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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더 헤아려줄걸

Author: 랑끗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03 03:15:44

인협과 인섭이 아직도 소원리에서 지내던 어느 날, 서울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던 영애가 엄마인 인자의 집에 들린 날이었다. 

쿵쿵쿵. 

“누가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해가 일찍 지는 어느 겨울 저녁. 

조심스럽게 새로 단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머리가 하얗게 세고 허리가 굽은 엄마 인자와 남편 태욱과 함께 식사를 하던 영애가 걸어 나가 문을 열었다.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추위에 얼굴이 벌겋게 된 김 씨 부부가 보였다. 

“어? 아줌마, 아저씨! 안녕하세요. 날이 추운데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부부의 방문의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일단 영애는 두 사람을 거실로 들였다.

지팡이를 짚는 두 사람이 오르기 꽤 험한 편인 오르막길을 어찌 올라왔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몇 년 전, 사위인 태욱의 도움으로 아예 신식으로 탈바꿈된 인자의 집안은 깔끔했다. 많이 추웠는지, 순순히 거실 소파에 앉은 김 씨 부부에게 인자가 말을 걸었다. 

인자는 머리가 하얗게 세고 짧은 머리로 굵은 파마머리를 한 노인이었다. 평생을 부지런하게 산 터라 몸에 살집은 전혀 없었다. 

“무슨 일이야?”

“언니, 그게….”

인자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김씨 부인이 입을 열었다. 딱 봐도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언니도 알잖아. 부용이네가 사정이 어려워서 그동안 우리가 많이 도와줬던 거.”

김씨 부인의 말에 김씨가 흐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우리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거 같아. 그래서 염치없지만 큰 부탁 하나 하려고.”

“살날이 나보다 너희 부부가 더 남았으면 남았지, 내가 더 남았겠어?”

“그래서. 그래서 영애네 부부가 잠시 들렀다는 소리에 이렇게 부리나케 찾아왔어.”

김씨 부인의 뜻밖의 소리에 인자와 영애가 동시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염치없지만 부탁 하나만 할게, 영애야.”

“한번 들어보고요, 아주머니.”

자고로 영애는 어렸을 적부터 소원리에 소문난 똑순이였다. 그녀만큼 셈이 빠른 사람이 없었고, 바른 말을 잘하는 사람이 없었다. 

겨우 30대에 과부가 되어 삼 남매를 홀로 키워낸 굳건한 인상의 인자를 닮았지만, 영애의 두 눈은 더 크고 반짝였다. 

“그게….”

“…….”

김씨 부인이 뜸을 들이자, 영애는 팔짱을 꼈고, 인자와 태욱은 숟가락을 식탁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지금 우리에게 남은 땅이랑 집 명의를 네게 싼값에 넘길게. 딱 그 값에다가 명의 맡아준 돈을 더해서 내가 네게 줄 테니, 인협이 녀석이 어느 정도 클 때까지만 명의를 좀 맡아 줘.”

“네?”

전혀 예상치 못한 중한 부탁에 영애의 눈이 커졌다.

“여기저기 알아보니, 부용이한테 우리 재산이 몽땅 넘어가지 않게 하려면 이 방법뿐이라고 하더라고.”

“절 어떻게 그렇게 믿으세요, 아주머니? 제가 딴맘이라도 먹으면요?”

영애의 대꾸에 김씨 부인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일단 네 엄마의 신용은 소원리에서 최고야. 오랜 시간 동안 지켜봐 온 내가 장담하는 데다가, 너는 부자에 엄마인 인자 언니를 유독 닮지 않았니.”

김씨 부인의 무지막지한 신뢰에 영애는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너도 잘 알잖니. 부용이네….”

얼핏 들어서 부용 부부 때문에 김 씨 부부의 재산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걸 알고 있는 영애였다. 

소원리 땅 사정은 거의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 그 땅을 팔게 된 사정이 완전한 비밀로 있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애초에 이 좁은 소원리에서 영원한 비밀이란 존재하기 힘들었다. 

“이러다가 인협이, 인섭이 그 영특한 애들도 덩달아 고생할까 봐 그래. 만에 하나 대학이라도 가려 하거나 빚쟁이 부모한테서 벗어나려거든, 이 재산을 전해줘.”

“…….”

“그냥 우리가 죽거든, 우리가 죽기 직전에 네가 필요한 땅이라고 샀다고 대충 둘러대고 말이야.”

