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음악 시간이 끝난 후 교무실. 에스더가 수업하는 시간이라 교무실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너, 대학은 나온 거니?” “네?” “인협이 너, 대학은 나왔냐고.” 옆 책상에서 들려온 제환의 깐깐한 목소리에 인협이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대꾸했다.서른 살 무렵의 제환이나, 마흔 살 무렵의 제환이나. 옹졸하고 짜증 나게 구는 건 여전했다.
아니, 어쩌면 십 년이 지나는 동안 더 똘똘 뭉쳐 단단해지기까지 한 옹졸함은 더 답이 없어 보이게 만드는 듯했다.
“대학 안 나왔는데요.”거짓말이라고는 모르는 인협이었다. 그의 돌직구에 제환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근데 어떻게 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칠 생각을 해?”시골에만 살아서 순수해서 그렇다고 해야 할까.
약아빠지게 굴 줄 전혀 모르는 듯해보여 불쌍해 보이는 지경의 제환의 공격에 인협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황 선생님이랑 교장 선생님의 요청이 있어서 맡게 된 건데요.”인협이 에스더를 언급하자마자 제환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 찰나의 변화를 잡아낸 인협이 한쪽 입꼬리만 올려서 웃었다.
“황 선생님이야 맡은 과목 수가 너무 많아서 판단력이 흐려졌다지만…. 교장 선생님은 황 선생님이 설득해서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거야, 알아?” “그럼, 황 선생님의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게 그전에 형님이 잘 좀 하시지, 그러셨어요.” “뭐?” “형님이 맡은 과목 수가 해봤자 네 개였고, 영어 선생님으로 임시로 와있는 황 선생님이 맡고 있던 과목 수가 여섯 개는 족히 됐다면서요? 그것도 필수 과목 위주로.”인협의 대꾸에 제환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다크서클이 유독 짙어 보이는 탓에 오늘따라 제환은 더 심술궂은 뱀파이어 같았다.
“게다가 형님은 뭐가 억울한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해봤자 아무도 안 살아서 오랫동안 비어 있던 관사 주시고, 형님의 월급에 훨씬 못 미치는 50만 원 다달이 받으면서 이 자리를 메꿀 건데요.” “…….” “겨우 몇 시간씩이긴 하지만, 주중 매일 출근인데 이 정도 돈이면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조 선생님이 하던 일도 워낙 많았어서 그것도 어느 정도 커버할 거고요.” “너, 형한테 말대꾸를 참 잘하는구나?”별것 없는 어른일수록 나이를 따진다는 건, 짤막한 사회 경험을 통해 잘 터득한 인협이었다.
감독이었던 정현도, 케이비 팀 리더였던 기태도. 자신에 대해 내세울 것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본인들의 나이를 강조하고는 했었다.
“그리고, 황 선생님을 네가 그렇게 잘 알아? 해봤자 몇 시간씩 깨작깨작 며칠 봤을 네가 황 선생님을 더 잘 알겠니, 주중에 매일매일 보고 점심도 같이 먹었을 내가 더 잘 알겠니?”가지가지 하네, 진짜.
미운 마흔의 진상의 표본을 제대로 보여주는 제환의 말에 인협은 다시 한번 한쪽 입꼬리만 올려서 웃었다.
“근데, 정작 황 선생님에게 도움이 되는 건 저인 거 같은데요.” “뭐라고?” “황 선생님을 그렇게 잘 알면, 황 선생님이 원하는 것도 잘 알아야 정상 아닌가?”말을 마친 후 인협은 아닌가, 라는 말을 덧붙이고는 한 번 더 피식 웃었다.
누가 봐도 제환은 에스더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에스더가 힘든 건 나 몰라라 하고서 자기 잇속 챙기기 바쁘면서 에스더랑 더 가깝다고 뻐기기는.
인협은 가소로울 지경의 공격에 큰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아, 그리고 제가 대학은 안 나왔지만, 아이들은 오늘 했던 음악 수업이 최고였대요. 이전에 했던 수업들은 맨날 교과서만 봐서 지루했다나, 뭐라나.”얇은 미성이라고 주장하는 내시 같은 목소리로 부르는 노랫소리에 늘 칭찬만 받아왔던 제환은 제가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굳게 믿고서 살아왔다.
