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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빚만 남기고

Author: 이레나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28 11:03:13

​경기도 외곽에 자리한 사설 장례식장은 한산했다.

​빈소 안에는 향 냄새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조문객보다 빈 곳이 더 많았다. 한때는 아버지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어 안달 나던 사람들조차 아무도 없었다. 이름도 낯선 몇 명만이 어색한 얼굴로 다녀갔다.

​설화는 영정 사진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사진 속 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생전에 집 안에서 쉽게 보여주지 않았던 얼굴이었다. 온화한 미소가 이상하게 낯설어서, 설화는 헛웃음만 나왔다.

​이렇게 허무하게 갈 거면서.

이렇게 다 놓고 갈 거면서.

그동안 엄마와 나를 왜 그렇게 옥죄었을까.

​목울대까지 삿된 욕설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빈소에서는 말할 수 없었다. 죽은 사람 앞에서 산 사람이 더 예의를 차려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모두가 침묵했다. 그 순간이 더욱 미치도록 숨이 막혀왔다.

​그렇게 아버지는 끝내 가장이라는 자리마저 자신의 방식대로 정리하고 말았다.

​하지만 진짜 지옥은 그 뒤에 찾아왔다. 집 앞으로 낯선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다음에는 문을 두드리고 소리가 거칠어졌다. 나중에는 초인종을 누르다 못해 현관문을 주먹으로 쳤다.

​쾅. 쾅!!

​"안에 있는 거 압니다."

"유병호 씨 가족 맞죠?"

"돈 갚으셔야죠. 죽었다고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엄마는 점점 말수가 줄었다. 밥을 하지 않았고, 설화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밤, 엄마는 엄마라는 이름마저 지워버렸다.

​작은 가방 하나만 들고, 밤도망치듯 집을 떠났다. 설화 하나만 이 지옥 같은 집에 남겨둔 채.

​그날 밤 설화는 차가운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오래 참았던 슬픔이 한꺼번에 터져 숨이 모자라 몸이 들썩였고, 목 안쪽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진짜 거지 같다.

나만 버려졌어.

이 춥고 외로운 곳에, 나만.

​온몸을 작게 웅크린 채 오래 울었다. 울다 지치면 숨을 몰아쉬었고, 다시 울음이 터졌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등을 두드려 주는 손도, 괜찮다고 말해 주는 목소리도 없었다.

​그날 이후, 설화는 다니던 대학을 자퇴했다.

​꿈도, 희망도, 청춘이라는 사치스러운 단어도 모두 접어두었다. 과제물 대신 근로계약서가 손에 들렸고, 강의실 대신 편의점과 고깃집, 카페 등을 전전했다.

​살아야 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설화의 모든 것을 앗아간 지독한 한 해가 지나고, 잔인하게도 다시 여름이 찾아왔다.

​기상청 예보처럼 비가 내렸다.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빗줄기가 거리를 흐릿하게 적셨고, 편의점 안의 낮은 LED 불빛 아래로 택시 헤드라이트가 번져 지나갔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손님이 내민 물건을 바코드에 찍고, 결제됐다는 말만 기계처럼 반복했다.

​드르륵—

​계산대를 타고 번져오는 진동에 설화는 슬쩍 주변을 살핀 뒤 스마트폰을 열었다. 액정 위로 떠오른 낯선 숫자 열 한자리.

​[착신: 미등록 번호]

​익숙한 패턴이었다. 받아도 해결되지 않고, 받지 않으면 더 깊은 늪에 빠질 것 같은 정말 개 같은 상황이 일 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또 오늘은 몇 번째지.

이러다 진짜 어디론가 끌려가는 거 아닌가.

​설화는 괜한 생각에 어이없는 웃음만 새어 나왔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일이나 하자.

​시간이 조금 흐르고 손님이 뜸해지자, 설화는 한쪽에 쌓여 있던 물류 상자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정확히 도착하는 삼각김밥과 도시락 상자들. 점장은 늘 ‘상품 입고 및 진열’이라는 말로 부르지만, 결국은 물건 리스트를 맞춰 진열대부터 채우는 반복 노동일뿐이었다.

​그런 일은 오히려 잡념을 지우기 좋았다. 바코드를 찍듯, 몸을 움직이면 불안도 잠깐은 뒤로 밀렸다.

​설화는 젖은 거리에서 들려오는 빗소리와 매장 안에서 흐르는 음악 사이로 유통기한이 짧은 신선식품들을 하나씩 꺼내 진열대 앞쪽으로 밀어 넣었다. 빈칸이 채워질수록 액정 위에 떠 있던 그 열한 자리 숫자도 조금씩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 탓인지, 아니면 기분 탓인지, 매장 밖 유리창 너머에 누군가 서있는 것 같은 서늘한 느낌이 자꾸 스쳤다.

​비 와서 예민한가 보네.

​설화는 짧게 혀를 찼다. 바닥에 떨어진 삼각김밥을 주우려 허리를 숙이는 순간이었다. 자동문이 열리며 눅눅한 공기와 함께 젖은 구둣발 소리가 매장 바닥에 묵직하게 울렸다.