“…….”

“내가 노파심에 걱정이 되어서 그래. 죽는 날에 애들 걱정에 눈을 못 감을 거 같아.”

김 씨 부인의 애원에도 영애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모두의 시선이 영애에게 향해있었다. 

“알겠어요.”

“고맙다, 정말 고마워.”

숙고 끝에 나온 영애의 대답에 김씨 부인은 울먹거리며 감사 인사를 했다. 그간 김씨 부부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지 눈에 훤했다.

“아줌마도 아줌마지만, 어린 인협이랑 인섭이 봐서 승낙하는 거예요.”

“그래, 고맙다.”

“부용이 겉으로 보기보다 고집 세고 독해서 좀 귀찮긴 하겠네요.”

“미안해, 그거 비용은 두둑이 쳐줄게.”

“그 돈 저 주시지 마시고, 그냥 두 분한테 쓰세요. 빚쟁이 딸한테는 맨날 가진 거 다 퍼주면서 두 분 겨울옷이 그게 뭐예요.”

영애는 낡아빠진 김 씨 부부의 겨울 겉옷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야 곧 죽을 늙은이들이잖아. 아휴, 돈 받아. 그래야 내 맘이 편해.”

“그럼, 인협이 인섭이한테 쓰세요. 저 돈 많아요.”

“…….”

영애의 말에 김씨 부인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직도 눈에 선한 김씨 부부의 얼굴을 떠올린 영애는 회상에 젖어있다가 혀를 끌끌 찼다. 

“에휴, 이 이기적인. 빼앗을 게 없어서 제 아들한테 남긴 엄마 재산을 뺏으러 와.”

최근에 소원리를 오가며 인협을 보기도 하고 인협과 관련된 소문을 듣기도 했던 영애였다. 

워낙 맘고생을 많이 했던 탓일까. 어렸을 적부터 영특하지만, 염세적인 기운이 느껴지던 인협이었다. 

그런데, 다 커서 만난 인협은 왠지 모르게 세상을 다 산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 철없는 부모의 짐까지 창창한 나날을 즐기고 있기도 모자란 어린아이가 다 짊어진 게 아닐까라는 걱정이 들 싶을 정도로. 

그래서 인협은 아직 모를 수도 있을 땅 이야기를 꺼내볼까 하다가, 영애는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어쭙잖게 명의를 넘겨주었다가는 도로 부용에게 모든 걸 빼앗길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되면 영애가 오랫동안 이 귀찮은 일을 도맡아 해왔던 게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릴 수도 있었다. 

“일단 인협이네 학교로 찾아갔다고 했으니까, 한번 지켜봐야지.”

최근에 소원리 근처에 큰 IC가 들어오며 주변이 개발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로 인해 땅값이 어마어마하게 오를 수도 있다는 소문까지도. 

“돈 냄새는 또 귀신같이 맡아요.”

영애는 혀를 끌끌 차며 혼잣말을 했다. 

“사장님!”

“그래, 나가.”

알바생의 부름에 영애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홀로 향했다. 

***

에스더와 학교 뒷정리를 마친 후 밖으로 나온 인협은 전혀 반갑지 않은 부모님을 마주해야만 했다. 

“인협아.”

뭐하나 브랜드 아닌 게 없는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서 애틋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부용의 모습에 인협은 신물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하필이면 왜 에스더가 같이 있을 때. 

인협은 당황하며 가장 먼저 제 곁에 선 에스더를 힐끗 쳐다보았다. 

“안녕하세요.”

역시나 에스더는 먼저 환하게 웃으며 인협의 부모에게 인사를 했다. 

“아, 임시 교사로 오신 분이세요?”

“네. 영어 교사로 온 황에스더라고 합니다.”

부용은 남에게만 잘 보여주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에스더를 바라보았다. 

그에 반해 매우 속세적인 눈은 바쁘게 돌아가며 에스더의 재력을 가늠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시선에 절로 불쾌해진 인협은 빠르게 에스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먼저 들어가.”

“응?”

“이야기가 길어질 거 같아.”

인협의 나지막한 음성에 에스더는 의아해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묘하게 가라앉아 보이는 인협의 두 눈을 본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저는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편하게 이야기 나누세요.”

