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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잘 자, 나인협

Author: 랑끗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08-04 12:00:33

똑똑똑. 

“나인협!”

노크 소리에 방에 들어갈 힘조차 없어서 거실 소파에 옆으로 누워있다가 깜빡 잠에 들었던 인협이 겨우 눈을 떴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열이 올랐는지, 온몸이 뜨거웠다. 

인협은 게슴츠레 뜬 눈으로 주위를 확인하고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식은땀이 이마에 맺혀 있었다.

“아으….”

몸이 천근만근인 것도 모자라,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쑤셨다. 

똑똑똑.

“집에 있는 거 다 알아!”

“지금 나가….”

인협의 힘없는 음성에 에스더의 힘찬 노크 소리가 잠시 멈췄다.

“너, 아파? 목소리가 좀 안 좋은데?”

인협이 느릿하게 움직여 구부정한 몸을 하고선 손으로 벽을 짚고는 문을 열었다. 

“너 아프구나.”

“조금.”

에스더의 동그래진 눈을 본 인협이 겨우 미소 띤 얼굴로 대꾸했다. 

에스더는 잠시 할 말을 잃었는지, 입을 벌린 채로 잠시 제자리에 서 있었다. 

“어째, 네가 더 아픈 것 같은 표정이야?”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에스더의 표정에 인협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몸, 많이 안 좋아? 병원에 가서 링거라도 맞을래?”

“추워….”

훅 불어온 여름 밤공기에 인협이 몸을 떨자, 에스더는 다짜고짜 발을 들이밀어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쾅. 그렇게 현관문이 닫혔다.

두 사람은 불도 켜지지 않은 어둑어둑한 집안에 함께 있게 되었다.

“어디 봐. 이 더운 여름에 춥기까지 한 거면 꽤 심각한 거 같은데.”

에스더는 손을 뻗어서 인협의 이마를 짚었다. 

열이 잔뜩 오른 이마에 닿은 그녀의 손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인협은 그 기분 좋은 감각에 눈을 감고서 그녀의 손에 살짝 기댔다.

“시원해. 기분 좋아.”

“인협아. 병원 가자.”

“괜찮아. 돈 아까워. 그냥 견디면서 약 먹으면 돼.”

행여나 큰 병원에 갔다가 신상이라도 밝혀질까 두려워진 인협은 에스더의 제안을 거절했다.

“약은 있고?”

도리도리. 인협의 힘없는 고갯짓에 에스더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루쯤 꼬박 견디면 나아.”

인협이 숙소에서 혼자 지내면서 터득한 방법이었다. 

이쯤이면 하루 끙끙 앓고 나면 적당히 생활할 만큼은 괜찮아질 터였다.

이렇게 견디고 견디는 법만 배웠다가 과거 어느 날 봉길에게 발견되고는 엄청난 잔소리를 듣긴 했었지만. 

피식. 작은 웃음을 흘린 후 봉길의 동그란 눈을 떠올린 그는 그 위로 에스더를 겹쳐보았다. 

어째 내 걱정을 더 해. 자기네들 걱정이나 하지. 봉길 코치님도, 에스더도. 

“뭘 견뎌, 견디긴. 약 먹으면 좋아져. 잠깐만 기다려, 우리 집에 약 있어.”

“…….”

에스더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이내 그녀가 돌아와 노크하자, 인협은 슬며시 문을 다시 열어주었다. 

손에 약을 든 에스더가 서 있었다. 에스더는 인협이 추울까 걱정되는지 빠르게 집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제집처럼 신발을 벗고서 집 안으로 들어와 부엌 불을 켜고는 물을 한 컵 따랐다. 

“누가 참으래?”

“뭐?”

인협이 시원한 벽에 기대어 몽롱한 정신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에스더가 대뜸 말했다. 

언뜻 들으면 화가 잔뜩 난 목소리였다. 

“누가 아픈 걸 참으래? 아프면 아픈 거지. 병원에 가든지, 약을 먹든지 해야지.”

