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 9화. 비상 연락망 누나
그날 밤,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이태건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태건이 한 말 때문이다.
“도망갈 거면 지금 가.”
“내일은 내가 더 붙잡을 것 같으니까.”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나는 침대 위에서 이불을 뒤집어썼다가 걷어냈다. 휴대폰을 들었다가 내려놓고, 다시 들었다.
연락이 올까.
오면 뭐라고 하지.
안 오면 그건 또 왜 신경 쓰이지.
스스로가 한심해서 이마를 짚었다.
“유민서, 정신 차려.”
혼잣말을 해도 소용없었다.
휴대폰 화면을 켜자 마지막 메시지가 보였다.
[이태건]
이 이름 하나가 이렇게 신경 쓰일 줄 몰랐다.
고등학교 때는 이름만 떠올라도 피하고 싶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메시지가 오지 않는 게 신경 쓰였다. 이건 분명히 위험한 변화였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나는 놀라서 거의 던지듯 휴대폰을 떨어뜨렸다가 다시 주웠다.
[이태건]
심장이 철렁했다.
메시지는 짧았다.
[도착했냐]
나는 괜히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기다렸으면서.
왜 이제 보내는데.
나는 일부러 천천히 답장을 썼다.
[진작 도착했어요]
곧바로 읽음 표시가 떴다.
[왜 연락 안 해]
나는 어이가 없어서 벌떡 일어났다.
[그쪽도 안 했잖아요]
답장은 금방 왔다.
[기다렸는데]
무슨 이런 말이 다 있지.
기다렸는데.
그 한마디를 너무 아무렇지 않게 보내서 더 어이가 없었다.
나는 한참 화면을 노려보다 답장을 보냈다.
[이상한 자존심 부리지 마요]
[너도 부렸잖아]
[저는 아니거든요]
[그럼 왜 바로 답장 안 했는데]
이걸 내가 왜 설명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손가락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씻고 있었어요]
보내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별말 아닌데도, 그에게 보내고 나니 이상하게 사적인 말처럼 느껴졌다.
한참 답이 없었다.
나는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가, 다시 확인했다.
그러고도 답이 없어서 괜히 베개를 팡팡 쳤다.
대체 왜 답장을 안 해.
그때 메시지가 왔다.
[자]
고작 그거였다.
사람을 흔들어놓고, 이제 와서 자라니.
나는 심술이 나서 답했다.
[도윤이는요?]
[잠]
[열은요?]
[내렸어]
다행이었다.
그 말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잠시 뒤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도윤이 잠옷을 입고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눈은 감겨 있고, 한 손에는 작은 빨간 자동차가 쥐어져 있었다. 내가 받은 것과 같은 종류였다. 다만 도윤의 것은 파란색이었다.
사진 아래 메시지가 붙었다.
[네 거랑 커플이라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웃었다.
[도윤이가요?]
[응]
[귀엽네요]
잠깐 뒤 답장이 왔다.
[누가]
나는 손가락을 멈췄다.
이 사람, 일부러 이러는 게 분명했다.
[도윤이요]
[알아]
[그럼 왜 물어봐요]
[확인]
무슨 확인.
나는 휴대폰을 이불 속에 밀어 넣었다.
그러고도 입가가 내려가지 않았다.
정말 큰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느꼈다.
소문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모양이 바뀌어 있었다.
어제까지는 “이태건 애 엄마”였다면, 오늘은 조금 이상한 이름이 붙어 있었다.
“저 사람이야? 비상 연락망?”
“어제 이태건이 장난감 줬다는 신입생?”
“애기가 누나라고 부른다며.”
“근데 애 엄마는 아니래.”
“그럼 뭐야?”
“비상 연락망 누나?”
비상 연락망 누나.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하린이 내 옆에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웃지 마.”
내가 낮게 말했다.
하린의 어깨가 떨렸다.
“안 웃어.”
“너 지금 웃고 있잖아.”
“미안. 근데 비상 연락망 누나는 좀 귀엽다.”
“하나도 안 귀엽거든.”
“애 엄마보다 훨씬 낫잖아.”
맞는 말이라 더 화가 났다.
어제보다 시선은 덜 날카로웠다.
여전히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적어도 아이 엄마라는 말은 많이 줄어든 것 같았다.
대신 이상한 별명이 생겼다.
