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천문학적인 빚을 짊어진 권씨 가문은 차광 그룹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벌어들인 돈은 전부 은행 이자와 부채를 갚는 데 썼다.
워낙 사치에 길들여진 사람들이라 형편이 항상 빠듯했다. 결국 권희연은 여동생의 모든 비용을 부담했는데 이토록 배은망덕한 짓을 하리라 생각지도 못했다.
“이...!”
권지연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억울한 표정으로 눈물을 펑펑 흘렸다.
“그래봤자 형부 돈이지, 본인이 번 것도 아닌데 생색은!”
권혁재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 입 다물어.”
권지연은 오숙희의 품에 뛰어들었다.
“엄마!”
착하고 얌전한 작은딸이 태어난 이후로 오숙희는 둘째에게 더 많은 애정을 쏟았고 말썽 많은 권희연은 점점 더 눈에 거슬렸다.
오숙희는 안쓰러운 얼굴로 권지연을 끌어안고 고개를 돌리더니 버럭 화를 냈다.
“이제 손찌검까지 하는 거니? 우악스러운 꼬락서니 좀 봐. 어쩐지 이혼이나 당한다 했어. 내 몸에서 어떻게 너 같은 반항아가 나왔을까? 전에는 도피한다고 하지 않겠나 지금은 또...”
“그만! 이미 지나간 일은 왜 언급해?”
권혁재가 끼어들더니 권희연을 바라보았다.
“설마 나한테도 자격을 운운할 거니?”
권희연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부답했다.
권혁재가 눈살을 찌푸렸다.
“대답해. 승혁이가 진짜 이혼한대?”
“몰라요.”
권희연은 목이 메었다.
“지금 연락이 안 돼요.”
큰아버지 권정남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희연아, 절대 이혼하면 안 된다? 요즘 사업하기 얼마나 힘든 줄 알아? 그나마 차광 그룹 덕분에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황이야. 투자를 철회하는 순간 우리는 끝장이라니까?”
“권도 그룹이 파산하면 수천 명이 넘는 직원들이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어. 너희 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일궈온 기업인데 정녕 무너져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 거야? 게다가 너를 워낙 애지중지 키워서 모든 심혈을 쏟아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잖아. 남자친구랑 도피했을 때도 한밤중에 차를 몰고 널 찾으러 나섰다가 교통사고까지 당해 다리를 다친 거 벌써 잊었어? 그 후유증으로 비만 오면 지금도 쑤신다고 하네.”
거실에 덩그러니 서 있는 권희연은 어느덧 입안이 바짝 말랐다. 잔소리를 한참 동안 듣고 나서야 여태껏 물 한 잔 따라주는 사람조차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몸이 휘청거렸다. 권혁재가 서둘러 다가가서 부축하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앉아서 얘기하자.”
그제야 누군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권희연은 멍한 얼굴로 부축을 받아 소파 한가운데 앉았다. 곧이어 권혁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혼만큼은 안 돼.”
“저한테 달린 게 아니에요.”
권혁재는 잠깐 고민하더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승혁한테 카톡 보내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 그리고 아이를 갖고 싶다고 얘기해.”
딸의 자존심 따위 뒷전인 요구였다.
권희연이 피식 비웃었다.
“내가 원해도 본인이 생각이 없는 이상...”
권혁재가 불쑥 끼어들었다.
“일단 보내. 내가 보는 앞에서.”
권희연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때 휴대폰 화면이 켜지면서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거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모든 사람의 가슴에 희망의 불씨가 타올랐고 차승혁이 다른 번호로 연락이 온 건 아닌지 싶었다. 어쨌거나 이혼 여부는 확실하게 정해야 하니까.
“받아.”
권희연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나 곽태민이야.”
권혁재가 버럭 외쳤다.
“끊어!”
이내 전화를 끊은 딸을 보며 씩씩거렸다.
“번호 저장하지 말고 지워.”
권희연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번호를 이미 알고 있는데 마음만 막으면 수시로 연락할 수 있지 않은가?
얼마나 초조했으면 이렇게 간단한 것도 알아채지 못했을까?
물론 애초에 곽태민과 연락할 생각이 없었기에 흔쾌히 번호를 지웠다.
잠시 후, 곽태민이 보낸 문자가 도착했다.
[희연아, 이혼할 때까지 기다릴게.]
권혁재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는 알아서 문자를 삭제하고 태연하게 물었다.
“이참에 번호라도 바꿀까요?”
그는 말문이 턱 막혔다.
...
파라다이스 리조트.
문이 굳게 잠긴 별장 밖에 검은색 옷차림의 경호원이 순찰하고 있었다.
방 안, 기다란 원형 나무 테이블 양쪽에 사람들로 가득했다.
차승혁이 서류를 가리키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1조, 3분 줄게요. 동의하는 즉시 계약서에 사인하시고 아니면 협상은 여기까지 합시다.”
말을 마치고 나서 다리를 꼬고 여유롭게 옆에 놓인 커피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이내 고개를 숙여 손목시계를 흘긋 쳐다보았다.
오후 6시.
워낙 인내심이 강한 성격이라 무려 3일 동안 인수합병 건을 논의했는데 상대방은 두손 두발을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3분이 지나자 악수를 청하며 계약하기로 했다.
“대표님이 존경스러울 지경이네요. 잘해봅시다.”
차승혁은 악수를 나누고 담당자한테 후속 조치를 취하게 한 다음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이번 차광 그룹의 인수합병 건은 반도체 산업과 관련되었기에 혹시라도 정보가 새어 나가 불청객이 나타나는 상황을 우려해 보안에 특별히 신경 썼다. 그래서 계약 당사자들을 파라다이스 리조트에 불러서 모든 전자기기를 수거하고 네트워크 신호도 차단했다. 협상이 끝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외부와 연락할 수 없었다.
