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가로등도 제대로 없는 어두운 시골길을 포터는 열심히 내달렸다.
읍내로 나가던 길의 차 안 분위기와 돌아오는 길의 차 안 분위기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차 안은 여전히 고요했으나, 에스더와 인협 사이에 흐르던 긴장감이 많이 완화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직접 나눈 대화는 거의 없었으나, 신기하게도 두 사람은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고 있었다.
서로가 사용하는 단어나 문장, 서로가 아닌 정렬을 향해 보내던 따스한 모습들은 두 사람 모두에게 ‘이 사람도 사람이구나’라는 인식을 어느 정도 심어준 듯싶었다.
정렬 씨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저 사람도 꽤 괜찮은 사람이었던 것 같던데.
묵묵히 창밖만 내다보던 에스더는 치킨집에서 보았던 인협의 여러 모습들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녀 앞에서나 다른 마을 사람들 앞에서는 성격 파탄자처럼 굴던 그가 유일하게 정상인처럼 보이던 시간이었다.
저 사람도 사람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할 만큼.
인협을 속으로 마음껏 비웃고 미워하던 시간만큼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와 동시에 인협이 소원리로 오게 된 이유를 가볍게 치부했던 것도 떠올랐다.
어쩌면 저 사람에게도 타당하고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는지도 몰라, 라는 생각과 함께.
어느새 포터는 소원리 입구로 진입했다.
차 한 대만 겨우 지나다닐 만한 길을 어둠 속에서도 정렬은 망설임 없이 내달렸다.
그만큼 이 동네에 익숙한 그였다.
“어어-.”그때 포터가 소원 초등학교 교문 앞을 지나쳐 내리막으로 향한 탓에 에스더가 놀란 소리를 냈다.
“아, 형 먼저 내려주고 선생님 내려드릴게요.” 정렬이는 다 생각이 있었구나.인협은 어둠 속에서 고요히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늦은 시간에 핑계를 대고 관사 앞까지 걸어가서 데려다주기 딱 좋을 터였다.
“응, 나 먼저 내려줘.”물론 에스더에게 정렬이 아깝다고 생각한 인협이었지만, 저 정도로 좋아 죽으려는 정렬의 마음을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인협의 말에 정렬은 재빠르게 인협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 앞에 차를 세웠다.
“정렬 씨, 번거롭잖아요.” “전 괜찮아요.”정렬과 선의의 투닥거림을 하는 사이, 자신에게 눈짓하는 인협과 눈을 마주친 에스더였다.
“뭐요?” “저 좀 내립시다. 비켜요.” “아-.”그제야 자기가 나와줘야 인협이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에스더는 황급히 문을 열고 길에 내렸다.
인협이 뿌듯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리자마자 텅, 하고 조수석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황 선생님-.”다급한 손짓으로 조수석 창문을 열고서 제게 인사를 건네는 에스더를 정렬이 불렀다.
“여기서 걸어가도 얼마 안 걸려요! 차 돌리는 게 더 어렵겠어요.” “후진하면 되죠.” “아뇨, 정렬 씨는 그냥 쭉 가세요. 애들도 기다리겠어요.”에스더의 정중한 거절에 정렬의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해졌다.
만만치 않네, 이 여자. 아니면 눈치가 없는 건가.
인협은 팔짱을 낀 채로 둘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오늘 읍내까지 태워주시고, 즐거운 시간도 선물해 주시고. 오늘 할 일은 넘치도록 해주셨어요. 고마워요.”에스더가 싱긋 웃자, 정렬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녀만 바라보았다.
“네.”저 답답한 녀석.
순순히 수긍하고서 차를 출발할 채비를 하는 정렬을 지켜보며 인협은 안타까워했다.
정렬이 저 녀석은 여태 연애를 한 번도 해보지 못해서 저 모양이겠지.
아, 그럼 나도 그렇게 나은 입장은 아니네. 나도 연애를 못 해봤으니까.
이내 정렬에게 훈수를 둘 입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인협은 입을 꾹 다물고서 서로에게 인사를 하는 나머지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잘 들어가. 오늘 고마웠어.”“오늘 치킨 사줘서 고마워, 형!”
정렬은 아쉬움을 빠르게 갈무리하고는 포터를 출발시켰다. 포터의 뒤편에 달린 빨간색 등이 간간이 집에서 흘러나오는 빛 외에는 칠흑 같은 어둠뿐인 곳으로 점점 더 구불구불 멀어져갔다.
