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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مؤلف: 매콤 칠리소스
“유경아, 지난 일은 좀 묻어두고 살자. 이제 앞으로 나아가야지. 우리 지연이 형수님 그만 괴롭혀.”

“그래, 유경아. 지연이가 기분 좋게 한 잔 올리는 거잖아. 해준이가 지연이를 얼마나 예뻐하는지 알지? 이번에도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면 너 오늘 당장 서경에서 쫓겨날지도 몰라.”

안유경은 빙 둘러앉은 무리를 보며 헛웃음을 삼켰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이들이 자신을 향해 굽신거리며 ‘형수님’이라 부르던 모습이 떠올랐으니까.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야, 송지연! 네가 나한테서 민해준 뺏은 건 시작에 불과하지. 네 엄마는 민해준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끼어들어 가정을 파탄 냈고, 네 아버지는 민해준 아버지를 죽이고 나서 그 죄를 우리 아빠한테 뒤집어씌웠어. 그 일로 나와 민해준, 우린 둘 다 집안이 풍비박산 났지.”

“너와 네 부모는 내 인생을 망친 철천지원수야. 그런데 나더러 이 술을 마시라고?”

그녀는 송지연을 빤히 쳐다보며 한 글자씩 내뱉었다.

“네까짓 게 감히 그럴 자격이나 있다고 생각해?”

“야, 안유경! 너 미쳤어?”

이때 화려한 셔츠를 입은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일어섰다.

“법원 판결도 끝난 일 아니야? 네 아버지가 범인인 거, 흉기에서 지문까지 다 나왔는데 왜 자꾸 죄 없는 지연 씨를 모함해!”

“맞아. 그때 네 아버지가 사람을 얼마나 많이 찔렀는데! 심지어 송지연 아버님도 칼에 찔리셨던 거 다들 알지...”

안유경은 더 이상 이 머리 빈 인간들과 대화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가방을 챙겨 들며 류설아를 향해 말했다.

“설아야, 미안. 여긴 뇌가 텅 빈 인간들이 너무 많아서 더는 못 있겠다. 나중에 우리끼리 따로 만나.”

안유경이 돌아선 그 순간이었다.

“잠깐.”

송지연이 다급하게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으려 했다.

안유경이 몸을 살짝 비틀어 피하자 송지연은 중심을 잃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으악!”

손에 들려 있던 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독한 술이 송지연의 비싼 명품 드레스 위로 쏟아졌다. 그녀는 그대로 테이블 모서리에 몸을 부딪치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모든 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룸 문이 열리고 입구에 서 있던 민해준은 바닥에 쓰러진 송지연과 그녀의 드레스를 엉망으로 적신 술 얼룩을 한눈에 확인했다.

남자의 시선이 옆에 서 있던 안유경에게 옮겨가더니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바닥에 주저앉은 송지연을 부축했다.

“어떻게 된 거야?”

“해준 오빠...”

송지연은 그의 품에 안기자마자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내가 실수로 잔을 놓친 거야. 유경 언니 탓하지 마. 언니가 일부러 안 마시려고 했던 게 아니니까...”

민해준은 안유경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그의 눈빛은 사람을 베어버릴 듯한 시퍼런 칼날 같았다.

“사과해.”

안유경은 헛웃음을 삼키며 덤덤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왜? 3년 전처럼 또 시작인가 보네? 그때 얘가 자작극 벌여서 약 탄 음료수 마신 거 기억나? 그때처럼 또 나한테 뒤집어씌우려고?”

“사과하라고 했어.”

민해준이 벌떡 일어나 안유경을 향해 한 걸음씩 압박해 왔다.

그는 테이블 위에 새로 뜯은 독한 양주병을 가리켰다.

“저거 다 마셔. 지연이한테 사죄하는 의미로.”

룸 안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의 대치를 지켜보았다.

안유경이 말없이 양주병을 집어 들었다.

“유경아, 안 돼... 마시지 마!”

