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인도에서 지낸 3년 동안, 그녀는 인도의 문화와 음식 어느 것에도 적응하지 못했다.
늘 배앓이를 했고, 서너 시간 후면 잠에서 깼으며 고질적인 빈혈로 철분제를 복용했다. 다 소용없었지만.
“너 괜찮아? 웬 땀을 이렇게 흘리니?”
은수의 이마에서 볼을 타고 흐르는 땀을 보고, 은영은 기겁을 하듯 했다.
여름이 한창 시작되는 중이었지만 실내는 서늘했다. 땀 날 일이 없었다는 뜻이다.
“아, 뜨거운 걸 먹어서...”
은수는 육개장에 말아놓은 밥을 한 술 한 술 뜨던 중이었다.
“몸이 허한가보다.”
은영의 그 말에 은수는 오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사시사철 더운 곳에서 3년을 있었다. 그곳에서 땀이 나면 그게 식은 땀인지 진땀인지 알 리 없었다.
‘허하다’는 뜻도 당연히 몰랐다.
“그걸로 되겠어?”
뒤이어 온 큰어머님이 큰아버님 옆에 앉으며 물었다.
“음식이 왜 이래? 뭐가 이렇게 없어?”
식탁을 둘러보며 낯을 찡그리자, 은영은 인상을 썼다.
“엄마, 들으면 어쩌려고...?”
“이걸 사람 먹으라고 시킨 거니? 너도 눈 있으면 봐.”
큰어머님은 들은 체도 않고 싫은 소리를 했다.
은수는 상위를 한 번 더 훑었다.
뭐가 이상한 건지는 몰랐다.
‘뭐가, 더 있어야 했나?’
인도에서 치렀던 친구 아버지 장례식이 떠올랐다.
이미 죽은 아버지를 생전의 모습처럼 씻기고 옷 입히고 안경까지 씌우더니, 살아있는 사람들과 사진을 찍게 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그 사체와 하룻밤, 하루 낮을 함께 보냈다.
그리고 나서는, 그들도 더러 가서 멱을 감는 강가의 모래밭에 사체를 묻었다!
하나같이 약속이나 한 듯, 장례 내내 그들은 금식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는 고인 앞에서, 그들은 산자임을 티내며 먹는 걸 불경스러워했지.’
마지막 남은 밥 한 술을 뜨며 은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니, 그녀 앞에 놓여진 음식은 함부로 평가받아야 할만큼 형편없지는 않다고.
“은수야. 앞으로 너는 어떻게 할 거야?”
큰어머님도 자신 앞에 놓여진 육개장 국물에 밥을 말았다. 찬이 없다며 ‘사람 먹는 음식이냐’ 더니, 그녀 역시 허기 앞에 무릎 꿇은 것이리라.
“저는...”
순아가 물었을 때는 그냥 ‘쉬겠다’ 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럼에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엄마는. 작은 아버지 장례 치르려고 공항에서 곧바로 온 애한테 벌써부터 왜 그런 걸 물어?”
은영이 어머니를 나무랐다.
“아, 눈치가 없었나?”
큰아버님이 컵에 따라준 맥주를 절반이나 마신 후 큰어머님은 허허 웃었다.
“실례했다면 미안. 내가 워낙 그런 쪽에 관심이 많아서.”
“아니에요.”
고개를 저으며, 은수는 얼른 덧붙였다.
“장례식 치르고 나서 생각하려고요.”
“그래? 설마, 외국에 다시 나가려는 건 아니지?”
묻는 말과 함께, 그녀는 동태전 하나를 들어 입에 넣었다.
“...”
“가지마.”
답이 없던 은수에게 큰어머님은 말했다.
‘왜?’ 냐고 묻는 듯 은수는 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3년이나 그 나라 사람들한테 봉사한다고 고생했으면 됐지, 뭘 더 하려고?”
“엄마, 그만 좀.”
젓가락을 탁 놓으며 은영이 성질을 부렸다.
“아까부터 왜 그래? 애 밥도 못 먹게?”
“...다 먹었네.”
큰어머님은 부러 은수의 그릇을 보고 그랬다. 그녀의 반응에 은영은 기가 막혔다.
“소화나 되겠어? 왜 그래?”
딸의 말에도 별 말 않고 밥 한 술을 더 뜨고 난 후, 그녀는 컵에 남은 맥주를 전부 털어 마셨다.
