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 10화. 우리 집 그림
그날 밤, 나는 색종이 꽃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비상 누나.
꽃 가운데 붙은 작은 글씨를 볼 때마다 웃음이 나왔다.
웃기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조금은 간지럽기도 했다.
이상한 별명이었다.
그런데 도윤이 그렇게 불렀다고 생각하니 싫지 않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싫지 않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바로 꽃을 뒤집어놓았다.
“아니야.”
혼잣말을 했다.
싫지 않은 게 문제가 아니라, 싫지 않다고 인정하는 게 문제였다.
나는 유민서였다.
대학 생활 조용히 하려고 마음먹은 유민서.
소문 싫어하고, 사람들 시선 싫어하고, 귀찮은 관계는 최대한 피하는 유민서.
그런 내가 지금 책상 위에 색종이 꽃 하나를 두고 이렇게까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태건 때문에.
그리고 도윤 때문에.
정확히는 둘 다 때문에.
휴대폰은 조용했다.
오늘은 그걸로 됐다던 이태건은 정말 그 뒤로 연락하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신경 쓰였다.
붙잡겠다더니.
내일은 더 붙잡을 것 같다더니.
막상 조용하니까 또 서운한 것 같아서, 나는 내 머리를 베개에 박았다.
“진짜 미쳤나 봐.”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이태건]
역시.
아니, 역시라니.
뭘 기다렸다고.
나는 헛기침을 하고 메시지를 열었다.
[꽃 버리지 마]
나는 책상 위의 색종이 꽃을 봤다.
감시라도 하는 줄 알았다.
[안 버렸어요]
답장을 보내자마자 바로 읽음 표시가 떴다.
[도윤이가 내일 검사한대]
나는 피식 웃었다.
[뭘 검사해요]
[네가 가지고 있는지]
[도윤이는 세 살인데 검사도 해요?]
[무섭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무섭다라는 말이, 정말 무서워서 하는 말이 아니라 도윤에게 꼼짝 못 하는 사람의 항복처럼 들렸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 답장을 보냈다.
[그럼 가지고 있다고 전해주세요]
[네가 말해]
[왜 자꾸 제가 말해요]
[비상 누나잖아]
나는 또 이마를 짚었다.
이 별명은 아무래도 오래갈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하린은 내 가방에 꽂힌 색종이 꽃을 보자마자 입을 틀어막았다.
“야.”
“왜.”
“너 그거 들고 왔어?”
“도윤이가 검사한다잖아.”
말하고 나서 아차 싶었다.
하린의 눈이 반짝였다.
“도윤이가 검사한다고 해서 들고 왔다?”
“그냥... 애가 만든 거 버리기 좀 그렇잖아.”
“누가 버리래? 근데 가방 앞주머니에 잘 보이게 꽂아온 건 좀 귀엽다.”
“안 보여?”
“엄청 보여. 지금 네 가방이 ‘저는 비상 누나입니다’ 하고 외치고 있어.”
나는 급히 꽃을 빼서 가방 안쪽에 넣었다.
하린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너 진짜 끝났다.”
“뭐가.”
“정들었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들었다.
그 단어가 너무 정확해서 반박하기 어려웠다.
강의실에 들어가자 몇몇 시선이 내 가방 쪽으로 향했다. 어제의 소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이상하게 분위기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누군가는 여전히 수군거렸지만, 누군가는 그냥 웃었다.
비상 연락망 누나라는 별명 때문인지, 어제보다 공격적인 느낌은 덜했다.
불편한 건 여전했다.
하지만 숨이 막히진 않았다.
첫 수업이 끝나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엔 전화가 아니었다.
사진 한 장.
발신자는 이태건이었다.
나는 하린의 눈을 피해 책상 아래에서 몰래 사진을 열었다.
사진에는 어린이집 활동지 한 장이 찍혀 있었다.
제목은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우리 집]
그 아래에는 크레파스로 그린 세 사람이 있었다.
가운데 작은 아이.
왼쪽에는 키 큰 사람. 아마 태건.
오른쪽에는 머리가 긴 사람. 아마 나.
나는 그대로 굳었다.