그러나 막상 음악적 지식은 전혀 없었기에 그는 조 선생이 치료를 위해 쉬게 된 후로는 교과서만 따라서 아이들을 겨우 가르쳤을 뿐이었다.
“뭐?” “생각보다 가르치는 데에 제가 재능이 있나 봐요.”결정타를 날린 인협은 다시 수업 준비를 하기 위해 책상 위에 펼쳐둔 책으로 눈을 돌렸다.
얼굴이 붉어진 제환이 씩씩거리는 소리가 고요한 교무실에 울렸다. 그 소리를 들으며 적잖은 쾌감을 느낀 인협은 책상 커버 밑에 숨어서 조용히 웃었다.
이제 앞으로 나도 에스더를 매일매일 볼 거고, 밥도 같이 먹으면 그만이지.
제환의 하찮은 도발을 떠올린 인협은 비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제환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빠른 시일내에 시내에 나가서 그녀와 밥이라도 한번 먹어야겠다고 다짐한 그였다.
그때 짤막한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교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화를 못 이긴 제환은 곧장 다음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버렸고, 교대를 하기 위해 교무실로 들어온 에스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인협을 바라보았다.
태연하게 자리에 앉아 있던 인협은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고 선생님 왜 저래?” “몰라요, 오늘따라 집에 우환이 좀 있나 봐.”인협의 태연한 대꾸에 에스더는 제환이 사라진 쪽을 힐끗 돌아보고는 인협의 옆 책상에 털썩 앉았다.
“고 선생님이랑 너무 깊이 엮이지 말아요.” “알아. 내가 어렸을 때 형도 소원리에 있었어.” “아하, 쉽지 않았겠네.” “쉽지 않았지. 근데, 이번에 보니까 그때보다 대하기 더 어려워진 거 같네.” “그래?”보통 흥분하지 않는 그였다.
그런데 에스더와 더 친하다고 으스대던 제환의 말을 들었던 순간, 그는 필요 이상으로 반응하고 말았다. 유치하게도.
에스더는 이제 다음 수업 준비에 집중하고 있었다.
에어컨이 돌아가는 소리 외에는 조용한 교무실 안. 덩달아 수업 준비에 집중하던 인협의 눈이 잠시 에스더 쪽으로 향했다.
동그란 이마와 잘 어우러지는, 낮지도 높지도 않게 오똑 솟은 콧대. 작고 갸름한 얼굴에는 적당한 볼살이 남아 있었다.
두근두근-.
그 모습을 찬찬히 보던 인협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고 순간 당황한 그는 황급히 시선을 돌려서 수업 계획서를 읽기 시작했다.
뭐지? 아까 전 제환의 도발에 짜증이 났던 순간이 떠올라서일까?
인협은 머릿속 의문을 안고서 수업 준비에 집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책상 위에 떠오르는 에스더의 잔상을 지우기 위해 애를 쓰며.
***
긴 장마에 갑순과 복란이 오랜만에 밭일을 하던 중. 멀리서부터 들려온 차 소리에 밭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어? 저거는 누구네 차래?”회색 고급 세단이 인협이 살던 낡은 집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본용이가 지난번에 인협이는 오늘부터 학교에서 일한다고 했는데?” “그러게.” “설마, 부용이네 부부인가?”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두 사람은 담장 너머로 사라져 버린 차를 바라보았다.
폐가나 다름없는 김 씨네를 찾을 사람은 그들의 외동딸인 부용의 가족 아니면 없을 터였다.
담장 너머로 집 쪽을 기웃거리는 머리 두 개가 보여서 갑순과 복란은 그쪽을 주시했다.
집을 살펴보던 두 사람은 이내 담장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밭에 나와 있는 갑순과 복란을 발견했다.
”아주머니!”반가움 가득한 부용의 목소리에 갑순의 눈이 커졌다.
“부용아!”갑순의 인사에 부용과 주성이 그들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마지막으로 봤던 게 부용의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였다.
“그래, 누가 아들내미를 저런 폐가 같은 집에 그냥 내버려둬?” “이제야 알게 됐나 보지. 인협이가 여기에 와있다는 걸.”갑순과 복란은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점점 더 가까워지는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아주머니! 혹시 인협이가 저 집에 살고 있나요?” “어, 장마 전까지는 살다가 물이 하도 새서 학교에서 지냈대.”갑순의 대답에 부용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네?” “그러다가 학교에 일손이 좀 부족해져서 몇 시간씩 근무하고 관사를 하나 받은 모양이더라고. 집을 살만해질 정도로 수리할 때까지는 거기에 있을 모양이야.”갑순의 설명에 부용과 주성이 조용히 시선을 교환했다.
