 시선이 다시 강현에게 꽂혔다.“내일 3번가 슈퍼. 장부대로 받아 와. 또 울면 진열대 하나 엎고. 그래도 버티면 팔을 꺾어. 알아듣지?”“알겠습니다.”강현이 몸을 돌리자, 뒤에서 웃음이 따라붙었다.“난 저 새끼 눈이 싫어.”차기광의 목소리가 문 닫히기 직전까지 따라왔다.“독한 것도 아니고, 빈 것도 아니고. 꼭 아직 뭘 고르고 있는 사람 눈이야.”골목의 찬 공기가 얼굴을
통화를 마친 강현은 스마트폰을 책상 위로 밀어냈다. 탁, 짧은 마찰음이 대표실의 정적을 갈랐다. 이마를 짚은 손끝이 뜨거웠다.“이런 씨발.”낮게 새어 나온 욕설 뒤로 더는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설화를 보고 그 사람이 단번에 알아챘다고 했다. 눈이 닮았다고, 아주 오래전 잊었다고 믿은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고. 그 한마디가 기분 나쁘게 정확했다.강현은 유리창 앞으로 걸어갔다. 구두 소리가 서늘하게 울렸다. 통유리 너머의 도시는 한여름이었다. 얽히고설킨 빌딩 숲 아래로 무표정한 행인들의 어깨가 쉼 없이 흘러갔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버티고, 견디고, 또 흘러가고 있었다.오늘따라 그 모습이 유난히 거슬렸다. 나만 멈춰 서 있는 것 같은 기분. 가장 단단하게 봉인해 두었던 안쪽이 통째로 들켜 버린 듯한 불쾌감에 입안이 썼다.“돌아버리겠네, 진짜.”혼잣말이 유리창에 닿자마자 흩어졌다. 창틈으로 비스듬히 스며든 오후의 햇살 속에서 먼지들이 조용히 반짝였다. 따뜻해야 할 빛이었지만, 강현의 살결에 닿는 온기는 기분 나쁠 정도로 차가워 눈을 감았다.***그 빛 사이로 오래된 냄새가 먼저 돌아왔다. 기름 냄새, 젖은 행주 냄새, 좁은 식당 안에 눌어붙은 매캐한 연기 냄새. 그 위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고막을 긁었다.“아들, 그만하고 들어가 자.”물기 젖은 고무장갑이 물기를 끌고 테이블을 스치는 소리가 났다. 강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뚝뚝한 얼굴로 어머니 손에 들린 행주를 빼앗아 기름진 테이블을 거칠게 닦아낼 뿐이었다. 어머니의 손등은 퍼석했고, 굳은살은 손마디마다 층처럼 박혀 있었다.“숙제는 다 했어?” “예.” “거짓말하지 말고.” “저 못 믿어요? 서예린 여사님?” “아이고, 또 시작이네.”그렇게 말하면서도 어머니는 웃었다. 설거지통 앞에서는 거칠고 빠르던 손이, 강현의 뺨에 닿을 때만 유난히 조심스러워졌다.어머니는 늘 웃고 있었지만, 그 눈 깊은 곳에는 가끔 닿을 수 없는 어딘가가 남아 있었다. 강현은 묻지 않았다.
설화는 화면을 밀어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지금 끝났어?“네, 방금 나왔습니다.”— 별일은 없었고?“네. 지시하신 대로 가방만 내려놓고 나왔습니다.”설화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덧붙였다.“…그분이, 제가 어떤 사람의 눈을 닮았다고 하더군요.”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숨소리조차 낮게 가라앉았다. 강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침묵은 생각보다 길었다. 설화는 스마트폰을 귀에 댄 채 나무 그늘 아래 서 있었다. 담장 너머에서 잎이 흔들리는 소리만 작게 들렸다.— 수고했어.짧은 한마디가 늦게 도착했다. 더 묻지도, 설명하지도 않는 목소리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손끝에 힘이 풀렸다.“네.”통화가 끊겼다. 설화는 한참 동안 꺼진 화면을 내려다봤다. 그 한마디가 마음 어딘가를 건드렸다. 칭찬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짧고 사무적인 말투. 그런데도 오늘은 그 말이 싫지 않았다.설화는 화면을 조작해 메시지 보관함을 열었다. 오래된 메시지 아래쪽에 한 달 동안 감정 쓰레기처럼 남아 있던 기프티콘 하나.[STB 달콤한 디저트 세트 교환권]처음 받았을 때는 그냥 넘겼다. 발신자도 없는 쿠폰 하나가 불쾌했고, 동시에 무서웠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그걸 써도 될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아닌 하루에 작은 구멍 하나를 내고 싶었다.설화는 지도 앱을 켜고 가장 가까운 S매장을 찾았다. 신호등 앞에 멈춰 선 채 화면을 내려다보니, 유효기간과 교환처가 초록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여름빛은 아직도 강했고, 아스팔트 위로 올라오는 열기 때문에 공기가 묘하게 눅눅했다. 바람이 살짝 불어왔지만 금세 지나가 버렸고, 블라우스 소매 끝이 손목을 스칠 때마다 땀기 어린 피부가 잠깐씩 드러났다.매장 앞에 도착하자 유리창 너머로 익숙한 초록빛 로고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바깥의 무더운 공기가 잘려 나가고 서늘한 냉기가 피부를 감쌌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은 차가웠고, 그 뒤를 따라 볶은 원두의 쌉쌀한 향이 천천히 번졌다. 안쪽에서는 음악
