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단체 여행 전날 밤.
희수의 방 바닥은 이미 캐리어와 파우치, 정리 체크리스트로 보이지 않았다.
철저한 준비는 희수의 기본값. 특히 ‘재원과 함께하는 첫 단체 여행’이라 집중도 120%다. 허둥대는 덜렁이 처럼 보이면 안되니까.휴대폰은 계속 울렸지만, 중요한 메시지는 하나도 없었다.
[MT 추진 (6)] 단톡방이었다.희수: 민지, 알코올 장본 거 영수증 꼭 챙겨. 정산해야 하니까.
희수: 지용, 펜션 예약 시간 다시 확인하고 공유해. 실수 없이.총무 모드 풀가동.
턱도 살짝 들린 효율의 자세.그때—
재원의 야간근무 후 루틴이 도착했다.[집 도착] 00:32
[씻고 쉰다] 00:33희수는 바로 답을 쓰려다,
단톡에서 폭탄 질문이 올라오는 걸 보고 멈췄다.민지: 야 희수! 너 재원이랑 같이 자냐?
“…뭔 소리야.”
희수가 코웃음 치며 답하려던 찰나,
민지: 근데 펜션 사장님이 방 구조 여자3 남자3이라고 못 박았다며?
“아… 맞다. 그거…”
그 부분 확인을 놓친 걸 깨닫자
희수는 약간 짜증이 밀려왔다. 바로 재원에게 넘어갔다.[고생했어 내자기❤️] 00:45
[자기야, 우리 내일 방 어떻게 할까?] 00:45겉으론 가볍게 보냈지만,
속으로는 희망이 찰랑거렸다.그러나 재원의 답은 칼같았다.
[왜요?] 00:56
[다 같이 가는데.] 00:56 [여자방 들어가세요.] 00:56“…???”
여자방… 들어가라고?
희수는 화면을 들고 그대로 굳었다.
이건…
너무 단호한 거 아니냐?희수는 마지막으로 감정 한 방을 넣어봤다.
[우리 첫 여행인데 같이 자면 안 돼?] 00:59
그랬더니 돌아온 건,
전형적인 ‘재원식 냉정함’이었다.[불편하지. 사람 많잖아요.] 01:01
[생각 좀 하세요.] 01:02“…하? 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
말은 싸늘하고,
논리는 완벽하고, 반박은 불가능하고…그게 더 열 받는다.
희수는 베개를 끌어안고 뒤집어졌다.
“아 진짜…! 감정이란 게 없냐고…!”
엎어져서 침대를 팡팡 두드리며 화를 참아본다. 메세지에 쏟아내고 싶은걸 꾹 참아보기로 했다.
재원식 논리에 반박하려던 손가락을 멈추고 희수는 가만히 생각해봤다.
근데 또
‘단체여행 인원 3:3 → 남녀 나눠 자는 게 효율적임’ 이라는 계산이 떠올랐고…“아… 맞는 말이네. 또 맞네. 또…!”
서운+이성+짜증이 뒤엉켜 머리가 지끈거렸다.
희수는 답장을 어떻게 보내야 감정 소모 없이 끝날지 고민했다.
물고 늘어지는 순간 싸움으로 번지는 서로의 논리로 맞불을 놔볼까? 말까?
그때—
재원에게서 톡이 하나 더 왔다.[내일 도착 시간 보내드릴게요] 01:15
[짐 무거운 건 제가 들면 됩니다] 01:15희수는 멍한 눈으로 메시지를 바라봤다.
'방은 안 된다.'
→ 로맨스 차단.하지만
‘짐은 내가 든다.’ → 실질적 불편함 해결.그리고 순간 떠오른 바디클렌저 사건.
“아… 이 인간은 왜 이런 식으로 챙겨…”
감정 대신 효율.
로맨스 대신 실속. 말투는 차갑지만 행동은 다정.너란 남자 대체 속을 어떻게 해야 알 수 있는 거지? 오늘은 메모장을 켤 힘도 없다.
희수는 결국 한숨을 쉬며 타자를 쳤다.
[알겠어. 내일 봐요.] 01:20
[...같이 못 자는 건, 일단 생각해볼게요.] 01:20답은 1초 컷.
[네에] 01:20
[조심히 주무세요] 01:21희수는 휴대폰을 캐리어 위에 던져두고 중얼거렸다.
“진짜… 연애는 하는 거 맞지? 좋아는 하는데 왜 표현은 이래…”
'이거 나만 지치는 연애 이런건가?'