에스더는 재빠르게 인사를 하고는 관사로 향했다. 에스더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부용의 얼굴에 피어있던 인자한 미소는 어느새 싹 지워져 있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매우 계산적이고도 표독해 보이는 얼굴이 남아 있었다. 

“돈은 별로 없어 보이는데, 밝고 싹싹한 게 마음에 드네.”

“엄마 눈에 들면 뭐가 좋아요?”

“뭐?”

“왜요? 내가 돈 연락 안 받으니까 마음 급해서 찾아오신 거잖아요.”

“너는 엄마 아빠를 뭐로 보고….”

그동안 수없이 증명해 왔던 그들이었다. 그들의 이기적인 행동을 넘치는 자식으로서의 사랑으로 어떻게든 좋게 해석해 보려던 인협이었다. 

어쩌면 그 일이 있기 전까지의 그는 평생 부모님의 이기적인 선택들을 그들 대신 합리화해 왔던 건지도 몰랐다.

외딴 시골에 그와 남동생을 반 버리듯이 두고 갔어도 부모님은 우리를 사랑해서 그랬던 걸 거야. 

그와 남동생을 방치하듯이 키웠어도, 우리를 믿어서 그랬던 걸 거야. 

수도 없이 수십억 원의 돈을 빼앗기면서도, 나를 키워준 은혜에 감사해서 마땅히 드려야 하는 거야.

지금 돌아보면 인협은 구차하기 짝이 없는, 짝사랑했을 뿐이었다. 자신의 부모를 향해서. 

어쩌면 자신이 이기적인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자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그의 세상의 시작이자 근간부터가 모두 엉망일 테니까. 

하지만 인협이 힘겹게 쌓아왔던 거짓 탑은 그날 이후로 와르르 무너져 내려버렸고, 그는 그간 감춰져 있던 진실을 그제야 마주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절망의 무게만큼, 인협은 제 부모님을 미워하게 됐다.

이전에는 부모님에게 잘 못해서 미움받고 거절 받는 거라고 스스로에게 쏘던 미움이 이제야 제 주인을 찾아가게 되었다. 

“똑바로 잘 보고 있는 것 같은데요. 빚을 많이 져서 돈이 필요한 부모님. 그래서 한때는 돈을 많이 벌던 아들을 찾아온 부모님.”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니?”

“왜요? 돈 없다는데도 털면 뭐라도 더 나올 거 같아요?”

인협은 거친 몸짓으로 제 바지 주머니를 뒤집어 꺼내 보였다. 

 

“돈 없어요. 먹고 죽으려 해도 없어서 달에 50 받는 이 일 하고 있잖아요.”

“뭐? 너 같은 애가 이런 푼돈 받고 이런 데서 뭐 하는 거니, 너 지금.”

이전 같았으면 네 가치를 충분히 알아주지 못하는 이곳에서 뭐 하는 거냐고 안타까워한다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부모의 속마음을 너무나도 잘 아는 지금, 그들의 걱정은 비싼 가축이 제값을 못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여기서 나가서 돈 못 벌어요. 대한민국에서 리그 오브 카오스 아는 사람이면 다 나를 범죄자 취급하거든요.”

“인섭이한테도 듣고, 기사도 봤어. 왜 해명을 안 하는 거니?”

주성의 질책에 인협이 큰 소리를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동안 실성한 듯이 웃어대는 그를 주성과 부용은 공포와 혐오가 뒤섞인 얼굴로 그를 지켜보았다. 

“해명하면 소송 걸어서 모든 의혹 다 나한테 뒤집어씌운대요. 내가 한 건도 아닌데요.”

“그럼, 나가서 싸워야지. 사내자식이 이 시골에 숨어들어서는-.”

“그래서 돈 필요하다고 했잖아요. 싸워야 해서.”

인협의 지적에 부용과 주성이 난감해했다. 

“우리는 몰랐잖아. 왜 그때 제대로 설명을 안 했던 거야? 알았으면 도와줬지.”

“제대로 설명했어요. 다 설명했고, 난생처음으로 누군가한테 빌듯이 부탁해 봤었어요.”

“아냐, 너는-.”

“근데 엄마 아빠는 딱 잘라 말하셨어요. 나를 살릴 수 있는 돈 따위는 없다고.”

“네가 똑바로 말한 적이 없잖니.”

부용의 말에 인협이 다시 한번 쿡쿡 웃었다. 이제는 환멸이 나다 못해 웃기는 지경이었다. 