“화났어?”

에스더는 성난 얼굴로 인협에게 물컵과 약을 내밀었다. 

“일단 먹어.”

인협은 멀뚱거리는 얼굴로 약과 물을 받아서 그것을 순순히 삼켰다. 

그러고는 컵을 다시 달라고 손을 내민 에스더에게 그것을 내어주었다. 

“왜 찾아온 거야?”

싱크대에서 컵을 씻으려던 손이 인협이 질문하자, 멈칫했다. 그러다가 에스더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물을 틀었다. 

“그냥.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하려고 했어. 출근 첫날이잖아. 잘했다는 기념으로 밥 한번 해주고 싶었어.”

“…….”

“바보야, 혼자서 왜 끙끙 앓고 있었어? 병원이든, 약국이든 가야 할 거 아니야. 정 안 되면 우리 집 문이라도 두드리든지.”

“왜 그렇게 화가 난 건데?”

인협의 질문에 컵을 건조대에 올려놓은 에스더가 그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남들한테 그렇게 시원시원하게 말할 줄 알면서 왜 네가 아프다는 말은 한마디를 못 해?”

“지금 아픈 사람 혼내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인협의 파리한 얼굴을 본 에스더는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망설이다가 이내 입을 꼭 다물어버렸다. 

그래, 지금 내가 아픈 애한테 뭐 하는 거냐. 

에스더는 화를 가득 담은 한숨을 크게 내뱉고는, 인협에게 다가섰다. 

“가자.”

에스더가 손을 내밀자, 인협은 멀뚱거리며 그런 그녀의 손만 내려다보았다. 

“침대에 데려다줄게. 혼자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는데, 도움 필요할 거 아니야.”

에스더의 말에 인협은 얼떨결에 그녀의 손 위에다가 제 손을 올려놓았다. 

제법 의지가 되는 에스더의 손에 무게를 실은 인협은 천천히 침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천천히, 천천히 걸어가다가 침대에 다다른 순간. 인협의 발이 다른 쪽 발에 걸렸다. 

“어-.”

평소 같았으면 중심을 금방 잡았을 휘청거림이, 열로 인해 힘이 없는 인협의 몸은 그대로 앞으로 쏠렸다.

“어어-!”

그걸 본 에스더는 재빠르게 인협을 부축하기 위해 그의 앞을 몸으로 막아섰으나, 인협의 무게를 못 견딘 그녀는 그대로 넘어져버렸다. 

다행히 두 사람의 상체는 침대에 안착했다. 에스더가 침대에 깔리고, 그 위에 인협이 엎어지듯이 누운 상태로. 

“으윽-.”

푹신한 매트리스 덕분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으나, 비슷한 체구여도 남자인 인협의 몸은 에스더에게 매우 무겁게 느껴졌다. 

게다가 열감기 때문에 힘이 잔뜩 빠진 채라 그런지, 그의 몸은 유독 더 무거웠다. 

“인협아-.”

“으윽-.”

쓰러지면서 느낀 큰 충격 때문인지 인협은 더 심한 두통을 느끼며 겨우 몸을 가누었다. 

그러다가 힘을 잃은 인협의 고개가 에스더의 어깨에 톡 하고 닿았다. 

두근두근-. 어깨에 닿은 뜨거운 체온과 입김에 에스더는 심장이 세차게 뛰는 걸 느꼈다.

그 순간 제 몸에 닿은 인협의 몸의 느낌이 다 하나하나 인지가 되었다. 단단하고 뜨거운 느낌. 

보기보다 남자다운 몸이었다. 

“일어나.”

이내 정신을 차린 에스더는 안간힘을 써서 허우적거리는 인협을 겨우 밀어내 그의 상체만 겨우 일으켰다. 

그러고는 재빨리 옆으로 굴러서 제 몸을 빼냈다. 

에스더는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 고인 땀을 닦아냈다.