하린이 내 얼굴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
“뭐야.”
나는 말없이 화면을 보여줬다.
하린도 굳었다.
“와.”
그 말밖에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사진을 확대했다.
오른쪽 사람 옆에는 선생님이 받아 적은 듯한 글씨가 있었다.
[비상 누나]
가운데 아이 옆에는 [나].
왼쪽 키 큰 사람 옆에는 [아빠].
그리고 세 사람 위에는 커다란 지붕이 그려져 있었다.
우리 집.
심장이 이상하게 조용해졌다.
좋다거나 싫다거나, 그런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냥 마음 한쪽이 툭 건드려진 기분이었다.
잠시 뒤 메시지가 왔다.
[선생님이 물어봤대]
나는 천천히 답장을 썼다.
[뭐라고요?]
[비상 누나는 가족이냐고]
나는 숨을 멈췄다.
가족.
그 단어가 화면 위에 떠 있는 걸 보는데, 손끝이 조금 떨렸다.
곧이어 메시지가 왔다.
[도윤이가 아니라고 했대]
안도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슴이 살짝 내려앉았다.
그다음 메시지가 바로 이어졌다.
[아직 아니라고]
나는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하린이 내 표정을 보더니 화면을 훔쳐봤고, 그대로 입을 틀어막았다.
“미쳤다.”
나는 급히 휴대폰을 엎었다.
“윤하린.”
“아니, 이건 내가 아니라 도윤이가 미쳤는데?”
“애한테 그런 말 하지 마.”
“그럼 뭐라고 해? 천재? 로맨스 장인?”
나는 귀까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말도 안 된다.
세 살짜리 아이가 뭘 안다고.
아직 아니라고.
그건 그냥 어디서 들은 말을 따라 했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선생님이 농담처럼 물은 말을 자기식으로 대답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지 모르겠다.
태건에게서 또 메시지가 왔다.
[난 안 가르쳤다]
나는 바로 답했다.
[당연히 그래야죠]
[억울한데]
[억울할 일 아니거든요]
[도윤이는 진심인 것 같던데]
나는 답장을 쓰다 멈췄다.
하린이 옆에서 속삭였다.
“뭐라고 답할 건데?”
“몰라.”
“너 진짜 큰일 났다.”
“알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정말 큰일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하린은 나를 학생식당으로 끌고 갔다.
“밥 먹어. 로맨스도 체력이 있어야 해.”
“로맨스 아니거든.”
“그럼 육아?”
“그것도 아니야.”
“그럼 뭐야?”
나는 식판을 내려놓고 한참 생각했다.
뭐지.
나와 이태건과 도윤의 관계는 대체 뭘까.
아이 엄마는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친구라고 하기엔 이상하고.
그냥 아는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이 엮였다.
비상 연락망.
그 말이 제일 말도 안 되는데, 이상하게 제일 정확했다.
급할 때 찾는 사람.
없으면 불안한 사람.
별일 아닐 때도 괜히 생각나는 사람.
나는 숟가락을 들다 말고 멈췄다.
이거, 너무 위험한데.
하린이 내 표정을 보고 물었다.
“또 이태건 생각했지?”
“아니야.”
“대답이 너무 늦어.”
나는 밥을 입에 넣으며 못 들은 척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엔 어린이집 번호였다.
나는 식판 앞에서 그대로 굳었다.
하린도 화면을 보고 눈이 커졌다.
“받아.”
나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
“네, 유민서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어린이집 선생님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 민서 학생, 혹시 통화 괜찮으세요?
“네. 도윤이 무슨 일 있어요? 또 아파요?”
― 아픈 건 아니고요. 많이 울지는 않는데, 오늘 활동 이후로 계속 그림을 들고 민서 누나한테 보여줘야 한다고 해서요. 태건 씨께 연락드렸는데 지금 잠깐 통화가 안 돼서요.
“아...”
― 혹시 바쁘시면 괜찮아요. 그냥 혹시나 해서요.
나는 식판을 내려다봤다.
하린이 나를 보고 있었다.
가지 마.
그 눈빛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갔다 오되 정신 차려, 에 가까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전화로 잠깐 말해줘도 될까요?”
