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희수와 재원이 미용실 근처 카페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재원이 희수 손을 잡고 걷는 평범한 오후였다. 하늘이 맑고 거리는 한산했다. 별일 없는 주말이었다.그런데 희수는 걸으면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시선이었다. 어딘가에서 누가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희수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훑었다. 카페 앞 벤치에 앉은 노인, 편의점에서 나오는 아주머니, 자전거 타는 아이들. 딱히 이상한 사람은 없었다.희수는 그냥 넘겼다. 기분 탓이겠지.근데 며칠이 지나도 그 느낌이 계속됐다. 미용실 마감할 때도, 재원이랑 저녁 먹으러 갈 때도. 희수는 결국 재원한테 말했다."있잖아, 요즘 누가 보는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들어."재원이 멈췄다."언제부터.""한 일주일 됐나? 확실하지 않은데 자꾸 그래."재원의 표정이 굳었다. 희수는 그 표정을 보며 살짝 후회했다. 말했다가 재원이 과도하게 반응할 것 같았다."기분 탓일 수도 있어. 혜리 씨 때문에 예민해진 건지도 몰라.""아니야. 확인해볼게."재원이 단호하게 말했다. 희수는 잠깐 재원을 봤다. 저 눈빛 한번 켜지면 멈추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업무 모드가 켜졌다. 미행범 색출 프로젝트 시작이었다.희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 이거 좀 크게 말했나.재원이 이미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희수 옆에 서서 자연스럽게 거리를 훑는 눈빛이었다. 평소에 보고서 검토하던 그 집중력이 지금 동네 골목을 향하고 있었다. 희수는 그 옆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 남자한테 뭔가 말하면 반드시 행동으로 나온다는 걸 알면서도 왜 말했지.근데 사실 말하고 나서 좀 홀가분하기도 했다. 혼자 며칠 동안 찜찜하게 안고 있었는데, 말하고 나니까 덜했다. 재원이 알면 알아서 뭔가 하겠지. 그리고 재원이 하면 뭔가 나올 거라는 것도 알았다.문제는 그 뭔가가 얼마나 진지하게 나올 거냐였는데.---그날부터 재원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퇴근하면서 미용실 주변을 빙 돌았다. 자연스럽게 걷는 척하면서 수상한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희수
이동현은 팀 공유 폴더에서 기획안을 찾다가 멈췄다. 파일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분명히 자기가 저장해둔 이름인데, 누군가 수정한 것 같았다. 동현은 옆 자리를 봤다. 진혜리가 노트북을 보며 뭔가를 타이핑하고 있었다."저기요."혜리가 고개를 들었다."혹시 공유 폴더 기획안 파일 건드셨어요?""아, 네. 정리하다가 파일명이 통일이 안 돼 있어서 제가 좀 바꿨어요."동현은 잠깐 말을 참았다. 바꿨어요. 말은 간단한데, 다른 사람 파일을 동의 없이 바꾼 거였다. 신입이 들어오자마자."팀 파일은 담당자한테 먼저 말하고 바꾸는 게 맞아요."혜리가 잠깐 동현을 봤다. 그 눈빛이 묘했다. 지적 받는다는 게 당황스러운 것 같기도 했고, 별거 아닌 걸 크게 말한다는 것 같기도 했다."아, 몰랐어요. 다음엔 그렇게 할게요."대답은 했는데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동현은 그냥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재원 대리님 후배라고 들어온 애가 첫날부터 팀 파일을 마음대로 바꾸는 거, 동현은 그게 마음에 걸렸다. 작은 일이었지만 작지 않았다.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저 사람이 재원 대리님 때문에 희수 누님을 불편하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회식 자리에서 있었던 일도, 미용실에 계속 오는 것도. 동현은 그걸 옆에서 다 봤다. 