“어휴…. 더럽게 무겁네.”

“으으….”

상체만 겨우 침대에 얹고서 신음하는 인협을 본 에스더는 그의 다리를 들어서 그를 겨우 침대에 눕혀주었다. 

에스더를 위해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쓰며 겨우 눈을 뜬 인협을 본 그녀는 그의 머리 쪽으로 다가갔다. 

에스더는 손을 뻗어서 인협의 눈 위를 덮어주었다. 

“어서 자. 마음 놓고.”

인협이 손을 들어서 그녀의 손 위에 얹었다. 와닿은 체온이 뜨거웠다.

“고마워….”

토닥토닥. 

읊조리듯이 말하고는 에스더의 손을 연달아 부드럽게 두드린 인협은 잠이 들었다. 

스르륵, 하고 인협의 손이 침대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

에스더는 손을 옮겨서 인협의 이마를 짚었다. 아직 약기운이 안 돌았는지 이마는 불덩이였다. 

그 손은 조금 더 올라가 인협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기 시작했다. 

“잘 자.”

부디 꿈꿀 때만큼은 조금이라도 편안하기를. 

불과 몇 시간 전 엿들었던 인협과 그의 부모님과의 대화를 떠올린 에스더는 착잡한 표정으로 잠이 든 인협을 내려다보았다.

***

‘지금 네 실력으로 승급 테스트 중 며칠을 뺀다고?’

‘물어보는 것도 민폐다, 인협아.’

‘아직 어려서 뭘 모르나 보네.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인협아, 그 정도로 나약한 정신머리 가지고는 정식 선수 못 돼. 아니, 그냥 바로 퇴출이지.’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적. 

열여섯의 인협이 밤새 고민하다가 겨우 꺼냈던 승급 테스트 중 며칠을 빼달라는 말에 정현 감독과 기태는 그를 대놓고 비웃었다. 

훈련생마다 가장 숨 막히는 경쟁을 해야 하는 승급 테스트 기간. 

약간의 성적 하락이 곧바로 퇴출까지 이어질 수도 있는 평가의 기간이었다. 

하물며 테스트에 아예 참석 안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훈련생이 사활을 걸고서 참여하는 때였다.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이미 충분히 병들어있던 팀 내 분위기였다. 

그러나 어렸던 인협은 그게 당연한 줄로만 알고서, 별다른 반항도 하지 않고서 순순히 따랐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장례식쯤에는 아예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때는 선수 데뷔를 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온갖 대회에 긴장한 채로 매 게임에 출전할 때였으니까. 

어쩌면 팀의 분위기를 그때 알아봐야 했는지도 몰랐다. 조금만 더 하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든 성공해서 하늘에 계신 조부모에게 효도하면 된다고. 그는 그렇게 되뇌며 버텼었다.

그러나, 효도는 산 사람에게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묘소를 찾아도, 그곳에는 아무런 반응도 답도 없을 뿐이었다. 

고요함을 닮은 상실만 있을 뿐.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님보다 더 사랑해 주었던 그들의 마지막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은 문득문득 서글펐다. 

특히나 소원리에 돌아왔을 때, 폐가에 가까운 상태였던 소원리 집의 모습은 그를 한층 더 슬프게 만들었다. 

이제는 결코 되찾을 수 없는 온기였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사랑이 가득했던 마음의 고향이었고. 

“할머니….”

‘너만 행복하면 된다, 우리 강아지.’

‘허허허, 우리 인협이. 뭘 해도 멋진 우리 손주.’

“할아버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음성이 귓가에 반복해서 울렸다. 

너무 따스해서 어른이 된 후에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절로 눈물이 나는 음성이었다. 

어쩌면 사무치는 그리움인지도 몰랐다. 

“미안해….”

‘허허허, 뭐가 미안해! 우리 강아지만 괜찮으면 할머니 할아버지는 됐어!’

“보고 싶어….”

