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경기도 외곽에 자리한 사설 장례식장은 한산했다.
빈소 안에는 향 냄새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조문객보다 빈 곳이 더 많았다. 한때는 아버지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어 안달 나던 사람들조차 아무도 없었다. 이름도 낯선 몇 명만이 어색한 얼굴로 다녀갔다. 설화는 영정 사진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사진 속 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생전에 집 안에서 쉽게 보여주지 않았던 얼굴이었다. 온화한 미소가 이상하게 낯설어서, 설화는 헛웃음만 나왔다. 이렇게 허무하게 갈 거면서. 이렇게 다 놓고 갈 거면서. 그동안 엄마와 나를 왜 그렇게 옥죄었을까. 목울대까지 삿된 욕설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빈소에서는 말할 수 없었다. 죽은 사람 앞에서 산 사람이 더 예의를 차려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모두가 침묵했다. 그 순간이 더욱 미치도록 숨이 막혀왔다. 그렇게 아버지는 끝내 가장이라는 자리마저 자신의 방식대로 정리하고 말았다. 하지만 진짜 지옥은 그 뒤에 찾아왔다. 집 앞으로 낯선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다음에는 문을 두드리고 소리가 거칠어졌다. 나중에는 초인종을 누르다 못해 현관문을 주먹으로 쳤다. 쾅. 쾅!! "안에 있는 거 압니다." "유병호 씨 가족 맞죠?" "돈 갚으셔야죠. 죽었다고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엄마는 점점 말수가 줄었다. 밥을 하지 않았고, 설화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밤, 엄마는 엄마라는 이름마저 지워버렸다. 작은 가방 하나만 들고, 밤도망치듯 집을 떠났다. 설화 하나만 이 지옥 같은 집에 남겨둔 채. 그날 밤 설화는 차가운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오래 참았던 슬픔이 한꺼번에 터져 숨이 모자라 몸이 들썩였고, 목 안쪽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진짜 거지 같다. 나만 버려졌어. 이 춥고 외로운 곳에, 나만. 온몸을 작게 웅크린 채 오래 울었다. 울다 지치면 숨을 몰아쉬었고, 다시 울음이 터졌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등을 두드려 주는 손도, 괜찮다고 말해 주는 목소리도 없었다. 그날 이후, 설화는 다니던 대학을 자퇴했다. 꿈도, 희망도, 청춘이라는 사치스러운 단어도 모두 접어두었다. 과제물 대신 근로계약서가 손에 들렸고, 강의실 대신 편의점과 고깃집, 카페 등을 전전했다. 살아야 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설화의 모든 것을 앗아간 지독한 한 해가 지나고, 잔인하게도 다시 여름이 찾아왔다. 기상청 예보처럼 비가 내렸다.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빗줄기가 거리를 흐릿하게 적셨고, 편의점 안의 낮은 LED 불빛 아래로 택시 헤드라이트가 번져 지나갔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손님이 내민 물건을 바코드에 찍고, 결제됐다는 말만 기계처럼 반복했다. 드르륵— 계산대를 타고 번져오는 진동에 설화는 슬쩍 주변을 살핀 뒤 스마트폰을 열었다. 액정 위로 떠오른 낯선 숫자 열 한자리. [착신: 미등록 번호] 익숙한 패턴이었다. 받아도 해결되지 않고, 받지 않으면 더 깊은 늪에 빠질 것 같은 정말 개 같은 상황이 일 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또 오늘은 몇 번째지. 이러다 진짜 어디론가 끌려가는 거 아닌가. 설화는 괜한 생각에 어이없는 웃음만 새어 나왔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일이나 하자. 시간이 조금 흐르고 손님이 뜸해지자, 설화는 한쪽에 쌓여 있던 물류 상자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정확히 도착하는 삼각김밥과 도시락 상자들. 점장은 늘 ‘상품 입고 및 진열’이라는 말로 부르지만, 결국은 물건 리스트를 맞춰 진열대부터 채우는 반복 노동일뿐이었다. 그런 일은 오히려 잡념을 지우기 좋았다. 바코드를 찍듯, 몸을 움직이면 불안도 잠깐은 뒤로 밀렸다. 설화는 젖은 거리에서 들려오는 빗소리와 매장 안에서 흐르는 음악 사이로 유통기한이 짧은 신선식품들을 하나씩 꺼내 진열대 앞쪽으로 밀어 넣었다. 빈칸이 채워질수록 액정 위에 떠 있던 그 열한 자리 숫자도 조금씩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 탓인지, 아니면 기분 탓인지, 매장 밖 유리창 너머에 누군가 서있는 것 같은 서늘한 느낌이 자꾸 스쳤다. 