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등 뒤에서 들려오는 낯선 남자의 사무적인 목소리. 정중한 척했지만, 그 안에 숨기지 못한 냉랭함이 섞여 있었다. 설화는 허리를 들고 돌아서 남자를 올려다봤다. 서류가방을 든 남자가 슈트 차림 그대로 서 있었다. 딱 봐도 용건이 무엇인지 말해 주는 얼굴이었다.
"네, 맞는데요.“
남자는 설화를 위아래로 훑어본 뒤 입안 볼을 혀로 밀었다.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가방에서 하얀 종이를 꺼내 설화 앞으로 내밀었다.
"내용증명입니다. 확인해 보시죠.“
흰 종이 위에는 채무자 유설화라는 이름이 박혔고, 그 아래로 선명하게 찍힌 주식회사 미래드림이라는 네 글자가 유난히 눈에 남았다. 남자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렇게 전화랑 문자를 피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닌 거 아실 텐데, 왜 자꾸 이러실까?“
아빠가 남긴 빚 때문이었다. 이들이 징그럽게 찾아오는 이유가 매번 같았다.
또 왔네. 진짜 지겹다. 내가 그 빚을 만든 것도 아닌데, 왜 전부 나한테 오는 거야.
설화는 남자가 내민 종이를 받지 않은 채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손끝에는 방금 전까지 만지던 삼각김밥 비닐의 감촉은 차갑게 남아있었지만, 매장 안 공기는 탁하고 숨이 막혔다.
"그렇다고 이렇게 일하는 곳까지 찾아오시면…….“
설화가 말을 잇기도 전에 헛웃음 소리와 한껏 높아진 고압적인 음색이 설화의 말허리를 툭 끊어냈다.
"저도 한가한 사람 아니에요. 그러니까 보낼 때 바로바로 받으시던가. 쯧.“
남자는 서류를 내려놓듯 건네고는 가방을 덮었다. 설화를 경멸이 섞인 눈빛으로 한 번 더 훑어본 뒤, 한숨을 내쉬고 돌아섰다. 구둣발 소리가 멀어지고 남자가 나갔다. 설화는 손에 든 서류를 움켜쥐었다.
바스러지는 종이. 구겨진 인생….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닌 걸 알면서도, 빚은 늘 숨바꼭질하듯 설화의 일터를 찾아왔다. 숨으면 더 깊이 쫓아오고, 버티면 더 거칠게 들이밀었다.
남자의 경멸 섞인 시선이 수치스러웠다. 그리고 그 수치심은, 언제나처럼 설화의 하루를 조용히 망가뜨리고 있었다.
편의점 안 손님들 몇몇도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계산대를 힐끔거리며 시선을 피했고, 커플들은 물건을 고르는 척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낮은 수군거림이 LED 불빛 아래로 얇게 번졌다.
설화는 그 소리들이 전부 자신을 향하는 것 같아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점장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미안함과 불편함이 뒤섞인 얼굴로, 그는 설화를 표정을 살피며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결국 점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설화 씨… 오늘까지만 하자. 일한 건 내일까지 입금해 줄게. 힘내고.“
순간, 가슴 한쪽이 구멍 난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익숙한 말이었는데도, 마지막 남은 일상의 버팀목마저 무너지는 기분은 매번 새로웠다. 애써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입꼬리는 올라오지 않았다.
"네, 알겠습니다.“
점장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돌아섰다. 설화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손에 쥔 서류만 만지작거렸다.
또 알바 검색이라도 뒤져야 하나.
편의점 매장에 울리는 음악 소리와 포스기 소리만이 현실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설화는 마지막 정리를 마친 뒤, 점장에게 인사하고 편의점 밖으로 나왔다.
여름비가 쏟아지는 오후 거리는 온통 질척거렸다. 설화는 편의점 처마 밑에 잠시 멈춰 선 채, 하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위로 차가운 빗방울이 툭툭 떨어져 고였다.