비상 연락망 누나.
누가 들으면 내가 어린이집 직원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나는 강의실에 앉아 가방 앞주머니를 열었다.
빨간 미니카가 안에 얌전히 들어 있었다.
어제 도윤이 나에게 준 선물.
손끝으로 미니카를 살짝 만지자, 어제 도윤이 환하게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게 좋아?”
하린이 옆에서 물었다.
나는 급히 손을 뺐다.
“아니거든.”
“아닌 사람이 장난감 쓰다듬고 있었어?”
“먼지 묻었나 본 거야.”
“그래. 먼지 참 귀엽게 보더라.”
나는 노트북을 켜며 하린을 무시했다.
수업이 시작됐다.
오늘은 집중하려고 했다.
정말 그러려고 했다.
그런데 교수님의 목소리가 시작된 지 십 분도 안 돼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처음엔 무시했다.
또 진동했다.
이번엔 메시지였다.
나는 몰래 화면을 봤다.
[이태건]
[전화 받아]
가슴이 덜컥했다.
무슨 일이지.
도윤이가 또 아픈가?
나는 하린에게 화면을 보여줬다. 하린의 얼굴도 바로 굳었다.
“나가.”
하린이 입모양으로 말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강의실 밖으로 나왔다.
복도 끝에서 바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한 번 울리기도 전에 태건이 받았다.
― 어디야.
“수업 중이었어요. 무슨 일인데요? 도윤이 아파요?”
― 아픈 건 아닌데.
“그럼요?”
수화기 너머로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숨을 멈췄다.
도윤이었다.
“도윤이 울어요?”
태건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 밥을 안 먹어.
“네?”
― 점심.
나는 순간 긴장이 풀리면서도 어이가 없어졌다.
“그걸 왜 저한테...”
말하다가 멈췄다.
수화기 너머에서 도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 누나아...
가슴이 이상하게 내려앉았다.
태건이 말했다.
― 선생님이 전화하라 해서.
“어린이집 선생님이요?”
― 응. 네 목소리 들으면 먹을지도 모른다고.
“제가 무슨 만능 약이에요?”
― 비상 연락망이잖아.
나는 이마를 짚었다.
“그 별명 누가 퍼뜨렸는지 알겠네요.”
― 나 아닌데.
“그쪽이 시작했잖아요.”
― 맞네.
당당하기까지 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바꿔줘요.”
곧 전화기 너머로 작은 숨소리가 가까워졌다.
― 누나?
“도윤아.”
― 응.
울먹이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밥 안 먹었어?”
― 밥 싫어.
“왜 싫어?”
― 당근 있어.
나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렇게 심각한 목소리로 울던 이유가 당근이었다니.
“당근 조금만 먹으면 안 돼?”
― 싫어.
“그럼 밥 한 숟가락 먹고, 당근은 아주 작은 거 하나만 먹기.”
― 싫어.
“그러면 누나한테 자동차 부릉 보여줄 힘 없어질 텐데.”
잠깐 정적.
― 힘 있어.
“밥 먹어야 더 세져.”
또 정적.
수화기 너머에서 태건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 먹으면 누나한테 자랑해.
도윤이 훌쩍였다.
― 누나 볼 거야?
나는 복도 벽에 기대섰다.
“응. 도윤이가 밥 잘 먹으면, 누나가 나중에 물어볼게. 오늘 몇 숟가락 먹었는지.”
― 많이 먹으면?
“많이 먹으면 칭찬해줄게.”
― 많이?
“엄청 많이.”
도윤은 잠깐 조용하더니 작게 말했다.
― 그럼 먹을래.
그 말이 어찌나 귀여운지, 나는 결국 웃었다.
“잘했어. 도윤이 최고.”
수화기 너머에서 의자를 끄는 소리, 숟가락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태건이 다시 전화를 받았다.
― 먹는다.
“다행이네요.”
― 너 진짜 뭐냐.
“네?”
― 애가 내 말은 안 듣고 네 말은 듣네.
“말을 예쁘게 해보세요.”
― 했어.
“어떻게요?”
― 먹어.
나는 눈을 감았다.
“그건 예쁜 말이 아니에요.”
― 그럼 뭐라고 해야 하는데.
정말 모르는 목소리였다.