“똑바로 들은 적이 없으신 거겠죠.”

말을 마친 인협은 달리듯이 운동장 한구석으로 향해 내려다보이는 집 앞에 세워진 고급 외제 차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부용과 주성 앞으로 걸어갔다. 

“봐봐요. 외제 차 두 대 잘 굴리고 계시죠? 그리고 서울에 제 돈으로 사드렸던 십억 넘는 집은 잘 있을 거고요. 아, 집값이 그새 더 올랐으려나.”

“너, 엄마 아빠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네가 똑바로 말하지 않아놓고는 꼭 우리 탓하듯이.”

“그거 팔아서 해결하시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세요. 제가 그거라도 돌려달라고 말할까 봐 공포에 떠시는 눈빛 보니까 기분이 진짜….”

X 같아요, 라고 말하려던 인협은 멈칫했다. 

상대가 인간의 도리 중 하나인 부모로서 해야 할 도리를 포기했다고 해서 저도 덩달아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졌다. 

성급하고 미련한 결정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과는 다른 인간으로 남고 싶다는, 옹졸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함이기에 손해가 따르는, 제 존엄을 지키고자 하는 초라하고도 올곧은 마음이 툭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네 부모를 그런 사람으로 몰아가서 얻는 게 도대체 뭐야?”

“몰아가는 게 아니라 그런 사람이라고 넘치도록 증명하신 거겠죠.”

인협의 반박에 부용의 두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저 눈물을 볼 때면, 늘 불효자가 된 것만 같은 생각이 들며 가슴이 저며오고는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이 정도의 효도면 날 낳아주고 키워준 것에 대한 보답은 충분히 했다는 생각이 더 강해질 뿐이었다. 

“너….”

“…….”

부들부들 떠는 부용과 주성 앞에서 인협은 잠잠히 기다렸다. 언젠가는 한 번쯤 사랑받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부모에게 그토록 모든 걸 내어주었는지도.

“너, 할머니 땅도 네가 갖고 있지?”

“네?”

금시초문이었다. 인협이 얼굴을 찌푸리자, 부용은 더 역정을 냈다.

“하다 하다 엄마 아빠 앞에서 연기까지 하니?”

“진짜 몰라서 그러는데요.”

부용은 부릅뜬 눈으로 인협을 찬찬히 살피고는 이내 몸을 홱 돌려서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기 시작했다. 

“네 엄마한테 정말 너무했다, 인협아.”

주성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부용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너무한 건 당신네들이겠지.”

인협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느 정도는 후련하면서, 마음이 난도질당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순간이었다.

자신을 난도질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데, 당한 사람만 남은 것 같았다.

***

“…….”

하필이면 환기를 위해 관사 창문이 열려있었고, 남의 가정사를 엿듣는 것 같아서 창문을 닫으려고 했을 때.

세 사람이 언성을 점점 더 높여갔고, 행여나 창문을 닫는 소리에 에스더는 자신이 듣고 있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그녀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모두가 떠난 후의 운동장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그리고 세 사람의 목소리는 꽤 컸다.

에스더는 조금 전 듣게 된 대화 내용을 곱씹었다.

“평범한 부모와 자식 간의 대화는 아니었어.”

웬 막장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대화 내용이었다. 

“소년가장이었나 보네, 나인협.”

에스더는 속삭이듯이 혼잣말을 했다.

돈 내놓으라고 부모님이 난리 칠 정도면. 게다가 그들이 몰고 온 차는….

부릉. 때마침 우렁차게 차 시동이 걸리는 소리에 에스더의 시선이 인협이 살던 집 쪽으로 향했다. 

딱 봐도 1억 원은 넘어 보이는 고급 외제 차였다. 그것도 신형. 

부아앙-. 분노에 찬 엑셀 소리와 함께 차는 빠르게 멀어졌다.

“저 차를 파는 게 빠르겠구먼.”

딱 봐도 돈 없는 사람을 그렇게 괴롭게 하고 탈탈 털어봐야 뭐해? 

‘십억 넘는 집’. 분명히 인협이 그렇게 말했었다. 그럼, 인협은 그 정도의 집을 해줄 만한 능력이 있던 모양이다.

그가 이전에 뭘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떠한 이유로 그 돈을 벌만한 기회를 잃어버렸고, 지금은 후줄근하게 입고서 월 50만 원 직장도 감사할 상황이라는 것. 

