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방과 후.
아침에 본용으로부터 옆집 관사 도어락 비밀번호를 전달받은 에스더가 그것을 인협에게 건네자마자 둘만의 작은 이사가 시작됐다.
7월 초. 오랜만에 잠시 비가 쉬어가는 날이었다.
그래봤자 옆집에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한 후에 캐리어 하나를 달랑 바로 옆집으로 옮기는 거였지만 말이다.
“진짜로 짐이 이게 다야?” “응.”에스더와 인협은 에스더의 집과 똑같이 생겼지만, 방향만 다른 집안을 둘러보았다.
사람 사는 온기가 아직 채워지지 않은 관사 안은 휑했다.
“이사 기념으로 자장면은 대접 못하지만, 짜파게리나 같이 끓여 먹을래?”짐이 든 캐리어를 한구석 벽에 기대어놓은 인협의 제안에 에스더의 얼굴이 밝아졌다.
“좋지! 오늘 밥 차리기 귀찮았는데, 잘 됐다.” “잘됐네. 소파에 앉아 있어.” “좋아.”에스더는 아직 물건 없이 텅 빈 집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인협은 능숙하게 움직여, 관사에 있던 냄비를 하나 꺼내서 그것을 씻었다.
생각보다 어깨가 넓네.
에스더의 눈이 인협의 뒷모습을 바쁘게 좇았다. 팔을 뻗을 때 은근히 보이는 근육. 생각보다 남자다운 몸의 선.
그녀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지금.
차라리 내 취향은 정렬 씨라고. 키도 크고 남자답고, 성격도 순하고.
마른 안경잡이는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에스더는 자기 최면을 걸며 잠시 스쳐 지나간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애를 썼다.
이상하게도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인협의 뒷모습에 절로 흐뭇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뭐야.” “뭐가?”에스더의 나지막한 혼잣말에 짜파게리를 끓이던 인협이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아냐, 아무것도 아니야.” “싱겁긴.”피식 웃고서 돌아보는 인협의 모습의 잔상이 남아 에스더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한 번 더 응시했다.
나, 드디어 정신이 어떻게 된 건가? 아니야, 그동안 같이 지내면서 정이 들었던 거지. 단지 그거뿐이야.
내가 저 인간을…. 절대로 아니야.
에스더는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같은 생각을 되뇌었다.
***
춘천 어느 대학병원.
“순옥아.” “여보.”수술 회복실에서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온 순옥에게 대기실에 앉아 있던 철호가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순옥은 파리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수술은 잘 됐대. 암이 잘 떼어져서 항암은 따로 안 해도 되고, 앞으로는 추적 검사만 열심히 하면 된대.” “감사하네.”철호의 말에 순옥이 힘없이 미소 지었다.
다행이었다. 집으로 더 빨리 돌아갈 수 있어서.
수술 전날 밤 했던 영상 통화에서 순옥과 철호가 보고 싶다며 울적해하던 주아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하여튼 아주 큰 산 하나 잘 넘었네.” “그러게.” “이제 회복만 신경 써, 당신은.”철호의 당부에 순옥의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
“고마워요.” “아후-.”안도감 때문인지 철호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동안 가장 맘고생했을 순옥을 위해 슬픔을 내비치는 걸 참아온 그였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다는 안타까움과 그녀를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은 날마다 철호를 덮쳐왔다.
“이 따뜻한 손을 다시는 못 잡을까 봐 얼마나 무서웠는지.” “참 걱정도 많아요, 당신.” “원래 잃을 게 많은 사람이 두려움이 많은 법이야. 내가 가진 것 중에 당신은 가장 큰 거고.”철호의 투덜거림에 순옥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모든 풍파에 강하고 우직해 집안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모두 막아내는 방파제 같은 사람이 그녀만 관련되면 유독 물렁물렁해지고는 했다.
그래서 순옥이 그를 더 사랑하게 된 거긴 했지만, 처음으로 크게 아파보니 철호가 적잖이 걱정되었다.
