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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친구라서 그런 거야

Author: 서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7 03:07:38

“나 고백해볼까?”

한로로의 한마디가 하루 종일 장혁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 마.

왜?

그냥.

이유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장혁은 책상에 엎드린 채 운동장을 바라봤다.

축구부 연습이 한창이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거슬리는 새끼가 하나 있었다.

축구부 주장 김태우.

“야.”

박승철이 가방을 메며 장혁의 책상을 툭 쳤다.

“안 가?”

“먼저 가.”

“왜.”

“볼일 있어.”

승철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곧이어 다시 장혁에게 돌아왔다.

“설마.”

“뭐.”

“아니다.”

승철이 피식 웃었다.

“사고만 치지 마라.”

“꺼져.”

“내일 경찰서에서 보자.”

“박승철.”

“간다, 새끼야.”

승철이 교실을 나갔다.

장혁은 잠시 더 기다렸다.

축구부 연습이 끝난 건 삼십 분쯤 뒤였다.

장혁은 운동장 옆 수도가에서 세수를 하고 있는 태우에게 다가갔다.

“야.”

태우가 고개를 들었다.

“나?”

“어.”

“왜?”

장혁은 대답 대신 그를 빤히 바라봤다.

잘생겼나?

로로가 존나 잘생겼다고 했다.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너 김태우지.”

“맞는데.”

“한로로 알아?”

태우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전학생?”

“어.”

“알지. 왜?”

“걔 건들지 마.”

태우의 눈썹이 올라갔다.

“뭐?”

“한로로 건들지 말라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태우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너 걔 남친이야?”

장혁의 입이 닫혔다.

남친.

그 단어가 이상하게 귀에 걸렸다.

“아니.”

“근데 네가 뭔데?”

“친구.”

“친구가 왜 이래?”

장혁도 몰랐다.

친구인데 왜 여기까지 찾아왔는지.

왜 로로가 저 새끼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하루 종일 거슬렸는지.

왜 둘이 사귀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더러워지는지.

설명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장혁은 가장 쉬운 말을 골랐다.

“걔 울리면 가만 안 둔다고.”

태우가 헛웃음을 쳤다.

“뭐야, 진짜.”

“알아들었으면 됐어.”

장혁이 돌아섰다.

“야!”

태우가 불렀다.

“근데 한로로가 나 좋아해?”

장혁의 발이 우뚝 멈췄다.

입을 다물었으면 됐을 텐데.

“어.”

왜 대답했는지도 모르겠다.

“진짜?”

태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순간 장혁은 말한 걸 후회했다.

“걔 예쁘잖아.”

장혁의 얼굴이 굳었다.

“나도 관심 있었는데.”

“…….”

“잘됐네.”

태우가 웃었다.

“내가 먼저 고백해야겠다.”

장혁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이 새끼를 그냥 묻어버릴까.

그때였다.

“장혁!”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장혁이 돌아봤다.

한로로였다.

작은 몸으로 가방을 들쳐멘 채 뛰어오고 있었다.

“너 여기서 뭐 해?”

“……그냥.”

로로가 태우를 발견했다.

그 순간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어?”

장혁은 그 표정이 또 마음에 안 들었다.

“안녕~.”

평소 누구에게든 당당하던 애가 갑자기 얌전해졌다.

태우도 웃었다.

“어. 한로로 맞지?”

“내 이름 알아?”

“알지.”

로로의 푸른 눈이 커졌다.

“진짜?”

장혁의 미간은 그만큼 좁아졌다.

“가자.”

그가 로로의 가방을 잡아당겼다.

“잠깐만!”

“배고파.”

“네가 배고픈데 왜 내가 가!”

“떡볶이 사줄게.”

로로의 저항이 즉시 멈췄다.

“튀김도?”

“어.”

“순대는?”

“사.”

“콜.”

태우는 멀어지는 두 사람을 황당하게 바라봤다.

“너 아까 태우랑 무슨 얘기했어?”

“아무것도.”

“거짓말.”

“왜.”

“둘이 얘기하고 있었잖아.”

“축구 얘기.”

“너 축구 관심 없잖아.”

장혁이 입을 다물었다.

눈치 한번 더럽게 빨랐다.

로로가 그의 옆으로 바짝 붙었다.

“혹시 내 얘기 했어?”

“안 했어.”

“진짜?”

“어.”

“그럼 됐어.”

로로는 금세 관심을 거두었다.

그러더니 혼자 배시시 웃었다.

장혁이 힐끗 바라봤다.

“왜 쪼개.”

