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펜션은 이미 도착한 친구들의 떠드는 소리로 난장판이었다.
통제 불가. 이대로는 일정 진행이 절대 불가능했다.희수는 각종 체크리스트를 붙잡고 폭풍같이 움직였다.
[자기 우리 도착했어!] 14:30
약속된 이동 보고.
‘정보 공백 금지’ 규칙은 단체 여행에서도 유지되었다.잠시 후 재원의 메시지가 떨어졌다.
[나 일 마치고 출발] 14:40
[주말 특근인데 뺐다] 14:40“오… 능력자.”
희수는 인원 체크, 동선 조정하면서도
10~15분마다 휴대폰을 확인했다. 변수 통제가 필수였으니까.[와앙! 자기 최고야! 계획대로 되는구나] 14:51
[나 짐 정리하고 동선 다시 짜놓을게~ 도착 전에 최종 연락줘!!] 14:52희수의 뇌는
총무 모드 + 연애 모드 = 풀가동.반면 친구들은 도착하자마자 술 마실 생각뿐이었다.
방 배정? 그런 개념은 아무도 갖고 있지 않았다.그 와중에—
밤 10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나 도착 10분 전] 21:52
그리고 현관문이 ‘찰칵’ 열렸다.
재원이 들어왔다.
인사보다 먼저 방 구조를 스캔했다.
여자방 위치 → 소음
남자방 위치 → 술판 거리 화장실 동선 → 소리 소파베드 → 조용한 공간그리고 딱 한 문장.
“희수 거실에서 자.”
“엥???? 갑자기 왜!!”
“여기가 조용해.
여자방은 화장실 소리 다 들리고, 남자방은 시끄러워.”친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또 시작이다ㅋㅋ”
“얘 분석 모드 들어갔다.”그때 재원의 폭탄 추가발언.
“그리고 희수 잠버릇 심함. 좁은 데서 못 자.”
“자기야!!!!! 그걸 왜 말해!! 여기서 공개할 필요 없다고!!!”
“그냥 사실을 말한 건데.”
희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근데 틀린 말이 아니라 더 열 받았다.친구들은 난리났다.
“와… 이 정도면 보호자 아니냐?”
“첫 여행인데 같이 자는 거 아니었음?”희수는 작은 기대를 포기 못 하고 말했다.
“그러니까… 나도 다른 방법이 있을 줄 알았는데—”
“사람 많다고 했잖아.”
재원은 또 담백하게 잘랐다.
논리 백점, 로맨스 제로.
아…진짜 빡치는데, 또 맞는 말이라 반박 못 하는 게 더 빡침. 새벽까지 모두가 정신없이 놀기 시작했다.그런 난장판 속에서도
재원만은 상황을 조용히 통제하고 있었다.“야 고기 탄다!”
“가만 있어. 내가 한다.”불판 갈고,
탄 고기 걷어내고, 흘리는 술 닦고, 비틀대는 친구에게 물 건네고, 술잔 멀리 치워놓고.희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말했다.
‘…이럴 때는 진짜 최고지.’
근데 또
기어이 불만이 올라왔다.‘…그래도 방은 같이 안 자겠다 하고…』
속에서 천천히 부글부글.
그때 갑자기 지용이 물었다.
“근데 재원아, 너랑 희수 잘 맞냐?”
“너 맨날 뭐라 하지 않았냐?”“아니 뭐… 그냥… 답답할 때는 있지.”
“오 나온다 나온다ㅋㅋ 뭐가 답답한데?”
재원은 컵 굴리다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길 못 찾음.”
“…뭐라구?”
“희수 길치야. 심각함.
지난주에 자기 차 어디 주차했는지도 몰라서 나 화났어.”친구들 빵 터져버렸다.
“설마ㅋㅋ”
“아니야 지하철에서도 반대로 나갔대ㅋㅋ”희수는 물 마시다 기침했다.
“아니!!! 불필요한 정보 공개 너무 심하다고!!!”
“팩트다.”
희수는 울컥했지만 동시에 웃었다.
재원도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새벽 3시
피곤이 몰려온 희수는 재원이 지정해준 소파베드에 쓰러지듯 누웠다.친구들은 새벽 4–5시까지 떠들었지만
재원은 끝까지 남아서 정리했다. 쓰레기 버리고, 술병 정리하고, 다음 날 동선을 깔끔하게 만들었다.그리고 모두가 잠든 후—
희수가 곤히 자는 걸 확인하고남자방 대신
소파베드 옆 바닥에 조심히 이불을 깔았다.살짝 한숨 같은 소리가 났다.