나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이 남자는 아이를 진심으로 돌보면서도, 아이를 달래는 말은 아직 배우는 중이었다. 그 서툰 모양이 이상하게 마음을 간질였다.
“예를 들면... 도윤아, 밥 한 숟가락만 먹어주면 아빠가 엄청 고마울 것 같아. 이런 식으로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 오글거려.
“그래도 해요.”
― 싫은데.
“그럼 계속 저한테 전화하세요.”
말하고 나서 멈칫했다.
이건 협박이 아니라 허락처럼 들렸다.
태건도 잠깐 조용했다.
그 침묵이 이상하게 길었다.
― 그래도 돼?
나는 숨을 삼켰다.
“도윤이 일이라면요.”
― 또 도윤이 핑계네.
“그쪽도 맨날 대잖아요.”
― 나는 아닌 때도 있다고 했잖아.
복도 끝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왔다.
나는 그 빛 아래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태건은 이렇게 사람을 멈추게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가, 갑자기 한 발 가까이 들어왔다.
“수업 들어가야 해요.”
나는 급히 말했다.
― 끝나고 연락해.
“왜요?”
― 도윤이가 몇 숟가락 먹었는지 알려줘야지.
나는 작게 웃었다.
“그건 궁금하네요.”
― 나도.
“뭐가요?”
잠깐 침묵.
― 네가 궁금해할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태건은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 들어가.
전화가 끊겼다.
나는 한참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강의실로 돌아왔다.
하린이 눈빛으로 물었다.
무슨 일?
나는 노트북 메모장에 짧게 적었다.
[도윤이 당근 때문에 밥 안 먹음]
하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그 아래에 내가 덧붙였다.
[태건이 나한테 전화함]
하린의 눈이 반짝였다.
나는 바로 노트북을 닫았다.
수업이 끝난 뒤, 휴대폰에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도윤이 밥 먹음]
그 아래 사진이 있었다.
빈 식판.
정확히는 밥은 거의 다 먹었고, 당근은 아주 작은 조각 하나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사진 한쪽에 도윤의 손가락이 보였다. 엄지 척.
나는 피식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잘했네요]
곧 답장이 왔다.
[누가]
또.
나는 이제 이 패턴에 넘어가지 않기로 했다.
[도윤이요]
[나는]
[당근 빼고 먹이라고 안 한 거요]
[칭찬이 짜네]
[더 바라지 마요]
[끝나고 시간 돼?]
손가락이 멈췄다.
또였다.
끝나고 시간 돼?
어제도 그렇게 시작됐다.
오늘도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답장을 쓰지 못했다.
그때 하린이 옆에서 말했다.
“또 이태건?”
“응.”
“뭐래?”
나는 휴대폰을 살짝 보여줬다.
하린은 눈썹을 올렸다.
“갈 거야?”
“안 가야지.”
“진짜?”
“응. 어제도 갔고, 오늘은 수업도 있고, 과제도 있고...”
말을 하는 동안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도윤이가 너한테 줄 거 있대]
나는 눈을 감았다.
하린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가겠네.”
“아니야.”
“넌 이미 표정이 갔어.”
나는 하린을 노려봤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답장을 보냈다.
[잠깐만요]
보내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잠깐.
우리 사이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단어였다.
오후 수업이 끝난 뒤 학교 정문으로 나갔을 때, 태건은 이번에도 골목 입구에 서 있었다.
오늘은 도윤이 없었다.
그게 먼저 눈에 들어왔다.
“도윤이는요?”
내가 묻자 태건은 손에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어린이집.”
“그럼 이건 뭐예요?”
“도윤이가 주래.”
나는 종이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서툴게 접은 색종이 꽃이 들어 있었다. 꽃잎은 삐뚤빼뚤했고, 테이프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가운데에는 선생님이 도와준 듯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비상 누나]
나는 그대로 굳었다.
“비상 누나?”
태건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비상 연락망 누나는 길다고 줄였대.”
“누가요?”
“도윤이가.”
“선생님이겠죠.”
“아마.”
나는 색종이 꽃을 내려다봤다.
웃겨야 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비상 누나.
말도 안 되는 별명인데, 도윤이 불렀다고 생각하니 조금 귀여웠다.
“웃네.”
태건이 말했다.
나는 급히 입꼬리를 눌렀다.
“안 웃었어요.”