"비는 왜 이리 내리는지.“
마치 제 마음속에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같아서, 설화는 손바닥에 고인 빗물을 힘주어 꽉 쥐었다가 이내 아래로 떨어뜨렸다.
축축하게 젖어 드는 옷자락보다 당장 내일부터가 더 아득했다. 설화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밀어 올렸다. 액정 불빛이 설화의 얼굴을 비추었다.
고깃집 아르바이트 단체 채팅방에 사장님이 남긴 짧은 메시지가 새로 올라와 있었다. 일 년간 이곳도 조금 전처럼 독촉으로 다녀갔지만, 사장님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다.
[설화야, 오늘도 11시까지 마감 부탁한다.]
설화는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한숨을 겨우 삼킨 뒤, 다시 무거워진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편의점의 밝은 불빛이 멀어질수록, 우산을 든 손은 한층 더 차갑게 식어갔다.
오늘따라 걸어가는 길이 유독 길고 험하게 느껴졌다. 도로 위를 거칠게 지나가는 택시와 배달 오토바이가 웅덩이를 밟을 때마다, 사방으로 튄 물이 바지 끝을 사정없이 더럽혔다.
"…아, 진짜.“
작은 탄식과 함께 바지를 털어내며 찾은 고깃집 번화가는 비가 오는데도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
술집 앞에 모여 깔깔거리며 담배를 피우는 무리, 커다란 우산 하나를 같이 쓰고 다정하게 걸어가는 젊은 커플들. 그 활기찬 풍경이 설화에겐 낯설었다.
문득 길가 상점의 투명한 유리창에 모습이 비쳤다. 온 세상의 불행은 혼자 다 짊어진 듯, 생기를 잃고 색 바랜 얼굴. 설화는 지독하리만큼 초라한 스스로를 마주하자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낮게 읊조렸다.
"…참 못났네."
설화는 무심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티셔츠 하나만 걸친 다리 위로 서늘한 공기가 닿았다. 순간, 피부 위로 소름이 잘게 돋았다.이게 뭐야.원래 입고 있던 옷이 아니었다. 비에 젖어 무겁게 들러붙어 있던 낡은 티셔츠도, 축축한 청바지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지나치게 큰 흰 티셔츠 한 장이 어깨부터 허벅지 위까지 헐겁게 걸쳐져 있었다.낯선 옷. 아니, 낯선 남자의 옷.설화는 반사적으로 티셔츠 자락을 움켜쥐었다. 원단에서 희미한 향이 났다. 이 방에 배어 있는 차갑고 건조한 스킨 향. 어젯밤 희미한 의식 너머로 스쳤던, 남자의 품에서 나던 향이었다.누가 갈아입힌 거지.생각은 거기서 멈췄다. 더 나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머릿속은 이미 가장 불편한 가능성을 향해 기울고 있었다. 설화는 속으로 숨을 삼키며 급히 담요를 끌어올렸다. 손톱이 천을 파고들 만큼 세게 움켜쥐고 나서야, 간신히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이런 곳에 내가 왜…….불안이 발목부터 스며들었다. 낯선 침실, 지나치게 넓은 침대, 군더더기 없이 정리된 가구들. 어느 것 하나 자신 것이 아니었다. 설화는 한동안 침대 위에 굳어 있다가, 조심스럽게 발을 내렸다.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자, 집 안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난간 손잡이를 붙잡고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설화는 담요가 구명줄라도 되는 듯 몸에 바짝 감고 있었다.시야에 들어온 거실은 상상보다 훨씬 넓었다. 높은 천장, 반듯하게 놓인 가구들, 차갑게 빛나는 대리석 바닥. 통유리 너머 정원에는 밤새 내린 비가 아직 남아, 나뭇잎과 꽃잎 끝마다 투명한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설화는 저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세상 불공평하네……."그 순간, 뒤쪽에서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일어나셨습니까."놀란 설화가 고개를 돌렸다. 말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자세는 지나치게 단정했고, 시선은 예의 바르면서도 차가웠다."대표님께 방금 연락드렸습니다. 곧 오실 겁니다."대