​“유설화 씨, 맞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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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는 너를 보고 싶었다.   57화 텅 빈 액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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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는 너를 보고 싶었다.   56화 그늘에서 피어난 웃음

    팽팽하게 이어지던 하루는 오후 여섯 시가 지나서야 느슨해졌다.설화는 직원 대기실에서 땀과 먼지가 밴 유니폼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거울 속 얼굴에는 피로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가방에서 립밤을 꺼내 입술 위에 덧바르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했다.누군가와 저녁을 먹기 위해 퇴근 준비를 하는 일이 낯설었다. 업무도 거래도 아닌 약속이었다.매니저와 동료들에게 인사를 건넨 뒤 정문으로 나가자, 난간에 기대선 진우가 보였다. 설화를 발견한 그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오래 기다렸어요?” “여섯 시라더니 삼십 분은 더 지난 것 같은데요.”진우의 투정 섞인 말투에 설화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죄송해요. 마감 정리가 늦어져서요. 뭐 드실래요?” “일단 걸어요. 배고픈 사람이 메뉴 고르는 게 제일 빠르니까.”진우가 앞장섰고, 설화는 그의 옆에 맞춰 걸었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하루 종일 달아올랐던 얼굴을 식혀 줬다. 백화점 안의 기계음과 안내 방송이 멀어질수록 발걸음도 조금씩 가벼워졌다.“저는 검사님처럼 지갑이 두둑하지 않아서 비싼 곳은 안 돼요.” “제가 그렇게 속물처럼 보입니까?”진우가 웃으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저도 평범한 사람입니다. 오늘은 삼겹살 먹고 싶네요.”삼겹살이라는 말에 설화의 걸음이 잠깐 느려졌다. 불판 앞에 서서 손님들의 고기를 뒤집고, 기름 냄새가 밴 옷으로 집에 돌아가던 날들이 떠올랐다. 진우는 그 변화를 알아차리고도 모른 척 계속 걸었다.“근처에 아는 곳 있으세요? 저는 이 동네를 잘 몰라서요.” “자주 가는 데가 있어요. 분위기는 기대하지 말고.”백화점 뒤편 골목으로 들어서자 낡은 네온 간판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진우가 멈춘 곳은 ‘생삼겹살 전문’이라는 환한 간판이 걸린 식당 앞이었다.문을 열자 고기 굽는 냄새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설화는 잠시 입구에 서 있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냄새였지만, 오늘은 앞치마를 두르지 않아도 됐다.직원이 물병과 물수건을 내려놓으며 진우

  • 우는 너를 보고 싶었다.   10화 세상은 언제나 문을 닫았다.

    뭐가 이렇게 불편한 건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여자 하나가 방 안에 잠들어 있을 뿐인데, 그런데도 손끝에 닿았던 설화의 부드러운 살결과 입술의 촉감이 기어이 잔상처럼 달라붙었다.아주 오래전 닫아 둔 문 안쪽에서, 누군가 조용히 손잡이를 건드리는 것처럼.비가 내렸다. 회색 하늘 아래, 굵은 빗방울이 낡은 식당 문을 쉼 없이 때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우산을 쓰고 바쁘게 스쳐 지나갔다. 누구도 그 작은 식당 앞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열 평 남짓한 식당은 젊은 여자와 어린 소년이 몸을 누일 수 있는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엄

  • 우는 너를 보고 싶었다.   9화 닫힌 문 안쪽에서

    설화가 차가운 기운을 느꼈는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더 둥글게 웅크렸다. 강현의 커다란 재킷 아래로 가냘픈 어깨가 파묻히고, 젖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뺨 위로 흘러내렸다.강현은 그 위태로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강제로 시선을 뚝 끊어냈다. 그런데도 의지는 배신하듯 다시 고개가 돌아갔다.확인하듯, 아니면 상황을 부정하려는 사람처럼.……이건 아니야.그는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 눈물처럼 붙어 있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걷어냈다. 닿는 순간마다 감각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고, 단단히 손끝에 들어가 있던 통제력은 허무하

  • 우는 너를 보고 싶었다.   8화 비에 젖은 여자

    축 늘어진 설화를 품에 안은 채, 강현은 빗속을 가로질렀다. 걸음은 평소보다 조금 느렸다. 의식 없는 몸 하나쯤 옮기는 일에 버거움을 느낄 남자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품 안에 닿은 체온이 신경을 거슬렀다. 그런데도 그 작고 힘없는 무게가 불쾌할 만큼 선명하게 남았다.강현은 설화를 조수석에 눕힌 뒤 안전벨트를 매어 주었다. 벨트가 가느다란 몸 위로 걸리는 순간,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마치 그 멈칫거림조차 허락할 수 없다는 듯 그는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 뒷좌석의 재킷을 집어 들었다.축축하게 젖은 상체 위로 재킷을 덮어 주는

  • 우는 너를 보고 싶었다.   7화 비 속으로 걸어온 남자

    설화는 다리 위에 멍하니 서 있었다. 빗방울이 머리카락을 타고 목덜미 아래로 축축하게 흘러내렸다. 손끝은 점점 차가워지고, 온몸이 젖어들수록 오한이 몸을 감싸 안았다. 가로등 불빛마저 거센 빗속에서 흐릿하게 번져 눈앞을 어지럽혔다.그 순간, 머리 위로 툭— 소리와 함께 암전처럼 검은 우산이 펼쳐졌다."그래서… 여기서 끝낼 생각이야?"낯설지만 낮고 묵직하게 깔리는 남자의 목소리. 설화는 무거워진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리며 천천히 남자를 응시했다.우산 아래 서 있는 남자는 빗물에 젖은 검은 셔츠 사이로 단단한 어깨를 드러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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