현실과 생생한 기억을 오가던 인협의 머리에 부드러운 손길이 와닿았다.

“괜찮아…. 괜찮아….”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몇 번 넘겨준 그 손길은 어느새 그의 어깨를 천천히 두드려주기 시작했다. 

뜨거운 눈물이 인협의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그 감각에 인협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곳에는 은은한 침대 맡 스탠드 불빛에 비친 에스더가 눈물 고인 채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스더…?”

천장으로 시선을 돌려서 지끈거리는 머리로 잠들기 전 상황을 떠올린 인협은 다시 에스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약기운이 돈 건지, 아직도 열 기운과 몸이 쳐지는 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정신은 조금 더 말똥했고 죽을 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괜찮아? 꿈꾸면서 좀 힘들어하는 거 같길래.”

“아….”

힘들었던 걸까. 

그리우면서 달콤하면서도 괴로웠다. 이 복잡스러운 감정을 뭐라 정의해야 할지. 

인협은 멍한 눈빛으로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방울을 본 에스더는 인협의 가슴팍에 얹었던 손을 옮겨서 엄지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냈다. 

그 손길에 인협은 손을 들어 에스더의 손목을 약하게 붙들었다. 

“…….”

침묵 속에서 둘의 시선이 얽혔다. 

“사실 힘들었어.”

“…….”

“많이 힘들었어.”

아무렇지 않게 잘 견뎌왔다고, 목표를 위해 희생을 감수하며 달려온 것뿐이라고. 

그렇게 그는 마음속에 벽을 차곡차곡 쌓아 나갔다. 안에서 썩어가는 상처의 악취를 막아내기 위해 그것을 최선을 다해 외면하며. 

그러나, 치유받지 못한 상처는 언젠가 곪아 터져 나오는 법이었다. 

마음속 벽을 지탱해 오던 힘을 잃고 나자마자, 곪아있던 상처는 일순간에 터져 나왔다.

마치 봇물이 터지듯이. 

그렇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승부조작 일로 이미 난도질당했던 인협을 곪아 터져버린 상처가 덮치고 말았다. 

울먹거리며 눈물을 흘린 인협을 지켜보던 에스더는 상체를 인협 쪽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몸을 내려서 그의 상체 위에 살포시 포개고 그의 목뒤에 팔을 두르고는 그를 꼭 안아주었다. 

지난번, 에스더의 집에서 그를 안았을 때도 느꼈지만 인협은 어떠한 위로의 말보다 온기가 필요해 보였다. 

괜찮아.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 그러니까 과거의 일쯤은 그냥 좀 토해내도 돼. 

계속 꺼내보고 조금 닳도록 만들어서 아주 조금은 무뎌질 때까지. 

그렇게 계속해서 꺼내보다가 언젠가는 아무렇지 않아질 때까지 내가 안아줄게. 

그런 마음을 담아 에스더는 눈을 감고서 떨려오는 인협의 몸을 더 꼭 안아주었다. 떨림도 모두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 많이 아팠어. 지금도 너무 아파. 사실 아무것도 괜찮지 않고 다 엉망이야….”

“응.”

“겉으로는 센 척하지만, 나약하기 짝이 없는 놈이야, 나. 겁쟁이라고.”

“응.”

“나는 쓰레기야. 날 사랑해 줬던 할머니 할아버지 마지막 길도 못 지켰어. 내가 성공해야만 했으니까.”

“그랬구나.”

인협은 고해성사하듯이 에스더의 어깨에 대고는 거칠고도 뜨거운 숨결을 쭉 내뱉었다. 

두서없는 고백에도 에스더는 담담히 답해주었다. 

쭉 이어지던 고백이 어느새 잦아들고, 인협의 몸의 떨림도 함께 잦아들자, 방안에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에스더는 천천히 인협을 놓아주고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의 눈가가 젖어있었다. 

“나는 사실 네가 뭐가 됐든, 네가 어떤 사람이었든지 상관없어. 그건 모두 너니까. 그냥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나인협이 내게는 전부야.”

