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설화는 다리 위에 멍하니 서 있었다. 빗방울이 머리카락을 타고 목덜미 아래로 축축하게 흘러내렸다. 손끝은 점점 차가워지고, 온몸이 젖어들수록 오한이 몸을 감싸 안았다. 가로등 불빛마저 거센 빗속에서 흐릿하게 번져 눈앞을 어지럽혔다.
그 순간, 머리 위로 툭— 소리와 함께 암전처럼 검은 우산이 펼쳐졌다.
"그래서… 여기서 끝낼 생각이야?"
낯설지만 낮고 묵직하게 깔리는 남자의 목소리. 설화는 무거워진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리며 천천히 남자를 응시했다.
우산 아래 서 있는 남자는 빗물에 젖은 검은 셔츠 사이로 단단한 어깨를 드러낸 채 설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매를 걷어 올린 팔뚝 위로 빗물이 천천히 흐르고, 이마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눈빛만은 장대비 속에서도 유난히 또렷했다.
"나는 빚 안 갚고, 죽음으로 퉁 치려는 인간들을 제일 경멸해."
'빚'이라는 단어가 귓가를 때리자, 설화는 떨리는 입술을 짓이기듯 꾹 다물었다. 아빠가 남긴 굴레가 결국 이곳까지 쫓아왔다는 절망감과 함께, 이 지독한 채권자들이 결국 사람을 붙여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설화는 빗물을 삼키며 조용히, 그러나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안 죽어요."
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엉망으로 들러붙고 턱 끝을 타고 빗방울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전…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남자는 그런 설화의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 비웃음처럼 번진 입가. 하지만 그 냉정함 이면에는 자신조차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이 잠깐 스쳤다.
"그래? 약하지 않다며 호기를 부리는 것치고는, 지금 꼴이 말이 아니네."
"신경 쓰지 마세요."잘게 떨리면서도 묘한 독기가 서린 설화의 목소리는 작지만 단단했다. 두 사람 사이를 세차게 메우는 빗소리 탓에, 순간적으로 세상의 모든 소음이 아득히 멀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남자는 우산을 살짝 기울이며 설화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커다란 검은 우산이 빗줄기를 가로막으며, 순식간에 두 사람만을 가두는 작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비와 눈물,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인 지독한 밤, 두 사람 사이에 묵직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더는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설화가 몸을 틀어 등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남자가 들고 있던 우산을 조용히 접었다. 쏟아지는 장대비를 온몸으로 맞기 시작하는 그의 돌발적인 행동이 이상하리만치 설화의 시선을 붙잡았다.
검은 셔츠 위로 빗물이 빠르게 스며들었다. 얇게 젖어 가는 천 아래로 단단한 어깨선과 팔의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비를 맞고 서 있을 뿐인데도, 그는 물러서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폭우를 고스란히 맞으며 아무 말 없이 설화를 응시할 뿐이었다. 설화는 남자의 강렬한 시선이 버거워 애써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빠가 남긴 빚을 받으러 온 사람일 뿐인데.
내가 지금 뭘 기대하는 거지.빗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감기고, 축축하게 가라앉은 옷이 몸을 옥죄어왔다. 피부를 짓누르는 차가운 밤공기보다, 남자가 내뿜는 이 서늘한 침묵이 훨씬 더 날카롭게 폐부를 찔렀다.
"왜요. 제가 정말 여기서 뛰어내려 죽어버리면, 그 대단한 돈을 못 받게 될까 봐 미행이라도 하신 건가요?"
설화가 메마른 목소리로 힘겹게 가시를 돋워내자, 남자는 낮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이내 정색하고 이죽거렸다.
"미행? 그래, 돈 중요하지. 그런데 이건 아니지. 내 소중한 채무자가 어디 아프거나 다치기라도 하면, 나만 손해잖아."
그가 설화의 앞까지 서슴없이 다가와 손을 내밀고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 위로 빗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더니 이내 손가락을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려 자취를 감췄다. 설화는 본능적인 위협을 느끼며 다가오는 그를 피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언제까지 계속 이러고 서 있을 거야?"
낮고 단호한 질문이 빗소리를 뚫고 귀에 박혔다. 설화가 그 오만한 태도에 뭐라도 쏘아붙이려 입술을 달싹이던 바로 그때였다.
순간, 시야가 기울었다. 머릿속이 텅 비는 것처럼 아찔했다. 가슴이 턱 막히고, 숨이 짧게 끊겼다. 눈앞에 있던 남자의 얼굴이 빗물 속에서 흐릿하게 두 개로 나누어졌다.
아니야.
무너지면 안 돼.설화는 무너지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손끝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중심을 잃은 몸이 옆으로 스르륵 기울었다.