엘리베이터 문이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유리문 안쪽에서는 이른 시간부터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공간 전체에 얇은 긴장과 업무의 열기가 깔려 있었지만, 강현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 공기는 한층 더 낮게 가라앉았다.직원들의 인사가 이어졌지만, 강현은 짧게 고개만 끄덕인 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곧장 복도 끝 회의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그의 구두 소리가 대리석 바닥 위로 규칙적으로 울렸다.회의실 문 앞에 잠시 멈춘 채 짧게 숨을 내쉬고 강현은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문이 열리자,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대표님."강현은 역시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무표정한 얼굴, 단정하게 정돈된 슈트, 흐트러짐 없는 걸음. 어젯밤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그는 상석에 앉아 테이블 위 서류를 넘겼다.“신흥물류 건은 어떻게 정리됐죠.” “이사님 쪽 정리는 끝났습니다. 하청 라인 조율만 남았습니다.” “내일까지 마무리하세요.”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 감정은 한 톨도 섞여 있지 않았다. 강현은 미지근해진 커피잔을 들어 입술만 적신 뒤,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쌉쌀한 맛이 입안에서 감돌았다.머릿속은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 아니, 철저하게 고요한 척을 연기하고 있었다. 창밖에서 아침 햇살이 유리창을 타고 매끄럽게 스며들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단 한 자락의 음영조차 비치지 않았다.이상하다. 이 정도의 숙취나 피로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밤을 새우고 병째 술을 비워내도 멀쩡히 거대한 투자 그룹의 판을 짜고 일을 처리해 온 사람이 자신이었다.그런데도 자꾸만 명치 끝이 거슬렸다. 독한 알코올 때문만은 아니었다.강현은 무심히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이유를 굳이 파고들 필요는 없었다. 생각의 자락을 여는 순간, 가슴 가장자리를 긁어대던 쓸데없는 이름 한 개가 기어이 머릿속을 통째로 점령해 버릴 테니까.그 여자 때문인가, 하는 의문조차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저 이
뭐가 이렇게 불편한 건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여자 하나가 방 안에 잠들어 있을 뿐인데, 그런데도 손끝에 닿았던 설화의 부드러운 살결과 입술의 촉감이 기어이 잔상처럼 달라붙었다.아주 오래전 닫아 둔 문 안쪽에서, 누군가 조용히 손잡이를 건드리는 것처럼.비가 내렸다. 회색 하늘 아래, 굵은 빗방울이 낡은 식당 문을 쉼 없이 때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우산을 쓰고 바쁘게 스쳐 지나갔다. 누구도 그 작은 식당 앞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열 평 남짓한 식당은 젊은 여자와 어린 소년이 몸을 누일 수 있는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엄마는 평생 단 한 번도 강현을 그 남자에게 데려간 적이 없었다. 자존심 때문이었고, 어쩌면 마지막까지 놓지 못한 품위일지도 몰랐다.하지만 그날은 달랐다.아홉 살의 강현이 학교에서 눈이 퉁퉁 부은 채 돌아온 날이었다. 작은 운동화는 흙탕물에 젖어 있었고, 책가방 끈을 움켜쥔 손가락 끝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울음을 참느라 턱 끝만 자꾸 떨렸다."엄마."아이가 겨우 입을 열었다."나도 아빠 있지?"엄마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무슨 뜻인지, 어린 강현은 다 알지 못했다. 다만 그날 학교에서 들었던 말들이 다시 목구멍을 긁고 올라왔다."