“그래요? 영애는요?” “영애는 카페에 있겠지. 걔는 또 왜? 또 땅 얘기하려고?” “아니요, 그냥. 소원리에 와있다니까 안부가 궁금해서 그러죠.”갑순의 다그침에 부용은 적당히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런 부용을 혀를 끌끌차며 보는 갑순이었다.
“저 코딱지만 한 땅이랑 다 쓰러져가는 집을 이 동네에서 가장 알아주는 부자인 영애가 탐냈을 리가 있겠니?” “그런 게 아니라요….” “그런 게 아니면! 그 땅 네 아들 손에서 뺏어서 또 뭐라도 해 먹으려고 그래?” “아주머니! 왜 저만 보면 뭐라고 하세요.” “네가 사업 때문에 난리만 안쳤어도 소원리 땅 중 3분의 1이 아직 너희 손에 있었을 거야.”옆집 김 씨 부부와 어렸을 적부터 친하게 지내온 갑순은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알고 있었다.
부용과 주성의 사업이 위태로울 때마다 그들은 김 씨 부부에게 손을 벌렸고, 그럴 때마다 마음이 약한 김 씨 부부는 밭을 팔아서 그들을 도와주고는 했었다.
그러다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그들은 도움을 주는 걸 멈췄고 그때 두 사람의 사업이 망하며 큰 빚을 지게 된 것이었다.
그때 부용은 금전적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는 제 아들들을 부모님 손에 맡기고 도망을 가버렸다.
빚쟁이들에게 쫓기지 않도록 숨어 다니기 위함이었으나, 결국 80대가 다 됐던 김 씨 부부에게 아이들 양육을 기한 없이 전적으로 부탁한 거나 다름없었다.
“아주머니, 저희 집안 이야기예요. 엄마랑 저랑 알아서 해결한 부분이고요.” “알아서 잘 해결된 문제 가지고 사람이 그렇게 골머리를 앓아?” “아주머니-.” “너, 이번에 인협이가 걱정되어서 내려온 게 아니구나?”갑순의 질문에 부용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주머니, 너무하세요. 제가 여기까지 아들 보러 오지, 왜 왔겠어요?”부용은 기분이 상한 채로 몸을 홱 돌려서 제 갈 길을 갔다.
“아들한테 그러면 안 돼! 아이들도 다 안다! 아무리 말을 번지르르하게 해도 그 속에 든 걸 다 안다고!”갑순의 잔소리에도 부용과 주성은 대꾸도 안 한 채로 걸어갔다.
“저 집은 또 무슨 일이래?” “쯧쯧, 부모라는 게 저리 못되어 먹어서는. 저러니 인협이가 온 세상에 뿔이 나있을만하다.” “…….” 갑순의 답에 복란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서 학교 쪽으로 향하는 부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네? 부용이가요?”
카페에서 일하던 영애는 전화를 받고는 홀 뒤편 룸에서 장부를 확인하다 말고서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 너 어딨느냐고 묻더라. 그 기집애가 네가 그리울 리는 없고 보나 마나 김 씨네 땅 이야기겠지] “일단 알겠어요. 카페로도 찾아올 수도 있겠네요.”갑순의 적나라한 표현에 영애가 심각한 표정으로 답했다.
