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인협과 인섭이 아직도 소원리에서 지내던 어느 날, 서울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던 영애가 엄마인 인자의 집에 들린 날이었다.
쿵쿵쿵. “누가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해가 일찍 지는 어느 겨울 저녁.
조심스럽게 새로 단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머리가 하얗게 세고 허리가 굽은 엄마 인자와 남편 태욱과 함께 식사를 하던 영애가 걸어 나가 문을 열었다.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추위에 얼굴이 벌겋게 된 김 씨 부부가 보였다.
“어? 아줌마, 아저씨! 안녕하세요. 날이 추운데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부부의 방문의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일단 영애는 두 사람을 거실로 들였다.
지팡이를 짚는 두 사람이 오르기 꽤 험한 편인 오르막길을 어찌 올라왔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몇 년 전, 사위인 태욱의 도움으로 아예 신식으로 탈바꿈된 인자의 집안은 깔끔했다. 많이 추웠는지, 순순히 거실 소파에 앉은 김 씨 부부에게 인자가 말을 걸었다.
인자는 머리가 하얗게 세고 짧은 머리로 굵은 파마머리를 한 노인이었다. 평생을 부지런하게 산 터라 몸에 살집은 전혀 없었다.
“무슨 일이야?” “언니, 그게….”인자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김씨 부인이 입을 열었다. 딱 봐도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언니도 알잖아. 부용이네가 사정이 어려워서 그동안 우리가 많이 도와줬던 거.”김씨 부인의 말에 김씨가 흐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우리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거 같아. 그래서 염치없지만 큰 부탁 하나 하려고.” “살날이 나보다 너희 부부가 더 남았으면 남았지, 내가 더 남았겠어?” “그래서. 그래서 영애네 부부가 잠시 들렀다는 소리에 이렇게 부리나케 찾아왔어.”김씨 부인의 뜻밖의 소리에 인자와 영애가 동시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염치없지만 부탁 하나만 할게, 영애야.”
“한번 들어보고요, 아주머니.”자고로 영애는 어렸을 적부터 소원리에 소문난 똑순이였다. 그녀만큼 셈이 빠른 사람이 없었고, 바른 말을 잘하는 사람이 없었다.
겨우 30대에 과부가 되어 삼 남매를 홀로 키워낸 굳건한 인상의 인자를 닮았지만, 영애의 두 눈은 더 크고 반짝였다.
“그게….” “…….”김씨 부인이 뜸을 들이자, 영애는 팔짱을 꼈고, 인자와 태욱은 숟가락을 식탁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지금 우리에게 남은 땅이랑 집 명의를 네게 싼값에 넘길게. 딱 그 값에다가 명의 맡아준 돈을 더해서 내가 네게 줄 테니, 인협이 녀석이 어느 정도 클 때까지만 명의를 좀 맡아 줘.” “네?”전혀 예상치 못한 중한 부탁에 영애의 눈이 커졌다.
“여기저기 알아보니, 부용이한테 우리 재산이 몽땅 넘어가지 않게 하려면 이 방법뿐이라고 하더라고.” “절 어떻게 그렇게 믿으세요, 아주머니? 제가 딴맘이라도 먹으면요?”영애의 대꾸에 김씨 부인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일단 네 엄마의 신용은 소원리에서 최고야. 오랜 시간 동안 지켜봐 온 내가 장담하는 데다가, 너는 부자에 엄마인 인자 언니를 유독 닮지 않았니.”김씨 부인의 무지막지한 신뢰에 영애는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너도 잘 알잖니. 부용이네….”얼핏 들어서 부용 부부 때문에 김 씨 부부의 재산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걸 알고 있는 영애였다.
소원리 땅 사정은 거의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 그 땅을 팔게 된 사정이 완전한 비밀로 있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애초에 이 좁은 소원리에서 영원한 비밀이란 존재하기 힘들었다.