류설아가 다급하게 말렸지만, 다음 순간 모두의 눈앞에서 믿기 힘든 광경이 벌어졌다. 안유경이 병에 든 술을 통째로 송지연의 머리 위로 쏟아버린 것이다.

주르륵, 독한 술이 송지연의 머리카락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공들인 메이크업은 처참하게 번졌고 머리는 엉망이 되었다. 송지연은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다.

“봤지? 이거야말로 진짜 내가 부은 거야.”

안유경은 빈 술병을 내려놓았다. 조금의 미안함도 없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민해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또렷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해준아, 네 아버지랑 우리 아빠 지금 하늘에서 다 지켜보고 계셔. 원수한테 술 따라주며 사과하라니. 업보 당할까 봐 겁나지도 않아?”

“업보?”

민해준이 비릿한 조소를 흘렸다.

“이 세상에 업보라는 게 있다면 가장 먼저 벌 받아야 할 사람은 너야! 대체 그때 왜 네 말을 믿었을까?”

민해준의 뜬금없는 말에 안유경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뜻인지 캐물을 찰나, 송지연이 울먹이며 그의 바짓단을 붙잡았다.

“오빠, 나 데리고 나가서 옷 좀 갈아입게 해주면 안 될까? 술 때문에 몸이 끈적거리고 너무 찝찝해. 유경 언니 탓하지 않으니까 우리 그냥 보내주자.”

민해준은 안유경과 송지연을 번갈아 보더니 결국 허리를 숙여 송지연을 번쩍 안아 올렸다. 이어서 위층 장기 투숙용 객실로 걸음을 옮겼다.

떠나기 직전, 그는 고개를 살짝 돌려 안유경에게 서늘한 경고를 남겼다.

“안유경, 오늘 일 절대 그냥 안 넘어가.”

류설아의 브라이덜 샤워를 더 이상 망치고 싶지 않았던 안유경은 묵묵히 자리를 떴다.

원더랜드를 나서자 검은색 벤틀리 한 대가 길가에 조용히 멈춰 서 있었다.

안유경이 나오자마자 운전기사가 재빨리 차에서 내려 문을 열어주었다.

“유경 씨, 대표님께서 모시러 오라 하셨습니다.”

차 안의 서늘한 냉기가 가을밤의 후텁지근한 열기를 단번에 씻어냈다.

안유경이 자리에 앉아 숨을 돌리기도 전, 휴대폰 액정이 환하게 빛났다.

바로 차도현의 영상 통화였다.

통화를 연결하자 화면 너머로 사무실 배경의 차도현이 나타났다.

뒤로 보이는 통유리창 너머의 이국적인 풍경보다 남자의 눈부신 외모가 훨씬 압도적이었다.

손짓 하나, 표정 하나에서도 귀티가 좔좔 흘렀다.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을 만큼 그는 비현실적으로 잘생겼다.

“기사는 만났어?”

차도현이 물었다.

“응, 지금 탔어.”

안유경은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가로등 불빛이 그녀의 피로한 옆얼굴 위로 덧칠해졌다.

차도현은 잠시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기분 안 좋아?”

“아니, 그냥 좀 피곤해서.”

그녀의 미세한 감정 변화를 읽어낸 차도현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주소 불러.”

“응?”

안유경이 멍하니 반문했다.

“유경아.”

그가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오늘 밤에 묵을 곳 주소 말해줘.”

“왜, 무슨 일 있어?”

안유경은 경계심을 세우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에 차도현은 금테 안경을 벗고 피곤한 듯 콧대를 꾹꾹 눌렀다.

“오늘 민해준 만난 거 다 알아. 넌 이제 내 아내야. 눈치 없는 전 애인이 널 귀찮게 하는 꼴은 못 보겠거든. 경호원들 보낼 테니까 주소 말해.”

그제야 그의 의도를 알아챈 안유경이 주소를 불러주었다.

전화를 끊기 전,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음을 흘렸다.