“……휴.”
그는 그렇게 조용히 희수 옆에 누웠다.
다음 날 아침
희수가 먼저 눈을 떴다.낯선 천장, 살짝 아픈 머리.
그리고 바로 옆…재원이 누워 있었다.
희수는 입가가 실룩거렸다.
‘어휴… 어제는 같이 못 잔다더니…’
그때 재원이 눈을 조금 떴다.
“…왜 웃어.”
희수는 움찔했다.
재원은 눈도 다 안 뜬 채
잔잔하게 말했다.“…같이 못 잔다고 어제 그렇게 투덜대더니.”
“……”
“……옆에 있어도 아무것도 안 하던데요.”
“……?????”
희수 얼굴이 한순간에 빨개졌다.
“아니!!! 여기서 뭘 하라고!!! 거실에서 뭘 기대한 건데!!”
재원은 아주 담백하게 말했다.
“…그냥.”
“그냥???? 뭔 그냥!!!!”
재원은 다시 눈을 감으며 던졌다.
“…그랬다는 거지.”
희수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 남자의 논리는 때때로 너무 불친절했다.펜션 거실에 아침 햇살이 쏟아졌다.
둘은 전날보다
확실히 조금 더 가까워져 있었다.예상은 아니었지만…
나쁘지 않았다.제대로 표현 좀 해주면 안될까?
희수는 눈감은 재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불을 끌어 그에게 살포시 덮어주었다.
이 남자의 사랑법. 희수는 그를 조금 더 분석 해보기로 결심했다.
" 너가 이러면 내가 지칠 수가 없네? "
퇴근 후 희수 미용실 앞에 재원의 차가 섰다. 희수가 가방을 들고 나오자 재원이 조수석 문을 열어줬다. 평소처럼 자연스러운 저녁이었고, 차 안에는 라디오가 낮게 깔려 있었다.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원이 입을 열었다."희수야, 부탁이 하나 있는데.""응, 뭔데?""네이버 예약 알림 나한테도 공유해줄 수 있어?"희수는 잠깐 재원을 봤다. 예약 알림이라는 단어가 귀에 걸렸는데, 재원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정면을 보고 있었다."예약 알림을? 왜?""네가 몇 시에 끝나는지 알아야 데리러 가는 시간 조정이 되잖아. 그리고 쉬는 날 미리 알면 불필요하게 연락하는 것도 줄일 수 있고. 효율적이잖아."논리적이었다. 틀린 말도 없었다. 그런데 희수는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예약 알림에는 손님 이름이 다 뜬다. 박시윤 예약도 뜬다. 재원이 그걸 모를 리 없었고, 희수도 그걸 모를 리 없었다."...생각해볼게.""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구글 캘린더 연동하면 되잖아.""알아. 그냥 생각해본다고."재원은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 그런데 입을 다무는 타이밍이 딱 한 박자 늦었고, 그 한 박자가 희수 머릿속에서 꽤 오래 남았다. 효율 때문이라고 했는데, 왜 지금 이 타이밍에 이 얘기가 나오는 건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희수는 창밖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음날 오후, 마지막 손님 마무리를 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저장된 이름이 떴다.💬 박시윤: 원장님, 뭉게가 어제부터 밥을 잘 안 먹고 기운이 없어요. 혹시 미용할 때 뭔가 이상한 거 없었나요?희수는 잠깐 손을 멈췄다. 미용 직후에 이런 증상이 생기면 걱정되는 게 당연했고, 샴푸 알러지일 수도 있고 스트레스 반응일 수도 있었다. 담당 미용사한테 물어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희수는 마무리 손질을 끝내고 답장을 보냈다.💬 희수: 미용할 때는 이상 없었어요. 혹시 구토나 설사는요?💬 박시윤: 그건 없어요. 그냥 축 처져 있어요.💬 희수: 미용