그동안 너무 서로만 사랑하고 의지했나, 라는 의심이 고개를 절로 들 만큼.
어느새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순옥의 침대는 그녀의 병실에 다다랐다.
같은 방 환자와 보호자들의 시선을 받으며 그녀의 침대는 제자리를 찾았다.
“감사합니다.”철호의 인사에 상냥한 인사를 건넨 의료진은 빠르게 밖으로 향했다.
철호는 순옥에게 덮인 이불을 더 꼼꼼히 덮어주었다.
“여보.” “응?”분주하게 움직이는 철호를 순옥이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돌아가면 여보도 여보 취미도 좀 즐기고 그래.” “순옥이, 나 서운하게 왜 그래? 나는 당신 옆에 딱 달라붙을 예정이었는데.” “왜?” “당신 옆에만 딱 달라붙어서 음식 건강하게 챙겨 먹으라 잔소리하고, 일은 적당히 하라고 잔소리하고, 남 일은 좀 뒤로 두고 적당히 쉬어주라고 잔소리해야지. 당신 아프다고 들었던 순간부터 이전에는 그거 제대로 못 한 걸 매일매일 후회했어.” “…….” “행여나 내가 당신 밖에 없어서 걱정스러운 거면, 그런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 당신이 억지로 떼어놓아도 나는 죽는 날까지 당신뿐일 거니까.”철호의 고집에 순옥이 행복과 걱정이 뒤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어. 거머리같이 당신 곁에만 딱 붙어있을 남편을 고른 건 당신이니까 책임져.”철호의 진지한 말에 순옥은 푸스스, 웃고 말았다. 귀엽고도 안쓰러운 투정이었다.
“이런 쭈글쭈글해진 아줌마, 뭐가 예쁘다고 그렇게 쪼르르 쫓아다녀?” “내가 더 쭈글쭈글해. 심지어 나는 그을리기까지 해서 촌스럽기까지 해. 이런 못난이 같은 나랑 살아주는 당신이 더 고맙지.”철호는 이내 순옥의 손을 꼭 잡았다. 아직 회복 중이라 그런지, 약간은 찬 기운이 도는 손이었다.
철호는 반대편 손을 들어서 순옥의 이마부터 머리까지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제 기력을 몽땅 순옥에게 전해주어서 그녀의 회복을 돕고 싶었다.
“누가 보면 쭈글쭈글한 사람 둘이서 유난 떤다고 하겠어, 그치?” “알 게 뭐야. 그런 사람들은 제대로 된 사랑 한번 못 해본 사람들이겠지.”철호의 투덜거림에 순옥이 다시 한번 조용히 미소 지었다.
“고마워.” “응, 그러니까 내 걱정 사서 하지 말고 제발 당신만 생각해.” “알겠어.”애원에 가까운 철호의 부탁에 순옥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러게. 나도 어찌 됐든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뿐인걸.
순옥은 자신을 살뜰히 살피는 철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 [나인협]초록색 칠판에는 인협의 이름 석 자가 하얀색으로 적혀 있었다.
그 앞에는 어색한 미소를 짓는 인협과 그 옆에 환한 표정으로 선 에스더가 서 있었다.
“안녕, 얘들아. 앞으로 미술, 체육, 그리고 음악을 가르치게 된 나인협 선생님이라고 해.” “와아아아-!!!”작은 소원리, 그보다 더 작은 소원 초등학교에 뉴페이스의 등장이란.
학교 앞에서 이전에 있던 일도 잊고서 아이들은 인협을 열과 성을 다해 환영했다.
이게 바로 아이들다움인 것 같았다.
인협은 한층 긴장이 풀린 얼굴로 교실 안에서 저를 올려다보는 아이들의 자그만 얼굴들을 둘러보았다.
제각각 개성을 가진 아이들이었다.
“자, 그럼 선생님께 너희들도 한번 소개를 해볼래?” “네?” “선생님도 너희들을 잘 모르시잖아. 너희들도 자리에서 한 명씩 일어나서 소개를 하면 어떨까?”에스더의 제안에 아이들이 수줍은 얼굴을 하고서 서로를 쳐다보며 눈치만 보았다.