“…….”

“그리고 그 나인협은 조금은 가시를 세우고 있고 서툴긴 하지만, 괜찮아. 꽤 괜찮은 사람이야.”

“…….”

“너, 괜찮아. 그리고 아파해도 괜찮아. 충분히 안 괜찮고 아플 만한 일이야. 나는 네가 살아왔던 시간을 감히 다 알 수 없지만, 네가 그렇다면 그런 일인 거야.”

에스더의 차분한 음성에 인협의 두 눈에서 다시 한번 뜨거운 눈물이 몇 방울 흘렀다. 

에스더는 또다시 손을 뻗어서 엄지손가락으로 그 눈물을 닦아주었다. 

“다 흘려. 그간 눈물 참느라 고생했겠네. 언제든지, 얼마든지 닦아줄게.”

“…….”

에스더는 입꼬리만 살짝 올려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망울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듯해 보였다.

마치 제 눈에 비친 인협의 두 눈에 담긴 슬픔을 고스란히 전해 담은 듯이. 

인협은 조용히 팔을 옆으로 뻗어서 제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

“옆에 있어 주면 안 돼?”

어린아이 같은 인협의 물음에 잠시 망설이던 에스더는 이내 그의 옆으로 향했다. 인협은 몸을 옆으로 돌려서 최대한 벽 쪽으로 붙어서 자리를 내어주었다. 

한쪽 팔을 받치고서 옆으로 누운 채로 그를 응시하던 에스더는 이내 반대편 손을 뻗어서 중간에 놓여있던 인협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조금 전처럼 그의 손을 토닥여주기 시작했다. 

“편하게 자. 내가 옆에 있으니까 단잠 잘 거야.”

“응.”

에스더의 나지막한 음성에 인협이 눈을 살포시 감았다. 순순한 그 모습에 그녀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내가 좋은 꿈 보내줄 테니 꼭 좋은 꿈 꿔.”

“응.”

 

이내 인협의 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그러자, 에스더의 토닥이던 손길이 점점 잦아들었다. 

“잘 자, 나인협.”

그녀는 제 손보다 큰 손을 부드럽게 붙들며 인사를 했다. 곤히 잠이 든 인협의 얼굴은 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편안해 보였다.

랑끗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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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웰컴 투 소원리   28. 더 헤아려줄걸

    인협과 인섭이 아직도 소원리에서 지내던 어느 날, 서울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던 영애가 엄마인 인자의 집에 들린 날이었다. 쿵쿵쿵. “누가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해가 일찍 지는 어느 겨울 저녁. 조심스럽게 새로 단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머리가 하얗게 세고 허리가 굽은 엄마 인자와 남편 태욱과 함께 식사를 하던 영애가 걸어 나가 문을 열었다.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추위에 얼굴이 벌겋게 된 김 씨 부부가 보였다. “어? 아줌마, 아저씨! 안녕하세요. 날이 추운데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부부의 방문의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일단 영애는 두 사람을 거실로 들였다.지팡이를 짚는 두 사람이 오르기 꽤 험한 편인 오르막길을 어찌 올라왔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몇 년 전, 사위인 태욱의 도움으로 아예 신식으로 탈바꿈된 인자의 집안은 깔끔했다. 많이 추웠는지, 순순히 거실 소파에 앉은 김 씨 부부에게 인자가 말을 걸었다. 인자는 머리가 하얗게 세고 짧은 머리로 굵은 파마머리를 한 노인이었다. 평생을 부지런하게 산 터라 몸에 살집은 전혀 없었다. “무슨 일이야?” “언니, 그게….”인자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김씨 부인이 입을 열었다. 딱 봐도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언니도 알잖아. 부용이네가 사정이 어려워서 그동안 우리가 많이 도와줬던 거.”김씨 부인의 말에 김씨가 흐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우리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거 같아. 그래서 염치없지만 큰 부탁 하나 하려고.” “살날이 나보다 너희 부부가 더 남았으면 남았지, 내가 더 남았겠어?” “그래서. 그래서 영애네 부부가 잠시 들렀다는 소리에 이렇게 부리나케 찾아왔어.”김씨 부인의 뜻밖의 소리에 인자와 영애가 동시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염치없지만 부탁 하나만 할게, 영애야.” “한번 들어보고요, 아주머니.”자고로 영애는 어렸을 적부터 소원리에 소문난 똑순이였다. 그녀만큼 셈이 빠른 사람이 없었고, 바른 말을 잘하는 사람이 없었다.