“대단한 사람이었네.”

이전에 별 대단한 사연도 없으면서 힘든 척한다고 인협을 비웃었던 게 매우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저벅저벅. 한참이 지난 이제서야 인협은 걸어오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행여나 제 집 창문이 열려있다는 사실을 들키게 될까 싶어서 에스더는 황급히 창문 밑으로 숨고는 숨을 죽였다.

쿵쾅쿵쾅.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후-.”

옆집 문 앞에서 인협이 깊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왜 에스더의 마음이 바닥까지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을까.

에스더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사실 토닥여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에스더조차도 듣기만 해도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것만 같았으니까.

하물며 장본인인 인협일까 싶어서였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하며 그를 맞아주기엔 그녀의 연기력이 심하게 딸렸다. 

괜찮을까, 나인협. 이내 도어락 소리가 들리고 인협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에스더는 참고 있던 숨을 내뱉었다.

어떤 마음을 품고 너는 집으로 들어갔을까. 그리고 저런 일을 너는 또 혼자서 삭히려나?

에스더는 아직도 눈앞에 선한, 검은색 비닐봉지를 들고서 시골길을 터덜터덜 걸어가던 얼마 전의 인협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쓸쓸하던 모습을 조금만 더 헤아려줄걸. 

괜스레 울컥한 에스더는 조용히 눈물지었다.

랑끗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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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온한 소원리의 월요일 아침. 소원 초등학교 교실. “선생님! 서울은 어때요?”“서울에는 진짜로 지하철이 왕 많아요?”첫 교시 수업을 맡은 인협은 온갖 질문에 시달리고 있었다. “얘들아, 선생님은 질문을 하라고 한 게 아니라 준비물 꺼내라고 했는데.”“피이…. 좀 알려주세요! 우린 서울에 한 번도 못 가봤단 말이에요.”인협의 심드렁한 말에 토라진 아이 몇몇이 볼멘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에 잠시 멈칫한 인협이었다. 아아, 우리에게 당연한 게 이 아이들에게는 당연한 게 아니구나.읍내에서 차로 30분은 더 들어와야 있는 시골의 한 자락. 대체로 조부모님들과 사는 아이들에게 서울 구경의 기회라고는 없었을 것이다.“서울을 한 번도 안 가봤다고?”이 와중에 재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마치 외국인을 보는듯한 시선으로 서울을 못 가봤다고 이야기하는 아이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구재형, 쉿. 조용.”평소에 잘난척하기 워낙 좋아하는 재형이라, 그의 말실수를 막기 위해서 인협이 엄한 표정을 지으며 재형에게 말했다. 그러자 입술을 한참 동안 씰룩이던 재형은 그의 말을 순순히 들었다. 그의 조부모도 못 말리는 재형을 유일하게 제어할 수 있는 건 인협뿐이었다. “서울 좋지. 선생님이 원래 뭐하던 사람인지 들어본 사람?”“어…. 무슨 선수라고 했었는데.”“맞아요. 메달도 따고 해서 되게 유명하다고 했어요.”기훈과 기정의 말에 인협이 씩 웃었다. 시골 아이들에게 핸드폰이란 아직 사치이기에,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는 좀 느린 편이었다. 아이들답게 들판을 뛰어다니고, 술래잡기나 하며 노는, 요새 보기 드문, 조금 이상하다고 할 수도 있는 아이들.“리그 오브 카오스 선수잖아. 그것도 한국 전체랭킹 2위라고.”재형은 이때를 기다려왔다는 듯이 잘난 척을 시작했다. 우쭐대며 턱을 치켜든 재형을 본 아이들은 ‘쟤 왜 저래?’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고맙다. 구재형. 리그 오브 카오스라는 게임의 프로 선수인데, 선생님이 이제 9월이 되면 선수 생활에 복귀