“자, 우리 학교의 왕형아 문기훈부터!”에스더의 부름에 사춘기 직전, 키가 쑥 크기 전에 통통한 얼굴을 한 기훈이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저는 문기훈이라고 합니다. 5학년입니다.”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은, 허스키하지만, 앳된 소년의 목소리였다. 나머지 사람들이 박수를 치자, 기훈이 머쓱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다음은 희주가 해볼까?”에스더의 부름에 긴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희주가 주변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저는 송희주라고 합니다. 저도 5학년이에요….”작고 느릿한 음성. 희주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에 황급히 앉았다.
“희주랑 희락이는 남매인데 옆마을인 가명리에서 매일 통학하고 있어요. 주변에 가까운 학교가 이곳뿐이거든요.”에스더의 부연 설명에 희주가 수줍게 고개만 끄덕였다.
“다음은?”정렬의 여동생 유림이었다. 앞머리도 없이 헝클어진 단발머리를 하고 얼굴이 조금 그늘진 아이였다.
유독 까만 눈동자가 불안한 듯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3학년 이유림입니다.”안 그래도 작은 어깨는 잔뜩 앞으로 말려있었다. 그때 한 아이의 손이 번쩍 올라왔다.
“어, 그럼 다음은 예담이가 해보자.”기탁의 첫째, 예담이었다. 단정한 머리를 한 예담은 큰 눈을 반짝이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부터 밝은 기운이 절로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묘하게 그 얼굴 위로 기탁이 보이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2학년, 양예담입니다!”또박또박하고 우렁찬 음성에 몇몇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자랑스러워하는 예담의 눈길이 잠시 옆자리에 앉은 주아에게 닿았다.
“다음은 제가 할래요!” “어, 그래. 희락아.”요령 없이 짧게 깎아 밤톨 같은 머리를 한 희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두 눈에는 힘이 가득해 보였다.
“저는 송희락입니다! 2학년이고, 송희주 누나의 동생입니다!” “보시다시피 희락이랑 예담이랑 엄청난 라이벌 관계랍니다.”예담을 이기기 위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희락을 본 에스더가 옆에 선 인협에게 살짝 귀띔해 주었다.
그 갑작스러운 속삭임에 인협은 목뒤에 잔털이 모두 쭈뼛 서는 걸 느꼈다.
희락이 힘차게 앉자마자 주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똑 단발머리에 똑 부러지게 생긴 아이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2학년 박주아라고 합니다. 우리 엄마는 박유진입니다.”주아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끝나고, 기훈의 동생 기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를 잔털 하나 없이 꽉 묶은, 총명해 보이는 아이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1학년 문기정입니다. 문기훈 오빠 동생입니다.” “자, 그럼 우리 정결이가 마지막이네?”정렬의 막냇동생, 바가지머리를 한 정결이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났다.
유림과 마찬가지로 정결의 고개를 살짝 숙여진 채로 두 눈은 바쁘게 주변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이정결입니다.” “정결이도 1학년이에요. 자, 앞으로 이렇게 여덟명의 아이들과 함께하시게 될 거예요.”말을 마친 에스더는 인협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오늘은 드디어 인협이 수업을 맡아서 진행하는 날.
에스더가 인협이 가르치는 시간에 함께 들어와 한동안은 도와주기로 이야기가 된 터였다.
그리고 언제 돌발행동을 할 줄 모르는 인협을 감시하려는 본용의 계책이기도 했다.
“잘 부탁해, 아이들아.”인협의 무뚝뚝한 인사에 모든 아이들의 표정에 설렘과 긴장이 가득해졌다.
에스더는 교실 뒤편에 놓아둔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자, 지금은 음악 시간이야.”어젯밤 이사 후. 인협이 봐야 하는 수업 자료를 넘겨주었을 때 그는 별다른 도움은 필요 없다고 장담했었다.