“꽃 마음에 드나 봐.”
“도윤이가 만든 거니까요.”
“나는?”
나는 고개를 들었다.
“네?”
“내가 가져왔잖아.”
또 그런다.
나는 종이봉투를 품에 안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쪽은 배달원.”
태건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배달원한테 너무하네.”
“고마워요. 배달원님.”
그가 낮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이상하게 가까웠다.
우리는 잠깐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학교 정문 앞이라 사람들은 계속 지나갔다. 몇몇은 우리를 알아보고 힐끔거렸고, 몇몇은 휴대폰을 들었다가 내렸다.
나는 예전처럼 숨고 싶어지진 않았다.
불편했지만, 견딜 수 있었다.
태건이 내 손에 들린 꽃을 내려다봤다.
“도윤이가 오늘 너 때문에 밥 먹었어.”
“당근은 남겼던데요.”
“한 조각 먹었어.”
“대단하네요.”
“그러니까.”
그는 잠깐 말을 멈췄다.
“고맙다고.”
나는 그를 봤다.
오늘의 고맙다는 어제보다 더 조용했다.
그리고 이상하게 더 무거웠다.
“고맙다는 말 자주 하네요.”
“네가 자꾸 고마운 짓을 하잖아.”
“그런 말도 쉽게 하지 마요.”
“쉽게 안 해.”
어제와 같은 대답이었다.
나는 심장이 또 이상하게 뛰는 걸 느꼈다.
태건은 한 걸음 다가왔다.
주변은 시끄러웠지만, 우리 사이만 조용해졌다.
“유민서.”
“네.”
“오늘은 안 붙잡을게.”
그 말에 숨이 멈췄다.
그가 어제 한 말을 나도 기억하고 있었고, 그도 기억하고 있었다.
내일은 더 붙잡을 것 같다고 했던 말.
“대신.”
그의 시선이 내 손에 들린 색종이 꽃에서 내 얼굴로 올라왔다.
“내일도 부르면 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도윤이가 부르면.”
태건은 잠깐 멈췄다.
그리고 아주 낮게 덧붙였다.
“내가 불러도.”
심장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나는 색종이 꽃을 품에 꼭 안았다.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런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태건이 나를 보며 말했다.
“대답 안 하면, 좋은 쪽으로 착각한다.”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그쪽은 원래 착각도 마음대로 해요?”
“응.”
“최악이네요.”
“그래서?”
그의 눈빛이 조금 짙어졌다.
“싫어?”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싫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작게 말했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할게요.”
태건은 낮게 웃었다.
“그럼 오늘은?”
나는 그를 다시 봤다.
그의 질문은 늘 그렇게 한 발 더 들어왔다.
오늘은.
오늘 나는 도망가지 않았다.
오늘 나는 도윤의 전화를 받았고, 태건의 메시지에 웃었고, 색종이 꽃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오늘,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 하나를 알게 됐다.
이 이상한 관계가.
생각보다 싫지 않다는 것.
“오늘은.”
나는 작게 말했다.
“꽃 고맙다고 전해줘요.”
태건은 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할게.”
“그리고 당근도 먹으라고 해요.”
“그건 네가 말해.”
“왜요?”
“비상 누나잖아.”
나는 결국 웃어버렸다.
이번엔 숨기지 못했다.
태건도 봤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웃었다.”
“봤으면 됐잖아요.”
“응.”
그의 눈빛이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오늘은 그걸로 됐다.”
나는 색종이 꽃을 품에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오늘은 그걸로 됐다.
그럼 내일은.
대체 어디까지 가게 되는 걸까.