“이러다가 인협이, 인섭이 그 영특한 애들도 덩달아 고생할까 봐 그래. 만에 하나 대학이라도 가려 하거나 빚쟁이 부모한테서 벗어나려거든, 이 재산을 전해줘.” “…….” “그냥 우리가 죽거든, 우리가 죽기 직전에 네가 필요한 땅이라고 샀다고 대충 둘러대고 말이야.” “…….” “내가 노파심에 걱정이 되어서 그래. 죽는 날에 애들 걱정에 눈을 못 감을 거 같아.”김 씨 부인의 애원에도 영애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모두의 시선이 영애에게 향해있었다.
“알겠어요.” “고맙다, 정말 고마워.”숙고 끝에 나온 영애의 대답에 김씨 부인은 울먹거리며 감사 인사를 했다. 그간 김씨 부부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지 눈에 훤했다.
“아줌마도 아줌마지만, 어린 인협이랑 인섭이 봐서 승낙하는 거예요.” “그래, 고맙다.” “부용이 겉으로 보기보다 고집 세고 독해서 좀 귀찮긴 하겠네요.” “미안해, 그거 비용은 두둑이 쳐줄게.” “그 돈 저 주시지 마시고, 그냥 두 분한테 쓰세요. 빚쟁이 딸한테는 맨날 가진 거 다 퍼주면서 두 분 겨울옷이 그게 뭐예요.”영애는 낡아빠진 김 씨 부부의 겨울 겉옷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야 곧 죽을 늙은이들이잖아. 아휴, 돈 받아. 그래야 내 맘이 편해.” “그럼, 인협이 인섭이한테 쓰세요. 저 돈 많아요.” “…….”영애의 말에 김씨 부인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직도 눈에 선한 김씨 부부의 얼굴을 떠올린 영애는 회상에 젖어있다가 혀를 끌끌 찼다.
“에휴, 이 이기적인. 빼앗을 게 없어서 제 아들한테 남긴 엄마 재산을 뺏으러 와.”최근에 소원리를 오가며 인협을 보기도 하고 인협과 관련된 소문을 듣기도 했던 영애였다.
워낙 맘고생을 많이 했던 탓일까. 어렸을 적부터 영특하지만, 염세적인 기운이 느껴지던 인협이었다.
그런데, 다 커서 만난 인협은 왠지 모르게 세상을 다 산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 철없는 부모의 짐까지 창창한 나날을 즐기고 있기도 모자란 어린아이가 다 짊어진 게 아닐까라는 걱정이 들 싶을 정도로.
그래서 인협은 아직 모를 수도 있을 땅 이야기를 꺼내볼까 하다가, 영애는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어쭙잖게 명의를 넘겨주었다가는 도로 부용에게 모든 걸 빼앗길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되면 영애가 오랫동안 이 귀찮은 일을 도맡아 해왔던 게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릴 수도 있었다.
“일단 인협이네 학교로 찾아갔다고 했으니까, 한번 지켜봐야지.”최근에 소원리 근처에 큰 IC가 들어오며 주변이 개발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로 인해 땅값이 어마어마하게 오를 수도 있다는 소문까지도.
“돈 냄새는 또 귀신같이 맡아요.”영애는 혀를 끌끌 차며 혼잣말을 했다.
“사장님!” “그래, 나가.”알바생의 부름에 영애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홀로 향했다.
*** 에스더와 학교 뒷정리를 마친 후 밖으로 나온 인협은 전혀 반갑지 않은 부모님을 마주해야만 했다. “인협아.”뭐하나 브랜드 아닌 게 없는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서 애틋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부용의 모습에 인협은 신물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하필이면 왜 에스더가 같이 있을 때.
인협은 당황하며 가장 먼저 제 곁에 선 에스더를 힐끗 쳐다보았다.
“안녕하세요.”역시나 에스더는 먼저 환하게 웃으며 인협의 부모에게 인사를 했다.
“아, 임시 교사로 오신 분이세요?” “네. 영어 교사로 온 황에스더라고 합니다.”부용은 남에게만 잘 보여주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에스더를 바라보았다.