그녀가 그러는 사이, 은수는 제단이 있는 방을 슬쩍 보았다.
친척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계모는 그들 쪽을 내내 노려보던 중이었다.
“정 뭣하면, 은영이네 집에 가.”
한숨을 섞은 말에 은수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엄마는, 나하고 상의도 없이.”
은영이 미간을 구기는 걸 보고 큰어머님은 콧방귀를 뀌었다.
“돈 좀 벌었다고 30평 아파트 덜컥 사놓은 게 누군데?”
“그러니까, 왜 나하고 상의도 없이 그런 결정을 혼자 내리냐고?”
“그래. 그건 당신이 너무 했다.”
따지는 건지 나무라는 건지 모를 큰어머님 말에 큰아버님이 은영의 역성을 들었다.
“알잖아. 나 약한 사람 편인 거.”
큰어머님은 은수를 힐끗 보았다.
“안 봐도 비디오지. 쟤 좀 봐. 공항에서 가방 들쳐메고 지네 집은 들르지도 못하고 여기로 바로 왔을 걸.”
말 끝에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장례식 끝나면, 완전히 남이라고 얘 집에 발도 못 들이게 했을 거야.”
큰어머님의 지난한 설명이 결론을 내는 중이었다. 갈곳 없는 은수에게 ‘갈 곳’을 만들어주는 거라고.
은수는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그냥 침묵했다. 한국에 갈 곳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어서.
뭐, 방법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꼼짝없이 순아에게 연락해 한두 달 신세를 질까 싶기도 했다.
“그건 그렇지.”
큰아버님은 말없이 병을 들어 아내의 빈 컵에 맥주를 그득 부었다.
“내 집이 좀 넓지.”
끄덕이며 은영 역시 캔음료를 따서 제 컵에 술마냥 부었다.
원래도 술을 안 하니 그녀도 술을 안 한 거라 여겼지만, 그건 은수 혼자의 착각이었다.
단번에 소주 두 병의 주량을 과시하는 은영이 술을 사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미 음주 상태인 부모를 대신해 그녀가 운전해야 했으니까.
무엇보다,
“...고맙습니다. 신경써 주셔서.”
은영의 집에서 은수가 머물 수 있도록 허락했다는 뜻을 곧 깨달았다.
“근데, 그냥, 제가 알아서 해볼께요.”
자신의 거취를 두고 함께 고민해준 건 감사하지만, 왕래가 없던 그들에게 이런 식으로 신세를 지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은 해 봐.”
부모님을 대신해 은영은 말했다.
“그런데, 될 수 있으면 오는 쪽으로. 내 집이 정말 넓어서 그래.”
은영은 정말, 갈 곳 없는 은수에게 방 하나쯤 내 주는 게 별로 어렵지 않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장례는 힘들었다.낯모르는 사람들에게 수없이 인사하고, 가끔 앉았다가도 일어나기를 반복했다.계모는 친척들과 자주 밖으로 나갔다.뭘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은수는 거의 혼자서 상주 노릇을 했다. 예사로 끼니도 놓치고.발인 날, 계모는 그녀에게 통보하듯 했다.“성남의 OO동에 있는 납골당에 모실 거야. 나중에 가보든지 하고, 넌 안 와도 돼.”“예?”은수는 이틀 밤을 꼬박 샌지라 피곤하고 허기진 상태였다.“발인 날인데, 같이 가지 말라구요?”기가 막혔다.“네가 뭐 자식이었어?”계모는 눈을 부릅떴다.“해준 것도 없는 년이 자식이라고 이틀 설쳤으면 됐지 뭘 끝까지 나서, 나서길?”“아니, 그래도 마지막인데...”“아 됐으니까,”밀치는 손길에 은수는 휘청거렸다.“이제 가. 찾아오지도 말고.”그녀는 오만원 권 지폐 몇 장을 그녀에게 휙 뿌렸다.“엄...”부를 수 없는 이름이었다. ‘엄마’라니.한 번도 가져본 적 없던 이름이라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그들이 떠나고, 은수는 혼자 남았다.바닥에는, 계모가 던져놓고 간 오만원 권 지폐가 휴지조각처럼도 보였다.사흘동안, 한 번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눈물이 나올 만큼 아버지에 대해 애틋한 마음이 있던 게 아니라서.