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희수는 휴대폰 화면을 내려놓았다.
재원이 샤워실로 들어간 뒤에도, 입가에 번진 작은 미소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팽팽했던 긴장이
따뜻한 물에 녹아든 듯, 서서히 풀리고 있었다.
조용한 거실.
늘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은,
이제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있었다.
지금은 재원의 행동을 분석할 필요도, 그의 언어를 해석할 필요도 없는 시간이니까.
익숙하게 거실 슬리퍼를 찾아 신고 그의 공간을 걸어보았다.
그가 퇴근 하자마자 가는 옷 방, 세탁실, 그리고 그의 방.
그의 냉장고도 열어보았다.
몇일 전 희수가 재원을 위해 준비해둔 밀프랩들.
'잘 챙겨먹고 있군..'
희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리된 선반.
윤이 나는 바닥.
각 잡힌 소파 쿠션.
이 집은 재원의 루틴과 규칙이 그대로 구현된 공간이었다.
정확하고, 효율적이고, 빈틈 없는.
그런데—
희수의 시선이 화장대 한 켠에서 멈췄다.
분홍색 헤어핀.
머리 빗.
빗은 희수가 제일 처음 가져다 둔 물건이었다.
남자의 공간에 여자가 쓰는 빗이 없다는 사실에
냉큼 자신의 빗을 두고 왔었다.
그리고,
며칠 전 편의점에서 대충 끼워 넣은 영수증.
정말 사소한 희수의 주머니에서 나온 동전들까지.
희수가 두고 갔던 것들이,
그냥 그대로 있었다.
그대로, 그대로.
마치 누가 건드리면 안 되는 전시품처럼.
“…하나도 치우지 않았네.”
보통은 ‘정리 안 해줘서 서운하다’가 반응일 텐데,
희수는 반대로 그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재원의 세계에서 정리정돈은 제1 루틴이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상태’가 기본값.
그의 세상에 타인의 물건은 바로 쓰레기통 행이었다.
그런데—
희수의 것만은 손도 대지 않았다.
“와… 진짜 그냥 두는구나.”
그래도 영수증은 좀 버려주지.. ㅋㅋ
가만히 그것들에 손을 대보았다. 다시 가방에 챙겨 넣을까 하다가. 가방 속에서 핸드크림을 꺼내어 또 한켠에 두었다.
희수는 괜히 마음이 간질거렸다.
자신의 물건이 하나 둘 늘어가는 것을 보는 것은
꽤나 큰 기쁨이었다. 이렇게 채워가는 건가?
그때, 샤워실 문이 철컥 열리는 소리가 났다.
재원은 타월로 머리를 털며 나왔다.
말없이 냉장고로 가서 물을 하나 꺼내고,
늘 앉는 소파 오른쪽 끝 ‘지정석’에 정확히 앉았다.
시선은 TV.
자세는 늘 똑같이.
동작은 정확히 그 자리로.
그 자체가 패턴이었다.
‘…방금까지 바디클렌저로 나 녹여놓은 사람이 맞나?’
희수는 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말투와 행동이 따로 노는 남자.
하지만, 그게 또 귀엽다.
희수는 테이블 위의 엎어진 휴대폰을 더 이상 보지 않았다.
‘데이터’는 이미 충분했으니까.
이제는 ‘실행’이었다.
그녀는 소파의 멀찍한 자리 대신—
재원의 바로 옆자리에 툭 앉았다.
재원은 물을 마시던 걸 멈추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이 남자에게 ‘피하지 않음 = 허용’이라는 걸
희수는 이제 너무 잘 안다.)
희수는 그를 올려다보며 짧게 말했다.
“뽀뽀.”
감정이 아니라 요청.
분명하고 팩트 기반.
재원은 TV를 보던 시선을 그대로 둔 채
천천히 고개만 희수 쪽으로 틀었다.
도망가듯이 외면하지 않고.
그저 아주 조금,
희수가 닿기 좋도록 얼굴을 ‘들이밀었다’.
희수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허용.
괜찮다.
접근해도 된다.
말로 하지 않아도
재원은 늘 그렇게 행동으로 말한다.
희수는 천천히 다가가
그가 내민 얼굴에 조용히 입을 맞췄다.
재원은 밀어내지도, 과하게 반응하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숨만 고르게 내쉬었다.
시선은 여전히 TV였지만—
그는 자신만의 패턴과 공간 안에
희수라는 존재가 들어오는 걸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재원의 팔에 팔짱을 끼고 가만히 어깨에 기대어 보았다.
두근 두근
재원의 규칙적인 심장 박동이 괜히 서운하다가도
이제는 익숙해진 우리라는 사이에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설레이지 않아도 안정적인 관계.