“그럼, 이만.”인협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서 집 쪽으로 몸을 돌렸다.
턱. 그때 그의 팔뚝을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 잡아챘다.
“뭡니까?” “학교 앞까지만 부탁해요.”에스더의 답지 않은 공손한 어투에 인협의 의아한 눈길이 달빛만 겨우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그녀를 향했다.
“내가 왜요?” “그야-.”당차게 입을 연 에스더는 이내 다시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무서워요?” “아뇨.”인협의 질문에 애써 부정하는 에스더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무서워하네.” “아니, 오늘 유독 달빛이 덜 밝기도 하고 제가 이 시간에 잘 다니는 편도 아니니까요-.” “그래서요?”에스더의 얼버무리는 말에 은근히 신이 난 인협이 일부러 그녀에게 더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말 끝났으면 저는 이만 들어갑니다.” “아, 좀 데려다 달라고요! 그래요, 이 정도로 어두워질 줄도 몰랐고, 이 정도로 무서울 줄 몰랐어요. 집에 가서 할 것도 없을 텐데 이거 하나 해주면 어디가 덧나요?” “이게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인가.”인협이 일부러 더 짓궂게 굴며 몸을 집쪽으로 약간 더 틀어버리자, 에스더의 손에 힘이 더 실렸다.
“아, 미안해요! 미안해! 좀 데려다줘요. 부탁해요!”귀뚤, 귀뚤. 개굴개굴.
그들의 대화를 들은 건지, 주변 풀벌레와 개구리들이 더 세차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저 원래 이런 거 잘 안 하는 사람인데, 이번만 특별히 들어드릴게요.”미세하게 떨리는 에스더의 손끝을 알아차린 인협은 이쯤 해두기로 했다.
이 정도로 떠는 사람 앞에서 무정하게 굴만큼 매정한 사람이 아니기도 했기 때문이다.
“고마워요.”그제야 안도한 에스더의 음성이 한결 더 부드러워졌다. 터벅터벅. 두 사람은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소원리에 가로등은 매우 띄엄띄엄 놓여있어서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특히나 인협의 집과 초등학교 앞은 유독 어두운 편이었다.
“그나저나, 팔 좀 놔주시죠.” “아, 미안해요.”저도 모르게 붙들고 있던 인협의 팔을 놓아준 에스더는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그들의 발걸음 소리와 온갖 풀벌레와 개구리 소리를 배경 삼아 둘은 침묵했다.
이내 소원 초등학교 앞에 다다른 에스더는 핸드폰 플래시를 의지해 키로 교문을 열었다.
교문이 열리자, 풍성한 나무에 둘러싸여 어둠 속에서 유독 더 스산해 보이는 분교의 전경이 보였다.
그나마 관사에 야외 등이 하나 켜져 있어서 다행이긴 했으나, 그곳으로부터 흘러나온 불빛이 학교를 둘러싼 수풀의 선을 한결 더 으스스해 보이게 만들었다.
아까도 무서워하더니. 여기는 더 무서워하겠네, 이 여자.
그 전경을 에스더 너머로 본 인협이 생각했다. 그의 생각대로인지, 에스더는 웬일로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안 가요?” “그게-.”인협과 키가 몇 센티미터 차이 나지 않아 늘 커 보이고 당당해 보이던 에스더는 지금만큼은 순한 강아지처럼 굴고 있었다.
꼬리와 귀를 내리고 낑낑거리던 어떤 동네 강아지가 인협의 머릿속에 절로 떠오를 만큼.
“같이 가줘요?”평소의 심술이었으면, 에스더가 어떻든지 그냥 집으로 가버렸을 인협이었다.
그러나 치킨집에서 함께 정렬을 위해주던 나름의 전우애일지, 아니면 하도 으르렁거리다가 들어버린 미운 정일지 모를 어떠한 감정이 그를 움직인 것이었다.
아, 어쩌면 정렬이에게 한 줄기 빛이라도 되어준 이 사람을 향한 고마움이려나.
인협은 딱 짚어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뒤로하고서 먼저 앞장서서 운동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교문은 닫아서 잠가두고 따라와요. 나는 지난번에 그쪽이 다니던 샛길로 내려가면 되니까.”인협의 말에 잠시 망설이던 에스더는 이내 교문을 걸어 잠그고는 인협의 뒤를 바짝 쫓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도 고고한 자존심을 세우기에는 너무 달콤한 제안이기 때문이었다.