비 와서 예민한가 보네. 설화는 짧게 혀를 찼다. 바닥에 떨어진 삼각김밥을 주우려 허리를 숙이는 순간이었다. 자동문이 열리며 눅눅한 공기와 함께 젖은 구둣발 소리가 매장 바닥에 묵직하게 울렸다. “유설화 씨, 맞으시죠?”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늘 눅눅했다. 곰팡이 냄새와 오래 묵은 담배 연기가 벽지처럼 들러붙은, 시장통 뒤편의 사채 사무실. 강현이 손을 뻗어 두꺼운 철문을 밀자, 기름칠이 말라붙은 경첩이 날카롭게 울었다. 문틈 사이로 탁한 열기가 먼저 쏟아져 나왔다.“왔네, 서강현.”검붉은 패딩 조끼를 걸친 차기광이 가죽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주황색 조명 아래서 그의 눈이 강현의 얼굴에서부터 어깨, 손끝까지 천천히 훑고 내려갔다.“요즘 손끝이 굼뜨다며. 돈 받으러 다니는 놈 손이 그렇게 느려서야 쓰겠냐.” “죄송합니다.”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변명도, 분노의 기색도 없었다. 그 무색무취한 반응이 오히려 기광의 신경을 긁은 듯했다. 그는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짧게 웃었다.“넌 늘 그 말뿐이지.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알겠습니다.”옆에 있던 정만수가 강현의 뒷통수를 툭 쳤다.“저러다 언젠가 우리 팔아먹는 거 아닙니까.”옆에 있던 조직원 하나가 전표를 뒤적이며 피식거렸다. 강현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조용히 구석진 테이블 앞으로 걸어갔다. 전표와 구겨진 지폐들이 뒤엉킨 자리 앞에 서서 손을 움직였다.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지폐는 축축했고, 손끝마다 끈적한 기름때가 묻어났다. 역겨움조차 오래 버티면 일상이 되었다.“제대로 세. 할당 못 맞추면 네 손가락부터 세게 될 줄 알아.”강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고무줄로 지폐를 묶자 팽팽한 탄성이 손목을 툭 쳤다. 기광은 묶인 돈을 집어 들어 대충 무게를 가늠했다.“그래도 오늘은 모자라진 않았네.”그의 시선이 다시 강현에게 꽂혔다.“내일 3번가 슈퍼. 장부대로 받아 와. 또 울면 진열대 하나 엎고. 그래도 버티면 팔을 꺾어. 알아듣지?”“알겠습니다.”강현이 몸을 돌리자, 뒤에서 웃음이 따라붙었다.“난 저 새끼 눈이 싫어.”차기광의 목소리가 문 닫히기 직전까지 따라왔다.“독한 것도 아니고, 빈 것도 아니고. 꼭 아직 뭘 고르고 있는 사람 눈이야.”골목의 찬 공기가 얼굴을
통화를 마친 강현은 스마트폰을 책상 위로 밀어냈다. 탁, 짧은 마찰음이 대표실의 정적을 갈랐다. 이마를 짚은 손끝이 뜨거웠다.“이런 씨발.”낮게 새어 나온 욕설 뒤로 더는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설화를 보고 그 사람이 단번에 알아챘다고 했다. 눈이 닮았다고, 아주 오래전 잊었다고 믿은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고. 그 한마디가 기분 나쁘게 정확했다.강현은 유리창 앞으로 걸어갔다. 구두 소리가 서늘하게 울렸다. 통유리 너머의 도시는 한여름이었다. 얽히고설킨 빌딩 숲 아래로 무표정한 행인들의 어깨가 쉼 없이 흘러갔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버티고, 견디고, 또 흘러가고 있었다.오늘따라 그 모습이 유난히 거슬렸다. 나만 멈춰 서 있는 것 같은 기분. 가장 단단하게 봉인해 두었던 안쪽이 통째로 들켜 버린 듯한 불쾌감에 입안이 썼다.“돌아버리겠네, 진짜.”혼잣말이 유리창에 닿자마자 흩어졌다. 창틈으로 비스듬히 스며든 오후의 햇살 속에서 먼지들이 조용히 반짝였다. 따뜻해야 할 빛이었지만, 강현의 살결에 닿는 온기는 기분 나쁠 정도로 차가워 눈을 감았다.***그 빛 사이로 오래된 냄새가 먼저 돌아왔다. 기름 냄새, 젖은 행주 냄새, 좁은 식당 안에 눌어붙은 매캐한 연기 냄새. 그 위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고막을 긁었다.“아들, 그만하고 들어가 자.”물기 젖은 고무장갑이 물기를 끌고 테이블을 스치는 소리가 났다. 강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뚝뚝한 얼굴로 어머니 손에 들린 행주를 빼앗아 기름진 테이블을 거칠게 닦아낼 뿐이었다. 어머니의 손등은 퍼석했고, 굳은살은 손마디마다 층처럼 박혀 있었다.“숙제는 다 했어?” “예.” “거짓말하지 말고.” “저 못 믿어요? 서예린 여사님?” “아이고, 또 시작이네.”그렇게 말하면서도 어머니는 웃었다. 설거지통 앞에서는 거칠고 빠르던 손이, 강현의 뺨에 닿을 때만 유난히 조심스러워졌다.어머니는 늘 웃고 있었지만, 그 눈 깊은 곳에는 가끔 닿을 수 없는 어딘가가 남아 있었다. 강현은 묻지 않았다.