희수는 그 옆에 기대어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이 집, 이제 좀 익숙해지는 것 같네.’
그는 말이 적고, 표현은 더 적지만
자기 세계에 누군가를 ‘그대로’ 들이는 남자.
그리고 희수는
그 허용된 공간 안에
조용히 안착해가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희수의 썸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건 그냥 곰이 인간 코스프레를 하던 시절이었다.1년 전, 집 앞 편의점.그곳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었다.희수는 퇴근길에 습관처럼 편의점에 들렀고, 그 시간대에는 항상 그 남자가 있었다.큰 키, 딱 벌어진 어깨, 무뚝뚝하게 생겼는데 의외로 단정한 인상.희수가 그에게 호감을 느낀 건, 알바생을 대하는 그의 ‘태도’ 때문이었다.그는 계산대에 물건을 올릴 때도 바코드가 찍기 편한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카드는 이미 손에 들려 있었다.“봉투는 괜찮습니다. 수고하십니다.”군더더기 없는 동작, 정중한 목소리.진상 손님이 난무하는 편의점에서, 그는 알바생의 감정 노동을 1g도 시키지 않는 ‘유니콘 같은 손님’이었다.동네 어르신이 길을 물으면, 귀찮은 내색 없이 가던 길을 멈추고 손가락으로 정확한 방향을 지시했다.누구에게나 예의 바르고 친절한 남자. 희수의 눈에는 그게 ‘다정함’으로 보였다.(나중에 알았지만, 그건 그냥 그의 철저하게 학습된 ‘사회생활 프로토콜’이었다.)어느 늦은 밤.편의점 앞 파라솔 테이블.우연히 맥주 한 캔을 사서 나온 희수와, 마침 컵라면을 먹으려던 그가 합석하게 되었다.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희수 혼자 좋았다.술기운이 살짝 오른 희수는, 알코올의 힘을 빌려 과감하게 돌직구를 던졌다.“저기요.”“예.”“제가 원래 이상형이 좀 확고하거든요?”희수는 맥주캔을 만지작거리며 곁눈질로 그를 훑었다.“저는 키 크고, 어깨 딱 넓고. 쌍꺼풀 없는 큰 눈에… 입술 좀 도톰한 남자를 좋아해요.”누가 봐도 ‘너다’라는 묘사였다.보통의 남자라면 얼굴을 붉히거나 겸손을 떨었겠지만, 그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어? 딱 저네요?”“...네?”그는 세상 쿨하게 웃었다.“하하하! 전 팩트만 말합니다. 거울 보면 딱 그렇게 생겼거든요.”희수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재수 없는 건지, 솔직한 건지. 근데 묘하게 설렜다.그는 기분 좋게 맥주를
재원의 지독한 간호(라 쓰고 통제라 읽는) 덕분에, 희수의 다리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회복되었다.드디어 보조기를 풀고, 두 발로 재원의 아파트 현관을 밟는 날.[도착 5분 전]희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파트 주차장을 가로질렀다.습관처럼 재원의 지정석을 확인했다.재원은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늘 같은 자리에 주차하니까.그런데.“…어?”그 자리에 낯선 차가 서 있었다.처음 보는 검은색 신형 세단. 번쩍거리는 새 차였다.‘뭐야, 다른 사람이 댔나?’재원은 자기 자리에 누가 대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데.희수는 고개를 갸웃하며 주차장을 한 바퀴 더 돌았지만, 재원의 익숙한 차는 보이지 않았다.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재원이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왔나. 다리는.”“완전 멀쩡해! 근데 자기야.”“어.”“자기 차 어디 갔어? 지정석에 다른 차 있던데?”재원의 시선이 TV 화면에서 아주 잠시, 미세하게 흔들렸다.하지만 목소리는 평소와 똑같이 덤덤했다.“…그냥. 다른 데 세웠다.”“어디? 내가 오면서 봤는데 안 보이던데?”“지하 2층 구석에. 자리 없어서.”“아, 그래?”희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그 꼼꼼한 성격에 문콕 당하기 싫어서 구석에 댔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그때까지만 해도, 그게 방어 기제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며칠 뒤.희수는 서프라이즈로 재원의 퇴근 시간에 맞춰 아파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저 멀리서 헤드라이트 불빛이 들어왔다.며칠 전 봤던 그 차였다.지정석에 세워져 있던, 그 번쩍이는 검은색 신형 세단.‘저 차 주인은 맨날 칼퇴 하네.’희수가 무심코 차를 바라보는데, 운전석 문이 열렸다.그리고 내리는 사람은.“……”재원이었다.익숙한 정장, 익숙한 가방을 든 그가 낯선 새 차의 문을 잠그고 있었다.희수는 순간 뇌 회로가 정지했다.숨을 곳도 찾지 못한 채, 멍하니 그와 눈이 마주쳤다.재원의 눈이 커졌다.당황. 명백한 당황이었다.마치 들키지 말아야 할 범죄 현장을 들킨