“네, 감사해요. 네-.”핸드폰을 내린 영애는 착잡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인협의 두 눈이 천천히 떠졌다. 아직 커튼도 달지 못한 창문을 통해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눈앞에는 깊이 잠든 에스더의 얼굴이 보였다. 머리는 아직 묵직했지만, 심한 몸살 기운은 가신 뒤였다. “…….”머리카락 한 가닥이 그녀의 코 쪽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인협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서 그 가닥을 에스더의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귀가 예쁘네. 에스더의 귀에 잠시 닿았던 시선이 천천히 그녀의 이마로 향했다. 동그랗고 예쁜 이마. 둥그런 아치 모양을 그리며 뻗어있는 눈썹. 얇게 진 속쌍꺼풀과 긴 편인 속눈썹. 오뚝한 코, 귀여운 콧방울. 그리고 입술. 윗입술보다 더 도톰하고 유난히 붉어 보이는 아랫입술에 시선이 닿자마자 인협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일종의 본능이었다. 시선은 더 아래로 향했다. 갸름한 턱, 가느다랗고 긴 목선. 그리고 늘어진 티셔츠 목 부분 옆으로 보이는 쇄골. 거기까지 시선이 닿은 인협은 얼굴로 밀려오는 뜨거운 기운에 당황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려 애꿎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쁜 짓이라도 저지른 기분이 들어서였다. 에스더의 손은 그의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마치 어제 가지 말라고 붙들었던 사람이 그녀인 것처럼. 평온한 순간이었다. 밝은 햇빛에 조용히 공기에 떠다니는 먼지마저도 따뜻이 다가올 만큼. 커튼이라고는 있을 수 없는 오래된 할머니 집 사랑방에서 어느 날 남동생 인섭과 함께 할머니 곁에 잠든 적이 있었다. 평소에는 건넌방에서 자고는 했었는데, 웬일인지 그날따라 함께 자고 싶어졌었다. 인협이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때였다. 그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한지 사이로 비춰들어 오는 은은한 햇빛에 보였던 할머니를 보며 느꼈던 안온함과 비슷했다. 마치 그가 원래 있어야만 했던 곳으로, 집을 찾아낸 느낌. 그날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단단한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선 느낌이었다. 이상해. 할머니와 에스더 사이에나 이 관사와 할머니 집의 사랑방에는 어떠한 접점도 없음에도
똑똑똑. “나인협!”노크 소리에 방에 들어갈 힘조차 없어서 거실 소파에 옆으로 누워있다가 깜빡 잠에 들었던 인협이 겨우 눈을 떴다.머리가 지끈거리고 열이 올랐는지, 온몸이 뜨거웠다. 인협은 게슴츠레 뜬 눈으로 주위를 확인하고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식은땀이 이마에 맺혀 있었다. “아으….”몸이 천근만근인 것도 모자라,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쑤셨다. 똑똑똑. “집에 있는 거 다 알아!” “지금 나가….”인협의 힘없는 음성에 에스더의 힘찬 노크 소리가 잠시 멈췄다. “너, 아파? 목소리가 좀 안 좋은데?”인협이 느릿하게 움직여 구부정한 몸을 하고선 손으로 벽을 짚고는 문을 열었다. “너 아프구나.” “조금.”에스더의 동그래진 눈을 본 인협이 겨우 미소 띤 얼굴로 대꾸했다. 에스더는 잠시 할 말을 잃었는지, 입을 벌린 채로 잠시 제자리에 서 있었다. “어째, 네가 더 아픈 것 같은 표정이야?”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에스더의 표정에 인협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몸, 많이 안 좋아? 병원에 가서 링거라도 맞을래?” “추워….”훅 불어온 여름 밤공기에 인협이 몸을 떨자, 에스더는 다짜고짜 발을 들이밀어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쾅. 그렇게 현관문이 닫혔다.두 사람은 불도 켜지지 않은 어둑어둑한 집안에 함께 있게 되었다. “어디 봐. 이 더운 여름에 춥기까지 한 거면 꽤 심각한 거 같은데.”에스더는 손을 뻗어서 인협의 이마를 짚었다. 열이 잔뜩 오른 이마에 닿은 그녀의 손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인협은 그 기분 좋은 감각에 눈을 감고서 그녀의 손에 살짝 기댔다. “시원해. 기분 좋아.” “인협아. 병원 가자.” “괜찮아. 돈 아까워. 그냥 견디면서 약 먹으면 돼.”행여나 큰 병원에 갔다가 신상이라도 밝혀질까 두려워진 인협은 에스더의 제안을 거절했다. “약은 있고?”도리도리. 인협의 힘없는 고갯짓에 에스더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루쯤 꼬박 견디면 나아.”인협이 숙소에서