그 오만원권 지폐를 주우면서, 그제야 눈물이 났다.한 번 더, 버려졌으니까.‘...네 장이네.’고교 시절 그녀가 알바해서 계모에게 건넨 돈은 열 배가 넘었다.‘고작 이걸 바라고 온 게 아닌데...’바닥으로 똑똑 떨어지는 눈물방울에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휴지조각처럼 버려졌던 그 돈을 구깃구깃 쥔 채로 그녀는 일어섰다.자지 못하고 먹지 못했다.휘청거렸지만, 그녀는 어지럼증을 털어내고 밖으로 성큼 성큼 나갔다.그들은 막 버스에 오르려던 참이었다.납골당까지는 한 시간여의 꽤나 긴 여정일 터였다.돌진하듯, 계모에게 다가간 은수는 손부터 뻗어 그녀의 어깨를 확 돌렸다.“너...”놀란 얼굴로 저를 알아본 그녀에게 은수는 쥐고 있던 돈을 홱 던졌다.“이게, 야
인도에서 지낸 3년 동안, 그녀는 인도의 문화와 음식 어느 것에도 적응하지 못했다.늘 배앓이를 했고, 서너 시간 후면 잠에서 깼으며 고질적인 빈혈로 철분제를 복용했다. 다 소용없었지만.“너 괜찮아? 웬 땀을 이렇게 흘리니?”은수의 이마에서 볼을 타고 흐르는 땀을 보고, 은영은 기겁을 하듯 했다.여름이 한창 시작되는 중이었지만 실내는 서늘했다. 땀 날 일이 없었다는 뜻이다.“아, 뜨거운 걸 먹어서...”은수는 육개장에 말아놓은 밥을 한 술 한 술 뜨던 중이었다.“몸이 허한가보다.”은영의 그 말에 은수는 오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사시사철 더운 곳에서 3년을 있었다. 그곳에서 땀이 나면 그게 식은 땀인지 진땀인지 알 리 없었다.‘허하다’는 뜻도 당연히 몰랐다.“그걸로 되겠어?”뒤이어 온 큰어머님이 큰아버님 옆에 앉으며 물었다.“음식이 왜 이래? 뭐가 이렇게 없어?”식탁을 둘러보며 낯을 찡그리자, 은영은 인상을 썼다.“엄마, 들으면 어쩌려고...?”“이걸 사람 먹으라고 시킨 거니? 너도 눈 있으면 봐.”큰어머님은 들은 체도 않고 싫은 소리를 했다.은수는 상위를 한 번 더 훑었다.뭐가 이상한 건지는 몰랐다.‘뭐가, 더 있어야 했나?’인도에서 치렀던 친구 아버지 장례식이 떠올랐다.이미 죽은 아버지를 생전의 모습처럼 씻기고 옷 입히고 안경까지 씌우더니, 살아있는 사람들과 사진을 찍게 했다.살아있는 사람들이 그 사체와 하룻밤, 하루 낮을 함께 보냈다.그리고 나서는, 그들도 더러 가서 멱을 감는 강가의 모래밭에 사체를 묻었다!하나같이 약속이나 한 듯, 장례 내내 그들은 금식했다.‘아무것도 먹지 않는 고인 앞에서, 그들은 산자임을 티내며 먹는 걸 불경스러워했지.’마지막 남은 밥 한 술을 뜨며 은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니, 그녀 앞에 놓여진 음식은 함부로 평가받아야 할만큼 형편없지는 않다고.“은수야. 앞으로 너는 어떻게 할 거야?”큰어머님도 자신 앞에 놓여진 육개장 국물에 밥을 말았다. 찬이 없다며 ‘사람 먹는 음식이냐’
아버지과 계모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아예 두 사람만 살기로 작정을 했던 것인지, 계모 쪽 조카들이 그 자식 대신이었는지 겉으로 보기에도 각별해 보였다.고인의 친딸이면서도, 그녀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나 다름없었다.찾아온 사람들은 죄다 계모와 관련이 있었고, 상복만 입었다 뿐이지 그녀는 영 모르는 사람이었으니까.“은수야.”갑작스레 부르는 말에 눈을 번쩍 떴다.“피곤했나 봐.”고개를 번쩍 들었다.계모와 친척들이 와서 우르르 나간 후로 혼자 상주 노릇을 하던 중이었다.저도 모르게 졸았던지라 민망해서 얼른 일어났다.“외국 있었다며? 바로 온 거야?”“예.”안부는 묻는 그들에게 은수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큰아버님네 가족이었다.할아버지의 형님 되시는 큰할아버지의 장남 가족.그녀의 할아버지와 달리, 그 집은 자녀들이 많았다.홀로 컸던 아버지는 종종 그 댁의 형제들과 스스럼없이 지냈다고 했다.특히 나이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큰아버님과.“밥은 먹었니?”꽃 한 송이 제단에 올리고 나서 큰어머님이 물었다.“생각이 없어서...”상주 자리를 비울 수 없었을 뿐이었다.