“국내에 있는 내 동선까지 이렇게 정확하게 꿰고 있다니. 차도현 씨는 여기저기 눈이 참 많네요. 혹시 내가 계약 파기하고 도망칠까 봐 그래?”

차도현의 차갑던 눈매에 그녀의 도발 때문인지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래. 그러니까 도망갈 생각 말고 내 말 잘 듣고 있어.”

차는 고급 아파트 단지 앞에 멈춰 섰다.

이곳은 3년 전 약혼 당시 민해준이 선물했던 집이다.

파혼 후 그가 회수해 가지 않아서 그대로 두었는데 위치도 구조도 흠잡을 데 없어 딱히 팔 이유가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안유경은 층수를 알리는 숫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3년 만의 귀환, 안에 둔 소중한 물건들이 그대로 있을지 걱정부터 앞섰다.

고요한 복도를 지나 익숙한 현관문 앞에 선 그녀가 비밀번호를 눌렀다.

삑.

하지만 비밀번호가 틀렸다는 경고음이 울렸다.

다시 한번 천천히 눌러보아도 결과는 똑같았다.

안유경은 눈살을 찌푸리며 관리실 호출 버튼을 눌렀다.

5분 후, 관리사무소장이 수리공을 데리고 급히 달려왔다. 그녀를 알아본 소장이 난처한 표정으로 쩔쩔매며 설명했다.

“아, 안유경 씨! 귀국하셨군요. 이 집 번호는 1년 전쯤 민해준 씨가 직접 와서 바꾸고 가셨습니다. 고장 난 게 아니에요.”

민해준이 왜 그녀의 집 비밀번호를 바꾼 거지?

안유경의 가슴 속에 날카로운 예감이 스쳤다.

“문 열어주세요.”

“그게, 주인 동의 없이는...”

“제가 이 집 주인이에요.”

안유경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등기부 등본이라도 떼어올까요? 이미 그 사람이 내 명의로 넘겨준 집이라고요.”

소장은 식은땀을 닦아내며 마지못해 문을 열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순간, 낯설고 불쾌한 냄새가 훅 끼쳐 왔다.

싼 티 나는 인공 향수 냄새와 기름 찌든 내, 현관문 앞에는 그녀의 것이 아닌 낯선 신발 여러 켤레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집에 도둑이 들었나?’

안유경은 숨을 죽인 채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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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수의 딸과 바람난 남친   제30화

    통쾌한가? 아주 조금은 그럴지도 모르겠다.하지만 그보다는 소동이 잦아든 뒤의 정적, 그리고 옅은 피로감이 더 컸다.복수가 주는 쾌감은 늘 찰나에 불과했고 그 뒤에는 더 깊은 공허함이 남기 마련이었다.“그럭저럭.”안유경은 결국 그렇게만 대답했다.“일이 해결됐으면 된 거지.”“뭐야. 왜 이렇게 덤덤해?”안유경의 차분한 태도에 류설아가 화제를 돌렸다.“그나저나 지금 어디야? 주변이 되게 조용하네.”“그냥... 아는 사람 집.”안유경은 차씨 가문의 복잡한 사정을 일일이 설명할 마음이 없어 적당히 둘러댔다.“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 며칠 더 머물 것 같아.”류설아는 더 캐묻지 않고 인터넷상의 재미있는 댓글들을 몇 개 더 읊어준 뒤 몸을 잘 챙기라는 당부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안유경이 휴대폰을 내려놓자마자 화면이 다시 켜졌다. 민해준에게서 온 새로운 메시지였다.화면 위에 손가락을 몇 초간 멈추고 있다가 끝내 읽지 않고 그대로 화면을 꺼버렸다.옷을 갈아입고 밥을 먹으려고 먼저 드레스룸으로 향했다.화장대를 지나칠 때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눈동자가 한없이 맑았다. 금방 잠에서 깨어난 나른함 외에 별다른 동요는 보이지 않았다.안유경이 거울을 보며 긴 머리를 천천히 빗어 넘겼다.창밖으로 본가의 불빛들이 하나둘씩 켜지는 풍경이 꽤 근사했다.저녁 식사는 예상외로 평온했다.긴 식탁에 차도현과 안유경 두 사람뿐이었다. 정갈한 요리들이 차례로 올라왔고 분위기는 여유로웠다.안유경은 이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침묵해도 되었고 차도현 역시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었다.식사 내내 차지환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방에서 죽을 먹었다는 소리에 안유경은 내심 안도했다.하지만 그 안도가 너무 성급했다.밤이 깊어지자 본가 저택이 본래의 고요함을 되찾았다.씻고 나온 안유경이 침대 머리에 기대 책을 읽다가 불을 끄려던 그때 저택 반대편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쿵 하는 소리가 적막한 밤공기를 타고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 원수의 딸과 바람난 남친   제29화