재원은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집 앞에 차가 서고 희수가 안전벨트를 풀었을 때도, 재원은 핸들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정면만 보고 있었다. 평소엔 차에서 내려 현관 앞까지 배웅하던 남자가 오늘은 그대로였다. "다 왔다." "응. 들어갈게." 희수는 문을 열고 내렸다. 그리고 잠깐 차를 돌아봤다. 재원의 옆얼굴이 어두운 차창 너머로 보였다. 뭔가를 참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그냥 피곤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희수는 그냥 현관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속으로 생각했다. 대답 안 한 게 대답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게 왜 이렇게 찜찜하냐고. 질투하는 거냐고 물었을 때 그냥 아니라고 하거나 맞다고 하면 되는 걸, 저 남자는 항상 침묵으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그 침묵이 이상하게 더 오래 남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희수는 안으로 들어서며 생각을 끊었다. 생각해봤자 답 안 나오는 거 알면서. --- 그날 이후로 재원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희수도 눈치채지 못했다. 퇴근 데리러 오는 시간이 조금씩 빨라졌다. 5시 반에 끝나는 날이면 5시 10분에 미용실 앞에 차가 서 있었고, 희수가 "일찍 왔네" 하면 재원은 "회의가 일찍 끝났다"고 했다. 딱히 이상하지 않았다. 그냥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달력을 확인하는 것도 처음엔 눈에 띄지 않았다. 재원이 희수 옆에 서서 카운터 위 달력을 자연스럽게 훑는 게, 그냥 오늘 손님이 몇 명이나 있었나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그 행동이 반복됐다. 들어오자마자 달력 먼저, 그러고 나서 희수 얼굴 확인. 순서가 고정돼 있었다. 희수는 가위를 정리하다가 그 패턴을 처음으로 의식했다. 루틴남이니까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루틴이 아니라 확인인 것 같았다. 뭔가를 확인하고 싶은데 직접 물어보기는 싫어서 행동으로 때우는 것 같은 그런 확인. 희수는 재원을 흘끗 봤다. 재원은 달력에서 눈을 떼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
예약 시간 정각에 미용실 문이 딸랑거렸다.박시윤이었다. 뭉게를 안고 들어서며 가볍게 목례를 했다."안녕하세요. 예약했어요.""어서 오세요. 뭉게 받을게요."희수는 뭉게를 받아 테이블에 올렸다. 뭉게가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희수 손을 핥아댔다. 한 번밖에 안 왔는데 기억하는 게 확실했다."목욕에 위생미용까지 하면 한 시간 반 정도 걸려요. 저쪽에 셀프 커피 있으니까 편하게 앉아 계세요."희수가 카운터 옆 커피 머신을 가리켰다. 시윤이 고맙다며 커피를 뽑아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희수는 뭉게를 목욕조에 올리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물을 틀자마자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재원: 나 밥 먹고 회의 들어가희수는 흘끗 화면을 확인했다. 손에 물이 묻어 있었다. 답장은 나중에.뭉게 목욕을 시작하면서 시윤이 소파에서 말을 걸어왔다."뭉게가 목욕 원래 싫어하는데, 여기선 얌전하네요.""처음엔 다 싫어해요. 자주 오면 익숙해져요.""그럼 자주 와야겠네요."희수는 뭉게 등을 문지르며 대꾸했다."뭉게한테 좋죠. 위생 관리 자주 해주는 게."시윤이 커피를 홀짝이며 웃었다."뭉게한테만요?"희수는 잠깐 손을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대답하지 않았다. 시윤은 더 밀어붙이지 않고 커피잔만 내려다봤다.이 사람, 선 넘는 것 같다가도 딱 거기서 멈추는 타입이었다.목욕을 마치고 드라이를 시작할 때쯤 핸드폰이 또 울렸다.💬 재원: 끝나면 연락할게💬 재원: 오늘 예약은 몇 시까지 있어?드라이기 소리에 진동이 묻혔다. 희수는 잠깐 화면을 봤다가 드라이기를 다시 들었다. 양손이 다 차 있었다. 답장을 못 하고 있다는 게 신경 쓰였다.재원이 회의 끝나면 바로 연락하고, 예약 시간에 칼같이 맞춰서 올 게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 남자가 보낸 카톡에 답장도 못 하면서 시윤 앞에 서 있는 게, 이유는 모르겠지만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일하면서 연락 받기 불편하시겠다."시윤이 불쑥 말했다. 희수가 핸드폰 화면을 흘끗 보는 걸 봤던 모양이었다."괜찮아요.