# 특별외전 2화. 나를 선택한 사람- 태건시점 - 결혼 다음 날, 나는 민서가 도윤에게 차이는 모습을 보며 눈을 떴다.도윤의 발이 민서의 뺨 가까이에 놓여 있었다.민서는 아이의 발목을 잡아 이불 안으로 밀어 넣었고, 도윤은 잠든 채 다시 다리를 뻗었다.“도윤아.”민서가 낮게 불렀다.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나는 아이를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미안.”“네가 왜 사과해.”“내 아들이라며.”잠이 덜 깬 채 대답했지만 민서가 웃는 소리는 분명히 들렸다.이상한 아침이었다.도윤은 내 옆에서 자고 있었고, 민서는 같은 반지를 낀 채 내 침대에 누워 있었다.정확히 말하면 우리 침대였다.나는 아직도 그 단어가 낯설었다.우리 집.우리 방.우리 침대.민서를 처음 만났을 때는 절대로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말들이었다.처음 본 유민서는 지나치게 태연했다.길을 잃은 도윤을 붙잡고 있으면서도 울리지 않았고, 내가 나타났을 때 겁먹은 얼굴로 물러나지도 않았다.오히려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도윤이 아빠 맞아요?”확신하지 못하는 목소리였다.도윤이 나를 아빠라고 불렀는데도 의심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맞는데.”내가 대답하자 민서는 도윤을 바로 넘겨주지 않았다.“그럼 아이가 왜 혼자 있었어요?”첫 만남부터 따졌다.나는 그게 싫었다.도윤을 잃어버린 사람은 나였고, 아이를 찾을 때까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는데, 처음 보는 여자가 내가 부족한 아빠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잠깐 놓친 거야.”“잠깐이어도 아이는 무서웠을 수 있잖아요.”민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그래서 더 싫었다.나는 틀린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화를 낼 수 있었다.맞는 말을 하는 사람 앞에서는 내가 잘못했다는 사실부터 마주해야 했다.그런데 도윤은 민서의 손을 놓지 않았다.“누나도 가.”도윤이 말했다.나는 그 말이 불편했다.아이는 원래 낯선 사람을 쉽게 따르지 않았다.어린이집 선생님에게도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처음 보는 사람이 가까이 오면
# 특별외전 1화. 내가 먼저 고른 사람-민서 시점 - 결혼 다음 날 아침, 내가 가장 먼저 본 것은 태건의 얼굴이 아니었다.도윤의 발바닥이었다.정확히는 내 뺨 옆에 놓인 작은 발이었다.나는 눈을 뜬 채 한동안 그 발을 바라봤다.어젯밤 분명 도윤을 가운데 눕혔다. 그런데 자는 동안 세로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아이의 머리는 태건의 옆구리에 붙어 있었고, 두 다리는 내 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도윤아.”작게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발을 살짝 밀자 아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내 얼굴 쪽으로 가져왔다.결혼 첫날밤의 다음 장면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나는 결국 도윤의 발을 붙잡아 이불 안으로 넣었다.그때 태건이 눈을 떴다.“왜.”“네 아들이 나 걷어찼어.”태건은 눈도 제대로 뜨지 않은 채 도윤을 자기 쪽으로 끌었다.“미안.”“네가 왜 사과해.”“내 아들이라며.”잠긴 목소리로 대답하는 얼굴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이런 아침을 내가 선택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이태건을 처음 봤을 때의 나는 절대로 상상하지 못했을 장면이었다.그날의 태건은 무서운 사람이었다.검은 옷.굳은 표정.사람을 믿지 않는 눈.그리고 처음 보는 아이가 그를 보자마자 달려가 안겼다.“아빠.”도윤이 그 한마디를 내뱉었을 때, 나는 내가 알던 세상의 규칙 하나가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저런 사람이 아빠라고?그것도 저렇게 작은 아이의?나는 처음부터 태건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그가 도윤의 아빠라는 이유만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오히려 더 의심했다.아이는 왜 혼자 있었는지.태건은 왜 그렇게 늦게 나타났는지.아이를 제대로 돌보고 있는 것은 맞는지.지금 생각하면 태건 역시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봤을 것이다.자기 아이 옆에 붙어 있으면서 계속 따지는 여자.