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유료 회차의 시작이네요. 여태 함께해주신 분들께 가장 먼저 감사드려요. 앞으로도 가능하시다면 함께해요!!
인협의 두 눈이 천천히 떠졌다. 아직 커튼도 달지 못한 창문을 통해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눈앞에는 깊이 잠든 에스더의 얼굴이 보였다. 머리는 아직 묵직했지만, 심한 몸살 기운은 가신 뒤였다. “…….”머리카락 한 가닥이 그녀의 코 쪽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인협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서 그 가닥을 에스더의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귀가 예쁘네. 에스더의 귀에 잠시 닿았던 시선이 천천히 그녀의 이마로 향했다. 동그랗고 예쁜 이마. 둥그런 아치 모양을 그리며 뻗어있는 눈썹. 얇게 진 속쌍꺼풀과 긴 편인 속눈썹. 오뚝한 코, 귀여운 콧방울. 그리고 입술. 윗입술보다 더 도톰하고 유난히 붉어 보이는 아랫입술에 시선이 닿자마자 인협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일종의 본능이었다. 시선은 더 아래로 향했다. 갸름한 턱, 가느다랗고 긴 목선. 그리고 늘어진 티셔츠 목 부분 옆으로 보이는 쇄골. 거기까지 시선이 닿은 인협은 얼굴로 밀려오는 뜨거운 기운에 당황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려 애꿎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쁜 짓이라도 저지른 기분이 들어서였다. 에스더의 손은 그의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마치 어제 가지 말라고 붙들었던 사람이 그녀인 것처럼. 평온한 순간이었다. 밝은 햇빛에 조용히 공기에 떠다니는 먼지마저도 따뜻이 다가올 만큼. 커튼이라고는 있을 수 없는 오래된 할머니 집 사랑방에서 어느 날 남동생 인섭과 함께 할머니 곁에 잠든 적이 있었다. 평소에는 건넌방에서 자고는 했었는데, 웬일인지 그날따라 함께 자고 싶어졌었다. 인협이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때였다. 그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한지 사이로 비춰들어 오는 은은한 햇빛에 보였던 할머니를 보며 느꼈던 안온함과 비슷했다. 마치 그가 원래 있어야만 했던 곳으로, 집을 찾아낸 느낌. 그날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단단한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선 느낌이었다. 이상해. 할머니와 에스더 사이에나 이 관사와 할머니 집의 사랑방에는 어떠한 접점도 없음에도 불
똑똑똑. “나인협!”노크 소리에 방에 들어갈 힘조차 없어서 거실 소파에 옆으로 누워있다가 깜빡 잠에 들었던 인협이 겨우 눈을 떴다.머리가 지끈거리고 열이 올랐는지, 온몸이 뜨거웠다. 인협은 게슴츠레 뜬 눈으로 주위를 확인하고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식은땀이 이마에 맺혀 있었다. “아으….”몸이 천근만근인 것도 모자라,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쑤셨다. 똑똑똑. “집에 있는 거 다 알아!” “지금 나가….”인협의 힘없는 음성에 에스더의 힘찬 노크 소리가 잠시 멈췄다. “너, 아파? 목소리가 좀 안 좋은데?”인협이 느릿하게 움직여 구부정한 몸을 하고선 손으로 벽을 짚고는 문을 열었다. “너 아프구나.” “조금.”에스더의 동그래진 눈을 본 인협이 겨우 미소 띤 얼굴로 대꾸했다. 에스더는 잠시 할 말을 잃었는지, 입을 벌린 채로 잠시 제자리에 서 있었다. “어째, 네가 더 아픈 것 같은 표정이야?”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에스더의 표정에 인협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몸, 많이 안 좋아? 병원에 가서 링거라도 맞을래?” “추워….”훅 불어온 여름 밤공기에 인협이 몸을 떨자, 에스더는 다짜고짜 발을 들이밀어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쾅. 그렇게 현관문이 닫혔다.두 사람은 불도 켜지지 않은 어둑어둑한 집안에 함께 있게 되었다. “어디 봐. 이 더운 여름에 춥기까지 한 거면 꽤 심각한 거 같은데.”에스더는 손을 뻗어서 인협의 이마를 짚었다. 열이 잔뜩 오른 이마에 닿은 그녀의 손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인협은 그 기분 좋은 감각에 눈을 감고서 그녀의 손에 살짝 기댔다. “시원해. 기분 좋아.” “인협아. 병원 가자.” “괜찮아. 돈 아까워. 그냥 견디면서 약 먹으면 돼.”행여나 큰 병원에 갔다가 신상이라도 밝혀질까 두려워진 인협은 에스더의 제안을 거절했다. “약은 있고?”도리도리. 인협의 힘없는 고갯짓에 에스더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루쯤 꼬박 견디면 나아.”인협이 숙소에서