다음 날 저녁, 설화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샤워를 마친 설화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감싸 쥔 채 냉장고 문을 열었다. 차가운 생수를 들이키는 동안에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물기가 서늘하게 식어 갔다. 밤은 깊었고, 오래된 빌라 안은 지나치게 고요했다.딩동. 딩동.정적을 깨고 현관 초인종이 두 번 울렸다. 설화는 마시던 물병을 내려놓고 그대로 멈춰 섰다. 잠시 망설임 끝에 문을 살짝 열어 밖을 확인한 뒤, 천천히 잠금장치를 풀었다.문 앞에는 한두 번 본 적 있는 미래드림 직원이 서 있었다. 단정한 차림으로, 손에는 지퍼를 끝까지 잠근 검은색 보스턴백이 들려 있었다. 설화는 그걸 보는 순간, 말보다 먼저 무게부터 느꼈다.“대표님께서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남자는 짧게 말하고 주소가 적힌 메모지 한 장을 내밀었다. 설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건네받았다. 손끝에 걸리는 묵직함에, 더 묻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았다.문이 닫힌 뒤에도 설화는 한동안 현관에 서 있었다. 보스턴백을 발치에 놓여 있었고, 메모지에는 삼청동 주소 하나가 반듯하게 적혀 있었다.어제는 말없이 와주더니, 오늘은 또 이런 식으로 나오네.설화는 낮게 헛웃음을 흘리고는, 가방을 한 번 내려다봤다. 손끝에 남은 묵직함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밤은 그렇게 지나갔다.현관에 남은 정적도, 마음 한구석에 걸린 찜찜함도 완전히 가시지 않은 채.다음 날 아침, 설화는 옷장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삼청동이라는 단어 하나가 이상하게 사람을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티셔츠를 꺼냈다가 넣고, 청바지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거울 앞에서 옷을 대어 보던 설화가 결국 작게 웃었다.“이젠 옷까지 신경 써야 하고.”혼잣말은 방 안에 낮게 떨어졌다. 옷장 안쪽에서 대학 시절에 입던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꺼냈다. 옷을 털자, 묵은 냄새와 먼지가 희미하게 일었다. 설화는 손바닥으로 천을 눌러 주름을 폈다.택시에 오른 뒤에는 창밖만 봤다. 메모지에 적힌 주소는 삼청동.
설화가 차가운 기운을 느꼈는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더 둥글게 웅크렸다. 강현의 커다란 재킷 아래로 가냘픈 어깨가 파묻히고, 젖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뺨 위로 흘러내렸다.강현은 그 위태로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강제로 시선을 뚝 끊어냈다. 그런데도 의지는 배신하듯 다시 고개가 돌아갔다.확인하듯, 아니면 상황을 부정하려는 사람처럼.……이건 아니야.그는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 눈물처럼 붙어 있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걷어냈다. 닿는 순간마다 감각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고, 단단히 손끝에 들어가 있던 통제력은 허무하
축 늘어진 설화를 품에 안은 채, 강현은 빗속을 가로질렀다. 걸음은 평소보다 조금 느렸다. 의식 없는 몸 하나쯤 옮기는 일에 버거움을 느낄 남자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품 안에 닿은 체온이 신경을 거슬렀다. 그런데도 그 작고 힘없는 무게가 불쾌할 만큼 선명하게 남았다.강현은 설화를 조수석에 눕힌 뒤 안전벨트를 매어 주었다. 벨트가 가느다란 몸 위로 걸리는 순간,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마치 그 멈칫거림조차 허락할 수 없다는 듯 그는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 뒷좌석의 재킷을 집어 들었다.축축하게 젖은 상체 위로 재킷을 덮어 주는
설화는 다리 위에 멍하니 서 있었다. 빗방울이 머리카락을 타고 목덜미 아래로 축축하게 흘러내렸다. 손끝은 점점 차가워지고, 온몸이 젖어들수록 오한이 몸을 감싸 안았다. 가로등 불빛마저 거센 빗속에서 흐릿하게 번져 눈앞을 어지럽혔다.그 순간, 머리 위로 툭— 소리와 함께 암전처럼 검은 우산이 펼쳐졌다."그래서… 여기서 끝낼 생각이야?"낯설지만 낮고 묵직하게 깔리는 남자의 목소리. 설화는 무거워진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리며 천천히 남자를 응시했다.우산 아래 서 있는 남자는 빗물에 젖은 검은 셔츠 사이로 단단한 어깨를 드러낸 채
밖으로 나오자 낮의 열기는 간데없이 습하고 차가운 밤공기가 훅 끼쳐왔다. 오늘따라 유독 부치는 몸에 남은 것은 뼈마디를 파고드는 피로와 공허함뿐이었다.조금만 더. 진짜 조금만 어떻게 버티면…….그렇게 되뇌면서도, 정작 버티고 난 끝에 자신에게 뭐가 남아 있을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텅 빈 미래를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툭 꺼져 내리듯 아팠다.가방끈이 젖은 어깨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 무게보다 마음 한구석에 뚫린 구멍이 더 무겁고 저릿하게 가라앉았다.어느새 멈추었던 비가 다시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하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