인협과 인섭이 아직도 소원리에서 지내던 어느 날, 서울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던 영애가 엄마인 인자의 집에 들린 날이었다. 쿵쿵쿵. “누가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해가 일찍 지는 어느 겨울 저녁. 조심스럽게 새로 단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머리가 하얗게 세고 허리가 굽은 엄마 인자와 남편 태욱과 함께 식사를 하던 영애가 걸어 나가 문을 열었다.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추위에 얼굴이 벌겋게 된 김 씨 부부가 보였다. “어? 아줌마, 아저씨! 안녕하세요. 날이 추운데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부부의 방문의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일단 영애는 두 사람을 거실로 들였다.지팡이를 짚는 두 사람이 오르기 꽤 험한 편인 오르막길을 어찌 올라왔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몇 년 전, 사위인 태욱의 도움으로 아예 신식으로 탈바꿈된 인자의 집안은 깔끔했다. 많이 추웠는지, 순순히 거실 소파에 앉은 김 씨 부부에게 인자가 말을 걸었다. 인자는 머리가 하얗게 세고 짧은 머리로 굵은 파마머리를 한 노인이었다. 평생을 부지런하게 산 터라 몸에 살집은 전혀 없었다. “무슨 일이야?” “언니, 그게….”인자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김씨 부인이 입을 열었다. 딱 봐도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언니도 알잖아. 부용이네가 사정이 어려워서 그동안 우리가 많이 도와줬던 거.”김씨 부인의 말에 김씨가 흐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우리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거 같아. 그래서 염치없지만 큰 부탁 하나 하려고.” “살날이 나보다 너희 부부가 더 남았으면 남았지, 내가 더 남았겠어?” “그래서. 그래서 영애네 부부가 잠시 들렀다는 소리에 이렇게 부리나케 찾아왔어.”김씨 부인의 뜻밖의 소리에 인자와 영애가 동시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염치없지만 부탁 하나만 할게, 영애야.” “한번 들어보고요, 아주머니.”자고로 영애는 어렸을 적부터 소원리에 소문난 똑순이였다. 그녀만큼 셈이 빠른 사람이 없었고, 바른 말을 잘하는 사람이 없었다.
음악 시간이 끝난 후 교무실. 에스더가 수업하는 시간이라 교무실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너, 대학은 나온 거니?” “네?” “인협이 너, 대학은 나왔냐고.” 옆 책상에서 들려온 제환의 깐깐한 목소리에 인협이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대꾸했다. 서른 살 무렵의 제환이나, 마흔 살 무렵의 제환이나. 옹졸하고 짜증 나게 구는 건 여전했다. 아니, 어쩌면 십 년이 지나는 동안 더 똘똘 뭉쳐 단단해지기까지 한 옹졸함은 더 답이 없어 보이게 만드는 듯했다. “대학 안 나왔는데요.”거짓말이라고는 모르는 인협이었다. 그의 돌직구에 제환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근데 어떻게 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칠 생각을 해?”시골에만 살아서 순수해서 그렇다고 해야 할까.약아빠지게 굴 줄 전혀 모르는 듯해보여 불쌍해 보이는 지경의 제환의 공격에 인협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황 선생님이랑 교장 선생님의 요청이 있어서 맡게 된 건데요.”인협이 에스더를 언급하자마자 제환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 찰나의 변화를 잡아낸 인협이 한쪽 입꼬리만 올려서 웃었다. “황 선생님이야 맡은 과목 수가 너무 많아서 판단력이 흐려졌다지만…. 교장 선생님은 황 선생님이 설득해서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거야, 알아?” “그럼, 황 선생님의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게 그전에 형님이 잘 좀 하시지, 그러셨어요.” “뭐?” “형님이 맡은 과목 수가 해봤자 네 개였고, 영어 선생님으로 임시로 와있는 황 선생님이 맡고 있던 과목 수가 여섯 개는 족히 됐다면서요? 그것도 필수 과목 위주로.”인협의 대꾸에 제환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다크서클이 유독 짙어 보이는 탓에 오늘따라 제환은 더 심술궂은 뱀파이어 같았다. “게다가 형님은 뭐가 억울한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해봤자 아무도 안 살아서 오랫동안 비어 있던 관사 주시고, 형님의 월급에 훨씬 못 미치는 50만 원 다달이 받으면서 이 자리를 메꿀 건데요.” “…….” “겨우 몇 시간씩이긴 하지만, 주중 매일 출근인데 이 정도 돈