그에 반해 매우 속세적인 눈은 바쁘게 돌아가며 에스더의 재력을 가늠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시선에 절로 불쾌해진 인협은 빠르게 에스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먼저 들어가.” “응?” “이야기가 길어질 거 같아.”인협의 나지막한 음성에 에스더는 의아해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묘하게 가라앉아 보이는 인협의 두 눈을 본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저는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편하게 이야기 나누세요.”에스더는 재빠르게 인사를 하고는 관사로 향했다. 에스더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부용의 얼굴에 피어있던 인자한 미소는 어느새 싹 지워져 있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매우 계산적이고도 표독해 보이는 얼굴이 남아 있었다.
“돈은 별로 없어 보이는데, 밝고 싹싹한 게 마음에 드네.” “엄마 눈에 들면 뭐가 좋아요?” “뭐?” “왜요? 내가 돈 연락 안 받으니까 마음 급해서 찾아오신 거잖아요.” “너는 엄마 아빠를 뭐로 보고….”그동안 수없이 증명해 왔던 그들이었다. 그들의 이기적인 행동을 넘치는 자식으로서의 사랑으로 어떻게든 좋게 해석해 보려던 인협이었다.
어쩌면 그 일이 있기 전까지의 그는 평생 부모님의 이기적인 선택들을 그들 대신 합리화해 왔던 건지도 몰랐다.
외딴 시골에 그와 남동생을 반 버리듯이 두고 갔어도 부모님은 우리를 사랑해서 그랬던 걸 거야.
그와 남동생을 방치하듯이 키웠어도, 우리를 믿어서 그랬던 걸 거야.
수도 없이 수십억 원의 돈을 빼앗기면서도, 나를 키워준 은혜에 감사해서 마땅히 드려야 하는 거야.
지금 돌아보면 인협은 구차하기 짝이 없는, 짝사랑했을 뿐이었다. 자신의 부모를 향해서.
어쩌면 자신이 이기적인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자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그의 세상의 시작이자 근간부터가 모두 엉망일 테니까.
하지만 인협이 힘겹게 쌓아왔던 거짓 탑은 그날 이후로 와르르 무너져 내려버렸고, 그는 그간 감춰져 있던 진실을 그제야 마주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절망의 무게만큼, 인협은 제 부모님을 미워하게 됐다.
이전에는 부모님에게 잘 못해서 미움받고 거절 받는 거라고 스스로에게 쏘던 미움이 이제야 제 주인을 찾아가게 되었다.
“똑바로 잘 보고 있는 것 같은데요. 빚을 많이 져서 돈이 필요한 부모님. 그래서 한때는 돈을 많이 벌던 아들을 찾아온 부모님.”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니?” “왜요? 돈 없다는데도 털면 뭐라도 더 나올 거 같아요?”인협은 거친 몸짓으로 제 바지 주머니를 뒤집어 꺼내 보였다.
“돈 없어요. 먹고 죽으려 해도 없어서 달에 50 받는 이 일 하고 있잖아요.”
“뭐? 너 같은 애가 이런 푼돈 받고 이런 데서 뭐 하는 거니, 너 지금.”이전 같았으면 네 가치를 충분히 알아주지 못하는 이곳에서 뭐 하는 거냐고 안타까워한다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부모의 속마음을 너무나도 잘 아는 지금, 그들의 걱정은 비싼 가축이 제값을 못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여기서 나가서 돈 못 벌어요. 대한민국에서 리그 오브 카오스 아는 사람이면 다 나를 범죄자 취급하거든요.” “인섭이한테도 듣고, 기사도 봤어. 왜 해명을 안 하는 거니?”주성의 질책에 인협이 큰 소리를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동안 실성한 듯이 웃어대는 그를 주성과 부용은 공포와 혐오가 뒤섞인 얼굴로 그를 지켜보았다.
“해명하면 소송 걸어서 모든 의혹 다 나한테 뒤집어씌운대요. 내가 한 건도 아닌데요.” “그럼, 나가서 싸워야지. 사내자식이 이 시골에 숨어들어서는-.” “그래서 돈 필요하다고 했잖아요. 싸워야 해서.”인협의 지적에 부용과 주성이 난감해했다.