대체 이 남자는 어떤 연애를 해왔었 던 걸까? 문득 궁금해지는 그의 연애사.
물어보면 대답은 절대 안해주겠지만, 궁금하긴 하다.
희수는 나중에 기회를 봐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불을 뒤집어쓰며 한마디 더 내뱉었다.
“전야제부터 이러면… 내일은 대체 어떻게 되려나.”
서운함 반 기대감 반.
그리고 희수는 아직 모른다.
여행에서, 재원이 평소와 0.1초도 다르지 않은 말투로 예상 밖의 행동을 하게 될 거라는 걸.재원의 의외의 모습에 희수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이 연애 지금 제대로 굴러가고 있는 거 맞는 걸까?
아버지의 ‘폭탄선언’이 지나간 식탁은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처럼 고요했다. 어머니 영란은 여전히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며 산더미처럼 쌓인 그릇들을 챙겨 주방으로 향했다. 아버님은 말없이 다시 신문을 펼쳐 드셨지만, 거칠게 넘기는 신문지 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어머니, 제가 할게요. 앉아 계세요.”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영란 어머니의 뒤를 따랐다. 빈 그릇을 뺏어 들려는 내 손을 어머니가 황급히 가로막았다.“에구, 희수야! 안 된다! 오늘 같은 날에 우째 손님 손에 물을 묻히노. 저기 가서 재원이랑 같이 좀 쉬어라. 내 금방 한다!”“아니에요, 어머니. 저 설거지 잘해요. 저 사람이랑 같이하면 금방 끝나요.”내가 고집을 피우며 고무장갑 쪽으로 손을 뻗자, 뒤에서 묵직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언제 다가왔는지 재원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며 어머니 앞을 가로막았다.“엄마, 희수 말이 맞아요. 희수랑 둘이 금방 치울 테니까, 엄마는 아부지 옆에서 좀 쉬세요.”“니가? 안재원 니가 설거지를 한다고?”어머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평소 집안일이라면 제 방 정리 빼고는 딱히 손대지 않던 무뚝뚝한 아들이 앞치마를 집어 드는 광경이 생경했던 모양이다. 재원은 묵묵히 소매를 걷어붙이며 나를 싱크대 앞으로 밀어 넣었다.“희수가 헹구면 제가 닦을게요. 엄마, 아까 요리하느라 고생하셨잖아요.”재원의 덤덤한 말에 영란 어머니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어머니는 나를 한 번, 재원을 한 번 번갈아 보더니 내 손등을 따뜻하게 토닥였다.“아이고... 우리 아들이 희수 만나더니 사람 다 됐네. 진짜 예쁘다, 예뻐. 그래, 그럼 내 오늘은 요 예쁜 뒷모습 구경 좀 하다가 아부지 옆으로 갈란다.”어머니는 정말로 기분이 좋은지 연신 “어쩜 저리 잘 어울릴꼬”를 연발하며 거실로 향했다. 병수 아버님의 곁에 앉아 “아부지예, 우리 아들 저래 다정한 거 보셨습니까?”라며 자랑을 늘어놓는 소리가 주방까지 들려왔다.수도꼭지에서
재원과 헤어지고 보름이 지났던 어느 밤이었다.가만히 서 있어도 가슴 한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그 구멍 사이로 찬 바람이 들이칠 때마다 희수는 숨을 쉬는 법을 잊어버리곤 했다. 잊어야 한다고 다짐할수록 재원이라는 이름은 선명해졌고, 지워내려 애쓸수록 그에 대한 갈망은 온몸의 신경을 타고 번졌다. 결국 희수는 홀린 듯 기차표를 끊었다. 재원이 나고 자랐으며, 그가 그토록 사랑한다던 바다가 있는 곳. 그곳에 가면 이 지독한 심장의 통증이 조금은 가라앉을 줄 알았다. 아니, 사실은 그가 숨 쉬던 공기라도 한 번 마셔보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밤 11시의 광안리 해변. 검은 바다는 거대한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파도를 뱉어내고 있었다. 희수는 모래사장 끝자락, 바닷물이 발등을 적시는 곳에 주저앉았다. 파도가 밀려왔다 나갈 때마다 발밑의 모래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제 영혼도 함께 쓸려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단순히 ‘보고 싶다’는 말로는 이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 심장이 비틀리고 짓눌려서, 당장이라도 그의 이름을 비명처럼 내뱉지 않으면 숨이 멎어버릴 것 같은 고통이었다.