    온갖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악의적인 추측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안유경의 과거 정보를 캐내어 제멋대로 왜곡하고 해석하기 시작했다.송지연 측에서 고용한 댓글 부대와 선동된 네티즌들은 진실을 밝혀냈다는 흥분 상태에 빠져 있었다.드디어 때가 왔다.안유경이 차분한 마음으로 자신의 SNS 계정에 접속해 차도현의 비서가 보내준 경미란의 심리 검사 진단서 위조에 관한 조사 보고서를 올렸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는 이미지 비교 증거들을 조목조목 정리해 장문의 글을 작성했다.작성을 마친 후 가짜 진단서를 처음 퍼뜨린 익명 계정과 가장 열심히 퍼뜨리던 계정 몇 개를 태그한 다음 게시 버튼을 눌렀다.그러고는 노트북을 덮고 욕실로 향했다.따스한 물줄기가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렸다. 아직 환한 대낮이었지만 그래도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안유경이 넓고 폭신한 침대에 올라가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감쌌다.이불에서 햇살에 잘 말린 듯한 포근한 향기와 은은한 향 내음이 났다. 예상외로 마음이 너무나 편안했다.눈을 감기 전 낮에 보았던 차지환의 히스테릭한 모습과 차도현의 지친 뒷모습, 그리고 인터넷의 비난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안유경은 가볍게 숨을 내쉬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멘탈이 좋아야 여자의 인생도 잘 풀리는 법이지.”비웃음이 섞인 말투였지만 한편으론 후련함도 담겨 있었다.안유경은 깊게 잠들지 못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났다.“작은 사모님,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문밖에서 도우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안유경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오랜만에 느껴보는 개운함이 몸을 감쌌다.협탁 위에 두었던 무음 모드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이 켜짐과 동시에 쏟아지는 알림 메시지에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좋아요, 댓글, 공유, 다이렉트 메시지... 붉은 숫자들이 쉴 새 없이 올라가고 있었다.부재중 전화도 두 통 와 있었다. 한 통은 민해준, 다른 한 통은 류설아였다.먼저