― 그럼 너무 좋죠.
잠시 뒤 도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 누나?
“응. 도윤아.”
― 그림 봤어?
“봤어. 진짜 잘 그렸더라.”
도윤의 목소리가 바로 밝아졌다.
― 나랑 아빠랑 누나.
“응. 다 봤어.”
― 우리 집.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 말이 이렇게 마음을 누를 줄 몰랐다.
“도윤아.”
― 응.
“누나는 도윤이 집에 같이 사는 사람은 아니야.”
말하는데 목이 조금 막혔다.
“근데 도윤이가 그림 보여줘서 누나는 엄청 고마웠어.”
수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했다.
혹시 울까 봐 긴장했다.
그런데 도윤은 작게 물었다.
― 그럼 누나 집도 그려?
나는 멈칫했다.
“누나 집?”
― 응. 누나 집에 나랑 아빠도.
옆에서 하린이 입을 막았다.
나는 웃음이 나올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건... 도윤이가 그리고 싶으면 그려도 돼.”
― 진짜?
“응. 그림은 마음대로 그리는 거니까.”
― 그럼 누나도 우리 그려.
“나도?”
― 응. 누나 그림에 나랑 아빠.
나는 대답을 못 했다.
그때 수화기 너머로 낮은 남자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 유민서.
태건이었다.
나는 놀라 휴대폰을 고쳐 잡았다.
“어, 언제 왔어요?”
― 방금.
“선생님이 통화 안 된다고 해서...”
― 봤어.
“뭘요?”
― 네가 도윤이 달래는 거.
전화기 너머인데도 그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괜히 목소리를 낮췄다.
“도윤이 안 울었어요?”
― 안 울어.
“다행이네요.”
― 근데 네가 지금 울 것 같은 목소리야.
나는 그대로 굳었다.
하린이 옆에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닌데요.”
― 아닌 척하지 마.
“수업 중이라 끊을게요.”
― 점심시간이잖아.
“어떻게 알아요?”
― 네 시간표 봤으니까.
“제 시간표를 왜 봐요?”
잠깐 침묵.
― 네가 보냈잖아.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아.
어제 도윤이 어린이집 하원 시간 때문에, 내가 오늘 수업 끝나는 시간을 캡처해서 보냈었다. 그걸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자연스럽게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건 필요한 시간만 보라고 보낸 거잖아요.”
― 다 보였어.
“잊어요.”
― 싫은데.
나는 이마를 짚었다.
이태건은 정말 사람 말을 안 들었다.
태건이 낮게 말했다.
― 오늘 안 와도 돼.
“알아요.”
― 도윤이는 내가 데려갈 거야.
“네.”
― 그러니까 기다리지 마.
나는 멈칫했다.
“제가 기다린다고 한 적 없는데요.”
― 할 것 같아서.
말문이 막혔다.
정확했다.
나는 어쩌면 수업이 끝나고 정문 근처를 한 번쯤 보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골목 입구에 검은 후드가 서 있는지.
그걸 들킨 기분이었다.
“착각하지 마요.”
― 그 말 자주 하네.
“그쪽이 착각을 자주 하니까요.”
― 이번엔 맞은 것 같은데.
나는 대답 대신 전화를 끊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태건이 잠깐 조용히 있다가 말했다.
― 유민서.
“네.”
― 오늘은 내가 안 부를게.
“네?”
― 네가 오고 싶으면 와.
숨이 멈췄다.
그 말은 어제보다 더 위험했다.
불러서 가는 건 핑계라도 있었다.
도윤이 찾는다, 밥을 안 먹는다, 그림을 보여주고 싶다.
그런 이유가 있으면 나는 나를 속일 수 있었다.
그런데 오고 싶으면 오라니.
그건 핑계가 아니었다.
선택이었다.
“안 가요.”
나는 바로 말했다.
태건은 낮게 웃었다.
― 그래.
그가 순순히 대답해서 더 이상했다.
― 그럼 기다릴게.
“방금 안 부른다면서요.”
― 안 불렀어.
“기다린다고 했잖아요.”