  • 웰컴 투 소원리   27. 두근두근

    음악 시간이 끝난 후 교무실. 에스더가 수업하는 시간이라 교무실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너, 대학은 나온 거니?” “네?” “인협이 너, 대학은 나왔냐고.” 옆 책상에서 들려온 제환의 깐깐한 목소리에 인협이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대꾸했다. 서른 살 무렵의 제환이나, 마흔 살 무렵의 제환이나. 옹졸하고 짜증 나게 구는 건 여전했다. 아니, 어쩌면 십 년이 지나는 동안 더 똘똘 뭉쳐 단단해지기까지 한 옹졸함은 더 답이 없어 보이게 만드는 듯했다. “대학 안 나왔는데요.”거짓말이라고는 모르는 인협이었다. 그의 돌직구에 제환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근데 어떻게 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칠 생각을 해?”시골에만 살아서 순수해서 그렇다고 해야 할까.약아빠지게 굴 줄 전혀 모르는 듯해보여 불쌍해 보이는 지경의 제환의 공격에 인협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황 선생님이랑 교장 선생님의 요청이 있어서 맡게 된 건데요.”인협이 에스더를 언급하자마자 제환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 찰나의 변화를 잡아낸 인협이 한쪽 입꼬리만 올려서 웃었다. “황 선생님이야 맡은 과목 수가 너무 많아서 판단력이 흐려졌다지만…. 교장 선생님은 황 선생님이 설득해서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거야, 알아?” “그럼, 황 선생님의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게 그전에 형님이 잘 좀 하시지, 그러셨어요.” “뭐?” “형님이 맡은 과목 수가 해봤자 네 개였고, 영어 선생님으로 임시로 와있는 황 선생님이 맡고 있던 과목 수가 여섯 개는 족히 됐다면서요? 그것도 필수 과목 위주로.”인협의 대꾸에 제환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다크서클이 유독 짙어 보이는 탓에 오늘따라 제환은 더 심술궂은 뱀파이어 같았다. “게다가 형님은 뭐가 억울한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해봤자 아무도 안 살아서 오랫동안 비어 있던 관사 주시고, 형님의 월급에 훨씬 못 미치는 50만 원 다달이 받으면서 이 자리를 메꿀 건데요.” “…….” “겨우 몇 시간씩이긴 하지만, 주중 매일 출근인데 이 정도 돈