그래서 그에게 전적으로 다 맡기기로 한 에스더였다.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는 직접 하는 경험을 통해 배워야만 하는 부분이 매우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가볍게 노래를 부르며 시작해 볼까? 앞으로 음악 시간이 시작될 때마다 선생님이랑 이 노래를 부르고 시작할 거야.”인협이 말을 마치고는 옆에서 기타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언젠가 기타를 칠 수 있는 선생님이 있었던 시절 학교 예산으로 구매했다가 학교 창고에 몇 년 동안 방치되어 있던 기타였다.
그걸 오늘 아침에 발견한 인협은 낡은 기타를 미리 조율해 두었다.
“우와아-!”처음 보는 기타의 자태에 아이들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자, 선생님이 먼저 알려줄게. 한 줄씩 따라 해봐?”어깨끈으로 기타를 맨 인협이 기타로 코드를 하나 치자마자 아이들은 단숨에 흥분상태가 되었다.
어미 오리를 졸졸 쫓아다니는 새끼 오리처럼 아이들은 눈을 반짝거리며 인협이 부르는 노랫말을 잘도 따라 불렀다.
“목소리가 좋네.”말할 때도 목소리가 퍽 듣기 좋은 중저음이라고 생각했던 인협의 목소리는 노래를 부를 때 조금 더 맑아지는 편이었다.
흔들림 없이 잘 뻗어내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에스더는 어느새 턱을 괴고서 인협이 부르는 노랫소리에 집중을 했다.
아이들은 아기 새처럼 그가 불러주는 노래를 제각각의 소리로 잘도 따라 불렀다.
묘한 불협화음으로 어우러졌음에도 아이들의 목소리는 듣기 좋았다.
생각보다 인협은 아이들 앞에서 잘 웃고, 안정적이었다.
게다가 처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이들을 다루는 데 꽤 능숙했다.
무던한 무표정함에서 우러나오는 안정감이 상냥한 여자 선생님들과는 또 다르게 아이들을 잘 붙들어 주는 것 같았다.
젊은 남자 선생님을 처음 보는 탓인지, 아니면 기타를 처음 보는 탓인지.
인협을 신기해하는 아이들은 그의 가르침에 유독 잘 따르는 것처럼 보였다.
에스더는 어느새 미소를 띤 얼굴로 편안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인협의 두 눈이 천천히 떠졌다. 아직 커튼도 달지 못한 창문을 통해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눈앞에는 깊이 잠든 에스더의 얼굴이 보였다. 머리는 아직 묵직했지만, 심한 몸살 기운은 가신 뒤였다. “…….”머리카락 한 가닥이 그녀의 코 쪽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인협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서 그 가닥을 에스더의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귀가 예쁘네. 에스더의 귀에 잠시 닿았던 시선이 천천히 그녀의 이마로 향했다. 동그랗고 예쁜 이마. 둥그런 아치 모양을 그리며 뻗어있는 눈썹. 얇게 진 속쌍꺼풀과 긴 편인 속눈썹. 오뚝한 코, 귀여운 콧방울. 그리고 입술. 윗입술보다 더 도톰하고 유난히 붉어 보이는 아랫입술에 시선이 닿자마자 인협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일종의 본능이었다. 시선은 더 아래로 향했다. 갸름한 턱, 가느다랗고 긴 목선. 그리고 늘어진 티셔츠 목 부분 옆으로 보이는 쇄골. 거기까지 시선이 닿은 인협은 얼굴로 밀려오는 뜨거운 기운에 당황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려 애꿎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쁜 짓이라도 저지른 기분이 들어서였다. 에스더의 손은 그의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마치 어제 가지 말라고 붙들었던 사람이 그녀인 것처럼. 평온한 순간이었다. 밝은 햇빛에 조용히 공기에 떠다니는 먼지마저도 따뜻이 다가올 만큼. 커튼이라고는 있을 수 없는 오래된 할머니 집 사랑방에서 어느 날 남동생 인섭과 함께 할머니 곁에 잠든 적이 있었다. 평소에는 건넌방에서 자고는 했었는데, 웬일인지 그날따라 함께 자고 싶어졌었다. 인협이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때였다. 그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한지 사이로 비춰들어 오는 은은한 햇빛에 보였던 할머니를 보며 느꼈던 안온함과 비슷했다. 마치 그가 원래 있어야만 했던 곳으로, 집을 찾아낸 느낌. 그날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단단한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선 느낌이었다. 이상해. 할머니와 에스더 사이에나 이 관사와 할머니 집의 사랑방에는 어떠한 접점도 없음에도 불