“우리는 몰랐잖아. 왜 그때 제대로 설명을 안 했던 거야? 알았으면 도와줬지.” “제대로 설명했어요. 다 설명했고, 난생처음으로 누군가한테 빌듯이 부탁해 봤었어요.” “아냐, 너는-.” “근데 엄마 아빠는 딱 잘라 말하셨어요. 나를 살릴 수 있는 돈 따위는 없다고.” “네가 똑바로 말한 적이 없잖니.”부용의 말에 인협이 다시 한번 쿡쿡 웃었다. 이제는 환멸이 나다 못해 웃기는 지경이었다.
“똑바로 들은 적이 없으신 거겠죠.”말을 마친 인협은 달리듯이 운동장 한구석으로 향해 내려다보이는 집 앞에 세워진 고급 외제 차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부용과 주성 앞으로 걸어갔다.
“봐봐요. 외제 차 두 대 잘 굴리고 계시죠? 그리고 서울에 제 돈으로 사드렸던 십억 넘는 집은 잘 있을 거고요. 아, 집값이 그새 더 올랐으려나.” “너, 엄마 아빠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네가 똑바로 말하지 않아놓고는 꼭 우리 탓하듯이.” “그거 팔아서 해결하시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세요. 제가 그거라도 돌려달라고 말할까 봐 공포에 떠시는 눈빛 보니까 기분이 진짜….”X 같아요, 라고 말하려던 인협은 멈칫했다.
상대가 인간의 도리 중 하나인 부모로서 해야 할 도리를 포기했다고 해서 저도 덩달아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졌다.
성급하고 미련한 결정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과는 다른 인간으로 남고 싶다는, 옹졸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함이기에 손해가 따르는, 제 존엄을 지키고자 하는 초라하고도 올곧은 마음이 툭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네 부모를 그런 사람으로 몰아가서 얻는 게 도대체 뭐야?” “몰아가는 게 아니라 그런 사람이라고 넘치도록 증명하신 거겠죠.”인협의 반박에 부용의 두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저 눈물을 볼 때면, 늘 불효자가 된 것만 같은 생각이 들며 가슴이 저며오고는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이 정도의 효도면 날 낳아주고 키워준 것에 대한 보답은 충분히 했다는 생각이 더 강해질 뿐이었다.
“너….” “…….”부들부들 떠는 부용과 주성 앞에서 인협은 잠잠히 기다렸다. 언젠가는 한 번쯤 사랑받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부모에게 그토록 모든 걸 내어주었는지도.
“너, 할머니 땅도 네가 갖고 있지?” “네?”금시초문이었다. 인협이 얼굴을 찌푸리자, 부용은 더 역정을 냈다.
“하다 하다 엄마 아빠 앞에서 연기까지 하니?” “진짜 몰라서 그러는데요.”부용은 부릅뜬 눈으로 인협을 찬찬히 살피고는 이내 몸을 홱 돌려서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기 시작했다.
“네 엄마한테 정말 너무했다, 인협아.”주성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부용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너무한 건 당신네들이겠지.”인협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느 정도는 후련하면서, 마음이 난도질당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순간이었다.
자신을 난도질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데, 당한 사람만 남은 것 같았다.
***
“…….”하필이면 환기를 위해 관사 창문이 열려있었고, 남의 가정사를 엿듣는 것 같아서 창문을 닫으려고 했을 때.
세 사람이 언성을 점점 더 높여갔고, 행여나 창문을 닫는 소리에 에스더는 자신이 듣고 있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그녀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모두가 떠난 후의 운동장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그리고 세 사람의 목소리는 꽤 컸다.
에스더는 조금 전 듣게 된 대화 내용을 곱씹었다.
“평범한 부모와 자식 간의 대화는 아니었어.”웬 막장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대화 내용이었다.
“소년가장이었나 보네, 나인협.”에스더는 속삭이듯이 혼잣말을 했다.