‘나쁜 놈. 죽일 놈. 미련 곰탱이 같은 놈.’희수는 젖은 모래를 손톱이 하얘지도록 꽉 쥐었다.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건 거친 욕설이었지만, 뺨을 타고 흐르는 건 투명한 그리움이었다. 희수는 바다를 향해 악을 쓰듯 나지막이 내뱉었다.“안재원, 너도 딱 나만큼만 아파라. 아니, 나보다 훨씬 더 아파서 죽을 것 같았으면 좋겠어.”희수의 목소리가 파들파들 떨렸다.“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숨 쉬는 매 순간마다 내 이름이 목구멍에 걸려서 꺽꺽거리면서 울어버려라. 너 진짜 나보다 백 배는 더 괴로워야 해. 내가 여기서 이렇게 무너지고 있는 만큼, 너도 피눈물을 쏟아야 공평한 거잖아.”하지만 저주를 퍼부으면 퍼부을수록 가슴 속의 갈증은 더 심해졌다. 그를 미워하려 애써도, 결국 끝에 남는 건 지독한 그리움뿐이었다. 희수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장장 400km에 달하는 대장정을 앞두고 재원은 비장했다.평소 같으면 고속도로 휴게소 위치부터 도착 시간까지 분 단위로 브리핑했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핸들을 잡은 재원의 손등에 핏줄이 돋아 있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그를 보며 희수가 웃음을 터뜨렸다.“자기야, 얼굴 좀 풀어. 누가 보면 우리 지금 본가 털러 가는 줄 알겠어.”“...그냥,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는 것뿐이야.”재원의 뻣뻣한 대답은 고속도로 진입 2시간 만에 무너졌다. 낙동강 휴게소에 잠시 멈췄을 때, 재원이 화장실로 사라진 사이 희수는 간식 가판대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재원이 평소에 좋아하던 '앙버터 호두과자'가 있었다.잠시 후, 볼일을 마치고 차로 돌아온 재원은 시동을 걸려다 옆에서 끼쳐오는 고소한 향기에 멈칫했다.“자, 아~ 해봐. 곰탱아.”희수가 갓 꺼낸, 버터가 두툼하게 낀 호두과자를 입가에 들이밀었다. “희수야, 이런 거 먹으면 이따 저녁에 엄마가 해준 음식 많이 못 먹어.”“아, 그냥 먹어! 자기 이거 좋아하잖아. 빨리!”재원은 짐짓 못 이기는 척 입을 벌렸다. 바삭한 빵 속에 녹아내리는 차가운 버터와 달콤한 팥앙금. 재원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크게 확장됐다. “...어때? 맛있어?”“...응. 팥이 적당히 달고... 버터가 고소하네. 딱 하나만 더 줘.”재원은 무심한 척 핸들을 잡았지만, 입가에 번지는 미소까진 숨기지 못했다. 희수가 하나씩 넣어주는 호두과자를 넙죽넙죽 받아먹으며, 재원의 차는 어느새 부산 해운대 초입에 들어서고 있었다.***부산 본가는 그야말로 ‘창과 방패’의 격전지였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진한 갈치조림과 구수한 전 냄새. 그리고 그 중심에 화사한 레이스 앞치마를 두른 재원의 어머니, 영란이 서 있었다.“어머! 왔나! 우짜면 좋노, 실물이 백 배는 더 예쁘네!”어머니 영란은 특유의 높은 톤과 화사한 미소로 희수를 반겼다. 희수가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영란은 그녀의 손을 덥석 잡
거실 바닥의 노란 이불 속에서 눈을 뜬 재원은 한참 동안 천장을 응시했다. 털 알레르기 약 기운 때문인지, 밤새 희수의 눈치를 보느라 얕은 잠을 잔 탓인지 온몸이 찌푸듯했다. 재원은 조심스럽게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목이 말랐지만 찬장 문을 열려다 멈칫했다. 어제 본 ‘텅 빈 선반’의 잔상이 여전했다. 자신이 함부로 컵을 꺼내는 행위조차 희수가 공들여 만든 ‘자신만의 평화’를 깨뜨리는 침범 같아 조심스러웠다.“...일어났어?”부스스한 머리로 주방 문턱에 선 희수가 재원을 바라봤다. 재원은 컵을 잡으려던 손을 슬그머니 내리며 쭈뼛거렸다. “응. 물 좀 마시려다가... 어느 컵을 써야 할지 몰라서.”“아무거나 써. 자기가 내 눈치 보는 거, 나도 마음 안 편해.”희수의 말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지만, 그 안에는 재원을 향한 안쓰러움이 섞여 있었다. 희수는 식탁 의자를 빼고 앉으며 재원을 불렀다.“자기야, 앉아봐. 우리 이렇게 계속 긴장하고 지낼 순 없잖아. 