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설화는 다리 위에 멍하니 서 있었다. 빗방울이 머리카락을 타고 목덜미 아래로 축축하게 흘러내렸다. 손끝은 점점 차가워지고, 온몸이 젖어들수록 오한이 몸을 감싸 안았다. 가로등 불빛마저 거센 빗속에서 흐릿하게 번져 눈앞을 어지럽혔다.
그 순간, 머리 위로 툭— 소리와 함께 암전처럼 검은 우산이 펼쳐졌다.
"그래서… 여기서 끝낼 생각이야?"
낯설지만 낮고 묵직하게 깔리는 남자의 목소리. 설화는 무거워진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리며 천천히 남자를 응시했다.
우산 아래 서 있는 남자는 빗물에 젖은 검은 셔츠 사이로 단단한 어깨를 드러낸 채 설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매를 걷어 올린 팔뚝 위로 빗물이 천천히 흐르고, 이마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눈빛만은 장대비 속에서도 유난히 또렷했다.
"나는 빚 안 갚고, 죽음으로 퉁 치려는 인간들을 제일 경멸해."
'빚'이라는 단어가 귓가를 때리자, 설화는 떨리는 입술을 짓이기듯 꾹 다물었다. 아빠가 남긴 굴레가 결국 이곳까지 쫓아왔다는 절망감과 함께, 이 지독한 채권자들이 결국 사람을 붙여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설화는 빗물을 삼키며 조용히, 그러나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안 죽어요."
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엉망으로 들러붙고 턱 끝을 타고 빗방울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전…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남자는 그런 설화의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 비웃음처럼 번진 입가. 하지만 그 냉정함 이면에는 자신조차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이 잠깐 스쳤다.
"그래? 약하지 않다며 호기를 부리는 것치고는, 지금 꼴이 말이 아니네."
"신경 쓰지 마세요."잘게 떨리면서도 묘한 독기가 서린 설화의 목소리는 작지만 단단했다. 두 사람 사이를 세차게 메우는 빗소리 탓에, 순간적으로 세상의 모든 소음이 아득히 멀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남자는 우산을 살짝 기울이며 설화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커다란 검은 우산이 빗줄기를 가로막으며, 순식간에 두 사람만을 가두는 작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비와 눈물,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인 지독한 밤, 두 사람 사이에 묵직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더는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설화가 몸을 틀어 등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남자가 들고 있던 우산을 조용히 접었다. 쏟아지는 장대비를 온몸으로 맞기 시작하는 그의 돌발적인 행동이 이상하리만치 설화의 시선을 붙잡았다.
검은 셔츠 위로 빗물이 빠르게 스며들었다. 얇게 젖어 가는 천 아래로 단단한 어깨선과 팔의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비를 맞고 서 있을 뿐인데도, 그는 물러서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폭우를 고스란히 맞으며 아무 말 없이 설화를 응시할 뿐이었다. 설화는 남자의 강렬한 시선이 버거워 애써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빠가 남긴 빚을 받으러 온 사람일 뿐인데.
내가 지금 뭘 기대하는 거지.빗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감기고, 축축하게 가라앉은 옷이 몸을 옥죄어왔다. 피부를 짓누르는 차가운 밤공기보다, 남자가 내뿜는 이 서늘한 침묵이 훨씬 더 날카롭게 폐부를 찔렀다.
"왜요. 제가 정말 여기서 뛰어내려 죽어버리면, 그 대단한 돈을 못 받게 될까 봐 미행이라도 하신 건가요?"
설화가 메마른 목소리로 힘겹게 가시를 돋워내자, 남자는 낮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이내 정색하고 이죽거렸다.
"미행? 그래, 돈 중요하지. 그런데 이건 아니지. 내 소중한 채무자가 어디 아프거나 다치기라도 하면, 나만 손해잖아."
그가 설화의 앞까지 서슴없이 다가와 손을 내밀고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 위로 빗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더니 이내 손가락을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려 자취를 감췄다. 설화는 본능적인 위협을 느끼며 다가오는 그를 피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언제까지 계속 이러고 서 있을 거야?"
낮고 단호한 질문이 빗소리를 뚫고 귀에 박혔다. 설화가 그 오만한 태도에 뭐라도 쏘아붙이려 입술을 달싹이던 바로 그때였다.
순간, 시야가 기울었다. 머릿속이 텅 비는 것처럼 아찔했다. 가슴이 턱 막히고, 숨이 짧게 끊겼다. 눈앞에 있던 남자의 얼굴이 빗물 속에서 흐릿하게 두 개로 나누어졌다.
아니야.