― 그건 내 마음이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화가 끊긴 뒤에도 한참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하린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유민서.”
“응.”
“넌 오늘 간다.”
“안 가.”
“가.”
“안 간다니까.”
하린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적어도 밥은 먹고 가.”
나는 반박하려다 멈췄다.
“나 간다고 안 했어.”
“응. 근데 먹어.”
그 말이 너무 현실적이라 결국 웃음이 났다.
오후 수업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교수님이 칠판에 무언가를 쓰고, 학생들이 노트북을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화면을 보고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다른 말뿐이었다.
네가 오고 싶으면 와.
그럼 기다릴게.
수업이 끝났을 때, 나는 한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린이 가방을 메고 나를 봤다.
“갈 거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민서야.”
“잠깐만.”
“그 잠깐은 또 믿으면 안 되는 잠깐이지?”
나는 가방 안에서 색종이 꽃을 꺼냈다.
비상 누나.
꽃잎 한쪽이 조금 구겨져 있었다. 나는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펴주었다.
그리고 일어섰다.
“정문까지만.”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문까지만 가서, 골목까지 가고, 어린이집까지 가고, 결국 도윤이랑 놀다 오겠지.”
“윤하린.”
“응원해.”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말린다고 안 갈 거 아니잖아.”
그 말이 너무 정확했다.
나는 결국 혼자 정문으로 향했다.
정문 앞에는 사람이 많았다. 동아리 홍보를 하는 학생들, 수업 끝나고 나오는 무리, 배달 오토바이,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골목 입구.
이태건은 없었다.
나는 멈춰 섰다.
당연했다.
오늘은 안 부른다고 했고, 도윤이는 태건이 데려간다고 했다. 기다린다는 말도 그냥... 그냥 그런 말이었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내려앉는지 모르겠다.
나는 스스로가 한심해서 웃었다.
“진짜 뭐 하는 거야.”
그때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비상 누나!”
나는 천천히 돌아섰다.
도윤이 태건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도윤은 한 손에 구겨진 활동지를 꼭 들고 있었다.
태건은 그런 도윤 옆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검은 후드.
무심한 얼굴.
그런데 눈빛만은 전혀 무심하지 않았다.
“안 온다며.”
그가 말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태건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왔네.”
도윤이 내게 달려왔다.
“누나! 그림!”
나는 도윤을 받아 안으며 겨우 웃었다.
“보여주려고 기다렸어?”
“응!”
그 작은 대답에 마음이 무너졌다.
태건이 한 걸음 다가왔다.
“도윤이가 기다린 거야.”
나는 그를 올려다봤다.
“그쪽은요?”
묻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하지만 태건은 피하지 않았다.
“나도.”
그는 너무 쉽게 대답했다.
쉽지 않게.
“기다렸어.”
나는 도윤의 그림을 품에 안은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관계는 아직 이름이 없었다.
그런데 이름이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었다.
# 특별외전 2화. 나를 선택한 사람- 태건시점 - 결혼 다음 날, 나는 민서가 도윤에게 차이는 모습을 보며 눈을 떴다.도윤의 발이 민서의 뺨 가까이에 놓여 있었다.민서는 아이의 발목을 잡아 이불 안으로 밀어 넣었고, 도윤은 잠든 채 다시 다리를 뻗었다.“도윤아.”민서가 낮게 불렀다.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나는 아이를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미안.”“네가 왜 사과해.”“내 아들이라며.”잠이 덜 깬 채 대답했지만 민서가 웃는 소리는 분명히 들렸다.이상한 아침이었다.도윤은 내 옆에서 자고 있었고, 민서는 같은 반지를 낀 채 내 침대에 누워 있었다.정확히 말하면 우리 침대였다.나는 아직도 그 단어가 낯설었다.우리 집.우리 방.우리 침대.민서를 처음 만났을 때는 절대로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말들이었다.처음 본 유민서는 지나치게 태연했다.길을 잃은 도윤을 붙잡고 있으면서도 울리지 않았고, 내가 나타났을 때 겁먹은 얼굴로 물러나지도 않았다.오히려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도윤이 아빠 맞아요?”확신하지 못하는 목소리였다.도윤이 나를 아빠라고 불렀는데도 의심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맞는데.”내가 대답하자 민서는 도윤을 바로 넘겨주지 않았다.“그럼 아이가 왜 혼자 있었어요?”첫 만남부터 따졌다.나는 그게 싫었다.도윤을 잃어버린 사람은 나였고, 아이를 찾을 때까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는데, 처음 보는 여자가 내가 부족한 아빠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잠깐 놓친 거야.”“잠깐이어도 아이는 무서웠을 수 있잖아요.”