그런데도 나는 떠나지 않았다.도윤이 내 손가락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때는 아이를 두고 갈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다.돌이켜 보면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꾼 것은 대단한
# 외전 5화. 우리 애가 다시 골랐다 [외전완결]결혼을 정한 다음 날.태건과 민서는 하연을 먼저 만났다.장소는 도윤이 자주 가는 어린이도서관 근처 카페였다. 도윤과 하연의 정기 만남이 없는 날이라 세 사람만 마주 앉았다.하연은 민서의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발견했지만 먼저 묻지 않았다.태건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우리 결혼하기로 했어.”짧은 말이었다.하연의 시선이 태건에게서 민서에게로 옮겨 갔다.놀란 표정은 오래가지 않았다.“축하해.”“고마워.”민서가 대답했다.하연은 물잔을 만지며 잠시 생각했다.“도윤이한테는 말했어?”“아직.”태건이 말했다.“너한테 먼저 알리기로 했어.”하연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허락을 구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도윤보다 먼저 자신의 귀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결혼하면 바로 달라지는 게 있어?”하연이 물었다.“생활은 지금이랑 비슷해.”민서가 대답했다.“이미 같이 살고 있으니까.”“도윤이 돌봄은?”“지금처럼 태건이가 주로 맡고요.”민서는 준비해 온 말을 천천히 꺼냈다.“저도 같은 집에서 생활하는 만큼 제가 선택한 범위에서는 함께할 거예요. 하지만 중요한 결정이나 하연 씨와의 일정은 두 분이 계속 직접 조율해 주세요.”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민서 씨한테 엄마 역할을 부탁할 생각은 없어요.”“알아요.”“도윤이가 결혼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으니까.”하연은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엄마가 바뀐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그 부분부터 설명하려고.”태건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엄마는 그대로 너라고.”하연은 그 말을 듣고 시선을 내렸다.도윤의 엄마라는 자리를 확인받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자신이 그 자리를 온전히 지켜 온 사람도 아니었다.그런데 태건은 하연의 과거를 없던 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현재의 역할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었다.“가족식은 작게 하려고 해.”태건이 말했다.“가까운 사람들만 불러서 밥 먹는 정도로.
# 외전 4화. 이번에는 내가 고르는 약속토요일 오후.도윤은 준우네 집에서 열리는 생일 파티에 갔다.태건은 아침부터 몇 번이나 시간을 확인했다.“네 시에 데리러 가는 거 맞지?”민서가 물었다.“응.”“그럼 세 시간밖에 없네.”“결혼 이야기하는 데 세 시간이 부족해?”태건은 소파에 앉아 민서를 바라봤다.민서는 식탁 위에 서류 몇 장을 펼쳐 두고 있었다.태건이 눈을 가늘게 떴다.“그게 뭐야.”“내가 준비한 말.”“결혼 이야기하는데 서류가 필요해?”“필요해.”민서는 종이를 태건 쪽으로 밀었다.가장 위에는 두 사람의 현재 생활이 적혀 있었다.태건의 센터 근무와 소득.민서의 학업과 프로젝트 일정.공동생활비 분담.도윤의 양육비와 돌봄 체계.하연과의 정기 만남.태건은 문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이거 우리 집 구할 때 다 이야기한 거잖아.”“결혼하면 달라지는 게 있으니까 다시 보는 거야.”“뭐가 달라져.”“법적으로 가족이 되는 거.”민서는 옆에 놓인 자료를 펼쳤다.혼인신고 이후 달라지는 법적 관계와 재산 관리, 의료 상황에서의 보호자 지위, 주거 계약과 세금에 관한 기본적인 내용이었다.태건은 예상하지 못한 얼굴로 민서를 바라봤다.“이걸 다 알아봤어?”“응.”“언제.”“네가 계속 결혼 이야기할 때부터.”태건은 서류를 다시 내려다봤다.결혼이라는 말을 꺼낸 사람은 자신이었다.그런데 정작 결혼이 두 사람의 생활을 어떻게 바꾸는지는 깊이 알아보지 않았다.좋아하고, 함께 살고, 오래 곁에 있고 싶다는 마음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민서는 마음이 부족해서 자료를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오래 함께하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을 외면하지 않은 것이었다.“결혼하면 내 빚도 네가 책임져야 해?”