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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비 속으로 걸어온 남자

Author: 이레나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06-03 15:35:52

설화는 다리 위에 멍하니 서 있었다. 빗방울이 머리카락을 타고 목덜미 아래로 축축하게 흘러내렸다. 손끝은 점점 차가워지고, 온몸이 젖어들수록 오한이 몸을 감싸 안았다. 가로등 불빛마저 거센 빗속에서 흐릿하게 번져 눈앞을 어지럽혔다.

그 순간, 머리 위로 툭— 소리와 함께 암전처럼 검은 우산이 펼쳐졌다.

"그래서… 여기서 끝낼 생각이야?"

낯설지만 낮고 묵직하게 깔리는 남자의 목소리. 설화는 무거워진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리며 천천히 남자를 응시했다.

우산 아래 서 있는 남자는 빗물에 젖은 검은 셔츠 사이로 단단한 어깨를 드러낸 채 설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매를 걷어 올린 팔뚝 위로 빗물이 천천히 흐르고, 이마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눈빛만은 장대비 속에서도 유난히 또렷했다.

"나는 빚 안 갚고, 죽음으로 퉁 치려는 인간들을 제일 경멸해."

'빚'이라는 단어가 귓가를 때리자, 설화는 떨리는 입술을 짓이기듯 꾹 다물었다. 아빠가 남긴 굴레가 결국 이곳까지 쫓아왔다는 절망감과 함께, 이 지독한 채권자들이 결국 사람을 붙여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설화는 빗물을 삼키며 조용히, 그러나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안 죽어요."

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엉망으로 들러붙고 턱 끝을 타고 빗방울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전…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남자는 그런 설화의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 비웃음처럼 번진 입가. 하지만 그 냉정함 이면에는 자신조차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이 잠깐 스쳤다.

"그래? 약하지 않다며 호기를 부리는 것치고는, 지금 꼴이 말이 아니네."

"신경 쓰지 마세요."

잘게 떨리면서도 묘한 독기가 서린 설화의 목소리는 작지만 단단했다. 두 사람 사이를 세차게 메우는 빗소리 탓에, 순간적으로 세상의 모든 소음이 아득히 멀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남자는 우산을 살짝 기울이며 설화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커다란 검은 우산이 빗줄기를 가로막으며, 순식간에 두 사람만을 가두는 작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비와 눈물,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인 지독한 밤, 두 사람 사이에 묵직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더는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설화가 몸을 틀어 등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남자가 들고 있던 우산을 조용히 접었다. 쏟아지는 장대비를 온몸으로 맞기 시작하는 그의 돌발적인 행동이 이상하리만치 설화의 시선을 붙잡았다.

검은 셔츠 위로 빗물이 빠르게 스며들었다. 얇게 젖어 가는 천 아래로 단단한 어깨선과 팔의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비를 맞고 서 있을 뿐인데도, 그는 물러서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폭우를 고스란히 맞으며 아무 말 없이 설화를 응시할 뿐이었다. 설화는 남자의 강렬한 시선이 버거워 애써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빠가 남긴 빚을 받으러 온 사람일 뿐인데.

내가 지금 뭘 기대하는 거지.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감기고, 축축하게 가라앉은 옷이 몸을 옥죄어왔다. 피부를 짓누르는 차가운 밤공기보다, 남자가 내뿜는 이 서늘한 침묵이 훨씬 더 날카롭게 폐부를 찔렀다.

"왜요. 제가 정말 여기서 뛰어내려 죽어버리면, 그 대단한 돈을 못 받게 될까 봐 미행이라도 하신 건가요?"

설화가 메마른 목소리로 힘겹게 가시를 돋워내자, 남자는 낮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이내 정색하고 이죽거렸다.

"미행? 그래, 돈 중요하지. 그런데 이건 아니지. 내 소중한 채무자가 어디 아프거나 다치기라도 하면, 나만 손해잖아."

그가 설화의 앞까지 서슴없이 다가와 손을 내밀고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 위로 빗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더니 이내 손가락을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려 자취를 감췄다. 설화는 본능적인 위협을 느끼며 다가오는 그를 피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언제까지 계속 이러고 서 있을 거야?"

낮고 단호한 질문이 빗소리를 뚫고 귀에 박혔다. 설화가 그 오만한 태도에 뭐라도 쏘아붙이려 입술을 달싹이던 바로 그때였다.

순간, 시야가 기울었다. 머릿속이 텅 비는 것처럼 아찔했다. 가슴이 턱 막히고, 숨이 짧게 끊겼다. 눈앞에 있던 남자의 얼굴이 빗물 속에서 흐릿하게 두 개로 나누어졌다.

아니야.

무너지면 안 돼.

설화는 무너지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손끝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중심을 잃은 몸이 옆으로 스르륵 기울었다.

"……아."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 강한 손이 설화의 허리를 낚아채듯 받아안았다. 힘없이 무너진 몸이 남자의 품 안으로 쏟아졌다.

서강현은 순간적으로 쏠린 무게를 지탱하며 잇새로 짧게 숨을 내뱉었다. 비에 젖어 차갑게 식은 옷자락이 서로 맞닿았다. 차가운 빗속인데도, 그 찰나만큼은 이상하게 선명한 온기가 있었다.

"이런 날 멍청한 짓이나 하고."

그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짓궂은 짜증과, 걱정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거칠었다.

강현은 젖은 머리카락에 가려진 설화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손등으로 그녀의 뺨 근처를 스치듯 짚었다. 서늘하게 식은 피부가 닿자 그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좁혀졌다.

"하. 아주 가지가지 하네."

내뱉는 한탄과 달리, 그는 설화를 조금 더 단단히 안아 들었다. 서늘한 비바람이 다리 위를 거칠게 휩쓸고 지나갔다. 의식을 잃은 여자와 그녀를 안은 남자 위로, 차가운 빗방울만이 말없이 흩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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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는 너를 보고 싶었다.   55화 보름의 중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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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는 너를 보고 싶었다.   9화 닫힌 문 안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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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는 너를 보고 싶었다.   8화 비에 젖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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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밖으로 나오자 낮의 열기는 간데없이 습하고 차가운 밤공기가 훅 끼쳐왔다. 오늘따라 유독 부치는 몸에 남은 것은 뼈마디를 파고드는 피로와 공허함뿐이었다.조금만 더. 진짜 조금만 어떻게 버티면…….그렇게 되뇌면서도, 정작 버티고 난 끝에 자신에게 뭐가 남아 있을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텅 빈 미래를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툭 꺼져 내리듯 아팠다.가방끈이 젖은 어깨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 무게보다 마음 한구석에 뚫린 구멍이 더 무겁고 저릿하게 가라앉았다.어느새 멈추었던 비가 다시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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