민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그래서 더 싫었다.나는 틀린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화를 낼 수 있었다.맞는 말을 하는 사람 앞에서는 내가 잘못했다는 사실부터 마주해야 했다.그런데 도윤은 민서의 손을 놓지 않았다.“누나도 가.”도윤이 말했다.나는 그 말이 불편했다.아이는 원래 낯선 사람을 쉽게 따르지 않았다.어린이집 선생님에게도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처음 보는 사람이 가까이 오면
# 특별외전 1화. 내가 먼저 고른 사람-민서 시점 - 결혼 다음 날 아침, 내가 가장 먼저 본 것은 태건의 얼굴이 아니었다.도윤의 발바닥이었다.정확히는 내 뺨 옆에 놓인 작은 발이었다.나는 눈을 뜬 채 한동안 그 발을 바라봤다.어젯밤 분명 도윤을 가운데 눕혔다. 그런데 자는 동안 세로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아이의 머리는 태건의 옆구리에 붙어 있었고, 두 다리는 내 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도윤아.”작게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발을 살짝 밀자 아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내 얼굴 쪽으로 가져왔다.결혼 첫날밤의 다음 장면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나는 결국 도윤의 발을 붙잡아 이불 안으로 넣었다.그때 태건이 눈을 떴다.“왜.”“네 아들이 나 걷어찼어.”태건은 눈도 제대로 뜨지 않은 채 도윤을 자기 쪽으로 끌었다.“미안.”“네가 왜 사과해.”“내 아들이라며.”잠긴 목소리로 대답하는 얼굴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이런 아침을 내가 선택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이태건을 처음 봤을 때의 나는 절대로 상상하지 못했을 장면이었다.그날의 태건은 무서운 사람이었다.검은 옷.굳은 표정.사람을 믿지 않는 눈.그리고 처음 보는 아이가 그를 보자마자 달려가 안겼다.“아빠.”도윤이 그 한마디를 내뱉었을 때, 나는 내가 알던 세상의 규칙 하나가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저런 사람이 아빠라고?그것도 저렇게 작은 아이의?나는 처음부터 태건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그가 도윤의 아빠라는 이유만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오히려 더 의심했다.아이는 왜 혼자 있었는지.태건은 왜 그렇게 늦게 나타났는지.아이를 제대로 돌보고 있는 것은 맞는지.지금 생각하면 태건 역시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봤을 것이다.자기 아이 옆에 붙어 있으면서 계속 따지는 여자.그런데도 나는 떠나지 않았다.도윤이 내 손가락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때는 아이를 두고 갈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다.돌이켜 보면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꾼 것은 대단한
# 외전 5화. 우리 애가 다시 골랐다 [외전완결]결혼을 정한 다음 날.태건과 민서는 하연을 먼저 만났다.장소는 도윤이 자주 가는 어린이도서관 근처 카페였다. 도윤과 하연의 정기 만남이 없는 날이라 세 사람만 마주 앉았다.하연은 민서의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발견했지만 먼저 묻지 않았다.태건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우리 결혼하기로 했어.”짧은 말이었다.하연의 시선이 태건에게서 민서에게로 옮겨 갔다.놀란 표정은 오래가지 않았다.“축하해.”“고마워.”민서가 대답했다.하연은 물잔을 만지며 잠시 생각했다.“도윤이한테는 말했어?”“아직.”태건이 말했다.“너한테 먼저 알리기로 했어.”하연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허락을 구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도윤보다 먼저 자신의 귀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결혼하면 바로 달라지는 게 있어?”하연이 물었다.“생활은 지금이랑 비슷해.”민서가 대답했다.“이미 같이 살고 있으니까.”“도윤이 돌봄은?”“지금처럼 태건이가 주로 맡고요.”민서는 준비해 온 말을 천천히 꺼냈다.“저도 같은 집에서 생활하는 만큼 제가 선택한 범위에서는 함께할 거예요. 하지만 중요한 결정이나 하연 씨와의 일정은 두 분이 계속 직접 조율해 주세요.”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민서 씨한테 엄마 역할을 부탁할 생각은 없어요.”“알아요.”“도윤이가 결혼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으니까.”하연은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엄마가 바뀐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그 부분부터 설명하려고.”태건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엄마는 그대로 너라고.”하연은 그 말을 듣고 시선을 내렸다.도윤의 엄마라는 자리를 확인받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자신이 그 자리를 온전히 지켜 온 사람도 아니었다.그런데 태건은 하연의 과거를 없던 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현재의 역할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었다.“가족식은 작게 하려고 해.”태건이 말했다.“가까운 사람들만 불러서 밥 먹는 정도로.