민서가 물었다.태건의 표정이 굳었다.“빚 있어?”“없어.”“그럼 왜 물어.”“서로 모르는 게 있는지 확인하려고.”민서는 질문 목록을 꺼냈다.학자금 대출.개인 채무.보험.저축.가족에게 정기적으로 보내는 돈.태건은
# 외전 3화. 졸업하는 아빠도윤의 유치원 발표회 날.태건은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났다.도윤의 흰 셔츠를 다리고, 바지 주름을 펴고, 유치원에서 보내 준 안내문을 세 번 확인했다.준비물은 없었다.보호자는 열 시까지 강당으로 오라는 내용뿐이었다.그런데도 태건은 도윤의 가방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했다.“아빠.”잠옷 차림의 도윤이 방문에 기대 서 있었다.“왜.”“오늘 가방 안 가져가.”태건의 손이 멈췄다.“알아.”“그런데 왜 봐?”“혹시 필요한 게 있나 해서.”“없어.”도윤은 하품을 하며 욕실로 걸어갔다.“나 노래 안 틀리게 해야 돼.”“집에서 계속 불렀잖아.”“친구들이 틀리면 나도 틀릴 수 있어.”태건은 웃지 않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럴 수도 있지.”도윤이 욕실 앞에서 돌아봤다.“틀려도 돼?”“응.”“선생님 안 화내?”“발표회는 시험 아니야.”도윤은 안심한 얼굴로 욕실에 들어갔다.민서는 그때까지도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전날 프로젝트 회의가 늦게 끝난 탓이었다.태건은 침실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발표회 보호자는 자신과 하연이었다.민서는 집에서 쉬다가 오후에 만나기로 했다.도윤이 직접 정한 일이었고, 민서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그런데 태건은 괜히 침실 안을 한 번 더 바라봤다.민서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빠진 사람은 아니었다.이미 함께 돌아올 집에 있는 사람이었다.하연은 약속 시간보다 십 분 먼저 유치원 앞에 도착했다.짙은 남색 원피스 위에 얇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손에는 작은 꽃다발도, 선물도 없었다.유치원에서 꽃과 장난감을 가져오지 말아 달라고 안내했기 때문이었다.“엄마.”도윤이 하연을 발견하고 뛰어갔다.태건은 따라가지 않았다.하연이 아이 앞에 몸을 낮췄다.“긴장돼?”“조금.”“엄마도 조금 긴장돼.”“엄마는 노래 안 하잖아.”“도윤이 보는 게 처음이니까.”도윤은 잠시 하연을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같이 들어가.”하연은 아이의 손을 잡았다.강당에는
# 외전 2화. 엄마가 오는 토요일“엄마, 내 집 봐.”도윤이 하연의 손을 잡아당겼다.하연은 현관 안쪽을 한 번 더 바라봤다.거실 바닥에는 새 수납장이 놓여 있었고, 민서의 책상 옆에는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조명이 기대어 있었다. 소파 위에는 태건의 겉옷과 도윤의 작은 가방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누군가의 집을 구경하는 일치고는 지나치게 많은 것이 보였다.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누구의 물건이 어디에 놓이는지.자신이 없는 시간 동안 어떤 생활이 만들어졌는지.“잠깐 보고 가세요.”민서가 다시 말했다.하연은 그제야 신발을 벗었다.“실례할게요.”“엄마, 여기.”도윤은 하연이 신발을 정리할 틈도 주지 않고 작은방으로 데려갔다.방문 안쪽에는 자동차 스티커가 붙어 있었고, 창문 아래 낮은 침대에는 공룡 이불이 깔려 있었다.벽 한쪽 수납장에는 자동차와 기차가 줄을 맞춰 들어가 있었다.“이게 파란 자동차.”도윤이 가장 먼저 꺼낸 것은 민서의 이전 집에 두고 다니던 장난감이었다.“누나 집에 있던 거 기억나?”하연은 자동차를 받아 들지 않고 아이가 든 모습을 바라봤다.“응. 도윤이 자리라고 했던 거.”“이제 여기 있어.”“좋겠다.”“엄마 집에도 내 거 있어?”질문은 망설임 없이 나왔다.하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응.”태건이 그녀를 바라봤다.하연은 도윤에게 설명했다.“지난번에 같이 산 기차책이랑 도윤이 쓰는 컵 하나 있어.”“내 컵?”“초록색.”“왜 나한테 안 보여 줬어?”“도윤이가 엄마 집에 올 수 있게 되면 보여 주려고 했어.”도윤은 곧바로 물었다.“나 언제 가?”하연은 태건 쪽을 보지 않았다.도윤에게 묻고, 태건이 대신 답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피하지 않았다.“아직 날짜는 안 정했어.”“왜?”“엄마 집에서 도윤이가 편하게 지낼 수 있는지 아빠랑 먼저 확인해야 해.”“침대 있어?”“도윤이가 낮잠 잘 수 있는 자리부터 만들려고.”도윤은 자신의 방을 돌아봤다.“내 침대는 여기 있는데.”“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