희수는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다가 멈췄다.핸드폰 화면을 다시 내려다봤다.[원장님, 내일 미용실 문 여시나요?]모르는 번호. 오늘 미용하고 간 손님은 박시윤 하나였다.'오늘 미용 다 끝내고 갔는데. 내일 왜?'희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찜찜한 기분이 발뒤꿈치를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다음날 오전, 미용실 문이 딸랑거렸다.박시윤이었다. 뭉게는 없었다."안녕하세요. 뭉게 다음 예약 하러 왔어요.""어서 오세요. 달력 보고 날짜 골라요, 여기요."희수는 가위를 정리하며 달력을 내밀었다. 시윤이 날짜를 고르는 동안 미용실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강아지 사진들이 다닥다닥 붙은 벽을 훑다가 한 곳에서 시선이 멈췄다.액자 속 작고 하얀 말티즈."혹시 이 강아지도 키우세요?"희수는 고개를 들었다가 시윤의 시선이 향한 곳을 확인했다."아, 구름이요. 예전에 키웠어요.""뭉게랑 많이 닮았네요. 그래서 어제 뭉게 보자마자 반응하신 거예요?"희수는 잠깐 멈칫했다. 어제 뭉게 손 내밀던 게 그렇게 티가 났나."...그랬나요, 제가.""네. 표정이 확 바뀌셔서요. 좋은 의미로요."희수는 픽 웃었다."눈썰미 좋으시네요.""자주 봐서요."희수가 고개를 들었다. 시윤은 달력을 보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사실 어제 처음 온 게 아니에요. 뭉게 산책시키면서 이 앞을 지나다닌 게 한 달 좀 넘었거든요. 원장님이 일하시는 거 유리창 너머로 자주 봤어요. 어제 마침 노쇼 있으셔서 들어온 거고요."희수는 잠시 시윤을 바라봤다.말투는 여전히 담담했다. 고백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톤이었다. 불편하게 들이미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냥 사실만 전달하는 것도 아닌 묘한 온도."그래서 내일 문 여냐고 문자 하신 거예요?""네. 뭉게 데리고 산책 나올 것 같아서요. 혹시 또 타이밍 맞으면 들어올까 싶었는데." 시윤이 희수를 보며 조용히 웃었다. "이렇게 예약을 잡는 게 더 낫겠네요.""그게 서로 편하죠."희수는 예약을 잡아주며
오후 두 시, 미용실 문에 달린 종이 딸랑거렸다.희수가 고개를 들었을 때, 낯선 남자가 말티즈 한 마리를 안고 서 있었다."안녕하세요, 지나가다가 들어왔는데요. 혹시 지금 미용 되나요? 예약은 없는데."희수는 잠깐 달력을 확인했다. 마침 두 시 예약이 노쇼였다."되네요. 들어오세요."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훈훈한 외모에 목소리도 부드러웠다. 희수는 반사적으로 남자가 아니라 그가 안고 있는 말티즈에게 시선이 꽂혔다.하얗고 둥근 얼굴. 크고 까만 눈.몇 년 전 무지개다리를 건넌 구름이랑 판박이였다."이름이 뭐예요?""뭉게요."희수는 손을 내밀었다. 뭉게가 코를 킁킁대더니 손바닥을 핥아왔다."대기해도 되죠?""그러세요."박시윤이라고 했다. 동네 살면서 미용실 지나칠 때마다 눈에 띄었다고,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태도가 매너 있고 부담스럽지 않았다.희수는 뭉게를 테이블에 올리며 물었다."언제부터 키우셨어요?""3년 됐어요. 혼자 사니까 얘가 낙이에요.""그렇구나. 뭉게야, 우리 잘해보자."뭉게 손질을 하는 내내 간간이 대화가 오갔다. 희수가 적당히 받아치는 사이, 시윤이 호감을 보이는 건지 그냥 말이 많은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손질을 마치고 뭉게를 안겨주자 시윤이 카운터 앞 명함 꽂이를 힐끗 봤다."명함 가져가도 되죠? 뭉게 데리고 자주 올 것 같아서요.""그러세요."딸랑, 문이 닫혔다.희수는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뭉게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우리 구름이랑 많이 닮았네.별거 아닌데, 괜히 마음이 잠깐 물컹해졌다.---며칠 뒤, 희수의 미용실 카운터 달력에는 4월 19일에 커다란 빨간색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그 위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내 생일'이라는 세 글자가 당당하게 적혀 있었다.퇴근 시간에 맞춰 들어온 재원은 달력 앞에 멈춰 섰다.한참이 지나도 말이 없었다.희수는 가위를 정리하며 기다렸다. 재원의 넓은 등판 너머로 머릿속 엑셀 창이 무서운 속도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인스타 즐겨찾기? 진짜 언제부터 본 거야?"희수의 장난 섞인 질문에 재원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그저 귓가로 피가 몰려 터질 것처럼 붉어질 뿐이었다.언제부터였냐고 묻는다면, 희수와 헤어지고 정확히 일주일이 지나던 날부터였다.처음 일주일 동안 재원은 지독한 오만과 자존심으로 버텼다.