똑똑똑. “나인협!”노크 소리에 방에 들어갈 힘조차 없어서 거실 소파에 옆으로 누워있다가 깜빡 잠에 들었던 인협이 겨우 눈을 떴다.머리가 지끈거리고 열이 올랐는지, 온몸이 뜨거웠다. 인협은 게슴츠레 뜬 눈으로 주위를 확인하고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식은땀이 이마에 맺혀 있었다. “아으….”몸이 천근만근인 것도 모자라,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쑤셨다. 똑똑똑. “집에 있는 거 다 알아!” “지금 나가….”인협의 힘없는 음성에 에스더의 힘찬 노크 소리가 잠시 멈췄다. “너, 아파? 목소리가 좀 안 좋은데?”인협이 느릿하게 움직여 구부정한 몸을 하고선 손으로 벽을 짚고는 문을 열었다. “너 아프구나.” “조금.”에스더의 동그래진 눈을 본 인협이 겨우 미소 띤 얼굴로 대꾸했다. 에스더는 잠시 할 말을 잃었는지, 입을 벌린 채로 잠시 제자리에 서 있었다. “어째, 네가 더 아픈 것 같은 표정이야?”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에스더의 표정에 인협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몸, 많이 안 좋아? 병원에 가서 링거라도 맞을래?” “추워….”훅 불어온 여름 밤공기에 인협이 몸을 떨자, 에스더는 다짜고짜 발을 들이밀어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쾅. 그렇게 현관문이 닫혔다.두 사람은 불도 켜지지 않은 어둑어둑한 집안에 함께 있게 되었다. “어디 봐. 이 더운 여름에 춥기까지 한 거면 꽤 심각한 거 같은데.”에스더는 손을 뻗어서 인협의 이마를 짚었다. 열이 잔뜩 오른 이마에 닿은 그녀의 손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인협은 그 기분 좋은 감각에 눈을 감고서 그녀의 손에 살짝 기댔다. “시원해. 기분 좋아.” “인협아. 병원 가자.” “괜찮아. 돈 아까워. 그냥 견디면서 약 먹으면 돼.”행여나 큰 병원에 갔다가 신상이라도 밝혀질까 두려워진 인협은 에스더의 제안을 거절했다. “약은 있고?”도리도리. 인협의 힘없는 고갯짓에 에스더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루쯤 꼬박 견디면 나아.”인협이 숙소에서
인협과 인섭이 아직도 소원리에서 지내던 어느 날, 서울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던 영애가 엄마인 인자의 집에 들린 날이었다. 쿵쿵쿵. “누가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해가 일찍 지는 어느 겨울 저녁. 조심스럽게 새로 단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머리가 하얗게 세고 허리가 굽은 엄마 인자와 남편 태욱과 함께 식사를 하던 영애가 걸어 나가 문을 열었다.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추위에 얼굴이 벌겋게 된 김 씨 부부가 보였다. “어? 아줌마, 아저씨! 안녕하세요. 날이 추운데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부부의 방문의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일단 영애는 두 사람을 거실로 들였다.지팡이를 짚는 두 사람이 오르기 꽤 험한 편인 오르막길을 어찌 올라왔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몇 년 전, 사위인 태욱의 도움으로 아예 신식으로 탈바꿈된 인자의 집안은 깔끔했다. 많이 추웠는지, 순순히 거실 소파에 앉은 김 씨 부부에게 인자가 말을 걸었다. 인자는 머리가 하얗게 세고 짧은 머리로 굵은 파마머리를 한 노인이었다. 평생을 부지런하게 산 터라 몸에 살집은 전혀 없었다. “무슨 일이야?” “언니, 그게….”인자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김씨 부인이 입을 열었다. 딱 봐도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언니도 알잖아. 부용이네가 사정이 어려워서 그동안 우리가 많이 도와줬던 거.”김씨 부인의 말에 김씨가 흐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우리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거 같아. 그래서 염치없지만 큰 부탁 하나 하려고.” “살날이 나보다 너희 부부가 더 남았으면 남았지, 내가 더 남았겠어?” “그래서. 그래서 영애네 부부가 잠시 들렀다는 소리에 이렇게 부리나케 찾아왔어.”김씨 부인의 뜻밖의 소리에 인자와 영애가 동시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염치없지만 부탁 하나만 할게, 영애야.” “한번 들어보고요, 아주머니.”자고로 영애는 어렸을 적부터 소원리에 소문난 똑순이였다. 그녀만큼 셈이 빠른 사람이 없었고, 바른 말을 잘하는 사람이 없었다.