인협과 인섭이 아직도 소원리에서 지내던 어느 날, 서울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던 영애가 엄마인 인자의 집에 들린 날이었다. 쿵쿵쿵. “누가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해가 일찍 지는 어느 겨울 저녁. 조심스럽게 새로 단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머리가 하얗게 세고 허리가 굽은 엄마 인자와 남편 태욱과 함께 식사를 하던 영애가 걸어 나가 문을 열었다.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추위에 얼굴이 벌겋게 된 김 씨 부부가 보였다. “어? 아줌마, 아저씨! 안녕하세요. 날이 추운데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부부의 방문의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일단 영애는 두 사람을 거실로 들였다.지팡이를 짚는 두 사람이 오르기 꽤 험한 편인 오르막길을 어찌 올라왔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몇 년 전, 사위인 태욱의 도움으로 아예 신식으로 탈바꿈된 인자의 집안은 깔끔했다. 많이 추웠는지, 순순히 거실 소파에 앉은 김 씨 부부에게 인자가 말을 걸었다. 인자는 머리가 하얗게 세고 짧은 머리로 굵은 파마머리를 한 노인이었다. 평생을 부지런하게 산 터라 몸에 살집은 전혀 없었다. “무슨 일이야?” “언니, 그게….”인자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김씨 부인이 입을 열었다. 딱 봐도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언니도 알잖아. 부용이네가 사정이 어려워서 그동안 우리가 많이 도와줬던 거.”김씨 부인의 말에 김씨가 흐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우리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거 같아. 그래서 염치없지만 큰 부탁 하나 하려고.” “살날이 나보다 너희 부부가 더 남았으면 남았지, 내가 더 남았겠어?” “그래서. 그래서 영애네 부부가 잠시 들렀다는 소리에 이렇게 부리나케 찾아왔어.”김씨 부인의 뜻밖의 소리에 인자와 영애가 동시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염치없지만 부탁 하나만 할게, 영애야.” “한번 들어보고요, 아주머니.”자고로 영애는 어렸을 적부터 소원리에 소문난 똑순이였다. 그녀만큼 셈이 빠른 사람이 없었고, 바른 말을 잘하는 사람이 없었다.
음악 시간이 끝난 후 교무실. 에스더가 수업하는 시간이라 교무실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너, 대학은 나온 거니?” “네?” “인협이 너, 대학은 나왔냐고.” 옆 책상에서 들려온 제환의 깐깐한 목소리에 인협이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대꾸했다. 서른 살 무렵의 제환이나, 마흔 살 무렵의 제환이나. 옹졸하고 짜증 나게 구는 건 여전했다. 아니, 어쩌면 십 년이 지나는 동안 더 똘똘 뭉쳐 단단해지기까지 한 옹졸함은 더 답이 없어 보이게 만드는 듯했다. “대학 안 나왔는데요.”거짓말이라고는 모르는 인협이었다. 그의 돌직구에 제환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근데 어떻게 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칠 생각을 해?”시골에만 살아서 순수해서 그렇다고 해야 할까.약아빠지게 굴 줄 전혀 모르는 듯해보여 불쌍해 보이는 지경의 제환의 공격에 인협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황 선생님이랑 교장 선생님의 요청이 있어서 맡게 된 건데요.”인협이 에스더를 언급하자마자 제환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 찰나의 변화를 잡아낸 인협이 한쪽 입꼬리만 올려서 웃었다. “황 선생님이야 맡은 과목 수가 너무 많아서 판단력이 흐려졌다지만…. 교장 선생님은 황 선생님이 설득해서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거야, 알아?” “그럼, 황 선생님의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게 그전에 형님이 잘 좀 하시지, 그러셨어요.” “뭐?” “형님이 맡은 과목 수가 해봤자 네 개였고, 영어 선생님으로 임시로 와있는 황 선생님이 맡고 있던 과목 수가 여섯 개는 족히 됐다면서요? 그것도 필수 과목 위주로.”인협의 대꾸에 제환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다크서클이 유독 짙어 보이는 탓에 오늘따라 제환은 더 심술궂은 뱀파이어 같았다. “게다가 형님은 뭐가 억울한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해봤자 아무도 안 살아서 오랫동안 비어 있던 관사 주시고, 형님의 월급에 훨씬 못 미치는 50만 원 다달이 받으면서 이 자리를 메꿀 건데요.” “…….” “겨우 몇 시간씩이긴 하지만, 주중 매일 출근인데 이 정도 돈