애들이 나보고 없는 애라고 해."끝내 강현의 볼을 타고 눈물이 떨어졌다."근데 나…… 없는 애 아니잖아."그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울먹이던 아이의 손을, 엄마는 끝내 놓지 못했다.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여자는 낡은 우산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고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여기서 기다리면…… 아마 들어오라고 할 거야."엄마는 젖은 우산을 강현의 어깨 쪽으로 바짝 기울였다. 자신은 거의 비를 맞고 있으면서도, 아이가 젖는 것만은 막으려 애썼다.소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손가락은 자꾸 우산 손잡이에서 미끄러졌다. 차가운 빗물이 틈새로 스며들어 손등을 때렸고, 어깨는 이미 절반쯤 젖어 있었다. 엄마의 손도, 아이의 손도 조금씩 식어 갔다.얼마 뒤 문이
설화가 차가운 기운을 느꼈는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더 둥글게 웅크렸다. 강현의 커다란 재킷 아래로 가냘픈 어깨가 파묻히고, 젖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뺨 위로 흘러내렸다.강현은 그 위태로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강제로 시선을 뚝 끊어냈다. 그런데도 의지는 배신하듯 다시 고개가 돌아갔다.확인하듯, 아니면 상황을 부정하려는 사람처럼.……이건 아니야.그는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 눈물처럼 붙어 있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걷어냈다. 닿는 순간마다 감각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고, 단단히 손끝에 들어가 있던 통제력은 허무하게 풀려버렸다.강현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파와의 거리를 두는 것이 지금 이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처럼 느껴졌지만, 발걸음은 곧장 떨어지지 않았다. 한 박자 늦게 바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장식장 선반 위에 놓여 있던 싱글몰트 위스키 병을 꺼내 유리잔에 거칠게 따랐다. 커다란 원형 얼음이 잔바닥에 부딪혀 내려앉으며 쨍하는 파찰음을 낮고 맑게 울렸다. 그는 그 소리를 덮어버리듯 잔을 들어 단숨에 목구멍 속으로 삼켜버렸다.독한 술이 식도를 강하게 긁고 내려갔지만, 뜨거워진 속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 텁텁하고 거칠게 말라붙어 갈 뿐이었다.창밖의 빗소리 위로 재즈 선율이 낮게 감겨들었다.거실에는 낮은 조명과 술 냄새, 젖은 공기와 뒤섞여 무겁게 깔렸다. 강현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은빛 지포라이터를 꺼냈다. 틱, 짧은 금속음과 함께 불꽃이 일었고, 입술 사이로 길게 흘러나온 연기가 열어둔 거실 창문 틈으로 느리게 번져나갔다.흘끗 뒤를 돌아보니 소파 위 설화를 덮고 있던 재킷이 아래로 흘러내려 있었다. 그녀는 추운 줄도 모르고 수면 아래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연기가 눈앞에서 피어올랐다 사라지는 사이로, 그녀의 얼굴이 희미하게 겹쳐졌다. 고른 숨, 뺨에 드리운 머리카락, 웅크린 몸. 그 모든 것이 밤의 습기와 음악 속에 섞여 강현의 신경을 잡아당겼다.그는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위스키 잔을 가득 채워 단숨