근데 본인이 나설 수 있는 게 없었다. 직접 뭔가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게 답답했다.오후에 회의 자료를 준비하면서 동현은 또 혜리랑 엮였다. 이번엔 혜리가 먼저였다."저기, 이동현 씨. 이 자료 어디서 찾아요?""뭐요?""팀장님이 작년 3분기 실적 자료 가져오라고 했는데."동현은 잠깐 혜리를 봤다. 스스로 찾아볼 생각은 안 하고 바로 물어보는 거였다. 동현도 신입 때 이것저것 물어봤으니까 뭐라고 할 수는 없었는데, 물어보는 방식이 좀 달랐다. 부탁하는 게 아니라 당연히 알려줄 거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톤이었다. 마치 재원 대리님 후배라는 게 여기서도 통할 거라는 것처럼."공유 폴더 실적 관리 탭에 있
금요일 저녁이었다.재원이 미용실에 들어왔을 때 희수는 마감 정리를 하고 있었다. 재원이 옆에 서자 희수는 수건을 접으며 말을 꺼냈다."자기야.""응.""혜리 씨 건, 자기 선에서 처리해."재원이 잠깐 희수를 봤다."내가?""응. 내가 나서기 전에 자기가 먼저 하는 게 맞잖아. 직장 후배니까."재원이 잠깐 생각했다. 희수가 이 얘기를 꺼내기까지 얼마나 참았는지 알 것 같았다. 지난번 회식 자리도, 혜리가 미용실에 오는 것도, 희수가 다 보고 느끼면서도 직접 나서지 않고 기다린 거였다. 그 기다림이 오늘 이 한마디로 나온 거였다."회사에서는 어렵겠어.""알아.""밖에서 따로 만나야 할 것 같은데. 괜찮아?"희수가 재원을 봤다. 재원이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혜리를 밖에서 만나는 게 희수 눈엔 어떻게 보일지 알면서도, 그게 맞는 방법이라는 걸 알아서 물어보는 거였다. 희수는 그 눈빛을 보며 잠깐 웃었다."물어봐줘서 고마워. 해."재원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금방 끝낼게."희수는 그 말을 들으며 수건을 정리했다. 이 남자가 금방 끝낸다고 하면 금방 끝내는 사람이라는 거 알았다. 그리고 어떻게 끝낼지도 알 것 같았다. 서류는 이번엔 없겠지. 대신 더 단호할 거였다.희수는 잠깐 재원을 봤다. 허락을 구하는 사람이 됐다. 예전 재원이었으면 본인이 알아서 처리했을 거였다. 희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근데 지금은 달랐다. 혜리를 밖에서 만나는 게 희수 눈에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고, 그래서 먼저 물어보는 거였다. 그 변화가 희수한테는 작지 않았다."자기야.""응.""고마워. 진짜로."재원이 멋쩍게 시선을 내렸다. 희수는 웃으며 가방을 들었다.---토요일 오후였다.재원이 나가면서 희수한테 문자를 보냈다.'혜리 만나고 올게. 한 시간 안에 끝낼게.'희수는 그 문자를 보며 미용실 청소를 시작했다. 한 시간. 재원이 한 시간이라고 했으면 한 시간이었다.정확히 오십이 분 후에 재원한테 문자가 왔다.'끝났어. 들어가도 돼?'희수는 웃
목요일 저녁 아홉 시였다.희수는 미용실 마감을 끝내고 집에 가려던 참이었다. 재원이 오늘 팀 회식이 있다고 했다. 늦게 끝날 것 같다고, 먼저 들어가라고 했었다. 희수는 그러겠다고 했다.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여보세요?""언니, 저 혜리예요. 재원 오빠가 좀 많이 취하셨는데요. 오실 수 있어요?"희수는 잠깐 멈췄다."많이요?""네, 평소에 잘 안 드시는 분이 오늘 좀 많이 드셔서요. 제가 챙기고 있는데 언니가 오시면 더 좋을 것 같아서요."목소리가 걱정스러운 척 자연스러웠다. 희수는 잠깐 생각했다. 재원이 술을 잘 못 한다는 건 알았다. 원래 잘 안 마시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많이 마셨다면 걱정이 되는 게 맞았다."어디예요?"혜리가 주소를 보내줬다. 희수는 가방을 들고 나섰다. 걸어가면서 재원한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갔지만 받지 않았다. 희수는 발걸음을 조금 빠르게 했다.그러면서도 머릿속 한켠에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혜리가 왜 재원 연락처 두고 희수한테 전화했을까. 재원이 취했으면 재원 핸드폰으로 희수한테 연락하게 하면 되는 거잖아. 근데 굳이 혜리가 직접 전화했다.희수는 그 생각을 일단 접었다. 