  • 웰컴 투 소원리   64. 나는 그냥 널 사랑해

    “아, 가기 싫다.”인협은 에스더가 지내는 방 안 침대에 누운 채로 칭얼거렸다. 그런 그의 옆에 마주 누운 채로 바라보던 에스더는 피식 웃고는 그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어여 가.”“싫은데….”인협은 오히려 에스더에게로 거리를 좁혀올 뿐이었다. “어쭈?”“아니, 좀 아깝잖아.”“도대체 뭐가 아까운 거지?”늦은 저녁 시간. 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인협은 이내 에스더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제 품 안에 꽉 가둬버렸다.“아, 나인협! 숨 막혀!”“이렇게 안고만 잘게.”“이거 놔라!”인협과 에스더의 실랑이는 계속되었다. 그러자, 이내 그의 등짝에 에스더의 매서운 손이 꽂혔다.짝! 그의 등짝에서 찰진 소리가 나며 인협은 에스더를 놓아주었다.“아으윽!”“그러게. 놓으라니까!”인협이 알싸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이, 에스더는 재빠르게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너무해….”“은근슬쩍 이러는 네가 더 너무한데.”에스더의 반격에 인협은 입술을 내밀고 있다가 그대로 고개를 침대에 묻어버렸다. 팔짱을 끼고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스더는 그러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잠시 표정을 풀었다.“많이 아파?”“쪽팔려.”“뭐가?”침대에 고개에 묻은 채로 고개를 저은 인협이 고개를 다시 번쩍 들었다.“깜짝이야.”“본능 하나 어쩌지 못하고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이러고 있는 내가 쪽팔려서 그래.”“…….”인협의 솔직한 고백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뻔한 에스더였다. 그러나 재빠르게 표정 관리를 하고서 무표정을 유지했다.“뭐, 그럴 수 있지. 내가 워낙 매력적이니까.”“응.”어라, 웃자고 한 소린데. 에스더의 말에 인협은 더 울상이 되고 말았다. “네가 너무 매력적인 게 문제야.”“…….”조금 전까지만 해도 멋있는 모습으로 기자회견에서 자기 이야기를 잘도 하더만. 화면 속에서는 그렇게 대단하고 커 보이던 사람이. 핸드폰 속 인협을 보며 에스더는 새삼 그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 웰컴 투 소원리   63. 사랑 방식

    “인협 선수 부모님 빚투 건은 어느 정도 이렇게 넘어가지는 것 같네요.”“아직도 여론이 반반쯤 되는 것 같습니다. 한번 확 뒤집어줄 이슈가 있으면 참 좋을 텐데요.”“그러게요.”우겸과 변호사는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우겸은 잠시 생각에 깊이 잠긴 채로 앉아 있다가, 무언가가 떠오른 듯 눈을 크게 떴다.“인협 선수, 남동생이 있다고 했죠?”“네.”“그 동생을 한번 포섭해 볼까요? 그분이 목소리를 좀 내주면, 인협 선수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양날의 검이죠. 만에 하나 남동생 측이 인협 선수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면 반대가 될 수도 있고요.”“아하…. 그러네요.”“숱한 케이스를 봐오며 느낀 건, 뭐든 저희가 생각하는 정상 범위를 벗어난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는 겁니다.”“고로, 인협 선수 동생도 일반적이지 않은 주장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거죠?”“네, 맞습니다.”“…….”변호사의 말에 우겸의 얼굴이 한결 진지해졌다. “너무 대놓고 접근하지 않고 적당히 떠볼 방법이 없으려나….”“글쎄요.”두 사람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 봉길 감독님을 한번 보내보죠.”“네? 곧 신생팀 감독을 맡게 되실 분이요?”우겸의 제안에 변호사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네, 언론에 많이 노출도 안 되어서 적당히 인협 선수 지인인 것처럼 접근해서 떠보는 건 어떨까 싶어서요.”“흐음….”“이 방법도 어느 정도의 리스크가 있긴 한데, 다른 방법보다는 좀 더 나을 거 같네요.”“그렇긴 하죠.”“그럼, 일단 이 방법으로 가볼게요.”우겸은 무언가 결심한 듯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정렬의 집 앞. 또다시 반찬을 들고 그곳을 찾은 지혜가 현관문에다가 노크를 하고 있었다. 초인종을 몇 번 눌렀음에도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똑똑똑.“계세요? 정결이 어머니-.”기탁의 아내 지혜의 두드림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정렬과 아이들이 그녀의 집에서 지내게 된 지는 벌써 두 주째. 며칠에 한 번씩