무너지면 안 돼.설화는 무너지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손끝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중심을 잃은 몸이 옆으로 스르륵 기울었다.
"……아."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 강한 손이 설화의 허리를 낚아채듯 받아안았다. 힘없이 무너진 몸이 남자의 품 안으로 쏟아졌다.
서강현은 순간적으로 쏠린 무게를 지탱하며 잇새로 짧게 숨을 내뱉었다. 비에 젖어 차갑게 식은 옷자락이 서로 맞닿았다. 차가운 빗속인데도, 그 찰나만큼은 이상하게 선명한 온기가 있었다.
"이런 날 멍청한 짓이나 하고."
그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짓궂은 짜증과, 걱정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거칠었다.
강현은 젖은 머리카락에 가려진 설화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손등으로 그녀의 뺨 근처를 스치듯 짚었다. 서늘하게 식은 피부가 닿자 그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좁혀졌다.
"하. 아주 가지가지 하네."
내뱉는 한탄과 달리, 그는 설화를 조금 더 단단히 안아 들었다. 서늘한 비바람이 다리 위를 거칠게 휩쓸고 지나갔다. 의식을 잃은 여자와 그녀를 안은 남자 위로, 차가운 빗방울만이 말없이 흩어지고 있었다.
서강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몇 걸음 물러서서 눈치를 보던 최 과장이 나직하게 목을 가다듬었다. 건조한 헛기침 소리가 정적을 가른 뒤에야 강현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희고 빳빳한 종이 가장자리에 서늘한 손끝이 닿았다. 사르륵,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두어 번 고요를 깨다 어느 한 페이지에서 흐름이 뚝 끊겼다. 검은 활자들 위로 그의 손끝이 걸린 채 멈춰 있었다.“이대로 진행하면 됩니까?”강현의 물음에 최 과장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큰 틀은 그렇습니다. 세부는 대표님께서 보시면 됩니다.”강현은 대답 대신 집게손가락 끝으로 하얀 종이 표면을 눌렀다. 종이 위로 얕은 자국이 생겼다.“나가보시죠.”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최 과장은 더 말을 얹지 못했다. 서류철을 고쳐 잡은 그가 소리 없이 물러나자 묵직한 문이 부드럽게 닫혔다. 대표실 안에는 오직 에어컨 바람만 공간에 감돌았다. 잠시 후, 문 너머로 다시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들어오세요.”오정민 비서실장이 정장 매무새를 가다듬고 단정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내일 일정이 빽빽하게 정리된 태블릿을 책상 한쪽에 조용히 내려놓았다.“대표님, 내일 VIP 자선 파티 동반 파트너는 어떻게 하실까요. 늘 하시던 대로 태성건설그룹 정유라 씨 쪽으로 안내할까요.”태블릿 화면을 넘기던 강현의 손이 잠깐 멈췄다. 화면에 두고 있던 시선이 천천히 오 실장에게로 옮겨갔다. 짧게 눈이 마주친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이번에는 유설화 씨로 하죠. 그렇게 정리해 주세요.”그 이름이 강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자, 오 실장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 반응은 금세 사라졌다.“대표님.”오 실장이 마른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유설화 씨는 그 자리가 조금 버거우실 것 같습니다.”강현은 두 손을 깍지 낀 채 입가로 가져갔다. 다문 입술 끝에 비웃음 같은 기색이 잠깐 스쳤다가 사라졌다. 그의 목소리는 아무 감정도 담
기광의 구둣발이 옆구리를 걷어찼다. 둔탁한 소리가 좁은 슈퍼 안에 울렸다. 과자 봉지가 짓눌리고, 빈 유리병이 바닥을 굴렀다. 강현은 신음하지 않았다. 차가운 바닥에 뺨을 댄 채 가게 형광등을 바라봤다. 의식이 한 번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정리해. 장부는 저쪽으로 넘기고, 현장은 그대로 둬.”서기광의 말에 조직원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정만수가 봉투를 계산대 아래로 밀어 넣었고, 다른 조직원이 슈퍼 주인의 손에 억지로 장부를 쥐였다. 강현은 바닥에 엎어진 채 그 모든 걸 봤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머리는 차갑게 깨어 있었다.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바람 소리 같았다. 