리조트는 예성 외곽이라 돌아가는 데 적어도 2시간이 걸렸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협상에 피곤함이 몰려왔고 차승혁은 차에 타자마자 눈을 감고 휴식했다.
잠시 후 김훈이 전전긍긍하며 입을 열었다.
“대표님?”
차승혁은 미동도 없었다.
“왜?”
“제 실책입니다. 사모님과 곽태민의 영상이 3일 전에 공개되었는데 인터넷에서 두 분의 이혼설이 돌고 있어요.”
차승혁이 눈을 번쩍 떴다.
백미러에 비친 칠흑 같은 눈동자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
권희연은 고개를 숙이고 카톡 대화창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메시지를 빤히 쳐다보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안 보낼 거예요.”
“뭐라고?”
권희연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적어도 자존심은 지키고 싶어요.”
사실 차승혁 앞에서 존엄 따위 버린 지 오래되었다.
빌붙어 사는 주제에 자존심이 웬 말인가?
결단력이 강한 사람이라 이혼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이런 문자를 받아봤자 그녀를 더욱 무시하기 마련이다.
권혁재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내 한마디 하려는 순간 오숙희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그녀는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부부가 아이를 갖는 데 자존심이 왜 필요해? 대체 언제 철이 들래? 부모님 말씀 한 번이라도 들으면 어디 덧나니?”
권희연이 고개를 들어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도대체 얼마나 말을 더 잘 들어야 하는 거죠?”
오숙희는 흠칫 놀랐다. 처음으로 마주하는 딸의 쌀쌀맞은 모습이었다.
“엄마는 뭐 철이 든 줄 아세요?”
권희연이 비아냥거렸다.
“지난달에 새로 산 가방이 얼마인지 잊었어요? 집안을 위해 하신 일이 뭐가 있죠? 저한테 빌붙어 살면서 불평하는 게 엄마로서 할 짓이에요?”
“이...!”
오숙희는 기가 막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권희연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도피 소동 때문에 다리를 다친 이후로 늘 죄책감을 느꼈다.
오숙희와 달리 권혁재 앞에서는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이내 그의 다리를 내려다보며 울컥하는 목소리로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아빠, 만약 승혁 씨가 이혼하겠다고 하면...”
이때, 휴대폰 벨 소리가 다시 울렸다.
화면에 뜬 대문짝만한 차승혁의 이름은 마치 마지막 동아줄처럼 느껴졌다.
권혁재는 얼른 받으라고 눈짓했다.
권희연이 심호흡하고 심판을 기다리는 죄인의 심정으로 잠금 해제를 풀었다.
통화가 연결되자 권혁재는 스피커 모드로 전환했다.
휴대폰 너머로 유난히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답해요, 저랑 이혼하고 싶어요?”
본인이 이혼한다고 하지 않았나? 대체 무슨 소리지?
권희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권혁재가 상냥한 말투로 대답을 가로챘다.
“그릴 리가? 우리 희연은...”
“권희연 씨.”
차승혁이 불쑥 끼어들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지금 당신한테 묻고 있잖아요.”
싸늘하고 무덤덤한 어조,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말끝을 흐릴 때 묘하게 성적인 매력을 풍겼다.
이름을 불러줄 때 이토록 달콤하게 들릴 줄이야.
권혁재는 차마 찍소리도 못했고, 대신 열심히 눈치를 주었다.
사실 몇 초밖에 안 되었지만 차승혁한테는 영겁의 세월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그녀의 대답이 들려왔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차승혁은 담뱃재를 툭툭 털었다.
“본가에요?”
“네.”
“2시간 뒤에 도착해요.”
전화를 끊고 나서야 권희연이 보낸 카톡을 발견했다.
[미안해요. 당신이 오해할까 봐 그러는데 설명할 기회를 줘요.]
당황한 나머지 휴대폰부터 확인하는 것조차 깜빡하다니.
차승혁은 담배를 비벼 끄고 무덤덤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2시간 안으로 대체 누가 이혼 소식을 퍼뜨렸는지 조사해. 아니면 오늘까지 일하는 거로 알고 있어.”
김훈이 식은땀을 흘리며 즉시 대답했다.
“네!”
...
차승혁이 온다는 소리에 권씨 가문 사람들은 바짝 긴장하면 만반의 준비에 돌입했다.
권혁재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권희연을 보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랑 이혼할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이따가 사과 제대로 해.”
권희연은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넋을 잃었다.
차승혁이 방금 카톡을 답장했다.
[괜찮아요.]
이해 혹은 무관심인데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컸다.
묵묵부답하는 그녀를 보자 오숙희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빠가 얘기하잖니. 안 들려?”
권희연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어쨌거나 사과는 해야 하니까.
2시간 뒤, 문이 열리며 검은색 캐시미어 코트를 입은 차승혁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권희연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일이 바빠서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이동해서인지 얼굴에 피곤함이 묻어났다.
누군가 그녀를 슬쩍 밀쳤다.
“얼른 가서 마중하지 않고 뭐 해?”
차승혁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권희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소파 한가운데 앉아 주먹을 꼭 말아쥔 모습은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연상케 했고, 눈빛에 당혹스러움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만 봐도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게 느껴졌다.
꿈쩍도 하지 않는 권희연 때문에 오숙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희연이가 아직 어려서 철이 덜 들었어. 방금 확실하게 교육시켰으니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줘.”
그러고 나서 권희연에게 말했다.
“얼른 사과하지 못해?”
권희연이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려던 찰나 차승혁이 차가운 시선으로 오숙희를 훑어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아내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