일단 가보고 판단하면 됐다.그래도 발걸음은 빨랐다. 재원이 걱정되는 건 사실이었다. 혜리가 만든 상황이든 아니든, 재원이 불편한 자리에 있다는 건 맞을 거였다. 술자리에서 혼자 버티고 있을 재원 얼굴이 눈에 그려졌다. 저 남자 그런 자리 진짜 싫어하는데.희수는 핸드폰으로 재원한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 시끄러운 자리라 못 들은 건지, 아니면 혜리가 의도적으로 핸드폰을 멀리 둔 건지 알 수 없었다.희수는 걸음을 더 빠르게 했다.---식당 앞에 도착했을 때 밖에 누군가 서 있었다.이동현이었다.동현은 희수를 보자마자 눈이 커졌다. 그러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희수 쪽으로 빠르게 걸어왔다."누님, 어떻게 오셨어요?""혜리 씨가 연락했어. 재원이 취했다고."동현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
오전 열한 시였다.희수가 손님 마무리를 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이동현이었다.문자였다.💬 동현: 누님 저 지금 역대급 장면 목격 중인데요희수는 손을 멈추지 않고 핸드폰을 흘끗 봤다.💬 희수: 뭔데💬 동현: 대리님이 진혜리 씨 불러서 얘기하고 있어요💬 동현: 지금 회의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데💬 동현: 대리님 표정이 완전 업무 모드예요 ㅋㅋㅋㅋ희수는 핸드폰을 카운터 위에 올려두고 손님 강아지를 마저 손질했다. 재원이 처리한다고 했던 게 오늘이구나. 동현이 또 목격한 거구나. 희수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손을 움직였다.💬 동현: 대리님이 서류 한 장 내밀었어요💬 동현: 서류는 또 왜 내밀어요 ㅋㅋㅋㅋ 업무 얘기인 척하려고요?희수는 그 문자를 보며 픽 웃었다. 재원답다. 선 긋는 자리에도 서류를 가지고 나오는 남자.💬 동현: 혜리 씨 표정이 좀 굳었어요💬 동현: 근데 대리님은 아랑곳 안 하고 계속 말하는 중💬 동현: 누님 대리님 진짜 감정 없는 사람처럼 말하는 것 같아요 ㅋㅋㅋㅋ 근데 저건 의도적인 것 같기도 하고손님이 나가고 나서 희수는 핸드폰을 제대로 들었다. 동현 중계가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희수는 카운터에 기대서 읽기 시작했다.💬 동현: 대리님이 혜리 씨한테 앉으라고 했어요💬 동현: 근데 본인은 안 앉음 ㅋㅋㅋ 서있어요💬 동현: 뭔가 면접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희수: ㅋㅋㅋㅋㅋ 서류는 아직 들고 있어?💬 동현: 네 아직 들고 있어요💬 동현: 혜리 씨가 오빠 왜 이래요 하는 표정인데💬 동현: 대리님은 그 표정 못 읽는 것 같아요 아니면 읽고도 무시하는 건지💬 희수: ㅋㅋㅋㅋ 후자일 가능성 높음💬 동현: 맞아요 누님 대리님 그런 사람이에요 ㅋㅋㅋㅋ희수는 핸드폰을 보며 혼자 킥킥거렸다. 재원이 저 자리에서 얼마나 불편할지 눈에 선했다. 감정적인 상황에서 서류를 꺼내드는 남자. 앉으라고 하고 본인은 서있는 남자. 그게 재원이었다.---💬 동현: 대리
"누님,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희수는 핸드폰을 귀에 댄 채 대답했다."말해봐.""그게, 오늘 회사에서 진혜리 씨가요—"그때 수화기 너머로 소리가 들렸다."야, 이동현. 너 지금 뭐해."재원이었다.희수는 핸드폰을 내리지 않았다. 그냥 들고 있었다. 동현이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아, 대리님. 저 그냥 개인 통화 중이었어요.""누구랑.""그, 그냥 아는 사람이요.""핸드폰 줘봐.""네?""희수 목소리 들렸어. 줘봐."잠깐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희수는 미용실 의자에 앉은 채 그 소리를 들었다. 재원이 동현한테서 핸드폰을 빼앗으려는 것 같았다. 동현이 버티는 것 같았다."대리님, 잠깐만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나한테 하면 되잖아.""그게... 대리님 얘기라서요."재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뭔데."