도가니탕은 훌륭했다.국물까지 싹 비운 그릇을 재원이 가져가 설거지를 시작했다.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물소리.희수는 식탁에 턱을 괴고 그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무뚝뚝하고, 말 없고, 표현도 없다.그런데 밥은 먹이고, 약 챙겨주고, 설거지까지 한다.‘멀쩡하게 생겨가지고, 성격은 시멘트인데, 또 하는 짓은 진국이고.’문득 궁금해졌다.이 기이한 ‘곰’을 거쳐 간 다른 여자들은 어땠을까.다들 이 남자의 ‘시멘트 화법’에 질려 도망갔을까, 아니면 나처럼 ‘도가니탕’에 코가 꿰였을까.희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툭 던졌다.“자기야.”“어.”“전 여친들이랑은 얼마나 만났어? 제일 오래 만난 게 얼마야?”설거지하던 손이 멈칫했다.재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딱 잘라 말했다.“비밀이다.”“에? 비밀이 어딨어. 그냥 말해줘 봐.”“지나간 일이다. 알 필요 없다.”철벽이었다.하지만 희수는 목표가 생기면 물러서지 않는다.그녀는 비장한 표정으로 외쳤다.“아, 말해줘! 알아야 내가 이기지!”재원이 고무장갑을 낀 채 뒤를 돌아봤다. 미간이 좁혀져 있었다.“...뭘 이겨.”“기록 갱신!”희수는 눈을 반짝이며 선전포고했다.“난 무조건 자기 전 여친들보다 오래 살아남을 거야.그러니까 데이터가 필요해. 최대 생존 기간이 얼만지 알아야 내가 목표를 잡지!”“......”재원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희수를 내려다보았다.보통은 “사랑해”나 “질투 나”라고 할 타이밍에, “살아남겠다”고 선언하는 여자친구라니.그는 피식, 헛웃음을 흘리고는 다시 싱크대로 몸을 돌렸다.그리고 헹굼을 마무리하며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3개월.”“......어?”희수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길어야 100일. 대부분 그전에 끝났다.”“뭐...? 3개월이 최대라고? 왜? 다 차였어?”재원은 물기를 닦고 식탁으로 와 희수의 맞은편에 앉았다.그의 표정은 건조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자신의 ‘실패 기록’을 팩트로 나열했다.“지친대. 내가 감정이
그날의 ‘외면 사건’ 이후, 며칠이 지났다.표면적으로는 다시 평화로운 루틴이 돌아왔다.[기상] 06:11[출근 준비] 06:12하지만 희수의 마음속에는 아직 잔여물이 남아 있었다.친구들에게 하소연했을 때, 돌아온 반응은 예상대로였다.“야, 그거 완전 나쁜 놈 아니야?”“지인한테 숨기는 거? 빼박이지. 어장관리 아니야?”“희수야, 너 가스라이팅 당하는 거 같아.”친구들의 말은 논리적이었다.사생활 숨김, 차가운 말투, 감정 회피.전형적인 ‘나쁜 남자’의 체크리스트와 일치했다.희수도 흔들리지 않은 건 아니었다.‘진짜 그런가? 내가 콩깍지가 씌어서 합리화하는 건가?’그때, 현관 벨 소리가 울렸다.저녁 7시. 재원이었다.“문 열어.”예고도 없이 찾아온 그는, 양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족발, 보쌈 같은 데이트용 배달 음식이 아니었다.대형 마트 장바구니.그 안에는 우유, 칼슘 두유, 멸치볶음, 그리고 도가니탕 팩이 가득했다.“...이게 다 뭐야?”재원은 대답 대신 희수의 다리부터 스캔했다.“보조기 찼나.”“찼지.”“부기는 좀 빠졌네.”그는 신발을 벗고 들어와 익숙하게 냉장고를 열고 사 온 것들을 채워 넣었다.정리는 칼각이었다. 유통기한 순서대로, 희수가 꺼내기 쉬운 칸에.“뼈 붙는 데 좋은 거다. 챙겨 먹어라.”“아니, 나 혼자 이걸 어떻게 다 먹어...”“먹어야 낫는다. 안 먹으면 안 낫는다.”그는 냉장고 정리를 끝내고 소파에 앉았다.그리고 희수에게 물 한 잔과 약 봉투를 내밀었다.“약 먹어.”희수는 약을 받아먹으며 그를 빤히 쳐다봤다.친구들이 말한 ‘나쁜 남자’의 모습과,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의 행동을 대조해 보았다.‘나쁜 남자들은... 책임 회피하고, 맘대로 구속하고, 감정적으로 휘두른다는데.’지금 이 남자는?1. 책임감: “안 먹으면 안 낫는다”며 바리바리 장을 봐왔다.2. 구속: “보조기 차라”, “돌아다니지 마라”고 잔소리하지만, 그건 내 안전 때문이다.3. 감정: 휘두르기는커녕,