설화는 화면을 밀어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지금 끝났어?“네, 방금 나왔습니다.”— 별일은 없었고?“네. 지시하신 대로 가방만 내려놓고 나왔습니다.”설화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덧붙였다.“…그분이, 제가 어떤 사람의 눈을 닮았다고 하더군요.”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숨소리조차 낮게 가라앉았다. 강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침묵은 생각보다 길었다. 설화는 스마트폰을 귀에 댄 채 나무 그늘 아래 서 있었다. 담장 너머에서 잎이 흔들리는 소리만 작게 들렸다.— 수고했어.짧은 한마디가 늦게 도착했다. 더 묻지도, 설명하지도 않는 목소리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손끝에 힘이 풀렸다.“네.”통화가 끊겼다. 설화는 한참 동안 꺼진 화면을 내려다봤다. 그 한마디가 마음 어딘가를 건드렸다. 칭찬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짧고 사무적인 말투. 그런데도 오늘은 그 말이 싫지 않았다.설화는 화면을 조작해 메시지 보관함을 열었다. 오래된 메시지 아래쪽에 한 달 동안 감정 쓰레기처럼 남아 있던 기프티콘 하나.[STB 달콤한 디저트 세트 교환권]처음 받았을 때는 그냥 넘겼다. 발신자도 없는 쿠폰 하나가 불쾌했고, 동시에 무서웠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그걸 써도 될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아닌 하루에 작은 구멍 하나를 내고 싶었다.설화는 지도 앱을 켜고 가장 가까운 S매장을 찾았다. 신호등 앞에 멈춰 선 채 화면을 내려다보니, 유효기간과 교환처가 초록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여름빛은 아직도 강했고, 아스팔트 위로 올라오는 열기 때문에 공기가 묘하게 눅눅했다. 바람이 살짝 불어왔지만 금세 지나가 버렸고, 블라우스 소매 끝이 손목을 스칠 때마다 땀기 어린 피부가 잠깐씩 드러났다.매장 앞에 도착하자 유리창 너머로 익숙한 초록빛 로고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바깥의 무더운 공기가 잘려 나가고 서늘한 냉기가 피부를 감쌌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은 차가웠고, 그 뒤를 따라 볶은 원두의 쌉쌀한 향이 천천히 번졌다. 안쪽에서는 음악
다음 날 저녁, 설화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샤워를 마친 설화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감싸 쥔 채 냉장고 문을 열었다. 차가운 생수를 들이키는 동안에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물기가 서늘하게 식어 갔다. 밤은 깊었고, 오래된 빌라 안은 지나치게 고요했다.딩동. 딩동.정적을 깨고 현관 초인종이 두 번 울렸다. 설화는 마시던 물병을 내려놓고 그대로 멈춰 섰다. 잠시 망설임 끝에 문을 살짝 열어 밖을 확인한 뒤, 천천히 잠금장치를 풀었다.문 앞에는 한두 번 본 적 있는 미래드림 직원이 서 있었다. 단정한 차림으로, 손에는 지퍼를 끝까지 잠근 검은색 보스턴백이 들려 있었다. 설화는 그걸 보는 순간, 말보다 먼저 무게부터 느꼈다.“대표님께서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남자는 짧게 말하고 주소가 적힌 메모지 한 장을 내밀었다. 설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건네받았다. 손끝에 걸리는 묵직함에, 더 묻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았다.문이 닫힌 뒤에도 설화는 한동안 현관에 서 있었다. 보스턴백을 발치에 놓여 있었고, 메모지에는 삼청동 주소 하나가 반듯하게 적혀 있었다.어제는 말없이 와주더니, 오늘은 또 이런 식으로 나오네.설화는 낮게 헛웃음을 흘리고는, 가방을 한 번 내려다봤다. 손끝에 남은 묵직함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밤은 그렇게 지나갔다.현관에 남은 정적도, 마음 한구석에 걸린 찜찜함도 완전히 가시지 않은 채.다음 날 아침, 설화는 옷장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삼청동이라는 단어 하나가 이상하게 사람을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티셔츠를 꺼냈다가 넣고, 청바지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거울 앞에서 옷을 대어 보던 설화가 결국 작게 웃었다.“이젠 옷까지 신경 써야 하고.”혼잣말은 방 안에 낮게 떨어졌다. 옷장 안쪽에서 대학 시절에 입던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꺼냈다. 옷을 털자, 묵은 냄새와 먼지가 희미하게 일었다. 설화는 손바닥으로 천을 눌러 주름을 폈다.택시에 오른 뒤에는 창밖만 봤다. 메모지에 적힌 주소는 삼청동.