  • 웰컴 투 소원리   26. 절대로 아니야

    방과 후. 아침에 본용으로부터 옆집 관사 도어락 비밀번호를 전달받은 에스더가 그것을 인협에게 건네자마자 둘만의 작은 이사가 시작됐다. 7월 초. 오랜만에 잠시 비가 쉬어가는 날이었다. 그래봤자 옆집에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한 후에 캐리어 하나를 달랑 바로 옆집으로 옮기는 거였지만 말이다. “진짜로 짐이 이게 다야?” “응.”에스더와 인협은 에스더의 집과 똑같이 생겼지만, 방향만 다른 집안을 둘러보았다. 사람 사는 온기가 아직 채워지지 않은 관사 안은 휑했다. “이사 기념으로 자장면은 대접 못하지만, 짜파게리나 같이 끓여 먹을래?”짐이 든 캐리어를 한구석 벽에 기대어놓은 인협의 제안에 에스더의 얼굴이 밝아졌다. “좋지! 오늘 밥 차리기 귀찮았는데, 잘 됐다.” “잘됐네. 소파에 앉아 있어.” “좋아.”에스더는 아직 물건 없이 텅 빈 집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인협은 능숙하게 움직여, 관사에 있던 냄비를 하나 꺼내서 그것을 씻었다. 생각보다 어깨가 넓네. 에스더의 눈이 인협의 뒷모습을 바쁘게 좇았다. 팔을 뻗을 때 은근히 보이는 근육. 생각보다 남자다운 몸의 선. 그녀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지금. 차라리 내 취향은 정렬 씨라고. 키도 크고 남자답고, 성격도 순하고. 마른 안경잡이는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에스더는 자기 최면을 걸며 잠시 스쳐 지나간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애를 썼다.이상하게도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인협의 뒷모습에 절로 흐뭇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뭐야.” “뭐가?”에스더의 나지막한 혼잣말에 짜파게리를 끓이던 인협이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아냐, 아무것도 아니야.” “싱겁긴.”피식 웃고서 돌아보는 인협의 모습의 잔상이 남아 에스더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한 번 더 응시했다. 나, 드디어 정신이 어떻게 된 건가? 아니야, 그동안 같이 지내면서 정이 들었던 거지. 단지 그거뿐이야.내가 저 인간을….

  • 웰컴 투 소원리   25. 난 기다릴 수 있어

    “이놈의 여편네가! 요새 내가 조용히만 있었더니!!”포터에서 내리자마자 집에서부터 들려온 거친 음성에 정렬이 집안으로 빠르게 뛰어 들어갔다. 쾅. 현관문이 굉음을 내며 열리자마자 거실 바닥에 주저앉듯이 쓰러진 엄마인 애라와 그 앞에 머리 위로 손을 들고 선 원길이 보였다. 참 익숙하면서 끔찍하고 동시에 지긋지긋하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늘 유순한 시골 청년의 모습을 한 정렬의 두 눈에 일순간 분노의 불이 일었다. 어렸을 적부터 봐왔던 아버지의 화내는 모습을 혐오해, 도통 화를 내는 적이 없는 정렬이었다. 그러나, 인간다움을 포기한 아버지 원길 앞에서만큼은 달랐다. 정렬이 거친 몸짓으로 신발을 벗고서 뛰어 들어가 애라 앞을 막아섰다. 분노로 인해 거친 숨결을 내뱉는 원길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풍겨왔다. 결국 저보다 몸집이 커버린 아들 앞에서는 분노를 삭이고 말 비겁한 그였다. ”네 엄마가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를 무시했다!”그놈의 무시. 정렬이 어렸을 적부터 지긋지긋할 정도로 들어왔던 단어였다. “어머니가 어떻게 아버지를 무시했는데요?”애라는 기력도, 말수도 없는 여자였다. 애초에 무시할 힘조차도 없는 사람이었다.늘 빼빼 마른 몸으로 삶을 살아내기 위해 사부작거리며 이 집에 유령처럼 존재해왔을 뿐. 일평생 순종적으로 살아오며 제대로 목소리 내는 법이 없는 그녀였다. 그래서 바보처럼 그녀는 이곳에서 폭력적인 남편 곁에 꾸역꾸역 머물러있는지도 몰랐다. “어떻게 집안에 점심거리 하나가 준비가 안 되어있어!” “아버지가 자주 밖에서 드시잖아요. 그래서 준비를 못 하셨나 보죠.”상 위에는 간단히 차려진 떡국과 김치 그릇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보나 마나 애라는 간단하게 점심만 때우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집안에 당장 먹을 게 하나도 없는 게 말이 돼?!” “아버지-.” “고 이장네, 본용이 형님네 봐! 마누라들이 몇 분이면 뜨거운 요리 턱턱 내오지.” “그러면 최 씨 아저씨도 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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