곧 붉고 푸른 불빛이 깨진 유리창 너머로 번갈아 스며들었다. 조직원들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슈퍼 안에는 쓰러진 주인과, 피 묻은 입술로 바닥에 엎어진 강현만 남아 있었다.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그의 어깨를 짓눌렀고, 팔을 뒤로 꺾었다. 차가운 금속이 손목을 파고들었다.철컥.그 소리는 이상하게 선명했다. 오래된 문이 닫히는 소리처럼, 무언가가 완전히 끝나는 소리처럼.강현은 끌려 나가며 고개를 들었다. 겨울 밤공기가 허파 깊숙이 박혔다. 가로등 불빛이 얼어붙은 아스팔트 위에 희멀건 원을 만들고 있었다. 그 안에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직은 깨끗하게 사라졌고, 남은 죄는 그의 손목에 채워져 있었다.호송차 뒷좌석에 밀려 앉는 순간, 강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창밖으로 겨울눈이 내렸다. 하얀 눈은 타이어 자국 위를 빠르게 덮었다. 더러워진 바닥도, 발자국도, 방금 전의 흔적도 잠깐은 깨끗해 보였다.구치소의 첫날 밤은 차가웠다. 회색 벽은 축축하게 식어 있었고, 얇은 담요에서는 오래된 먼지 냄새가 올라왔다. 강현은 벽을 마주한 채 앉아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손목에는 수갑 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다.어쩌다 여기까지 왔지.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숨이 가라앉고 온몸의 감각이 무뎌질 즈음, 복도 끝에서 쇠문이 끌리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누군가 잠깐 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늘 눅눅했다. 곰팡이 냄새와 오래 묵은 담배 연기가 벽지처럼 들러붙은, 시장통 뒤편의 사채 사무실. 강현이 손을 뻗어 두꺼운 철문을 밀자, 기름칠이 말라붙은 경첩이 날카롭게 울었다. 문틈 사이로 탁한 열기가 먼저 쏟아져 나왔다.“왔네, 서강현.”검붉은 패딩 조끼를 걸친 차기광이 가죽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주황색 조명 아래서 그의 눈이 강현의 얼굴에서부터 어깨, 손끝까지 천천히 훑고 내려갔다.“요즘 손끝이 굼뜨다며. 돈 받으러 다니는 놈 손이 그렇게 느려서야 쓰겠냐.” “죄송합니다.”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변명도, 분노의 기색도 없었다. 그 무색무취한 반응이 오히려 기광의 신경을 긁은 듯했다. 그는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짧게 웃었다.“넌 늘 그 말뿐이지.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알겠습니다.”옆에 있던 정만수가 강현의 뒷통수를 툭 쳤다.“저러다 언젠가 우리 팔아먹는 거 아닙니까.”옆에 있던 조직원 하나가 전표를 뒤적이며 피식거렸다. 강현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조용히 구석진 테이블 앞으로 걸어갔다. 전표와 구겨진 지폐들이 뒤엉킨 자리 앞에 서서 손을 움직였다.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지폐는 축축했고, 손끝마다 끈적한 기름때가 묻어났다. 역겨움조차 오래 버티면 일상이 되었다.“제대로 세. 할당 못 맞추면 네 손가락부터 세게 될 줄 알아.”강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고무줄로 지폐를 묶자 팽팽한 탄성이 손목을 툭 쳤다. 기광은 묶인 돈을 집어 들어 대충 무게를 가늠했다.“그래도 오늘은 모자라진 않았네.”그의 시선이 다시 강현에게 꽂혔다.“내일 3번가 슈퍼. 장부대로 받아 와. 또 울면 진열대 하나 엎고. 그래도 버티면 팔을 꺾어. 알아듣지?”“알겠습니다.”강현이 몸을 돌리자, 뒤에서 웃음이 따라붙었다.“난 저 새끼 눈이 싫어.”차기광의 목소리가 문 닫히기 직전까지 따라왔다.“독한 것도 아니고, 빈 것도 아니고. 꼭 아직 뭘 고르고 있는 사람 눈이야.”골목의 찬 공기가 얼굴을