서로 지킬 건 지키고, 존중할 건 존중하자고. 가이드라인... 아니, 제대로 된 운영 합의서를 쓰자.”“합의서? 양식은 내가 잡아볼까?”재원의 눈이 본사 팀장 모드로 순식간에 복귀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태블릿 PC를 가져와 식탁 위에 올렸다. 희수는 그 모습에 실소를 터뜨리면서도, 보내준 자료들을 토대로 조항을 읊기 시작했다.[제1조. 사실과 해석의 분리]-사실->감정->요청 순으로 대화하기“자기야, 앞으로 서운한 게 있으면 '사실-감정-요청' 순으로 말해. '왜 매번 그 모양이야?'라고 묶어서 공격하지 말고.”“...메모 완료. 사실: 계획 변동 발생, 감정: 피로함, 요청: 24시간 전 공유. 알겠어. 감정 확대를 줄이는 데 효율적이겠군.”"아니 뭘 그렇게까지..."[제2조. 숫자 경계선 합의]-일주일에 3회 만나기. 피곤하거나, 더 보고 싶으면 대화로 합의하기.“우리 루틴 말이야. 일주일에 한 번은 너무 적고, 매일은 자기가 힘들잖아. 주간 빈도 3회,
주방 문턱을 밟으려던 재원의 발걸음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등 뒤로 꽂히는 희수의 외침은 날카로운 화살보다 더 아프게 그의 뒷덜미를 파고들었다.“당장 나가! 우리 집 비밀번호도 바꿀 거야! 당장 네 집으로 가버려!”재원은 멈춰 선 채 냉장고 문고리를 잡고 있던 제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머릿속은 방금 전까지 ‘얼음주머니 위치’와 ‘희수의 부어오른 발가락’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희수의 불호령이 떨어지는 순간, 재원의 사고회로는 거대한 해일이라도 만난 듯 하얗게 씻겨 내려갔다.‘...가라고?’재원은 붉어진 눈을 깜빡였다. 평소의 재원이라면 이 상황에서 뒤를 돌아 “얼음찜질부터 하는 게 순서야”라고 설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재회 이후, 그는 희수의 감정 앞에서는 유독 무력해졌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희수의 목소리를 들으며 버티고 서 있을 배짱이, 지금의 그에게는 없었다.결국 재원은 주방 안으로 한 발짝도 들이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렸다. 희수가 던진 쿠션이 바닥을 뒹구는 소리를 뒤로하고 현관으로 향하는 그의 어깨가 유난히 무거웠다. 쿵, 소리를 내며 현관문이 닫히고 복도의 서늘한 공기가 뺨에 닿는 순간, 재원은 제 뺨을 한 대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자신은 지금 얼음을 가져오려던 길에, 희수가 나가라고 했다고 진짜 쫓겨나 버린 것이었다.***복도 벽에 기댄 재원은 멍하니 차 키를 만지작거렸다. 초코와 사투를 벌이며 얻은 털 알레르기 덕분에 코는 여전히 맹맹했고 눈가는 따가웠다. 하지만 지금 재원을 더 괴롭히는 건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었다.‘가라고 했다고 진짜 나오면 어떡해. 너 바보냐?’스스로를 향한 자책이 쏟아졌다. 평소라면 1초 만에 결론을 내렸을 문제였지만, 희수와 관련된 일이라면 그는 늘 판단력이 흐려졌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발걸음이 멈췄다. 이대로 집에 가는 건 영영 희수를 잃는 것과 다름없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재원은 비상구 계단에 주저앉아 자기가 뱉은 말을 복기했다.사실을 말하는 게
“아얏! 아이고... 발가락이야.” 바닥에 주저앉아 발가락을 움켜쥔 희수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의자 위에서 기적 같은 균형감각으로 살아남은 재원이 천천히 내려왔다. 보통의 로맨스 소설 남주인공이라면 당장 안아 올리며 "괜찮아?"라고 물었겠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바닥에 구르는 희수를 내려다보며 훌쩍거리는 코를 한 번 팽 풀더니, 아주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정도면 골절 아니네. 가동 범위 보니까 단순 타박상이야. 누가 그렇게 조심성 없이 징징대래?” 희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지 성격 어디 안 간다고, 좀 받아주니 원래 본 모습이 나오나보다. 