축 늘어진 설화를 품에 안은 채, 강현은 빗속을 가로질렀다. 걸음은 평소보다 조금 느렸다. 의식 없는 몸 하나쯤 옮기는 일에 버거움을 느낄 남자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품 안에 닿은 체온이 신경을 거슬렀다. 그런데도 그 작고 힘없는 무게가 불쾌할 만큼 선명하게 남았다.강현은 설화를 조수석에 눕힌 뒤 안전벨트를 매어 주었다. 벨트가 가느다란 몸 위로 걸리는 순간,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마치 그 멈칫거림조차 허락할 수 없다는 듯 그는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 뒷좌석의 재킷을 집어 들었다.축축하게 젖은 상체 위로 재킷을 덮어 주는 손길에는 다정함보다 짜증에 가까운 조심성이 배어 있었다. 공조를 켜자 미지근한 바람이 차 안을 채웠다.그 바람에 그녀의 창백한 얼굴이 조금씩 풀리고, 물기 어린 속눈썹 끝이 잘게 흔들렸다.강현은 가죽 핸들을 강하게 쥔 채 한동안 차를 출발시키지 않았다. 와이퍼가 유리창을 격렬하게 긁어대는 소리만이 차 안의 정적을 깰 뿐이었다.유설화.그 이름 석 자가 자꾸만 단단하게 닫혀 있던 그의 의식 가장자리를 날카롭게 긁어대고 있었다. 강현은 낮게 혀를 차고는 신경질적으로 액셀을 밟았다. 검은색 세단이 빗길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저택의 외등이 쏟아지는 여름비로 얼룩진 마당 위로 희미하게 번져나가고 있었다. 강현은 차에서 설화를 다시 안아 들고 현관문을 지나 넓은 거실로 들어섰다.거실 소파 위에 눕히는 순간, 흠뻑 젖은 설화의 머리카락 끝에서 맺힌 작은 물방울들이 뚝, 뚝 소리를 내며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강현은 바닥에 번지는 물 자국을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젖은 이마를 쓸어 올리며 욕실로 향했다. 두껍고 마른 수건을 몇 장 들고 돌아온 그는 낮게 가라앉은 소파 곁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설화의 머리카락에 남은 차가운 물기를 조심스럽게 닦아내기 시작했다.푹신한 수건이 그녀의 이마와 뺨, 그리고 가늘게 떨리는 입가를 조심스레 지나갈 때마다, 강현의 단단한 미간은 조금씩 더 깊게 좁혀졌고 표정은 어둠 속으
설화는 다리 위에 멍하니 서 있었다. 빗방울이 머리카락을 타고 목덜미 아래로 축축하게 흘러내렸다. 손끝은 점점 차가워지고, 온몸이 젖어들수록 오한이 몸을 감싸 안았다. 가로등 불빛마저 거센 빗속에서 흐릿하게 번져 눈앞을 어지럽혔다.그 순간, 머리 위로 툭— 소리와 함께 암전처럼 검은 우산이 펼쳐졌다."그래서… 여기서 끝낼 생각이야?"낯설지만 낮고 묵직하게 깔리는 남자의 목소리. 설화는 무거워진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리며 천천히 남자를 응시했다.우산 아래 서 있는 남자는 빗물에 젖은 검은 셔츠 사이로 단단한 어깨를 드러낸 채 설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매를 걷어 올린 팔뚝 위로 빗물이 천천히 흐르고, 이마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눈빛만은 장대비 속에서도 유난히 또렷했다."나는 빚 안 갚고, 죽음으로 퉁 치려는 인간들을 제일 경멸해."'빚'이라는 단어가 귓가를 때리자, 설화는 떨리는 입술을 짓이기듯 꾹 다물었다. 아빠가 남긴 굴레가 결국 이곳까지 쫓아왔다는 절망감과 함께, 이 지독한 채권자들이 결국 사람을 붙여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설화는 빗물을 삼키며 조용히, 그러나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안 죽어요."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엉망으로 들러붙고 턱 끝을 타고 빗방울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전…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남자는 그런 설화의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 비웃음처럼 번진 입가. 하지만 그 냉정함 이면에는 자신조차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이 잠깐 스쳤다."그래? 약하지 않다며 호기를 부리는 것치고는, 지금 꼴이 말이 아니네." "신경 쓰지 마세요."잘게 떨리면서도 묘한 독기가 서린 설화의 목소리는 작지만 단단했다. 두 사람 사이를 세차게 메우는 빗소리 탓에, 순간적으로 세상의 모든 소음이 아득히 멀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남자는 우산을 살짝 기울이며 설화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커다란 검은 우산이 빗줄기를 가로막으며, 순식간에 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