동현이 잠깐 망설이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오늘 진혜리 씨가 대리님한테 좀 심하게 붙더라고요. 복도에서 팔도 잡고. 대리님이 빼셨는데 혜리 씨가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아서. 누님이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전화한 거예요."희수는 핸드폰을 잡은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재원이 한동안 말이 없었다."...그걸 왜 희수한테 말해.""누님이 알아야 하지 않아요?""내가 처리할 거야.""대리님이 모르셨잖아요. 혜리 씨가 대리님 좋아하는 거."희수는 그 말을 들으며 숨을 살짝 참았다. 재원이 몰랐다. 혜리가 재원을 좋아한다는 걸. 그리고 동현은 알고 있었다. 희수는 이 대화를 듣고 있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재원이 낮게 말했다."알았어. 끊어.""누님한테—""내가 한다고."뚝.전화가 끊겼다.희수는 핸드폰을 귀에서 떼지 않고 잠깐 그대로 있었다. 재원이 알았다고 했다. 내가 처리한다고 했다. 동현한테 끊으라고 했다. 그 말들이 순서대로 머릿속에서 재생됐다.재원이 몰랐다는 게 먼저 들어왔다. 혜리가 재원을 좋아한다는 걸. 집안끼리 친하고 오래 알던 후배인데, 그 후배가 재원을 좋아한다는 걸 재원 본
가게 한켠에서 머리를 질끈 묶고 정리하던 희수는 재원의 루틴이 오늘은 단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 [12:30 / 15:40 / 18:00] 같이 칼같이 들어오던 보고였다.희수는 처음엔 “바빴겠지” 하고 넘겼다.하지만 점심시간도, 퇴근 시간도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자, 슬슬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왜 보고 안 해…?’예측할 수 없는 상황은 희수에게 불안감이라는 감정을 선물했다.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희수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고는, 진심을 담아 길게 메시지를 보냈다.[자기 늦어도
가게 한켠에서 머리를 질끈 묶고 정리하던 희수는재원이 아침부터 보내는 ‘초건조 모드’를 보며슬슬 불쾌함이 쌓여갔다.[회의들어간다] 09:30[끝났다] 10:10[밥먹고 쉰다] 12:31[일하는 중] 13:05평소에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오늘은 유난히 ‘정보만 던지고 사라지는’ 느낌이었다.심지어 온도도 없음.희수는 메시지를 보낼 때마다나름의 감정을 조금씩 섞었다.[나 지금 밥먹었어!] 13:30[오늘 손님 많아 ㅠㅠ 지쳐어~] 14:25그런데 돌아오는 답은—[네에] 15:40[집이다 쉰다] 15:4
무릎 수술 후 회복기.희수는 여전히 두꺼운 보조기를 차고 있었다.집 안에만 갇혀 있는 게 답답해, 재활 겸 아주 천천히 집 앞 편의점을 다녀오는 길이었다.절뚝, 절뚝.걸음은 느렸고, 땅거미가 내려앉은 골목은 조용했다.봉지를 든 손이 조금 시리다고 느꼈을 때였다.저만치 앞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어?’재원이었다.칼퇴근을 하고 집 근처로 온 모양이었다.반가움에 희수가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하려던 순간, 그녀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그는 혼자가 아니었다.옆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직장
그날의 ‘외면 사건’ 이후, 며칠이 지났다.표면적으로는 다시 평화로운 루틴이 돌아왔다.[기상] 06:11[출근 준비] 06:12하지만 희수의 마음속에는 아직 잔여물이 남아 있었다.친구들에게 하소연했을 때, 돌아온 반응은 예상대로였다.“야, 그거 완전 나쁜 놈 아니야?”“지인한테 숨기는 거? 빼박이지. 어장관리 아니야?”“희수야, 너 가스라이팅 당하는 거 같아.”친구들의 말은 논리적이었다.사생활 숨김, 차가운 말투, 감정 회피.전형적인 ‘나쁜 남자’의 체크리스트와 일치했다.희수도 흔들리지 않은 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