발가락 끝이 욱신거리는 고통보다 그의 그 무심한 말투가 더 아프게 가슴을 찔렀다. 붉어진 눈시울로 재채기를 참아가며 저런 독설을 내뱉는 꼴이라니. “뭐? 징징? 야! 사람이 다쳤는데 걱정은 못 할망정!” “걱정할 단계가 아니니까 사실을 말하는 거야. 얼음주머니 가져올 테니까 가만히 있어.” “됐어! 필요 없으니까 가! 당장 나가!” 희수는 홧김에 옆에 있던 쿠션을 재원에게 날렸다. 재원은 날아오는 쿠션을 가볍게 피하더니,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주방을 향했다. 희수는 그런 재원의 뒷모습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너 들어올 생각 하지 마! 우리 집 비밀번호도 바꿀 거야! 당장 네 집으로 가버려!” 재원은 주방 문턱에서 멈칫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관으로 향했다. 평소 같으면 “논리적으로 대화하자”며 버텼을 그가, 희수의 서슬 퍼런 기세에 진짜로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쿵. 뭐야, 나가란다고 진짜 나간거야? 정적이 찾아온 거실. 희수는 얼떨떨했다. 진짜로 가버릴 줄은 몰랐다. 발가락은 여전히 욱신거렸고, 텅 빈 집안은 아까보다 더 서늘했다. ‘...진짜 갔네. 나쁜 곰탱이.’ 희수는 입술을 삐죽이며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예전 같았으면 재원의 기분에 맞춰 “내가 조심성이 없었네” 하며 사과했겠지만
그날의 ‘외면 사건’ 이후, 며칠이 지났다.표면적으로는 다시 평화로운 루틴이 돌아왔다.[기상] 06:11[출근 준비] 06:12하지만 희수의 마음속에는 아직 잔여물이 남아 있었다.친구들에게 하소연했을 때, 돌아온 반응은 예상대로였다.“야, 그거 완전 나쁜 놈 아니야?”“지인한테 숨기는 거? 빼박이지. 어장관리 아니야?”“희수야, 너 가스라이팅 당하는 거 같아.”친구들의 말은 논리적이었다.사생활 숨김, 차가운 말투, 감정 회피.전형적인 ‘나쁜 남자’의 체크리스트와 일치했다.희수도 흔들리지 않은 건 아니었다.‘
무릎 수술 후 회복기.희수는 여전히 두꺼운 보조기를 차고 있었다.집 안에만 갇혀 있는 게 답답해, 재활 겸 아주 천천히 집 앞 편의점을 다녀오는 길이었다.절뚝, 절뚝.걸음은 느렸고, 땅거미가 내려앉은 골목은 조용했다.봉지를 든 손이 조금 시리다고 느꼈을 때였다.저만치 앞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어?’재원이었다.칼퇴근을 하고 집 근처로 온 모양이었다.반가움에 희수가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하려던 순간, 그녀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그는 혼자가 아니었다.옆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직장
가게 한켠에서 머리를 질끈 묶고 정리하던 희수는 재원의 루틴이 오늘은 단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 [12:30 / 15:40 / 18:00] 같이 칼같이 들어오던 보고였다.희수는 처음엔 “바빴겠지” 하고 넘겼다.하지만 점심시간도, 퇴근 시간도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자, 슬슬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왜 보고 안 해…?’예측할 수 없는 상황은 희수에게 불안감이라는 감정을 선물했다.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희수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고는, 진심을 담아 길게 메시지를 보냈다.[자기 늦어도
가게 한켠에서 머리를 질끈 묶고 정리하던 희수는재원이 아침부터 보내는 ‘초건조 모드’를 보며슬슬 불쾌함이 쌓여갔다.[회의들어간다] 09:30[끝났다] 10:10[밥먹고 쉰다] 12:31[일하는 중] 13:05평소에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오늘은 유난히 ‘정보만 던지고 사라지는’ 느낌이었다.심지어 온도도 없음.희수는 메시지를 보낼 때마다나름의 감정을 조금씩 섞었다.[나 지금 밥먹었어!] 13:30[오늘 손님 많아 ㅠㅠ 지쳐어~] 14:25그런데 돌아오는 답은—[네에] 15:40[집이다 쉰다] 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