"……아."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 강한 손이 설화의 허리를 낚아채듯 받아안았다. 힘없이 무너진 몸이 남자의 품 안으로 쏟아졌다.
서강현은 순간적으로 쏠린 무게를 지탱하며 잇새로 짧게 숨을 내뱉었다. 비에 젖어 차갑게 식은 옷자락이 서로 맞닿았다. 차가운 빗속인데도, 그 찰나만큼은 이상하게 선명한 온기가 있었다.
"이런 날 멍청한 짓이나 하고."
그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짓궂은 짜증과, 걱정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거칠었다.
강현은 젖은 머리카락에 가려진 설화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손등으로 그녀의 뺨 근처를 스치듯 짚었다. 서늘하게 식은 피부가 닿자 그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좁혀졌다.
"하. 아주 가지가지 하네."
내뱉는 한탄과 달리, 그는 설화를 조금 더 단단히 안아 들었다. 서늘한 비바람이 다리 위를 거칠게 휩쓸고 지나갔다. 의식을 잃은 여자와 그녀를 안은 남자 위로, 차가운 빗방울만이 말없이 흩어지고 있었다.
"……제가 어떻게 사는지 구경하면서, 한심하다고 비웃으신 거네요." "비웃을 시간도 없고. 네가 얼마나 무력했는지 확인했을 뿐이지." "……." "알바를 세 개를 뛰든, 밤을 새우든, 결국 네 처지는 내 손바닥 안이라는 것."설화는 잠시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치 오기를 부리듯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이건 싸움조차 되지 않는 부분이란 걸. 이 집 안에서 자신의 분노를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이 식탁 위에 차려진 것들은 배려가 아니라, 네 한계를 알게 하려는 노골적인 조롱이었다.강현은 아무 말 없이 설화의 시선을 받아주었다. 그 시선은 점점 더 무겁고 차가워졌다. 설화는 결국 손에 들고 있던 삼각김밥을 천천히 내려놓았다."왜. 입맛이 없어?" "네."설화는 고개를 숙인 채 단호하게 받아쳤다."너무 질려서, 이제는 손이 안 가네요."강현의 입꼬리가 얄팍하게 올라갔다. 벼랑 끝에 몰려서도 고개를 꼿꼿이 드는 생존 본능이 제법 재미있다는 얼굴이었다.그가 고개를 살짝 돌려 나직하게 명령했다."오 실장님, 이것 좀 치워 주세요."곧 처음에 봤던 남자가 다가왔다. 편의점 도시락과 삼각김밥, 컵수프가 빠르게 봉투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자, 설화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저도 이제 가볼게요."그 순간, 강현의 짙은 눈썹이 느릿하게 올라갔다. 그녀가 몸을 틀려는 찰나, 그의 커다란 손이 손목을 단번에 낚아채 그대로 자신 앞에 세웠다."누가 가도 된다고 했지?"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설화의 등줄기가 얼어붙었다."……네?" "아버지 빚 때문이라면, 제가 어떻게든 갚을게요." "갚아?"강현이 식탁 테이블을 밀고 완전히 일어섰다. 압도적인 체구가 설화의 시야를 차단하듯 가로막았다. 위에서 아래로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그의 시선이, 설화의 숨통을 기어이 틀어쥐었다."원금에 이자까지 붙으면 하루에도 돈이 불어나." "…….
식탁 위에는 이미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고급 저택의 주방에 어울릴 법한 한식 상차림도, 호텔 조식 같은 접시들도 아니었다.편의점 도시락 몇 개. 삼각김밥. 컵수프와 작은 우유, 플라스틱 포크까지. 그것들이 지나치게 반듯한 식탁 위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설화는 잠시 말문을 잃은 채 헛웃음이 나왔다."이건……." "먹을 수 있는 걸로 사 오라고 했어."강현은 의자 쪽을 턱으로 한번 가리켰다."비싼 거 차려 놔 봐야 못 먹을 것 같아서."그 말에 설화는 미묘하게 얼굴을 굳혔다. 배려인지, 무시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말투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는, 그녀가 이런 음식을 더 익숙하게 느낄 거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그게 조금 불쾌했다.설화는 의자 앞에 서서 식탁 위를 내려다보았다. 삼각김밥 포장지에 맺힌 작은 물기, 아직 온기가 남은 도시락, 옆에 놓인 나무젓가락.강현은 맞은편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앉아." "저, 괜찮……." "유설화."주방에 이름이 낮게 불렸다. 말하는 법도, 부르는 법도 익숙한 사람처럼. 그 한마디에 설화는 입을 다물었다. 강현의 눈빛은 차갑고 무심했다."먹고 말해."설화는 결국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담요를 무릎 위로 끌어당긴 채, 조심스럽게 삼각김밥 하나를 집었다. 포장지를 뜯는 작은 소리만이 식탁 위에 어색하게 번졌다.강현은 그런 설화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맞은편 의자에 앉지 않은 채 식탁 끝에 비스듬히 기대섰다."옷은."설화의 손이 멈췄다. 강현의 시선이 그녀의 티셔츠 자락으로 잠깐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왔다."젖어서 버렸어."설화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잘못 들은 건가 싶어 그를 쳐다봤지만 돌아오는 건 무료한 눈빛뿐이었다."버렸다고요?" "입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제 옷인데요." "그럼 다시 가져다줄까? 기름이 배고 빗물에 절어서 냄새나는걸."냉정한 말에 설화는 할 말을 잃었다. 맞는