돈 내놓으라고 부모님이 난리 칠 정도면. 게다가 그들이 몰고 온 차는….
부릉. 때마침 우렁차게 차 시동이 걸리는 소리에 에스더의 시선이 인협이 살던 집 쪽으로 향했다.
딱 봐도 1억 원은 넘어 보이는 고급 외제 차였다. 그것도 신형.
부아앙-. 분노에 찬 엑셀 소리와 함께 차는 빠르게 멀어졌다.
“저 차를 파는 게 빠르겠구먼.”딱 봐도 돈 없는 사람을 그렇게 괴롭게 하고 탈탈 털어봐야 뭐해?
‘십억 넘는 집’. 분명히 인협이 그렇게 말했었다. 그럼, 인협은 그 정도의 집을 해줄 만한 능력이 있던 모양이다.
그가 이전에 뭘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떠한 이유로 그 돈을 벌만한 기회를 잃어버렸고, 지금은 후줄근하게 입고서 월 50만 원 직장도 감사할 상황이라는 것.
“대단한 사람이었네.”이전에 별 대단한 사연도 없으면서 힘든 척한다고 인협을 비웃었던 게 매우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저벅저벅. 한참이 지난 이제서야 인협은 걸어오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행여나 제 집 창문이 열려있다는 사실을 들키게 될까 싶어서 에스더는 황급히 창문 밑으로 숨고는 숨을 죽였다.
쿵쾅쿵쾅.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후-.”옆집 문 앞에서 인협이 깊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왜 에스더의 마음이 바닥까지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을까.
에스더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사실 토닥여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에스더조차도 듣기만 해도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것만 같았으니까.
하물며 장본인인 인협일까 싶어서였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하며 그를 맞아주기엔 그녀의 연기력이 심하게 딸렸다.
괜찮을까, 나인협. 이내 도어락 소리가 들리고 인협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에스더는 참고 있던 숨을 내뱉었다.
어떤 마음을 품고 너는 집으로 들어갔을까. 그리고 저런 일을 너는 또 혼자서 삭히려나?
에스더는 아직도 눈앞에 선한, 검은색 비닐봉지를 들고서 시골길을 터덜터덜 걸어가던 얼마 전의 인협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쓸쓸하던 모습을 조금만 더 헤아려줄걸.
괜스레 울컥한 에스더는 조용히 눈물지었다.
감사합니다 :)
인협과 인섭이 아직도 소원리에서 지내던 어느 날, 서울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던 영애가 엄마인 인자의 집에 들린 날이었다. 쿵쿵쿵. “누가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해가 일찍 지는 어느 겨울 저녁. 조심스럽게 새로 단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머리가 하얗게 세고 허리가 굽은 엄마 인자와 남편 태욱과 함께 식사를 하던 영애가 걸어 나가 문을 열었다.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추위에 얼굴이 벌겋게 된 김 씨 부부가 보였다. “어? 아줌마, 아저씨! 안녕하세요. 날이 추운데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부부의 방문의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일단 영애는 두 사람을 거실로 들였다.지팡이를 짚는 두 사람이 오르기 꽤 험한 편인 오르막길을 어찌 올라왔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몇 년 전, 사위인 태욱의 도움으로 아예 신식으로 탈바꿈된 인자의 집안은 깔끔했다. 많이 추웠는지, 순순히 거실 소파에 앉은 김 씨 부부에게 인자가 말을 걸었다. 인자는 머리가 하얗게 세고 짧은 머리로 굵은 파마머리를 한 노인이었다. 평생을 부지런하게 산 터라 몸에 살집은 전혀 없었다. “무슨 일이야?” “언니, 그게….”인자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김씨 부인이 입을 열었다. 딱 봐도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언니도 알잖아. 부용이네가 사정이 어려워서 그동안 우리가 많이 도와줬던 거.”김씨 부인의 말에 김씨가 흐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우리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거 같아. 그래서 염치없지만 큰 부탁 하나 하려고.” “살날이 나보다 너희 부부가 더 남았으면 남았지, 내가 더 남았겠어?” “그래서. 그래서 영애네 부부가 잠시 들렀다는 소리에 이렇게 부리나케 찾아왔어.”김씨 부인의 뜻밖의 소리에 인자와 영애가 동시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염치없지만 부탁 하나만 할게, 영애야.” “한번 들어보고요, 아주머니.”자고로 영애는 어렸을 적부터 소원리에 소문난 똑순이였다. 그녀만큼 셈이 빠른 사람이 없었고, 바른 말을 잘하는 사람이 없었다.