에스더를 기다려주느라 느릿해졌던 인협의 두 발이 그녀의 걸음 속도보다 약간 빠른 정도로 움직였다.
저벅저벅. 텅 빈 밤의 운동장에 두 사람의 발소리만 울렸다.
천만다행이야. 이 길을 혼자서 걸어오지 않아도 돼서.
에스더는 인협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둠을 그다지 무서워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모든 게 도시보다 훨씬 더 무성하고 더 어두운 이곳의 한밤은 유독 더 무섭게 다가왔다.
그래서 소원리로 온 후로는 어두울 때 밖을 돌아다니지 않는 편이었다.
저벅저벅. 평소에 싫어하고 깔보던 사람으로부터 도움받는다는 사실은 굉장히 복잡미묘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고마워요.”관사 앞에 다다르자마자 에스더는 일종의 고해성사를 하듯이 고마움을 전했다.
에스더가 사는 관사 문 위에 켜져 있는 등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인협은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만 서 있을 뿐이었다.
시골의 여름밤 소리가 두 사람을 덮었다.
주변이 고요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완전히 고요했다면, 그 정적을 이기지 못하고 에스더의 얼굴은 붉어지고 말았을 테니.
동그란 안경알 너머의 시선과 에스더의 시선이 얽혔다.
동공이 꽤 큰 편이네. 은근히 빛나는 편인 거 같기도 하고.
에스더는 처음으로 인협의 얼굴을 오목조목 뜯어볼 수 있었다. 그 시선을 묵묵히 견뎌내던 인협은 이내 에스더의 관사 문 방향으로 머리를 한번 까딱했다.
“네?”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갈게요.” “어-.”늘 나쁘게만 행동하던 사람이 선한 행동을 하는 것만큼 당황스러운 것도 없었다.
에스더는 동그래진 눈으로 멍하니 인협만 바라보았다.
“어두운 거 무서워하는 거 아니에요?” “아, 그건 그런데-.”내가 싫어하는 짓만 일부러 골라서 하는 줄로만 알았더니.
에스더는 의아해하며 손짓으로 관사 문을 가리키는 인협을 쳐다보았다.
“안 들어갈 거면, 지금 그냥 갑니다?” “아, 아뇨. 들어갈게요.”홀로 남는 건 싫어서 에스더는 자존심도 내버린 채 냉큼 관사 문을 열었다.
두려움 앞에서 자존심은 많이도 옅어져 있었다.
덜 친절하고 어딘가 많이 모나 보이던 인협은 늘 내려다봐도 되고 우습게 여겨도 되는 줄로만 알았다.
그가 무례하게 굴어도 에스더는 그에게 겉으로는 늘 친절했고, 그를 존중해 주었으니까. 스스로가 좀 더 나은 인간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막상 모든 걸 벗어내고 그의 앞에서 작아진 순간이 되자마자 그를 내려다보았던 시간만큼 약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한 꺼풀 벗겨진 채로 인협 앞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오히려 평소와 다름없는 인협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건 늘 그를 내려다보던 그녀였다.
관사 문손잡이를 잡고서 그냥 이대로 들어가 버릴까, 말까 고민하던 에스더는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뜨고는 고개를 인협 쪽으로 돌렸다.
“고마워요.” “뭐가요?” “여기까지 데려다준 거요.”에스더의 말에 인협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으나, 평소의 그가 지었던 것처럼 누군가를 불쾌하게 만들기 위한 웃음은 아니었다.
한구석에 행복이 조금은 묻어나오는 표정이었다.
이 사람도 사람이긴 하구나. 살아있는 사람. 이런 무심한 친절도 베풀 줄 아는 사람.