  • 원수의 딸과 바람난 남친   제28화

    “안유경.”차도현이 안유경의 이름을 불렀다.“우리의 계약이 어떤 건지, 그리고 너한테 얼마나 불공평한 일인지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나한테 지환이가 살아남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어. 어떤 대가든, 어떤 수단이든 난 다 받아들일 수 있어.”그가 단호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그러니 지환이가 아무리 거부하고 나를 증오하고 밀어낸다 해도 살아있기만 하면 돼.”안유경이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늘 냉철하고 자제력을 잃지 않던 이 남자의 단단한 껍데기 아래에 숨겨진 균열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던 중 한 젊은 도우미가 다급하게 다가오더니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차도현의 앞에 멈춰 섰다.“큰 도련님, 작은 도련님이 방에서 또 난동을 부리고 계세요. 그러면서...”“뭐라고 하던가요?”차도현이 돌아서서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남쪽 끝에 있는 연심재의 꽈배기가 드시고 싶다고 하십니다. 갓 튀겨서 겉면이 바삭한 상태여야 한다고...”도우미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고 고개도 푹 숙였다.“당장 사람을 보내 가장 빠른 항공편으로 사 오겠다고 말씀드렸지만 배달해 오면 식어버려서 그 맛이 안 난다고 하셨어요.”차도현이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연심재에 연락해서 돈을 세 배, 아니 열 배로 줄 테니까 그 집에서 제일 잘하는 장인더러 재료와 도구까지 챙겨서 가장 빠른 비행기를 타고 와 이 집에서 직접 만들라고 하세요.”“모든 비용은 차씨 가문에서 부담할 테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환이 요구를 들어주라고 하고요.”“알겠습니다, 큰 도련님.”도우미는 대답한 뒤에도 바로 물러나지 않고 머뭇거렸다.“그리고... 방금 주 박사님이 그러시는데 작은 도련님이 요즘 정서적으로 몹시 불안정하고 신장 수치도 요동치고 있다고 합니다. 가급적 비위를 맞춰주시고 충돌은 피해달라고 하셨어요.”차도현이 이를 악물었다. 손을 휘저어 물러가라는 신호를 보내자 도우미가 큰 짐이라도 덜어낸 듯 서둘러 자리를 떴다.안유경은 옆에서 가만히 듣기만 했다.

  • 원수의 딸과 바람난 남친   제27화

    “차지환.”차도현이 경고의 뉘앙스를 담아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꺼져. 네 사람 데리고 꺼지라고!”차지환이 거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두 눈에 오랜 투병과 불안정한 정서에 시달린 흔적인 핏발이 가득 서 있었다.차도현은 더 이상 그와 실랑이하지 않고 곧장 안유경을 향해 몸을 돌렸다.“이쪽은 안유경이야. 이 사람 신장이 너한테 적합해.”그 말이 폭탄이 되어 차지환을 완전히 폭발시켰다.“적합하다고?”그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더니 옆에 있던 장식장의 꽃병을 덥석 잡고 그대로 바닥에 던졌다.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누가 신장 달래? 누가 그따위 가식적인 동정을 바란대? 꺼져. 다 필요 없으니까 당장 꺼지라고!”이성을 잃은 차지환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선물 상자까지 집어 들어 두 사람 쪽으로 던졌다.상자가 매끄러운 바닥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고 내용물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격렬한 움직임이 본래 허약했던 그의 체력을 순식간에 앗아갔다.물건을 던진 후 차지환이 몸을 숙여 한 손으로 테이블의 가장자리를 짚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가슴팍을 꽉 움켜쥔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입술은 금세 보랏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작은 도련님!”곁에 있던 도우미들과 뒤에서 대기하던 간병인들이 황급히 달려들었다.차도현도 다가갔으나 차지환이 그를 거부한다는 것을 알기에 직접 부축하지는 못하고 대신 도우미들에게 지시했다.“방으로 데려가서 쉬게 해요. 의료진 말대로 조치하고.”숙련된 간병인들이 비틀거리는 차지환을 부축해 방으로 데려갔다.차지환이 여전히 발버둥 쳤지만 힘이 빠진 탓에 거친 숨소리와 욕설만 간간이 들려왔다.잠시 후 그 소리마저 복도 너머로 흩어졌다.거실 안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안유경이 제자리에 서서 바닥에 널브러진 파편들과 차도현의 뒷모습을 번갈아 봤다. 순간 마음이 복잡해졌다.외부인이라 이 상황에 뭐라 말해야 할지도 몰랐다.한참의 정적 끝에 안유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예전부터 저렇게 예민했