통화를 마친 강현은 스마트폰을 책상 위로 밀어냈다. 탁, 짧은 마찰음이 대표실의 정적을 갈랐다. 이마를 짚은 손끝이 뜨거웠다.“이런 씨발.”낮게 새어 나온 욕설 뒤로 더는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설화를 보고 그 사람이 단번에 알아챘다고 했다. 눈이 닮았다고, 아주 오래전 잊었다고 믿은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고. 그 한마디가 기분 나쁘게 정확했다.강현은 유리창 앞으로 걸어갔다. 구두 소리가 서늘하게 울렸다. 통유리 너머의 도시는 한여름이었다. 얽히고설킨 빌딩 숲 아래로 무표정한 행인들의 어깨가 쉼 없이 흘러갔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버티고, 견디고, 또 흘러가고 있었다.오늘따라 그 모습이 유난히 거슬렸다. 나만 멈춰 서 있는 것 같은 기분. 가장 단단하게 봉인해 두었던 안쪽이 통째로 들켜 버린 듯한 불쾌감에 입안이 썼다.“돌아버리겠네, 진짜.”혼잣말이 유리창에 닿자마자 흩어졌다. 창틈으로 비스듬히 스며든 오후의 햇살 속에서 먼지들이 조용히 반짝였다. 따뜻해야 할 빛이었지만, 강현의 살결에 닿는 온기는 기분 나쁠 정도로 차가워 눈을 감았다.***그 빛 사이로 오래된 냄새가 먼저 돌아왔다. 기름 냄새, 젖은 행주 냄새, 좁은 식당 안에 눌어붙은 매캐한 연기 냄새. 그 위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고막을 긁었다.“아들, 그만하고 들어가 자.”물기 젖은 고무장갑이 물기를 끌고 테이블을 스치는 소리가 났다. 강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뚝뚝한 얼굴로 어머니 손에 들린 행주를 빼앗아 기름진 테이블을 거칠게 닦아낼 뿐이었다. 어머니의 손등은 퍼석했고, 굳은살은 손마디마다 층처럼 박혀 있었다.“숙제는 다 했어?” “예.” “거짓말하지 말고.” “저 못 믿어요? 서예린 여사님?” “아이고, 또 시작이네.”그렇게 말하면서도 어머니는 웃었다. 설거지통 앞에서는 거칠고 빠르던 손이, 강현의 뺨에 닿을 때만 유난히 조심스러워졌다.어머니는 늘 웃고 있었지만, 그 눈 깊은 곳에는 가끔 닿을 수 없는 어딘가가 남아 있었다. 강현은 묻지 않았다.
설화는 화면을 밀어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지금 끝났어?“네, 방금 나왔습니다.”— 별일은 없었고?“네. 지시하신 대로 가방만 내려놓고 나왔습니다.”설화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덧붙였다.“…그분이, 제가 어떤 사람의 눈을 닮았다고 하더군요.”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숨소리조차 낮게 가라앉았다. 강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침묵은 생각보다 길었다. 설화는 스마트폰을 귀에 댄 채 나무 그늘 아래 서 있었다. 담장 너머에서 잎이 흔들리는 소리만 작게 들렸다.— 수고했어.짧은 한마디가 늦게 도착했다. 더 묻지도, 설명하지도 않는 목소리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손끝에 힘이 풀렸다.“네.”통화가 끊겼다. 설화는 한참 동안 꺼진 화면을 내려다봤다. 그 한마디가 마음 어딘가를 건드렸다. 칭찬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짧고 사무적인 말투. 그런데도 오늘은 그 말이 싫지 않았다.설화는 화면을 조작해 메시지 보관함을 열었다. 오래된 메시지 아래쪽에 한 달 동안 감정 쓰레기처럼 남아 있던 기프티콘 하나.[STB 달콤한 디저트 세트 교환권]처음 받았을 때는 그냥 넘겼다. 발신자도 없는 쿠폰 하나가 불쾌했고, 동시에 무서웠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그걸 써도 될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아닌 하루에 작은 구멍 하나를 내고 싶었다.설화는 지도 앱을 켜고 가장 가까운 S매장을 찾았다. 신호등 앞에 멈춰 선 채 화면을 내려다보니, 유효기간과 교환처가 초록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여름빛은 아직도 강했고, 아스팔트 위로 올라오는 열기 때문에 공기가 묘하게 눅눅했다. 바람이 살짝 불어왔지만 금세 지나가 버렸고, 블라우스 소매 끝이 손목을 스칠 때마다 땀기 어린 피부가 잠깐씩 드러났다.매장 앞에 도착하자 유리창 너머로 익숙한 초록빛 로고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바깥의 무더운 공기가 잘려 나가고 서늘한 냉기가 피부를 감쌌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은 차가웠고, 그 뒤를 따라 볶은 원두의 쌉쌀한 향이 천천히 번졌다. 안쪽에서는 음악