에스더는 그런 인협의 미소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
최 씨는 구멍가게 앞, 낡을 대로 낡아 색이 다 바래버린 자판기 옆 평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위에 길게 늘어진 처마 너머로 내려오는 빗줄기를 구경하며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한 손에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담배가 들려있었고, 그의 앞에는 조금 전 기탁이 방문하며 놓고 간 보온 가방이 있었다. 빈속에 술 마시지 말라는 다정한 잔소리를 늘 꿋꿋이 해대는 양반이었다. 교회에는 전혀 관심 없는 최 씨를 여태 포기하지 않은 끈질긴 인물이기도 했고. 원래 이렇게 반강제로 농사를 쉬어야 하는 날이면 고 이장의 무리가 방문하고는 했었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아무도 소식이 없었다.오늘이 나를 빼고 노는 날이던가. 최 씨는 좋은 장소를 제공해 주고, 때때로 공짜로 마른안주나 술을 내어주기도 해서 그들이 자신을 이용 가치로만 보는 걸 알고 있었다. 때때로 그를 아래로 보고, 때때로 그를 뒤에서나 앞에서 대놓고 비웃기도 하면서 최 씨를 종종 모임에 끼워주고는 했다. 남 주려니 아깝고, 진짜 친구로 받아들이자니 그들의 눈에는 최 씨가 한참 모자라 보이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부인이 그를 두고 도망간 버린 후부터 원래도 팽배했던 그들의 업신여김이 더 심해졌다. ‘자고로 성공한 사내라면 옆에 훌륭하게 내조해 주는 부인이 꼭 있어야지.’그런 말을 끝마친 고 이장이나 심 씨의 시선 끝에 걸리는 건 최 씨였다. “후-.”최 씨가 들이마셨던 공기가 연기가 되어 흩어져 나왔다. 아내는 첫째 딸의 아이보는 걸 도와줘야한다며 서울로 떠나버렸다. 딸아이가 육아로 많이 힘들어한다면서 도와야겠다는 이유였다. 그게 벌써 5년 전이었다. 그 사이 둘째 딸도 결혼해 아이를 낳았고, 듣자 하니 아내는 두 집을 오가며 손주들을 봐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떠난 후, 그의 아내는 단 한 번도 소원리에 오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씩 하게 되는 연락도 용건만 간단히. 최 씨가 그녀의 의중을 떠보기라도 하면, 그녀는 무응답으로 일관했다.그렇다고 아내와 마을 사람들
꺄아아-.방음이 잘 된 집 덕분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아이들 소리에 인협의 눈이 살며시 떠졌다. 아무래도 열려 있는 학교 창문을 통해 들려온 소리인 듯싶었다. 날이 워낙 우중충한 데다가 커튼까지 잘 처져있어서 그런지, 한낮의 관사는 꽤나 어둑어둑했다. 체감상 눈을 아주 잠시 감았다가 뜬 것만 같은데, 몸은 굉장히 개운했다. 얼마 만에 잠을 뒤척이지 않고 편안하게 잔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태와 감독과 트러블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나서는 사실 그 좋던 숙소에서조차도 잠을 뒤척이기 일쑤였으니까. “후-.”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니,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된 시간이었다. 나가는 소리도 못 듣고 푹 잤네. 인협은 괜한 머쓱함에 제 차림과 머리카락을 슬쩍 확인했다. 다행히 지나치게 추한 모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끼야야-! 신난 아이들의 소리에 인협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무채색에서 색이 입혀진 세상은 생각보다 더 다채롭게 느껴졌다. 이전에는 성가시게 다가오던 아이들의 소리조차도 유심히 감상해 볼 만한 것이 되었으니까. “집 상태를 한번 확인은 해봐야 하나.”그는 빗소리를 들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짐도 어느 정도 챙겨는 봐야 할 터였다. 곧 에스더의 옆집으로 이사 오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아직 아이들이 수업 중인 거면, 여기서 나가서 샛길로 내려가면 학교에서 눈에 띄지는 않을 텐데. 인협은 그곳까지 생각이 닿자마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식탁 위에 차려진 단출한 아침 식사가 보였다. [간단하게라도 챙겨 먹어. 점심으로 먹을만한 반찬들은 냉장고 안에 있으니, 밥이랑 같이 챙겨 먹어. 굶지 말고!]꾹꾹 눌러쓴 동글동글한 글씨체에 인협이 피식 웃었다. 에스더의 들뜬 음성이 귓가에 직접 울리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그를 이렇게 살뜰하게 챙겨준 건 할머니 이후로 처음이었다. 서울에 가서는 가족들과 제대로 시간을 보낼 새도 없이 바로 팀 합숙 훈련에 들어갔으니까. 인협은 포스트잇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는 냉장고에서 반