“입술이 다 바짝 말랐는데 무슨 소리야?”은수는 놀랐다. 곧바로 그녀의 상태를 꿰뚫어 본 것 같은 그녀의 말에.“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어?”큰어머님이 은수의 얼굴을 쓸었다.“가서 무슨 고생을 얼마나 한 거야?”어른의 손이 닿은 건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당황해서 애써 웃는데,“형님?”순식간에 얼음이 되어버렸다.“오셨어요?”계모가 친척들과 함께 돌아왔던 것이다.“어디, 다녀온 거야? 상주가 자리를 비우면 쓰나?”은수를 힐끗 보며 그녀는 계모를 나무랐다.“마음이 안 좋아서...”목이 메 꺼지는 목소리로 계모는 우는 소리를 했다.“잠깐 바람 쐬자 해서요. 은수도 그러라고 했고.”애써 침착하려 했지만, 은수는 당황한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내가 언제?’그저 그러면 그러는 줄 알고 입을 다물어버릴 뿐이었다.은수는, 그런 배려의 말을 할 줄 몰라서
원래 살던 집이 아니었다.그녀가 떠나오기 전, 그들이 살던 집은 15평 조그만한 아파트였으니까.짧다면 짧은 세월이 불과 3년인데도, 그들은 이층에 지하까지 있는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온 모양이었다.번듯했다. 유산을 물려받았다더니 그게 좀 많았나 보다고 은수는 생각했다.내부는 어떤지 알지 못했다.대문을 끼고, 계모가 쌍심지를 켜듯 했으니까.“뭐 하러 왔니?”은수를 보자마자, 퉁명스레 쏘아붙이는 그녀.“너 좋다고 혼자 나가서 3년이나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그녀는 말과 함께 날선 눈으로 은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아버지 장례는 치뤄야죠.”“그뿐이니? 네가 여기 온 이유가?”은수의 작은 목소리와 상대적으로 따져 묻는 그녀의 목소리가 사뭇 아팠다.“...예.”“그럼 이대로 가.”작게 답한 말인데 즉답이 돌아왔다.“여기, 너 있을 곳 없으니까.”“예?”“어차피 오늘부터 장례 치른다고 다들 장례식장 가 있을 테니까 너도 이대로 가라고.”카앙.은수의 눈앞에서 대문이 잠겼다.계모는 아예, 그녀가 대문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게 해버렸다.인도의 먼지 바람은 거셌다.아무리 깔끔히 차려 입고 왔어도 은수의 모습은 피곤에 쩔고 꾀죄죄했으리라.“짐 놓고 씻고 가면 안 돼요?”은수는 부탁조로 말했다.“장례 치르러 왔다며?”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계모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 말라는 투였다.“장례 치르면 끝인데 여기다 짐은 왜 둬? 뭐 여기서 살 거야?”할 말이 없었다.‘그냥, 남이라는 소리구나...’집 안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한, 은수는 인도에서 돌아온 그대로 장례식장으로 가야했다. 당연히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목욕탕부터 찾아서 씻고 옷도 갈아입고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그럼, 저는 따로 가겠습니다.”“그렇게 해. 안 그래도 차에 너 탈 자리는 없었어.”계모는 돌아보지도 않고 자신의 차에 올랐다. 그 누구도 그녀와 동행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자리는 많았다.은수는 아무말 않고 장례식장 주소만 받았다.‘기대도 안