방과 후. 아침에 본용으로부터 옆집 관사 도어락 비밀번호를 전달받은 에스더가 그것을 인협에게 건네자마자 둘만의 작은 이사가 시작됐다. 7월 초. 오랜만에 잠시 비가 쉬어가는 날이었다. 그래봤자 옆집에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한 후에 캐리어 하나를 달랑 바로 옆집으로 옮기는 거였지만 말이다. “진짜로 짐이 이게 다야?” “응.”에스더와 인협은 에스더의 집과 똑같이 생겼지만, 방향만 다른 집안을 둘러보았다. 사람 사는 온기가 아직 채워지지 않은 관사 안은 휑했다. “이사 기념으로 자장면은 대접 못하지만, 짜파게리나 같이 끓여 먹을래?”짐이 든 캐리어를 한구석 벽에 기대어놓은 인협의 제안에 에스더의 얼굴이 밝아졌다. “좋지! 오늘 밥 차리기 귀찮았는데, 잘 됐다.” “잘됐네. 소파에 앉아 있어.” “좋아.”에스더는 아직 물건 없이 텅 빈 집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인협은 능숙하게 움직여, 관사에 있던 냄비를 하나 꺼내서 그것을 씻었다. 생각보다 어깨가 넓네. 에스더의 눈이 인협의 뒷모습을 바쁘게 좇았다. 팔을 뻗을 때 은근히 보이는 근육. 생각보다 남자다운 몸의 선. 그녀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지금. 차라리 내 취향은 정렬 씨라고. 키도 크고 남자답고, 성격도 순하고. 마른 안경잡이는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에스더는 자기 최면을 걸며 잠시 스쳐 지나간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애를 썼다.이상하게도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인협의 뒷모습에 절로 흐뭇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뭐야.” “뭐가?”에스더의 나지막한 혼잣말에 짜파게리를 끓이던 인협이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아냐, 아무것도 아니야.” “싱겁긴.”피식 웃고서 돌아보는 인협의 모습의 잔상이 남아 에스더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한 번 더 응시했다. 나, 드디어 정신이 어떻게 된 건가? 아니야, 그동안 같이 지내면서 정이 들었던 거지. 단지 그거뿐이야.내가 저 인간을….
“이놈의 여편네가! 요새 내가 조용히만 있었더니!!”포터에서 내리자마자 집에서부터 들려온 거친 음성에 정렬이 집안으로 빠르게 뛰어 들어갔다. 쾅. 현관문이 굉음을 내며 열리자마자 거실 바닥에 주저앉듯이 쓰러진 엄마인 애라와 그 앞에 머리 위로 손을 들고 선 원길이 보였다. 참 익숙하면서 끔찍하고 동시에 지긋지긋하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늘 유순한 시골 청년의 모습을 한 정렬의 두 눈에 일순간 분노의 불이 일었다. 어렸을 적부터 봐왔던 아버지의 화내는 모습을 혐오해, 도통 화를 내는 적이 없는 정렬이었다. 그러나, 인간다움을 포기한 아버지 원길 앞에서만큼은 달랐다. 정렬이 거친 몸짓으로 신발을 벗고서 뛰어 들어가 애라 앞을 막아섰다. 분노로 인해 거친 숨결을 내뱉는 원길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풍겨왔다. 결국 저보다 몸집이 커버린 아들 앞에서는 분노를 삭이고 말 비겁한 그였다. ”네 엄마가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를 무시했다!”그놈의 무시. 정렬이 어렸을 적부터 지긋지긋할 정도로 들어왔던 단어였다. “어머니가 어떻게 아버지를 무시했는데요?”애라는 기력도, 말수도 없는 여자였다. 애초에 무시할 힘조차도 없는 사람이었다.늘 빼빼 마른 몸으로 삶을 살아내기 위해 사부작거리며 이 집에 유령처럼 존재해왔을 뿐. 일평생 순종적으로 살아오며 제대로 목소리 내는 법이 없는 그녀였다. 그래서 바보처럼 그녀는 이곳에서 폭력적인 남편 곁에 꾸역꾸역 머물러있는지도 몰랐다. “어떻게 집안에 점심거리 하나가 준비가 안 되어있어!” “아버지가 자주 밖에서 드시잖아요. 그래서 준비를 못 하셨나 보죠.”상 위에는 간단히 차려진 떡국과 김치 그릇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보나 마나 애라는 간단하게 점심만 때우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집안에 당장 먹을 게 하나도 없는 게 말이 돼?!” “아버지-.” “고 이장네, 본용이 형님네 봐! 마누라들이 몇 분이면 뜨거운 요리 턱턱 내오지.” “그러면 최 씨 아저씨도 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