  • 원수의 딸과 바람난 남친   제26화

    청기와와 하얀 담장, 날아갈 듯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처마 끝, 대문 앞을 지키는 두 개의 조각상이 모진 비바람을 견뎌온 듯 고요하면서도 위엄이 넘쳤다.도심의 소음에서 완전히 격리된 곳이라 대나무숲을 스치는 바람 소리와 맑은 새소리만 감돌았다.문턱을 넘어서자마자 단아한 옷차림의 중년 여성이 마중을 나왔다. 그녀가 차도현에게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오셨습니까, 큰 도련님.”이어 그녀의 시선이 안유경에게 머물렀다. 역시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작은 사모님도 오셨군요.”잠시 멍해진 안유경의 얼굴에 살짝 민망한 기색이 스쳤다.슬쩍 곁눈질로 차도현을 봤더니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여성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아주머니.”도우미 임해숙이 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안내했다.“오전에 장 회장님과 사모님이 다녀가셨어요. 햇차를 가져오셨는데 얼마 안 있으시고 바로 가셨어요.”“네.”차도현이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덤덤하게 답했다.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차씨 가문은 여전히 A시 명문가의 수장이었기에 매년 줄을 대려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회랑을 지나는 동안 안유경은 자신도 모르게 양옆으로 펼쳐진 조경에 시선을 빼앗겼다.조경 디자인을 공부했던 그녀의 눈에 비친 정원은 모든 배치가 지극히 정교했다.특히 아시아 기후에서는 자라기 힘든 희귀 식물들이 버젓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어떤 기술을 동원해 이곳에 뿌리를 내리게 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길에서 마주치는 도우미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한결같이 나직한 목소리에 절도 있는 걸음걸이를 유지했다.그들은 차도현을 볼 때마다 발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고 안유경에게도 역시 ‘작은 사모님’이라 칭하며 흠잡을 데 없는 예우를 갖췄다.저택 전체에 오랜 시간 겹겹이 쌓인 고요와 질서가 흐르고 있었다.공기 중에 은은한 백단향과 풀 내음이 감돌았고 화려함은 나무의 결 하나하나와 정원의 배치 속에 숨어 있었다. 굳이 과시하지 않아도 그 존재감은 어디에나 있었다

  • 원수의 딸과 바람난 남친   제25화

    다른 한편 안유경도 경미란의 심리 검사 진단서를 조사 중이었지만 아직 뚜렷한 실마리를 잡지 못했다.그러던 차에 차도현의 비서로부터 메일이 도착했다. 안유경이 멈칫했다가 마우스를 움직여 메일을 클릭했다.내용을 확인한 순간 저도 모르게 손가락이 미세하게 굳어졌다.아주 상세한 조사 보고서와 함께 여러 장의 비교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보고서는 경미란의 중증 우울증 진단서에 문제가 있음을 명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서류에 찍힌 도장과 의사의 서명 등 여러 군데가 해당 심리 클리닉에서 사용하는 실제 양식과 달랐다.결론은 자명했다. 위조된 진단서였고 이 또한 예상했던 바였다.거짓말이 일상인 경미란과 송지연 모녀라면 증거를 위조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을 터.안유경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톡톡 눌렀다.차도현의 일 처리 속도에 안유경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이제 막 귀국해서 회사 일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 사건이 터진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이런 결과물을 내놓았다.누가 차도현 아니랄까 봐 일 처리가 지극히 효율적이었다.안유경이 보고서를 저장한 뒤 컴퓨터를 껐다.창밖이 어느새 어두워졌고 도심의 불빛들이 하나둘씩 피어올랐다. 안유경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밤 9시가 다 되어갈 무렵 차도현이 퍼스트 강남으로 돌아왔다. 거실에 켜진 스탠드 조명 하나가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안유경이 무릎 위에 얇은 담요를 덮고 소파에 앉아 책을 펼쳐놓고 있었지만 내용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 듯 보였다.문이 열리는 소리에 안유경이 고개를 들었다.차도현이 입고 있던 정장 재킷을 벗어 소파 등받이에 걸쳐두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가 그녀를 보며 평소처럼 덤덤하게 물었다.“밥 먹었어?”“아직.”안유경이 책을 덮었다.“같이 먹자, 그럼.”차도현은 짧게 말하고는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가사 도우미가 금세 정갈한 4첩 반상과 국을 차려냈다.다이닝 룸에 식기들이 부딪치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두 사람 모두 이 갑작스러운 식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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