고작 연애 하나 끝났다고 무너질 사람인가 싶어 평소보다 출근을 앞당기고, 일에 미친 사람처럼 몸을 굴렸다.하지만 불 꺼진 텅 빈 아파트에 들어설 때마다 명치끝이 짓눌리는 것 같은 통증이 찾아왔다.몸이 아픈 거라 스스로를 속이며 타이레놀을 삼켰지만, 그건 약으로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니었다.그리움이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딱 일주일이 걸렸다.평소 SNS는 거들떠도 안 보던 남자가, 결국 희수의 소식이 너무 궁금해 의미 없는 영어와 숫자를 조합한 가짜 계정을 만들었다.ajw19820314. 고심 끝에 입력한 아이디는 본인 이니셜과 생년월일의 조합이었다.프로필 사진도 없고 팔로워도 없는,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계정이었다.오직 희수의 미용실 인스타 하나만 즐겨찾기 해둔 채, 퇴근 후 침대에 누워 새로고침만 수백 번을 눌렀다.남들은 그냥 지나칠 강아지 미용 사진을 한참 동안 확대해 보곤 했다.사진 구석 유리창에 아주 작게 비친 희수의 실루엣을 찾아내고, 혹시 손가락에 대역 밴드가 붙어 있으면 어디 다친 건가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사진 속 희수의 표정이 조금만 어두워 보여도 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지독한 미련의 시작이었다.회사에서 대형 모니터를 보고 있어도 서류의 글자 대신 희수의 얼굴이 자꾸만 겹쳐 보였다.그토록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공적인 자존심과 회사에서의 완벽함이, 희수가 없는 공간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껍데기일 뿐임을 뼈저리게 깨달았다.퇴근길, 예전에 희수가 찾아왔을 때 모질게 돌려보냈던 본사 로비 구석을 지날 때마다 밀려드는 죄책감과 후회로 숨이 막혔다.그날 희수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도시락 가방 끈을 꼭 쥐고 아무 말 없
그날의 ‘외면 사건’ 이후, 며칠이 지났다.표면적으로는 다시 평화로운 루틴이 돌아왔다.[기상] 06:11[출근 준비] 06:12하지만 희수의 마음속에는 아직 잔여물이 남아 있었다.친구들에게 하소연했을 때, 돌아온 반응은 예상대로였다.“야, 그거 완전 나쁜 놈 아니야?”“지인한테 숨기는 거? 빼박이지. 어장관리 아니야?”“희수야, 너 가스라이팅 당하는 거 같아.”친구들의 말은 논리적이었다.사생활 숨김, 차가운 말투, 감정 회피.전형적인 ‘나쁜 남자’의 체크리스트와 일치했다.희수도 흔들리지 않은 건 아니었다.‘
무릎 수술 후 회복기.희수는 여전히 두꺼운 보조기를 차고 있었다.집 안에만 갇혀 있는 게 답답해, 재활 겸 아주 천천히 집 앞 편의점을 다녀오는 길이었다.절뚝, 절뚝.걸음은 느렸고, 땅거미가 내려앉은 골목은 조용했다.봉지를 든 손이 조금 시리다고 느꼈을 때였다.저만치 앞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어?’재원이었다.칼퇴근을 하고 집 근처로 온 모양이었다.반가움에 희수가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하려던 순간, 그녀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그는 혼자가 아니었다.옆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직장
가게 한켠에서 머리를 질끈 묶고 정리하던 희수는 재원의 루틴이 오늘은 단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 [12:30 / 15:40 / 18:00] 같이 칼같이 들어오던 보고였다.희수는 처음엔 “바빴겠지” 하고 넘겼다.하지만 점심시간도, 퇴근 시간도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자, 슬슬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왜 보고 안 해…?’예측할 수 없는 상황은 희수에게 불안감이라는 감정을 선물했다.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희수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고는, 진심을 담아 길게 메시지를 보냈다.[자기 늦어도
가게 한켠에서 머리를 질끈 묶고 정리하던 희수는재원이 아침부터 보내는 ‘초건조 모드’를 보며슬슬 불쾌함이 쌓여갔다.[회의들어간다] 09:30[끝났다] 10:10[밥먹고 쉰다] 12:31[일하는 중] 13:05평소에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오늘은 유난히 ‘정보만 던지고 사라지는’ 느낌이었다.심지어 온도도 없음.희수는 메시지를 보낼 때마다나름의 감정을 조금씩 섞었다.[나 지금 밥먹었어!] 13:30[오늘 손님 많아 ㅠㅠ 지쳐어~] 14:25그런데 돌아오는 답은—[네에] 15:40[집이다 쉰다] 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