음악 시간이 끝난 후 교무실. 에스더가 수업하는 시간이라 교무실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너, 대학은 나온 거니?” “네?” “인협이 너, 대학은 나왔냐고.” 옆 책상에서 들려온 제환의 깐깐한 목소리에 인협이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대꾸했다. 서른 살 무렵의 제환이나, 마흔 살 무렵의 제환이나. 옹졸하고 짜증 나게 구는 건 여전했다. 아니, 어쩌면 십 년이 지나는 동안 더 똘똘 뭉쳐 단단해지기까지 한 옹졸함은 더 답이 없어 보이게 만드는 듯했다. “대학 안 나왔는데요.”거짓말이라고는 모르는 인협이었다. 그의 돌직구에 제환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근데 어떻게 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칠 생각을 해?”시골에만 살아서 순수해서 그렇다고 해야 할까.약아빠지게 굴 줄 전혀 모르는 듯해보여 불쌍해 보이는 지경의 제환의 공격에 인협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황 선생님이랑 교장 선생님의 요청이 있어서 맡게 된 건데요.”인협이 에스더를 언급하자마자 제환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 찰나의 변화를 잡아낸 인협이 한쪽 입꼬리만 올려서 웃었다. “황 선생님이야 맡은 과목 수가 너무 많아서 판단력이 흐려졌다지만…. 교장 선생님은 황 선생님이 설득해서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거야, 알아?” “그럼, 황 선생님의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게 그전에 형님이 잘 좀 하시지, 그러셨어요.” “뭐?” “형님이 맡은 과목 수가 해봤자 네 개였고, 영어 선생님으로 임시로 와있는 황 선생님이 맡고 있던 과목 수가 여섯 개는 족히 됐다면서요? 그것도 필수 과목 위주로.”인협의 대꾸에 제환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다크서클이 유독 짙어 보이는 탓에 오늘따라 제환은 더 심술궂은 뱀파이어 같았다. “게다가 형님은 뭐가 억울한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해봤자 아무도 안 살아서 오랫동안 비어 있던 관사 주시고, 형님의 월급에 훨씬 못 미치는 50만 원 다달이 받으면서 이 자리를 메꿀 건데요.” “…….” “겨우 몇 시간씩이긴 하지만, 주중 매일 출근인데 이 정도 돈
방과 후. 아침에 본용으로부터 옆집 관사 도어락 비밀번호를 전달받은 에스더가 그것을 인협에게 건네자마자 둘만의 작은 이사가 시작됐다. 7월 초. 오랜만에 잠시 비가 쉬어가는 날이었다. 그래봤자 옆집에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한 후에 캐리어 하나를 달랑 바로 옆집으로 옮기는 거였지만 말이다. “진짜로 짐이 이게 다야?” “응.”에스더와 인협은 에스더의 집과 똑같이 생겼지만, 방향만 다른 집안을 둘러보았다. 사람 사는 온기가 아직 채워지지 않은 관사 안은 휑했다. “이사 기념으로 자장면은 대접 못하지만, 짜파게리나 같이 끓여 먹을래?”짐이 든 캐리어를 한구석 벽에 기대어놓은 인협의 제안에 에스더의 얼굴이 밝아졌다. “좋지! 오늘 밥 차리기 귀찮았는데, 잘 됐다.” “잘됐네. 소파에 앉아 있어.” “좋아.”에스더는 아직 물건 없이 텅 빈 집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인협은 능숙하게 움직여, 관사에 있던 냄비를 하나 꺼내서 그것을 씻었다. 생각보다 어깨가 넓네. 에스더의 눈이 인협의 뒷모습을 바쁘게 좇았다. 팔을 뻗을 때 은근히 보이는 근육. 생각보다 남자다운 몸의 선. 그녀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지금. 차라리 내 취향은 정렬 씨라고. 키도 크고 남자답고, 성격도 순하고. 마른 안경잡이는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에스더는 자기 최면을 걸며 잠시 스쳐 지나간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애를 썼다.이상하게도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인협의 뒷모습에 절로 흐뭇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뭐야.” “뭐가?”에스더의 나지막한 혼잣말에 짜파게리를 끓이던 인협이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아냐, 아무것도 아니야.” “싱겁긴.”피식 웃고서 돌아보는 인협의 모습의 잔상이 남아 에스더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한 번 더 응시했다. 나, 드디어 정신이 어떻게 된 건가? 아니야, 그동안 같이 지내면서 정이 들었던 거지. 단지 그거뿐이야.내가 저 인간을….