음악 시간이 끝난 후 교무실. 에스더가 수업하는 시간이라 교무실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너, 대학은 나온 거니?” “네?” “인협이 너, 대학은 나왔냐고.” 옆 책상에서 들려온 제환의 깐깐한 목소리에 인협이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대꾸했다. 서른 살 무렵의 제환이나, 마흔 살 무렵의 제환이나. 옹졸하고 짜증 나게 구는 건 여전했다. 아니, 어쩌면 십 년이 지나는 동안 더 똘똘 뭉쳐 단단해지기까지 한 옹졸함은 더 답이 없어 보이게 만드는 듯했다. “대학 안 나왔는데요.”거짓말이라고는 모르는 인협이었다. 그의 돌직구에 제환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근데 어떻게 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칠 생각을 해?”시골에만 살아서 순수해서 그렇다고 해야 할까.약아빠지게 굴 줄 전혀 모르는 듯해보여 불쌍해 보이는 지경의 제환의 공격에 인협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황 선생님이랑 교장 선생님의 요청이 있어서 맡게 된 건데요.”인협이 에스더를 언급하자마자 제환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 찰나의 변화를 잡아낸 인협이 한쪽 입꼬리만 올려서 웃었다. “황 선생님이야 맡은 과목 수가 너무 많아서 판단력이 흐려졌다지만…. 교장 선생님은 황 선생님이 설득해서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거야, 알아?” “그럼, 황 선생님의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게 그전에 형님이 잘 좀 하시지, 그러셨어요.” “뭐?” “형님이 맡은 과목 수가 해봤자 네 개였고, 영어 선생님으로 임시로 와있는 황 선생님이 맡고 있던 과목 수가 여섯 개는 족히 됐다면서요? 그것도 필수 과목 위주로.”인협의 대꾸에 제환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다크서클이 유독 짙어 보이는 탓에 오늘따라 제환은 더 심술궂은 뱀파이어 같았다. “게다가 형님은 뭐가 억울한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해봤자 아무도 안 살아서 오랫동안 비어 있던 관사 주시고, 형님의 월급에 훨씬 못 미치는 50만 원 다달이 받으면서 이 자리를 메꿀 건데요.” “…….” “겨우 몇 시간씩이긴 하지만, 주중 매일 출근인데 이 정도 돈
방과 후. 아침에 본용으로부터 옆집 관사 도어락 비밀번호를 전달받은 에스더가 그것을 인협에게 건네자마자 둘만의 작은 이사가 시작됐다. 7월 초. 오랜만에 잠시 비가 쉬어가는 날이었다. 그래봤자 옆집에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한 후에 캐리어 하나를 달랑 바로 옆집으로 옮기는 거였지만 말이다. “진짜로 짐이 이게 다야?” “응.”에스더와 인협은 에스더의 집과 똑같이 생겼지만, 방향만 다른 집안을 둘러보았다. 사람 사는 온기가 아직 채워지지 않은 관사 안은 휑했다. “이사 기념으로 자장면은 대접 못하지만, 짜파게리나 같이 끓여 먹을래?”짐이 든 캐리어를 한구석 벽에 기대어놓은 인협의 제안에 에스더의 얼굴이 밝아졌다. “좋지! 오늘 밥 차리기 귀찮았는데, 잘 됐다.” “잘됐네. 소파에 앉아 있어.” “좋아.”에스더는 아직 물건 없이 텅 빈 집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인협은 능숙하게 움직여, 관사에 있던 냄비를 하나 꺼내서 그것을 씻었다. 