설화는 무심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티셔츠 하나만 걸친 다리 위로 서늘한 공기가 닿았다. 순간, 피부 위로 소름이 잘게 돋았다.이게 뭐야.원래 입고 있던 옷이 아니었다. 비에 젖어 무겁게 들러붙어 있던 낡은 티셔츠도, 축축한 청바지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지나치게 큰 흰 티셔츠 한 장이 어깨부터 허벅지 위까지 헐겁게 걸쳐져 있었다.낯선 옷. 아니, 낯선 남자의 옷.설화는 반사적으로 티셔츠 자락을 움켜쥐었다. 원단에서 희미한 향이 났다. 이 방에 배어 있는 차갑고 건조한 스킨 향. 어젯밤 희미한 의식 너머로 스쳤던, 남자의 품에서 나던 향이었다.누가 갈아입힌 거지.생각은 거기서 멈췄다. 더 나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머릿속은 이미 가장 불편한 가능성을 향해 기울고 있었다. 설화는 속으로 숨을 삼키며 급히 담요를 끌어올렸다. 손톱이 천을 파고들 만큼 세게 움켜쥐고 나서야, 간신히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이런 곳에 내가 왜…….불안이 발목부터 스며들었다. 낯선 침실, 지나치게 넓은 침대, 군더더기 없이 정리된 가구들. 어느 것 하나 자신 것이 아니었다. 설화는 한동안 침대 위에 굳어 있다가, 조심스럽게 발을 내렸다.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자, 집 안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난간 손잡이를 붙잡고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설화는 담요가 구명줄라도 되는 듯 몸에 바짝 감고 있었다.시야에 들어온 거실은 상상보다 훨씬 넓었다. 높은 천장, 반듯하게 놓인 가구들, 차갑게 빛나는 대리석 바닥. 통유리 너머 정원에는 밤새 내린 비가 아직 남아, 나뭇잎과 꽃잎 끝마다 투명한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설화는 저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세상 불공평하네……."그 순간, 뒤쪽에서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일어나셨습니까."놀란 설화가 고개를 돌렸다. 말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자세는 지나치게 단정했고, 시선은 예의 바르면서도 차가웠다."대표님께 방금 연락드렸습니다. 곧 오실 겁니다."대
엘리베이터 문이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유리문 안쪽에서는 이른 시간부터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공간 전체에 얇은 긴장과 업무의 열기가 깔려 있었지만, 강현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 공기는 한층 더 낮게 가라앉았다. 직원들의 인사가 이어졌지만, 강현은 짧게 고개만 끄덕인 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곧장 복도 끝 회의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그의 구두 소리가 대리석 바닥 위로 규칙적으로 울렸다. 회의실 문 앞에 잠시 멈춘 채 짧게 숨을 내쉬고 강현은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문이 열리자,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표님." 강현은 역시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무표정한 얼굴, 단정하게 정돈된 슈트, 흐트러짐 없는 걸음. 어젯밤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 그는 상석에 앉아 테이블 위 서류를 넘겼다. “신흥물류 건은 어떻게 정리됐죠.” “이사님 쪽 정리는 끝났습니다. 하청 라인 조율만 남았습니다.” “내일까지 마무리하세요.”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 감정은 한 톨도 섞여 있지 않았다. 강현은 미지근해진 커피잔을 들어 입술만 적신 뒤,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쌉쌀한 맛이 입안에서 감돌았다. 머릿속은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 아니, 철저하게 고요한 척을 연기하고 있었다. 창밖에서 아침 햇살이 유리창을 타고 매끄럽게 스며들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단 한 자락의 음영조차 비치지 않았다. 이상하다. 이 정도의 숙취나 피로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밤을 새우고 병째 술을 비워내도 멀쩡히 거대한 투자 그룹의 판을 짜고 일을 처리해 온 사람이 자신이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명치 끝이 거슬렸다. 독한 알코올 때문만은 아니었다. 강현은 무심히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이유를 굳이 파고들 필요는 없었다. 생각의 자락을 여는 순간, 가슴 가장자리를 긁어대던 쓸데없는 이름 한 개가 기어이 머릿속을 통째로 점령해 버릴 테니까. 그 여자 때문인가,