방과 후. 아침에 본용으로부터 옆집 관사 도어락 비밀번호를 전달받은 에스더가 그것을 인협에게 건네자마자 둘만의 작은 이사가 시작됐다. 7월 초. 오랜만에 잠시 비가 쉬어가는 날이었다. 그래봤자 옆집에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한 후에 캐리어 하나를 달랑 바로 옆집으로 옮기는 거였지만 말이다. “진짜로 짐이 이게 다야?” “응.”에스더와 인협은 에스더의 집과 똑같이 생겼지만, 방향만 다른 집안을 둘러보았다. 사람 사는 온기가 아직 채워지지 않은 관사 안은 휑했다. “이사 기념으로 자장면은 대접 못하지만, 짜파게리나 같이 끓여 먹을래?”짐이 든 캐리어를 한구석 벽에 기대어놓은 인협의 제안에 에스더의 얼굴이 밝아졌다. “좋지! 오늘 밥 차리기 귀찮았는데, 잘 됐다.” “잘됐네. 소파에 앉아 있어.” “좋아.”에스더는 아직 물건 없이 텅 빈 집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인협은 능숙하게 움직여, 관사에 있던 냄비를 하나 꺼내서 그것을 씻었다. 생각보다 어깨가 넓네. 에스더의 눈이 인협의 뒷모습을 바쁘게 좇았다. 팔을 뻗을 때 은근히 보이는 근육. 생각보다 남자다운 몸의 선. 그녀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지금. 차라리 내 취향은 정렬 씨라고. 키도 크고 남자답고, 성격도 순하고. 마른 안경잡이는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에스더는 자기 최면을 걸며 잠시 스쳐 지나간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애를 썼다.이상하게도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인협의 뒷모습에 절로 흐뭇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뭐야.” “뭐가?”에스더의 나지막한 혼잣말에 짜파게리를 끓이던 인협이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아냐, 아무것도 아니야.” “싱겁긴.”피식 웃고서 돌아보는 인협의 모습의 잔상이 남아 에스더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한 번 더 응시했다. 나, 드디어 정신이 어떻게 된 건가? 아니야, 그동안 같이 지내면서 정이 들었던 거지. 단지 그거뿐이야.내가 저 인간을….
“이놈의 여편네가! 요새 내가 조용히만 있었더니!!”포터에서 내리자마자 집에서부터 들려온 거친 음성에 정렬이 집안으로 빠르게 뛰어 들어갔다. 쾅. 현관문이 굉음을 내며 열리자마자 거실 바닥에 주저앉듯이 쓰러진 엄마인 애라와 그 앞에 머리 위로 손을 들고 선 원길이 보였다. 참 익숙하면서 끔찍하고 동시에 지긋지긋하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늘 유순한 시골 청년의 모습을 한 정렬의 두 눈에 일순간 분노의 불이 일었다. 어렸을 적부터 봐왔던 아버지의 화내는 모습을 혐오해, 도통 화를 내는 적이 없는 정렬이었다. 그러나, 인간다움을 포기한 아버지 원길 앞에서만큼은 달랐다. 정렬이 거친 몸짓으로 신발을 벗고서 뛰어 들어가 애라 앞을 막아섰다. 분노로 인해 거친 숨결을 내뱉는 원길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풍겨왔다. 결국 저보다 몸집이 커버린 아들 앞에서는 분노를 삭이고 말 비겁한 그였다. ”네 엄마가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를 무시했다!”그놈의 무시. 정렬이 어렸을 적부터 지긋지긋할 정도로 들어왔던 단어였다. “어머니가 어떻게 아버지를 무시했는데요?”애라는 기력도, 말수도 없는 여자였다. 애초에 무시할 힘조차도 없는 사람이었다.늘 빼빼 마른 몸으로 삶을 살아내기 위해 사부작거리며 이 집에 유령처럼 존재해왔을 뿐. 일평생 순종적으로 살아오며 제대로 목소리 내는 법이 없는 그녀였다. 그래서 바보처럼 그녀는 이곳에서 폭력적인 남편 곁에 꾸역꾸역 머물러있는지도 몰랐다. “어떻게 집안에 점심거리 하나가 준비가 안 되어있어!” “아버지가 자주 밖에서 드시잖아요. 그래서 준비를 못 하셨나 보죠.”상 위에는 간단히 차려진 떡국과 김치 그릇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보나 마나 애라는 간단하게 점심만 때우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집안에 당장 먹을 게 하나도 없는 게 말이 돼?!” “아버지-.” “고 이장네, 본용이 형님네 봐! 마누라들이 몇 분이면 뜨거운 요리 턱턱 내오지.” “그러면 최 씨 아저씨도 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