“이놈의 여편네가! 요새 내가 조용히만 있었더니!!”포터에서 내리자마자 집에서부터 들려온 거친 음성에 정렬이 집안으로 빠르게 뛰어 들어갔다. 쾅. 현관문이 굉음을 내며 열리자마자 거실 바닥에 주저앉듯이 쓰러진 엄마인 애라와 그 앞에 머리 위로 손을 들고 선 원길이 보였다. 참 익숙하면서 끔찍하고 동시에 지긋지긋하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늘 유순한 시골 청년의 모습을 한 정렬의 두 눈에 일순간 분노의 불이 일었다. 어렸을 적부터 봐왔던 아버지의 화내는 모습을 혐오해, 도통 화를 내는 적이 없는 정렬이었다. 그러나, 인간다움을 포기한 아버지 원길 앞에서만큼은 달랐다. 정렬이 거친 몸짓으로 신발을 벗고서 뛰어 들어가 애라 앞을 막아섰다. 분노로 인해 거친 숨결을 내뱉는 원길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풍겨왔다. 결국 저보다 몸집이 커버린 아들 앞에서는 분노를 삭이고 말 비겁한 그였다. ”네 엄마가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를 무시했다!”그놈의 무시. 정렬이 어렸을 적부터 지긋지긋할 정도로 들어왔던 단어였다. “어머니가 어떻게 아버지를 무시했는데요?”애라는 기력도, 말수도 없는 여자였다. 애초에 무시할 힘조차도 없는 사람이었다.늘 빼빼 마른 몸으로 삶을 살아내기 위해 사부작거리며 이 집에 유령처럼 존재해왔을 뿐. 일평생 순종적으로 살아오며 제대로 목소리 내는 법이 없는 그녀였다. 그래서 바보처럼 그녀는 이곳에서 폭력적인 남편 곁에 꾸역꾸역 머물러있는지도 몰랐다. “어떻게 집안에 점심거리 하나가 준비가 안 되어있어!” “아버지가 자주 밖에서 드시잖아요. 그래서 준비를 못 하셨나 보죠.”상 위에는 간단히 차려진 떡국과 김치 그릇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보나 마나 애라는 간단하게 점심만 때우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집안에 당장 먹을 게 하나도 없는 게 말이 돼?!” “아버지-.” “고 이장네, 본용이 형님네 봐! 마누라들이 몇 분이면 뜨거운 요리 턱턱 내오지.” “그러면 최 씨 아저씨도 보세
저녁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난, 어느 조용한 일식당 안. 180센티미터 남짓한 키에 적당한 체구. 안경을 쓴 남자가 누군가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때, 그는 상대를 발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가장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반갑습니다, 조봉길 코치님.” “우겸 씨, 안녕하세요.”마스크를 쓴 우겸의 인사에 봉길이 화답하고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어쩌다 제게 연락을….” “지난 5년 동안 몸담았던 케이비에서 반 쫓겨나듯이 코치직을 그만두셨다고 들었어요.”우겸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봉길이 잠시 흠칫했다. 그런 봉길을 기다려주며 우겸은 잔에 물을 따라서 봉길 앞에 놓아주었다. “아…. 네, 그렇게 됐습니다.” “혹시 갑작스러운 인협 씨 퇴출과 관련된 일 때문이었을까요?” “…….” “승부조작건 말이에요.” “…….”봉길보다 열 살은 족히 어리지만, 현재로서는 리그 오브 카오스로 전 세계 1위이자 유일무이한 존재인 우겸이었다. 그의 포커페이스에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한 봉길은 막막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침묵했다. 