뭐가 이렇게 불편한 건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여자 하나가 방 안에 잠들어 있을 뿐인데, 그런데도 손끝에 닿았던 설화의 부드러운 살결과 입술의 촉감이 기어이 잔상처럼 달라붙었다.아주 오래전 닫아 둔 문 안쪽에서, 누군가 조용히 손잡이를 건드리는 것처럼.비가 내렸다. 회색 하늘 아래, 굵은 빗방울이 낡은 식당 문을 쉼 없이 때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우산을 쓰고 바쁘게 스쳐 지나갔다. 누구도 그 작은 식당 앞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열 평 남짓한 식당은 젊은 여자와 어린 소년이 몸을 누일 수 있는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엄마는 평생 단 한 번도 강현을 그 남자에게 데려간 적이 없었다. 자존심 때문이었고, 어쩌면 마지막까지 놓지 못한 품위일지도 몰랐다.하지만 그날은 달랐다.아홉 살의 강현이 학교에서 눈이 퉁퉁 부은 채 돌아온 날이었다. 작은 운동화는 흙탕물에 젖어 있었고, 책가방 끈을 움켜쥔 손가락 끝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울음을 참느라 턱 끝만 자꾸 떨렸다."엄마."아이가 겨우 입을 열었다."나도 아빠 있지?"엄마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무슨 뜻인지, 어린 강현은 다 알지 못했다. 다만 그날 학교에서 들었던 말들이 다시 목구멍을 긁고 올라왔다."애들이 나보고 없는 애라고 해."끝내 강현의 볼을 타고 눈물이 떨어졌다."근데 나…… 없는 애 아니잖아."그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울먹이던 아이의 손을, 엄마는 끝내 놓지 못했다.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여자는 낡은 우산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고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여기서 기다리면…… 아마 들어오라고 할 거야."엄마는 젖은 우산을 강현의 어깨 쪽으로 바짝 기울였다. 자신은 거의 비를 맞고 있으면서도, 아이가 젖는 것만은 막으려 애썼다.소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손가락은 자꾸 우산 손잡이에서 미끄러졌다. 차가운 빗물이 틈새로 스며들어 손등을 때렸고, 어깨는 이미 절반쯤 젖어 있었다. 엄마의 손도, 아이의 손도 조금씩 식어 갔다.얼마 뒤 문이
설화가 차가운 기운을 느꼈는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더 둥글게 웅크렸다. 강현의 커다란 재킷 아래로 가냘픈 어깨가 파묻히고, 젖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뺨 위로 흘러내렸다.강현은 그 위태로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강제로 시선을 뚝 끊어냈다. 그런데도 의지는 배신하듯 다시 고개가 돌아갔다.확인하듯, 아니면 상황을 부정하려는 사람처럼.……이건 아니야.그는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 눈물처럼 붙어 있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걷어냈다. 닿는 순간마다 감각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고, 단단히 손끝에 들어가 있던 통제력은 허무하게 풀려버렸다.강현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파와의 거리를 두는 것이 지금 이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처럼 느껴졌지만, 발걸음은 곧장 떨어지지 않았다. 한 박자 늦게 바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장식장 선반 위에 놓여 있던 싱글몰트 위스키 병을 꺼내 유리잔에 거칠게 따랐다. 커다란 원형 얼음이 잔바닥에 부딪혀 내려앉으며 쨍하는 파찰음을 낮고 맑게 울렸다. 그는 그 소리를 덮어버리듯 잔을 들어 단숨에 목구멍 속으로 삼켜버렸다.독한 술이 식도를 강하게 긁고 내려갔지만, 뜨거워진 속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 텁텁하고 거칠게 말라붙어 갈 뿐이었다.창밖의 빗소리 위로 재즈 선율이 낮게 감겨들었다.거실에는 낮은 조명과 술 냄새, 젖은 공기와 뒤섞여 무겁게 깔렸다. 강현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은빛 지포라이터를 꺼냈다. 틱, 짧은 금속음과 함께 불꽃이 일었고, 입술 사이로 길게 흘러나온 연기가 열어둔 거실 창문 틈으로 느리게 번져나갔다.흘끗 뒤를 돌아보니 소파 위 설화를 덮고 있던 재킷이 아래로 흘러내려 있었다. 그녀는 추운 줄도 모르고 수면 아래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연기가 눈앞에서 피어올랐다 사라지는 사이로, 그녀의 얼굴이 희미하게 겹쳐졌다. 고른 숨, 뺨에 드리운 머리카락, 웅크린 몸. 그 모든 것이 밤의 습기와 음악 속에 섞여 강현의 신경을 잡아당겼다.그는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위스키 잔을 가득 채워 단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