신호음이 이어지는 동안 설화는 테이블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작은 진동이 손끝에서 어깨까지 번졌다. 술기운 탓인지, 기다림 탓인지 속이 울렁거렸다.한참 뒤, 낮고 느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대표님… 어디세요?”설화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혀끝에 술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흔들리는 걸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왜. “그냥… 시간 되시면, 저랑 술 한잔, 하실래요?”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거절도 허락도 아닌 침묵이었다. 설화는 그 침묵 속에서 숨을 삼켰다. 손가락이 휴대전화 모서리를 더 세게 붙잡았다.— 거기 어디야.마침내 들려온 대답은 짧고 낮았다. 설화는 그제야 눈을 감았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여기, 고깃집 바로 옆 포장마차예요.” — 끊어.전화는 그렇게 끝났다. 귓가에는 그의 목소리만 희미하게 남았다. 설화는 헛웃음을 삼키며 잔에 남은 소주를 한 번에 털어 넣었다.과연 올까.나 같은 전화 한 통에 움직일 사람이었나.기대와 체념이 뜨거운 공기 속에 섞였다. 우동은 젓가락에 한 번 건드려진 채 식어 가고 있었다. 누군가 포장마차 입구를 지나갈 때마다 설화는 고개를 들었다. 대부분은 취객이거나 길을 묻는 사람이었다.기다린다는 감정이 얼마나 비루한지, 설화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은 그 비루함조차 필요했다. 누군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장면 하나가 절실했다.테이블이 하나둘 비고, 포장마차 안이 조금 한산해질 무렵이었다. 설화는 잔을 내려다본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때 밤공기를 맞으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회색 셔츠에 재킷을 걸친 남자였다. 큰 키, 넓은 어깨, 한 손에 무심히 쥔 자동차 키. 서강현이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좁은 공간의 공기가 달라졌다. 떠들던 사람들의 시선이 짧게 그에게 닿았다가 흩어졌다.시원한 머스크 향 사이로 담배 냄새가 희미하게 스쳤다. 강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설화 맞은편 의자를 빼고 앉았다. 설화는 그 움직임을 멍하니 좇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설화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여자가 서 있었다. 낡은 가방끈을 두 손으로 움켜쥔 채, 설화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1년 반 전보다 훨씬 야위고 초라해진 얼굴이었다. 낯선 듯 익숙한 그 모습에, 오래 묻어 두었던 기억이 서늘하게 들춰졌다.엄마였다.여자는 한발 다가오려다 멈췄다. 설화가 물러선 만큼 골목 한가운데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졌다. 예전엔 그 선을 넘어서 엄마를 붙잡고 싶었다. 지금은 다시는 넘고 싶지 않았다.지옥 같던 빚쟁이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같이 살자고 매달리던 딸의 손을 뿌리치고, 야반도주하듯 사라진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1년 반 만에 다시 나타나 제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잘 지내니…….”