천둥소리와 인협의 흐느낌이 모두 잦아든 후. 집 안에는 세찬 빗소리만 들려왔다. “일단 오늘은 우리 집으로 가요.”에스더의 권유에 인협은 순순히 그녀를 뒤따랐다. 에스더의 손을 붙들고 그녀를 뒤따라서 인협은 질퍽한 오르막을 올라갔다. 그가 미끄러질 때마다 에스더는 그의 손을 강하게 붙들어주었다.신기한 여자였다. 덩치가 훨씬 큰 자신을 이렇게 안정적으로 붙들어주는 걸 보면. 관사의 문이 열렸고, 늘 은은하게만 맡아지던 에스더에게 배어있던 향이 인협의 얼굴에 온기가 되어 훅 다가왔다. “들어와요.”혼자서 지내기에는 널찍한 크기의 관사는 깔끔해 보였다. 젖은 상태로 머뭇거리는 인협을 알아차린 에스더는 재빨리 욕실로 향해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많이 춥죠? 일단 욕실에서 따뜻한 물로 몸 좀 녹이면서 씻을래요?” “갈아입을 옷이-.” “찾아보면 입을만한 옷이 좀 있을 거예요.” “네….”인협은 순순히 대답하고는 곧장 에스더의 인도를 따라서 욕실로 향했다.오랜시간동안 젖어있던 몸의 체온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에, 그도 물의 온도에 몸을 내맡기는 게 낫겠다 싶었다. “아예 욕조에 몸 좀 담그고 나와요.” “네.”욕실 문 바깥에서 들려온 에스더의 권유에 인협은 순순히 답했다. 누군가의 앞에서 처음으로 제 바닥을 내보였다는 사실은, 은근한 위안이 되어주었다.에스더 앞에서만큼은 더 이상 무언가 있는 사람인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아주 편리했다. 이미 그녀는 그의 있는 그대로의 바닥을 보았으니까.온수를 튼 인협은 욕조에 앉았다. 작지 않은 체구의 그에게도 크게 불편하지 않게 느껴질 만큼 욕조의 크기는 적당했다. 물의 온기에 몸을 내맡기자, 오랜 시간 동안 식어 내려있던 체온이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좋다-.”그는 눈을 감은 채로 머리를 뒤에 있는 벽에 기대었다. 제대로 보수되지 않은 할머니의 낡은 집보다 훨씬 더 쾌적한 환경이었다. 게다가 관사는 최근에 인테리어를 모두 새로 한 건지, 매우 신식인 데다가 깔끔했다.그 환
똑똑. “미치겠네.”거친 몸짓으로 이불 위에서 돌아누우며 인협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미 물이 차오른 통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는 요 며칠 동안 인협의 불면의 이유였다. “아우씨-.”반복되는 소음에 인협은 거친 몸짓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어렴풋한 달빛을 의지해 그는 벽 한구석을 노려보았다.며칠 동안 이어진 불면에 화가 났으나, 애꿎은 집에다가 화풀이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어두운 밤이면, 제 처지가 유독 깊게 느껴지고는 했다. 누가 더럽게 깊게 파놓은 구덩이에 꼭 끼어버린 기분. 다시 오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어딘가에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X 같네.”이런 감정이 밀려올 때면 인협의 인생 전체가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기분이 들면서, 더 이상 살아도 이런 어두운 터널 속에만 머물러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때는 대한민국에 리그 오브 카오스의 2인자였으나, 그 옷을 빼앗겨버린 지금은 뭣도 아닌 인간이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늘 훈련에 참석하느라 바빠서 형편없는 성적으로 겨우 졸업한 고등학교 이름이 그의 마지막 방패였다. 세상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판단할 만큼 하찮고 보잘것없는 이름이었다.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방구석에 틀어박혀 날마다 밤낮없이 게임만 해댄 경험은 지금의 인협에게는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다.그 시간 동안 차라리 대학이라도 갈 걸 그랬나. 인협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던,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던 자신의 삶의 궤도가 늘 후회스러웠다. 바보같이 내일이 없을 것처럼 외길만 파서는. 그렇게 성실하게 외길만 파면 누군가는 알아줄 거라고, 결과로 증명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과거의 자신을 인협은 힘껏 비웃었다. 그 순수했던 시절의 자신이 한심하기가 짝이 없었다. “미련한 새X.”세상이 손가락질하기 전에 자신을 가장 강하게 손가락질해야 일종의 면죄부를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서 인협은 늘 자괴감이 들 때마다 나서서 자신을 비난했다. 나는 이미