생각보다 어깨가 넓네. 에스더의 눈이 인협의 뒷모습을 바쁘게 좇았다. 팔을 뻗을 때 은근히 보이는 근육. 생각보다 남자다운 몸의 선. 그녀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지금. 차라리 내 취향은 정렬 씨라고. 키도 크고 남자답고, 성격도 순하고. 마른 안경잡이는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에스더는 자기 최면을 걸며 잠시 스쳐 지나간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애를 썼다.이상하게도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인협의 뒷모습에 절로 흐뭇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뭐야.” “뭐가?”에스더의 나지막한 혼잣말에 짜파게리를 끓이던 인협이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아냐, 아무것도 아니야.” “싱겁긴.”피식 웃고서 돌아보는 인협의 모습의 잔상이 남아 에스더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한 번 더 응시했다. 나, 드디어 정신이 어떻게 된 건가? 아니야, 그동안 같이 지내면서 정이 들었던 거지. 단지 그거뿐이야.내가 저 인간을….
“이놈의 여편네가! 요새 내가 조용히만 있었더니!!”포터에서 내리자마자 집에서부터 들려온 거친 음성에 정렬이 집안으로 빠르게 뛰어 들어갔다. 쾅. 현관문이 굉음을 내며 열리자마자 거실 바닥에 주저앉듯이 쓰러진 엄마인 애라와 그 앞에 머리 위로 손을 들고 선 원길이 보였다. 참 익숙하면서 끔찍하고 동시에 지긋지긋하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늘 유순한 시골 청년의 모습을 한 정렬의 두 눈에 일순간 분노의 불이 일었다. 어렸을 적부터 봐왔던 아버지의 화내는 모습을 혐오해, 도통 화를 내는 적이 없는 정렬이었다. 그러나, 인간다움을 포기한 아버지 원길 앞에서만큼은 달랐다. 정렬이 거친 몸짓으로 신발을 벗고서 뛰어 들어가 애라 앞을 막아섰다. 분노로 인해 거친 숨결을 내뱉는 원길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풍겨왔다. 결국 저보다 몸집이 커버린 아들 앞에서는 분노를 삭이고 말 비겁한 그였다. ”네 엄마가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를 무시했다!”그놈의 무시. 정렬이 어렸을 적부터 지긋지긋할 정도로 들어왔던 단어였다. “어머니가 어떻게 아버지를 무시했는데요?”애라는 기력도, 말수도 없는 여자였다. 애초에 무시할 힘조차도 없는 사람이었다.늘 빼빼 마른 몸으로 삶을 살아내기 위해 사부작거리며 이 집에 유령처럼 존재해왔을 뿐. 일평생 순종적으로 살아오며 제대로 목소리 내는 법이 없는 그녀였다. 그래서 바보처럼 그녀는 이곳에서 폭력적인 남편 곁에 꾸역꾸역 머물러있는지도 몰랐다. “어떻게 집안에 점심거리 하나가 준비가 안 되어있어!” “아버지가 자주 밖에서 드시잖아요. 그래서 준비를 못 하셨나 보죠.”상 위에는 간단히 차려진 떡국과 김치 그릇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보나 마나 애라는 간단하게 점심만 때우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집안에 당장 먹을 게 하나도 없는 게 말이 돼?!” “아버지-.” “고 이장네, 본용이 형님네 봐! 마누라들이 몇 분이면 뜨거운 요리 턱턱 내오지.” “그러면 최 씨 아저씨도 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