그날 밤, 희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루틴도 건너뛰었다.단 한 번도 어긴 적 없던 ‘보고 규칙’을 희수가 먼저 깨버렸다.이것은 시위가 아니었다.그냥, 할 말이 없었다.‘없는 사람’ 취급을 당했는데, 굳이 ‘있는 척’ 보고를 하는 게 우스웠다.점심시간이 지났다.재원에게서도 연락이 없었다.희수는 씁쓸하게 웃었다.‘그래. 내가 보고 안 하니까 편하지? 네 시스템에서 오류가 사라져서 좋겠네.’그런데 오후 3시.재원에게서 메시지가 왔다.[다리는.] 15:00[많이 부었나.] 15:01평소라면 절대 연락하지 않을 애매한 시간.심지어 내용은 ‘루틴’이 아니라 ‘상태 체크’였다.희수는 답하지 않았다.그러자 30분 뒤, 또 메시지가 왔다.[약은.] 15:30[어제 무리해서 걸었잖아.] 15:30희수는 그 문장에서 멈칫했다.‘...어제 무리해서 걸었다고?’그는 알고 있었다.어제 편의점에 다녀온 것. 자기가 절뚝거리고 있었던 것.그 모든 걸 봤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다.희수는 떨리는 손으로 타자를 쳤다.[봤으면서 왜 모른 척했어?] 15:32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이건 ‘감정’이 아니라 ‘진실 규명’ 요구였다.답장은 한참 뒤에야 왔다.그가 수백 번 고민하고 지웠을 시간.[...설명하기 복잡했다.] 15:45[옆에 사람 있었고.] 15:45[준비 안 된 상황이었다.] 15:46‘준비 안 된 상황.’희수의 머릿속에서 번쩍, 하고 불이 들어왔다.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소리가 들렸다.그는 희수가 창피했던 게 아니었다.‘예기치 못한 상황(변수)’에 ‘사적인 영역(희수)’이 ‘통제 없이 노출’되는 그 순간이, 그에게는 견딜 수 없는 ‘위험 상황’이었던 것이다.재원에게 연애는 둘만의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완벽한 시스템이다.하지만 그 시스템이 외부(지인)에게, 그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개되는 건 그에게 ‘시스템 붕괴’나 다름없었다.그래서 그는 본능적으로 ‘방어’했다.가장
무릎 수술 후 회복기.희수는 여전히 두꺼운 보조기를 차고 있었다.집 안에만 갇혀 있는 게 답답해, 재활 겸 아주 천천히 집 앞 편의점을 다녀오는 길이었다.절뚝, 절뚝.걸음은 느렸고, 땅거미가 내려앉은 골목은 조용했다.봉지를 든 손이 조금 시리다고 느꼈을 때였다.저만치 앞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어?’재원이었다.칼퇴근을 하고 집 근처로 온 모양이었다.반가움에 희수가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하려던 순간, 그녀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그는 혼자가 아니었다.옆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직장 동료 같기도 하고, 지인 같기도 했다. 두 사람은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희수는 멈칫했다.이 몰골(보조기+추리닝)로 마주치는 게 좀 그런가 싶었지만, 그래도 연인 사이인데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그녀는 제자리에 서서 그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거리가 좁혀졌다.10미터, 5미터.그리고 마침내, 재원의 시선이 희수에게 닿았다.분명했다.그의 눈동자가 희수를 담았다. 희수의 보조기를,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어, 자기야.’희수의 입술이 달싹이던 찰나.재원의 고개가,아주 매끄럽게 반대편으로 돌아갔다.“......”마치 가로수나 전봇대를 본 것처럼.아니, 처음부터 그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그는 옆 사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희수의 어깨를 스치듯 그대로 지나쳐갔다.속도가 줄어들지도, 멈칫하지도 않았다.완벽한 무시.완벽한 타인.희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등 뒤로 멀어지는 두 사람의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뭐지?”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ESTJ의 빠른 판단력도 이 순간만큼은 작동하지 않았다.‘못 봤나? 아니, 분명 눈이 마주쳤는데.’‘옆에 사람이 있어서? 그래도 눈인사 정도는 할 수 있잖아.’‘내가 창피한가? 다리 다쳐서 이러고 있는 게?’수만 가지 가설이 폭죽처럼 터졌지만, 결론은 하나였다.그는 나를 모른 척했다.다리가 떨려왔다.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