다음 날 저녁, 설화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샤워를 마친 설화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감싸 쥔 채 냉장고 문을 열었다. 차가운 생수를 들이키는 동안에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물기가 서늘하게 식어 갔다. 밤은 깊었고, 오래된 빌라 안은 지나치게 고요했다.딩동. 딩동.정적을 깨고 현관 초인종이 두 번 울렸다. 설화는 마시던 물병을 내려놓고 그대로 멈춰 섰다. 잠시 망설임 끝에 문을 살짝 열어 밖을 확인한 뒤, 천천히 잠금장치를 풀었다.문 앞에는 한두 번 본 적 있는 미래드림 직원이 서 있었다. 단정한 차림으로, 손에는 지퍼를 끝까지 잠근 검은색 보스턴백이 들려 있었다. 설화는 그걸 보는 순간, 말보다 먼저 무게부터 느꼈다.“대표님께서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남자는 짧게 말하고 주소가 적힌 메모지 한 장을 내밀었다. 설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건네받았다. 손끝에 걸리는 묵직함에, 더 묻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았다.문이 닫힌 뒤에도 설화는 한동안 현관에 서 있었다. 보스턴백을 발치에 놓여 있었고, 메모지에는 삼청동 주소 하나가 반듯하게 적혀 있었다.어제는 말없이 와주더니, 오늘은 또 이런 식으로 나오네.설화는 낮게 헛웃음을 흘리고는, 가방을 한 번 내려다봤다. 손끝에 남은 묵직함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밤은 그렇게 지나갔다.현관에 남은 정적도, 마음 한구석에 걸린 찜찜함도 완전히 가시지 않은 채.다음 날 아침, 설화는 옷장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삼청동이라는 단어 하나가 이상하게 사람을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티셔츠를 꺼냈다가 넣고, 청바지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거울 앞에서 옷을 대어 보던 설화가 결국 작게 웃었다.“이젠 옷까지 신경 써야 하고.”혼잣말은 방 안에 낮게 떨어졌다. 옷장 안쪽에서 대학 시절에 입던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꺼냈다. 옷을 털자, 묵은 냄새와 먼지가 희미하게 일었다. 설화는 손바닥으로 천을 눌러 주름을 폈다.택시에 오른 뒤에는 창밖만 봤다. 메모지에 적힌 주소는 삼청동.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낯선 남자의 사무적인 목소리. 정중한 척했지만, 그 안에 숨기지 못한 냉랭함이 섞여 있었다. 설화는 허리를 들고 돌아서 남자를 올려다봤다. 서류가방을 든 남자가 슈트 차림 그대로 서 있었다. 딱 봐도 용건이 무엇인지 말해 주는 얼굴이었다."네, 맞는데요.“남자는 설화를 위아래로 훑어본 뒤 입안 볼을 혀로 밀었다.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가방에서 하얀 종이를 꺼내 설화 앞으로 내밀었다."내용증명입니다. 확인해 보시죠.“흰 종이 위에는 채무자 유설화라는 이름이 박혔고, 그 아래로 선명하게 찍힌 주식회사
경기도 외곽에 자리한 사설 장례식장은 한산했다. 빈소 안에는 향 냄새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조문객보다 빈 곳이 더 많았다. 한때는 아버지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어 안달 나던 사람들조차 아무도 없었다. 이름도 낯선 몇 명만이 어색한 얼굴로 다녀갔다. 설화는 영정 사진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사진 속 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생전에 집 안에서 쉽게 보여주지 않았던 얼굴이었다. 온화한 미소가 이상하게 낯설어서, 설화는 헛웃음만 나왔다. 이렇게 허무하게 갈 거면서. 이렇게 다 놓고 갈 거면서. 그동안 엄마와 나를 왜
일상적인 며칠이 지나갔다. 여름 햇살의 열기는 여전했고, 매미 소리도 여전히 귀가 따가울 만큼 울어댔다. 골목을 채운 낡은 빌라들, 담벼락 위로 엉켜 늘어진 전선, 쓰레기봉투 옆을 지나쳐가는 고양이까지. 어제와 다르지 않은 아침이었다. 다른 건 하나뿐이었다. 현관문이 거칠게 열리고, 낯선 사람들이 집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압수수색영장입니다. 협조해 주십시오." 낮고 딱딱한 목소리가 좁은 현관을 파고들었다. 설화는 처음에는 그 뜻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압수수색. 영장. 협조. 뉴스에서나 들었을 법한 단어들이, 갑자기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가 여름의 문턱을 먼저 넘어와 있었다. 인문관 계단은 오후 햇살을 오래 머금어 뜨끈했고, 문을 나서는 순간 에어컨의 냉기는 금세 뒤로 밀려났다. 잔디밭 위로 흘러가는 바람마저 미지근했다. "아… 더워. 진짜 여름 됐네." 설화는 손에 든 과제물을 부채처럼 파닥이며 인문관을 나섰다. 프린트 가장자리가 손바닥을 스칠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방금 전까지 강의실 안에서 교수님 목소리에 졸음 섞인 집중을 붙들고 있던 애들이 맞나 싶게 캠퍼스는 벌써 한껏 풀어진 분위기였다. 잔디밭에는 삼삼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