여전히 공항은 복작댔다.어디서 이 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지 재헌은 가끔 의문을 품었다.‘이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중에, 현이는 없어.’재헌은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을 그는 무심히 휘둘러볼 뿐이었다.1년 전, 유학을 가는 그녀를 공항에서 배웅했다.약혼한 사이였지만 사랑했기에, 그의 아내로만 살 수 없다는 그녀의 꿈을 지지하고자 그녀의 유학길을 막지 않았다.그녀는 4년제 대학을 3년 안에 패스하고 오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가 그녀를 더 이상 말리지 못하게 하려 했다는 걸 그 역시 모르지 않았다.사랑했다.잠시의 이별도 힘들었지만, 그녀의 말이라면 들어줄 수밖에 없을 정도로.그녀의 호언장담은, 1년 후 갑작스레 돌아온 이별 통보로 끝이 났다.그곳에서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는 게 이유였다.믿을 수 없어서 재헌 혼자 나선 길이었다.전세기도 수행원도 없이, 그렇다고 퍼스트 클래스 티켓을 산 것도 아니었다.소용없는 짓이겠지만, 일단 비행기를 탈 때는 누구도 그가 움직이는 건 몰랐으면 했다.‘변심한 연인을 만나러 가는데, 과한 관심이라니.’피식 웃음이 났다.정비서의 굳은 표정을 떠올리자 한 번 더 바람 빠진 풍선같은 웃음이 났다.맞춤막하게 보딩을 알리는 안내음이 들렸다.그가 일어나자, 그제야 자신을 힐끔거리는 몇몇 시선들을 깨달을 수 있었다.‘알아보았나?’쓰고 있던 캡을 깊숙이 내렸다.‘곤란한데...’애써 태연한 척 걸음을 옮겼지만 그는 몰랐을 것이다.그가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이유가 공인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생각지 않은 이유로 그렇다는 걸.혼자 떠나는 여행객처럼, 단촐한 차림으로 작은 캐리어를 끌고 걷는 그는, 모델이나 다름없었다.190이 넘은 키에 넓은 어깨, 옷으로 가려 놓아도 눈썰미 좋은 사람들이면 알아챌 수 있는 탄탄하고 균형 잡힌 몸에 눈을 가렸어도 드러나는 준수한 얼굴.휴대폰을 끄기 전, 그는 정비서에게 연락을 취했다.[어디십니까?]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건너온 말에,“...숨 좀 쉬지?”
부다다다다-.우툴두툴한 도로 위로 구르는 바퀴 때문에 소음이 꽤나 따가웠다.“이야-, 한동안 이 릭샤도 그립겠네.”옆에 앉은 순아의 말에 은수는 설핏 웃었다.“돌아올 때까지 애들이나 어른들이나 잘 있어야 할 텐데...”뒤이어 중얼거린 그 말에 순아는 그녀를 돌아보았다.“...왜?”“그냥.”웃는 얼굴로 묻는 순아에게 달리, 은수는 고개를 저었다.“그냥은 무슨.”순아는 픽 웃었다.“그런 일을 겪고도 또 여기 오고 싶냐, 뭐 그런 거 물으려던 거 아니었어?”콕 집어내듯 은수의 속마음을 물으며 순아는 또 슬쩍 웃었다.은수 역시도 말없이 웃었다.그 뒤로는, 둘 사이에 더 이상 오가는 말은 없었다.여전히 릭샤가 달리며 내는 소리와 사방이 뚫린 터라 맡을 수밖에 없는 매캐한 매연이 두 사람의 침묵을 오롯이 채울 뿐이었다.원래 있던 곳에서 공항과 가까운 버스 정류장까지 꼬박 네 시간 동안 버스를 탔다.현지인 친구들과는 예사로 가던 길이 두 사람만 딱 나오는 길이다 보니 어쩐지 더 멀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게, 두 사람 모두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버려서 떠나는 길이었으니까.공항에 도착한 후, 수하물로 짐을 부치고 났더니 그제야 조금은 홀가분해졌다.“차 한 잔 할까?”“그러지 뭐.”공항 안의 카페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자리를 잡았다."마지막이니까, 짜이 한 잔 마셔야지."에어컨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 곳이라 후덥지근 했는데도, 순아는 뜨거운 짜이를 시켰다."너는?"인도에 있는 내내, 은수는 하루 세 번씩 갖는 티타임 중 짜이를 한 번도 제대로 마신 적 없었다."스프라이트."단호히 떨어진 그 말에 순아는 고운 눈을 흘겼으면서, 짜이 한 잔과 스프라이트, 얼음도 함께 주문해 주었다.은수가 시킨 음료는 짜이의 두 배나 되는 값이었다. 스프라이트 값이나마 자신이 치르겠다고 주머니를 뒤지던 은수에게 순아는 손을 흔들어 댔다.“내가 낼께.”“응?”“루피 남은 거 써야 돼서.”“루피가 아직 있다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