설화는 입술을 다물었다. 대꾸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표정 없는 얼굴로 서 있는 딸을 보며 여자는 마른 입술을 짓씹었다.“우리 딸, 이쁘게 잘 자랐네.”그 말에 설화의 얼굴에서 남아 있던 온기가 빠졌다. 갑자기 나타나서 내뱉는 첫마디가 고작 저것이라니. 미안함도 염치도 없는 안부가 골목 안에 얄팍하게 걸렸다.침묵이 길어지자, 여자의 손이 가방끈을 더 세게 쥐었다.“설화야, 내가 지금 좀 많이 아파. 그래서 말인데…… 병원비가 조금 필요해서.” “…….” “진짜 갈 곳이 없어서 그래. 엄마가 미안해.”기어이 조소 섞인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분노나 슬픔이란 단어로는 형언할 수 없는, 이 잔인한 현실에 대한 순수한 경멸이었다. 설화는 어깨를 잘게 떨며 웃다가, 이내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눈앞의 여자를 똑바로 쏘아보았다.“어쩌죠. 내가 돈이 어디 있다고.” “설화야, 그래도 네가 젊으니까 일해서…….” “혼자 살겠다고 그 빚더미에 딸년 던져놓고 도망갈 땐 언제고. 이제 와 병원비요?”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히려 골목 안에 또렷하게 박혔다. 여자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그때 엄마만 아팠어? 아빠 죽고 매일 같이 찾아오는 빚쟁이들한테 시달리면서, 나도 매일 밤 죽고 싶었어. 매일 밤
축 늘어진 설화를 품에 안은 채, 강현은 빗속을 가로질렀다. 걸음은 평소보다 조금 느렸다. 의식 없는 몸 하나쯤 옮기는 일에 버거움을 느낄 남자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품 안에 닿은 체온이 신경을 거슬렀다. 그런데도 그 작고 힘없는 무게가 불쾌할 만큼 선명하게 남았다.강현은 설화를 조수석에 눕힌 뒤 안전벨트를 매어 주었다. 벨트가 가느다란 몸 위로 걸리는 순간,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마치 그 멈칫거림조차 허락할 수 없다는 듯 그는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 뒷좌석의 재킷을 집어 들었다.축축하게 젖은 상체 위로 재킷을 덮어 주는
설화는 다리 위에 멍하니 서 있었다. 빗방울이 머리카락을 타고 목덜미 아래로 축축하게 흘러내렸다. 손끝은 점점 차가워지고, 온몸이 젖어들수록 오한이 몸을 감싸 안았다. 가로등 불빛마저 거센 빗속에서 흐릿하게 번져 눈앞을 어지럽혔다.그 순간, 머리 위로 툭— 소리와 함께 암전처럼 검은 우산이 펼쳐졌다."그래서… 여기서 끝낼 생각이야?"낯설지만 낮고 묵직하게 깔리는 남자의 목소리. 설화는 무거워진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리며 천천히 남자를 응시했다.우산 아래 서 있는 남자는 빗물에 젖은 검은 셔츠 사이로 단단한 어깨를 드러낸 채
밖으로 나오자 낮의 열기는 간데없이 습하고 차가운 밤공기가 훅 끼쳐왔다. 오늘따라 유독 부치는 몸에 남은 것은 뼈마디를 파고드는 피로와 공허함뿐이었다.조금만 더. 진짜 조금만 어떻게 버티면…….그렇게 되뇌면서도, 정작 버티고 난 끝에 자신에게 뭐가 남아 있을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텅 빈 미래를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툭 꺼져 내리듯 아팠다.가방끈이 젖은 어깨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 무게보다 마음 한구석에 뚫린 구멍이 더 무겁고 저릿하게 가라앉았다.어느새 멈추었던 비가 다시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비 오는 거리를 걷고 또 걸어, 마침내 목적지인 고깃집 앞에 도착했다. 설화는 낡아빠진 우산을 접고, 눅눅해진 옷을 추슬렀다. 기름진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후끈한 열기와 고기 냄새, 연기가 한꺼번에 얼굴을 덮쳤다.사장님이 설화를 보고 눈짓으로 인사했다. 가게 안은 이미 손님들로 북적였고, 빈 테이블 위에는 아직 치우지 못한 굳은 고기와 빈 소주병, 흩어진 쌈 채소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불판을 들고 움직이던 지원 언니가 설화를 보자 장난스럽게 볼을 한 번 잡아당기며 피식 웃었다."왔어? 오늘따라 손님 오지게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