# 외전 4화. 이번에는 내가 고르는 약속토요일 오후.도윤은 준우네 집에서 열리는 생일 파티에 갔다.태건은 아침부터 몇 번이나 시간을 확인했다.“네 시에 데리러 가는 거 맞지?”민서가 물었다.“응.”“그럼 세 시간밖에 없네.”“결혼 이야기하는 데 세 시간이 부족해?”태건은 소파에 앉아 민서를 바라봤다.민서는 식탁 위에 서류 몇 장을 펼쳐 두고 있었다.태건이 눈을 가늘게 떴다.“그게 뭐야.”“내가 준비한 말.”“결혼 이야기하는데 서류가 필요해?”“필요해.”민서는 종이를 태건 쪽으로 밀었다.가장 위에는 두 사람의 현재 생활이 적혀 있었다.태건의 센터 근무와 소득.민서의 학업과 프로젝트 일정.공동생활비 분담.도윤의 양육비와 돌봄 체계.하연과의 정기 만남.태건은 문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이거 우리 집 구할 때 다 이야기한 거잖아.”“결혼하면 달라지는 게 있으니까 다시 보는 거야.”“뭐가 달라져.”“법적으로 가족이 되는 거.”민서는 옆에 놓인 자료를 펼쳤다.혼인신고 이후 달라지는 법적 관계와 재산 관리, 의료 상황에서의 보호자 지위, 주거 계약과 세금에 관한 기본적인 내용이었다.태건은 예상하지 못한 얼굴로 민서를 바라봤다.“이걸 다 알아봤어?”“응.”“언제.”“네가 계속 결혼 이야기할 때부터.”태건은 서류를 다시 내려다봤다.결혼이라는 말을 꺼낸 사람은 자신이었다.그런데 정작 결혼이 두 사람의 생활을 어떻게 바꾸는지는 깊이 알아보지 않았다.좋아하고, 함께 살고, 오래 곁에 있고 싶다는 마음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민서는 마음이 부족해서 자료를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오래 함께하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을 외면하지 않은 것이었다.“결혼하면 내 빚도 네가 책임져야 해?”민서가 물었다.태건의 표정이 굳었다.“빚 있어?”“없어.”“그럼 왜 물어.”“서로 모르는 게 있는지 확인하려고.”민서는 질문 목록을 꺼냈다.학자금 대출.개인 채무.보험.저축.가족에게 정기적으로 보내는 돈.태건은
# 외전 3화. 졸업하는 아빠도윤의 유치원 발표회 날.태건은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났다.도윤의 흰 셔츠를 다리고, 바지 주름을 펴고, 유치원에서 보내 준 안내문을 세 번 확인했다.준비물은 없었다.보호자는 열 시까지 강당으로 오라는 내용뿐이었다.그런데도 태건은 도윤의 가방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했다.“아빠.”잠옷 차림의 도윤이 방문에 기대 서 있었다.“왜.”“오늘 가방 안 가져가.”태건의 손이 멈췄다.“알아.”“그런데 왜 봐?”“혹시 필요한 게 있나 해서.”“없어.”도윤은 하품을 하며 욕실로 걸어갔다.“나 노래 안 틀리게 해야 돼.”“집에서 계속 불렀잖아.”“친구들이 틀리면 나도 틀릴 수 있어.”태건은 웃지 않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럴 수도 있지.”도윤이 욕실 앞에서 돌아봤다.“틀려도 돼?”“응.”“선생님 안 화내?”“발표회는 시험 아니야.”도윤은 안심한 얼굴로 욕실에 들어갔다.민서는 그때까지도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전날 프로젝트 회의가 늦게 끝난 탓이었다.태건은 침실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발표회 보호자는 자신과 하연이었다.