  • 웰컴 투 소원리   62. 천천히 함께 가보자

    작은 기자회견장. 그곳에 사회자의 인도에 따라서 인협이 강대상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자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이곳은 우겸이 인맥을 동원해 깔아준 판이었다.“안녕하세요, 저는 케이비팀 소속이었던, 나인협 선수라고 합니다.”억울하게 누명을 쓴 직후에 이곳에 서는 걸 얼마나 꿈꿨던가. 인협은 제게 시선을 집중한 채로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든 기자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들은 특종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된 얼굴로 인협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저는 케이비팀 승부조작에 가담한 적이 없습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썼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직접 그 증거들을 보여드리려 합니다.”우겸이 미리 공수해 두었던, 케이비팀 승부조작에 가담했던 이들과 원티드 스폰서 측에서 주고받았던 문자 캡처본, 태우를 통해 만들어둔 녹취록, 그리고 정현과 모비팀 감독이 멱살을 잡고서 실랑이를 벌이던 장면까지. 그 외에도 자잘한 증거들은 더 많았다.인협이 증거들을 공개할 때마다 기자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네, 보시다시피 저는 승부조작에 가담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승부조작을 하는 이들로부터 배척받았었고요. 지속적인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했었습니다.”인협이 차분하게 입장표명을 이어가자, 한 기자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네, 말씀하세요.”“그렇다면, 왜 이렇게 뒤늦게서야 이 모든 입장을 밝히고 증거들을 밝히시는 건가요? 지금 반년이 좀 넘게 지난 거로 알고 있는데요.”“그건….”인협이 컨펌을 받기 위해 맨 앞자리에 앉은 우겸을 바라보자, 바로 옆자리에 앉은 변호사와 짤막하게 대화를 나눈 그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승부조작에 가담했던 사람들의 협박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저도 팀의 승부조작에 대해 심증만 있었을 뿐, 이렇다고 할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요.”“정확히 어떤 협박이 있었죠?”찰칵찰칵. 시간이 지나며 좀 잦아들었던 플래시 세례가 다시 시작되었다. “일단 공식적으로 어떠한 발언이라도 하면 소송을 걸

  • 웰컴 투 소원리   61. 너 놀리는 재미에 산다니까

    “여기가 나인협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식당이란 말이지.”모자를 푹 눌러쓴 기태는 경기도 어느 외곽에 위치한 식당 외관을 쭉 훑어보았다. 3층짜리 초대형 건물이었으나, 주차장은 텅텅 비어 있었다. 기태는 의아해하며 핸드폰 화면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분명히 정현이 알려준 주소였다. “나 같으면 부모님 식당이나 집이라도 정리해서 소송이라도 제대로 걸었을 텐데. 미련한 놈….”기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현이 보내줬던 인협의 부모님에 대한 정보는 놀라웠다.족히 10억은 넘는 브랜드 아파트에, 대형 식당을 운영하는 부모님이었다. 이 정도의 재력이 있는, 아니면 인협을 통해 부를 쌓았을 부모가 왜 인협이 궁지에 몰렸을 적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지 의아해진 그였다.보나 마나, 그 고지식한 놈이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했겠지.세상 물정 하나 모르던 인협은 이전부터 늘 기태의 심기를 거슬렀다.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실력은 좋고 성실해서 알려진 것도 싫었고, 미련할 정도로 올곧은 게 보기가 싫었다. 꼭 오래된 고목나무처럼. 인협은 묵묵하고 우직했다. 기태와는 다르게. 약간의 괴롭힘에 인협이 흔들렸다면, 기태는 그를 비웃고는 적당한 때 관뒀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고고하고 꼿꼿했던 인협의 모습은 기태의 승부욕을 건드리고 말았다.그의 올곧음은 굽은 기태에게 거슬리는 걸림돌이 되고야 말았으니까. 그래, 언제까지 그렇게 고고하게 굴 수 있나 보자. 그렇게 하면서 기태는 속으로 되뇌었다. 사실 승부조작으로 얻게 될 돈에도 솔깃했지만, 동시에 이런 나락으로 자빠뜨리면 잘난척하는 인협의 얼굴을 일그러뜨릴 수 있을까 싶은 호기심도 컸다. 결과적으로 그 호기심은 기태를 잡아먹고 말았지만 말이다.“나인협 그 자식이 적당히만 했어도 내가 이렇게까지는 안 왔을 텐데.”인협의 경우에 승부조작 이슈를 크게 키우지 않아 경찰에게까지 넘어가지는 않았었다. 수사가 진행되면 진실이 파헤쳐질 거라는 생각에 정현이 내린 조치였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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