신뢰 혹은 불신.모두가 쉬쉬하고 넘어갔지만, 몇몇은 진실을 알고 있는 승부조작건을 우겸이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가 관건이었다.특히나 내부에서 모든 진실을 보고 들었던 봉길의 입장으로선. 게다가 우겸은 케이비의 오랜 천적인 원티드의 수장이었다. “저와 우겸 씨와 오며 가며 인사도 나눴기에 일면식은 어느 정도 있고, 제가 우겸 씨의 엄청난 팬이기도 하지만 답하기 조심스러운 질문이네요.”그가 택한 전략은 보류였다. 우겸의 반응을 보기 위한 보류. 봉길의 긴장한 시선에 미소 띤 우겸의 얼굴이 담겼다. “아, 제가 중요한 사안인데 너무 다짜고짜 여쭤봤죠?” “사실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요.”봉길의 조심스러운 대답에 우겸이 쿡쿡 웃으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일단은 봉길 코치님을 제가 옮겨갈 새 팀으로 영입하고 싶어요.” “네? 저를요?” “네, 그리고 인협 씨도 같은 팀 팀
“정렬 씨!” “황 선생님, 죄송해요. 제가 많이 늦었죠?”학교의 모든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후. 유림과 정결만 남아 있던 학교에 정렬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깨끗하게 청소된 학교 상태를 고려해 신발을 벗고서 맨발로 들어온 그였다. “아, 괜찮아요. 비가 진짜 많이 내리죠?” “네, 오늘 일이 좀 바빴어요. 늦어서 죄송해요.” “괜찮아요. 지금 오셨으니 됐죠. 그동안 저도 학교 뒷정리하고 있었어요.” “죄송해요.”포터를 운동장에 비스듬하게 세우고 급하게 뛰어오느라 손에 든 우산을 펼치지도 못했던 정렬의 머리카락은 거센 빗줄기에 꽤 젖어있었다. “괜찮아요. 해봤자 집은 걸어서 1분 남짓이라 퇴근이 급할 것도 없는데요.”에스더는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학교 불을 다 끄는 에스더를 지켜보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정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인협이 형은요?” “네?”정결의 물음에 우산을 펼치려던 에스더가 멈칫하고선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인협이 형, 학교에서 지내고 있다고 양 목사님께 지난번에 들었거든요.” “아-.”지난번에 목사님이 반찬 전해줄 때 인협이가 집에서 마주쳤다더니. 에스더는 인협이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학교에서 지냈다고 둘러댔다는 사실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맞아요. 저녁에 들어오면 제가 문을 열어드리거든요. 어차피 금방 걸어올 수 있는 거리니까요.” “어? 그럼, 낮에는 물새는 집에서 지내는 거예요?”정렬의 순진무구한 눈을 마주한 에스더는 어색하게 웃었다. “글쎄요. 하하하, 낮에는 어디에 가 있을까요?” “그나저나, 인협이 형이 잠시 아이들을 가르칠 거라는 소문도 돌던데요.”소문이 참 빨리도 퍼지는 동네야. 에스더는 속으로 새삼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 네. 지난번에 이야기 나누는데 악기도 좀 다룰 줄 아신다고 하셔서 잠시 예체능 쪽을 맡길까 하고요. 당장 별다른 대안이 없어서요.” “그렇군요.”정렬의 표정에서 이유 모를 아쉬움이 보였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