민서는 집에서 쉬다가 오후에 만나기로 했다.도윤이 직접 정한 일이었고, 민서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그런데 태건은 괜히 침실 안을 한 번 더 바라봤다.민서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빠진 사람은 아니었다.이미 함께 돌아올 집에 있는 사람이었다.하연은 약속 시간보다 십 분 먼저 유치원 앞에 도착했다.짙은 남색 원피스 위에 얇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손에는 작은 꽃다발도, 선물도 없었다.유치원에서 꽃과 장난감을 가져오지 말아 달라고 안내했기 때문이었다.“엄마.”도윤이 하연을 발견하고 뛰어갔다.태건은 따라가지 않았다.하연이 아이 앞에 몸을 낮췄다.“긴장돼?”“조금.”“엄마도 조금 긴장돼.”“엄마는 노래 안 하잖아.”“도윤이 보는 게 처음이니까.”도윤은 잠시 하연을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같이 들어가.”하연은 아이의 손을 잡았다.강당에는
# 외전 2화. 엄마가 오는 토요일“엄마, 내 집 봐.”도윤이 하연의 손을 잡아당겼다.하연은 현관 안쪽을 한 번 더 바라봤다.거실 바닥에는 새 수납장이 놓여 있었고, 민서의 책상 옆에는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조명이 기대어 있었다. 소파 위에는 태건의 겉옷과 도윤의 작은 가방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누군가의 집을 구경하는 일치고는 지나치게 많은 것이 보였다.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누구의 물건이 어디에 놓이는지.자신이 없는 시간 동안 어떤 생활이 만들어졌는지.“잠깐 보고 가세요.”민서가 다시 말했다.하연은 그제야 신발을 벗었다.“실례할게요.”“엄마, 여기.”도윤은 하연이 신발을 정리할 틈도 주지 않고 작은방으로 데려갔다.방문 안쪽에는 자동차 스티커가 붙어 있었고, 창문 아래 낮은 침대에는 공룡 이불이 깔려 있었다.벽 한쪽 수납장에는 자동차와 기차가 줄을 맞춰 들어가 있었다.“이게 파란 자동차.”도윤이 가장 먼저 꺼낸 것은 민서의 이전 집에 두고 다니던 장난감이었다.“누나 집에 있던 거 기억나?”하연은 자동차를 받아 들지 않고 아이가 든 모습을 바라봤다.“응. 도윤이 자리라고 했던 거.”“이제 여기 있어.”“좋겠다.”“엄마 집에도 내 거 있어?”질문은 망설임 없이 나왔다.하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응.”태건이 그녀를 바라봤다.하연은 도윤에게 설명했다.“지난번에 같이 산 기차책이랑 도윤이 쓰는 컵 하나 있어.”“내 컵?”“초록색.”“왜 나한테 안 보여 줬어?”“도윤이가 엄마 집에 올 수 있게 되면 보여 주려고 했어.”도윤은 곧바로 물었다.“나 언제 가?”하연은 태건 쪽을 보지 않았다.도윤에게 묻고, 태건이 대신 답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피하지 않았다.“아직 날짜는 안 정했어.”“왜?”“엄마 집에서 도윤이가 편하게 지낼 수 있는지 아빠랑 먼저 확인해야 해.”“침대 있어?”“도윤이가 낮잠 잘 수 있는 자리부터 만들려고.”도윤은 자신의 방을 돌아봤다.“내 침대는 여기 있는데.”“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