“태우가 내 이름 알더라.”

“그게 뭐.”

“좋잖아.”

“뭐가 좋아.”

“좋아하는 사람이 내 이름 알고 있으면 좋지.”

장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이름 하나 아는 게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자기는 한로로가 좋아하는 음식도 알고,

싫어하는 우유도 알고,

매점에서 무슨 아이스크림을 고르는지도 알고,

웃을 때 오른쪽 입꼬리가 먼저 올라가는 것도 안다.

그런데 김태우는 이름 하나 안다고 저렇게 좋아한다.

괜히 억울했다.

“야.”

“응?”

“걔 별로야.”

“또 시작이네.”

“진짜 별로라고.”

“왜?”

“그냥.”

“너 자꾸 그냥이라고 한다?”

로로가 걸음을 멈췄다.

장혁도 따라 멈췄다.

“장혁.”

“왜.”

“혹시…….”

로로가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눈치챘나.

“너도 김태우 싫어해?”

“……뭐?”

“남자애들 사이에서 사이 안 좋아?”

장혁은 허탈했다.

“됐다.”

“뭐가?”

“떡볶이나 먹으러 가.”

“튀김도.”

“알았어.”

“순대도.”

“알았다고.”

다음 날.

태우는 정말 로로를 피해 다녔다.

장혁 때문은 아니었다.

밤새 생각해보니 친구가 직접 찾아와 경고할 정도로 복잡한 관계에 굳이 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로로는 그 이유를 알 리 없었다.

“이상하다.”

점심시간 내내 로로가 중얼거렸다.

“뭐가.”

“태우가 나 피하는 것 같아.”

“착각이겠지.”

장혁은 태연하게 우유를 마셨다.

맞은편의 승철이 그런 장혁을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방과 후.

승철은 장혁의 목덜미를 잡아 옥상으로 끌고 갔다.

“놔.”

“잠깐 와봐.”

“뭔데.”

옥상문이 닫히자 승철이 팔짱을 꼈다.

“너 어제 축구부 주장 찾아갔지?”

장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가 그래.”

“봤어.”

“…….”

“내가 너보다 먼저 간다고 했지 집에 간다고는 안 했다.”

“스토커냐?”

“말 돌리지 말고.”

승철이 안경을 밀어 올렸다.

“왜 찾아갔는데?”

“그냥.”

“또 그냥.”

“한로로 가지고 장난칠까 봐.”

“김태우가 장난친대?”

“몰라.”

“근데 왜 찾아가?”

장혁이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 몰라. 그냥 신경 쓰인다고.”

승철의 표정이 묘해졌다.

드디어 나왔다.

“뭐가 신경 쓰이는데?”

“로로가 저 새끼 좋아하는 게.”

“왜?”

“…….”

“친구가 누구 좋아하든 네가 왜 기분 나빠?”

장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승철이 한숨을 내쉬었다.

“장혁.”

“왜.”

“너 로로 좋아하잖아.”

장혁의 얼굴이 굳었다.

“아니거든.”

“좋아해.”

“아니라고.”

“그럼 로로가 김태우랑 사귀어도 괜찮아?”

장혁의 턱이 굳었다.

싫었다.

생각만 해도 싫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승철이 피식 웃었다.

“봐. 표정에 다 써있어.”

“닥쳐.”

“그냥 고백해.”

장혁이 처음으로 승철을 똑바로 바라봤다.

“싫어.”

“왜?”

“친구잖아.”

“친구인데 좋아할 수도 있지.”

“그러다 잘못되면?”

승철의 입이 닫혔다.

장혁이 난간에 등을 기대었다.

평소답지 않게 한참 침묵하던 그가 낮게 말했다.

“고백했다가 로로가 싫다고 하면?”

“…….”

“그럼 지금처럼 못 지내잖아.”

열네 살 장혁에게는 그게 더 무서웠다.

로로를 갖지 못하는 것보다,

로로가 자신의 옆에서 사라지는 것이.

“그러니까 로로한테 말하지 마.”

승철이 장혁을 바라봤다.

“진짜 안 할 거야?”

“어.”

“나중에 후회한다?”

“상관없어.”

장혁이 운동장을 내려다봤다.

저 아래에서 로로가 혼자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혁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냥 친구면 돼.”

그때의 장혁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친구라는 이름만 지킬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그 이름으로 평생 한로로의 옆에 있을 수 있다면,

자기 마음 하나쯤 숨기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 선택이 무려 스무 해 동안 이어질 줄은,

열네 살의 장혁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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