“끄으응-.”조 선생을 보낸 후, 관사로 돌아온 에스더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로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관사 부엌과 거실 공간을 서성거리고 있었다.아, 괜히 큰소리친 건가. 조 선생이 맡은 과목은 일단 고 선생이 맡은 수학, 과학, 그리고 에스더가 맡은 영어를 제외한 과목 모두였다. 국어, 사회, 도덕, 음악, 미술, 체육. 게다가 학교의 전반적인 업무까지. 교장인 본용이 학교에 거의 나오지도 않는 걸 보면 사실상 학교의 모든 업무를 조 선생이 한다고 봐도 무방할 듯했다. 조 선생은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학교 관련 업무는 딸인 유진에게 부탁해 보겠다고 했다. “내가 일곱 과목…. 일곱 과목-.”에스더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한국을 떠난지라 한국 과정은 잘 기억도 나지 않았고, 애초에 그로부터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은 교육 과정이 많이 바뀌었을 터였다. 게다가 소원리 초등학교 특성상, 아이들에 맞춰서 그녀가 준비해야 할 과정은 다양했다. 전교생은 열 명 남짓했지만, 초등학교 1학년부터 5학년까지 골고루 있었다. “아으으-. 그래, 일단 과목 중 두 개 정도는 고 선생님이 맡아주겠지. 사람이라면 말이야.”정말? 힘없고 비열한 드라큘라 백작처럼 생긴 고 선생의 심드렁한 얼굴을 떠올린 에스더는 또 한 번 앓는 소리를 냈다. 안 한다고 해도 그 인간을 어떻게든 설득해 봐야지.그는 당장 아파서 죽어가는 사람보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걸 충분히 못 견뎌 할 위인이었다. “후우, 그럼 다섯 과목.”예체능만 누구한테 부탁할 수 없나? 에스더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음악과는 정말 연이 없다는 것. 심지어 노래도 못 부르는 편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즐기고 좋아하던 조 선생의 음악 교실에는 전자피아노와 노래가 필수였다. 때때로 그녀는 창고에서 사물놀이를 꺼내 와 아이들을 가르치고는 했다. “아-.”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렇다고 고 선생도 이렇다고 할 음악적인 재능도 없었다. 당장 며칠 동안은 어떻게든 버텨볼 만했지
같은 날 점심시간 무렵. 카페가 유독 바쁜 날이라 카페 사장인 아내 영애를 도우러 출근한 태욱이었다.그는 가게 일을 돕다가 잠시 한산해진 틈을 타 커피 한잔을 하며 쉬는 중이었다. “철호!”태욱은 그때 카페 안으로 들어서는 뜻밖의 손님을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비싼 커피보다는 인스턴트커피가 제 입맛에는 제격이라며 읍내에서 일하면서도 가까운 곳에 있는 카페에 절대 들리지 않던 철호였다. 대개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철호의 얼굴이었지만, 아는 누군가를 만나기만 하면 서글서글해지는 얼굴이 웬일로 가장 친한 태욱을 발견해 내고 나서도 여전히 굳어있었다. 어딘가에 영혼을 빼앗겨버린 듯한 철호의 모습에 태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여태 봐왔던 철호의 모습 중 새로운 모습이었다. ”태욱아.” “웬일이야, 여기에는? 철물점은?”카페 한구석에 빈자리에 앉아 있던 태욱 맞은편 의자에 철호는 쓰러지듯 앉았다. 다리가 풀려버린 사람처럼. “태욱아.” “커피 한잔 내려줄까? 달달하고 따끈한 거로?”평소에 펄펄 끓는 물로 만든 인스턴트커피를 단숨에 마셔버리고는 하는 철호였다. 뜨끈한 기운이 몸을 데워줘서 좋다나. 그런 철호의 취향을 아는 태욱은 인스턴트커피와 얼추 비슷한 달달한 라떼를 만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시원한 걸로 내려주라. 내 속에 천불 좀 끄게.” “뭐?” “……..”놀란 태욱이 되물어도 철호는 말없이 카페의 자랑인 바다 풍경만 유리창을 통해 내다보았다. 잠시 답을 거부하는 그 옆모습을 읽어낸 태욱은 바로 향해 능숙한 손길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영애가 이 카페를 시작했을 무렵. 그녀만 고생시킬 수는 없다는 이유로 태욱은 그녀 옆에서 부지런히 카페 일을 배워서 그녀를 보좌했었다. 지금에서야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서 고정으로 돌릴 직원이 생겨난 데다가, 갑자기 맡게 된 영애의 조카들 때문에 태욱은 아이들을 돌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어, 여보? 커피 한잔만 하고 바로 집에 들어간다면서?”카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