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아이린! 아직도 안 일어났니?"
아침부터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만 더 누워 있으면 안 될까 싶었지만, 이미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은 방 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일어났어요!" 나는 이불 속에서 대답했다. 나는 한동안 이불을 뒤집어쓴 채 가만히 누워 있다가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가난한 평민에게 아침은 언제나 빨리 찾아온다. 그리고 나에게는 특히 더 그랬다. 우리 가족은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마을에 살며 농사를 지었다. 농사가 잘되지 않는 날에는 내가 직접 숲으로 들어가 약초를 캐 도시에 팔아 부족한 돈을 마련하곤 했다. 물론 매일 약초를 캐서 돈을 버는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 집 형편에서 한 푼이라도 더 벌 수 있다면 가만히 앉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오늘은 좀 많이 캐야 하는데."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대충 흐트러진 갈색 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제대로 꾸미고 다닐 필요도 없었기에 머리를 뒤로 묶고 평소 입던 낡은 옷으로 갈아입은 뒤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멍!" "으악!" 문을 열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녀석이 내게 달려들었다. 우리 집에서 키우는 개 '마리'였다. 녀석은 내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꼬리를 미친 듯이 흔들며 내 몸에 앞발을 올렸고, 나는 간신히 균형을 잡으며 녀석의 머리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마리! 아침부터 사람을 놀라게 하면 어떡해!" "멍!" "이익! 얼굴 핥지 말라니까!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 마리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듯 혀를 내밀고 헥헥거리기만 했다. "그래, 네가 내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지." "멍!" "그렇게 대답하지 마. 진짜 알아듣는 것 같잖아." 나는 결국 녀석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뒤 마당에 있던 큰 바구니를 들었다. "오늘도 숲에 갈거니?" 마당에서 농기구를 챙기던 아버지가 물었다. "네. 며칠 전에 비도 왔으니까 약초가 좀 많이 자랐을 거에요." "음,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고." "제가 몇 살인데요. 숲에 약초 캐러 간 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요."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조심할게요." 아버지는 늘 같은 말을 했다.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말 것.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올 것. 처음 보는 길을 따라가지 말 것. 어릴 때부터 수없이 들었던 말이었지만, 사실 나는 한 번도 그 말을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가는 숲은 마을 사람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곳이었고, 나 역시 어린 시절부터 여러 번 드나들었으니까.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끄으응~차! 그럼 다녀올게요." "아침도 안먹고 가게?" "숲에서 이거저거 주워먹죠, 뭐." 나는 어머니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숲으로 향했다. --------------- 숲에 들어선 나는 익숙한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살폈다. 며칠 전 내린 비 때문에 흙은 아직 촉촉했고, 나무와 풀에서는 싱그러운 냄새가 풍겨왔다. 이런 날은 운이 좋으면 평소보다 좋은 약초를 많이 찾을 수 있었기에 나는 조금 기대를 품고 바구니를 손에 든 채 숲길을 걸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바구니는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이 정도 시간에 이미 절반 정도는 찼어야 했는데, 오늘은 약초 몇 줄기만 바닥에 외롭게 놓여 있을 뿐이었다. "오늘 왜 이러지?" 나는 바구니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며칠 전 비도 내렸고, 날씨도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없을 수가 있나?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그 결국 익숙한 길에서 조금 벗어나기로 했다. "조금만 더 들어가 보자." 이 정도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숲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아직 해가 높이 떠 있었으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평소보다 조금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천천히 바닥을 살피며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 순간 나는 주변의 풍경이 낯설어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설마."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 보는 나무. 처음 보는 풀. 처음 보는 길. 아니, 애초에 길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없었다. 그제야 나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 길을 잃었나?" 말로 직접 꺼내고 나니 갑자기 상황이 심각해졌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던 햇빛은 아침보다 훨씬 기울어져 있었다. "괜찮아. 아직 어두워지지는 않았으니까.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 가야겠어."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걸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분명 왔던 길로 되돌아 온 것 같은데 점점 더 헤메는 기분이 들었다. "...어떡하지?" 배는 고프고 목까지 말라오기 시작하니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 법!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주변을 살폈다. 조금 더 걷다보니 멀리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햇빛이 나뭇잎에 반사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것은 점점 선명해졌다. 푸르고 맑은 빛.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뛰어갔다. "...이런 곳에 호수?" 이 숲에 호수가 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정성스럽게 만들어 놓은 거대한 거울처럼 주변의 풍경을 그대로 비추고 있었고, 수면 위에는 낙엽 하나 떠 있지 않았다. "...좀 이상하긴 하지만, 물이 이렇게 맑으니 안 마실수가 없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호숫가로 다가가 두 손으로 물을 떠 올렸다. 꿀꺽, 꿀꺽. 시원한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하아...살겠다." 나는 저절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물을 떠 마셨다. 꿀꺽.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심장이 갑자기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쿵쾅, 쿵쾅, 쿵쾅! "윽, 괴로워...!" 목을 타고 내려간 차가운 물과는 정반대의 열기가 갑자기 몸속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가슴에서 시작된 뜨거운 열기는 순식간에 팔과 다리로 퍼져 나갔고, 손끝과 발끝까지 타오르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으윽..!" 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내 몸은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맑은 호수 위에서 무언가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모습이었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난거지?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익숙한 나무들이었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누워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본 순간, "...여긴?" 이곳은 가장 익숙한 숲의 입구였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놀랍게도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온몸을 태울 듯했던 열기도 사라졌고, 미친 듯이 뛰던 심장도 분명히 가라 앉았다. "...꿈이라도 꾼 걸까?" 이상하게도 호숫가에서 쓰러진 이후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옷에 묻은 흙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약초도 제대로 캐지 못했는데, 벌써 해가 기울고 있었다. "일단 집에 가야겠어." 나는 텅 빈 바구니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몸 성히 숲을 나왔으니 된 거겠지. 나는 별 생각없이 허탕 친 하루에 분노하며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날, 내가 마신 것이 단순한 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그리고 그 물 한 모금이, 보잘것없는 평민이었던 내 인생을 완전히 바꾸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제대로 찾아 왔군."갑작스럽게 찾아온 불청객의 등장에 남자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나 역시 묶인 채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그리고 문가에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카시안 백작님?"문을 박살내고 들어온 것은 분명 카시안이었다.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깔끔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얼굴만큼은 평소보다 훨씬 더 차가워 보였다."넌 뭐야?""여긴 어떻게 들어왔지?"남자들은 갑자기 나타난 카시안을 경계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 남자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카시안의 앞을 막아섰다."야, 못 들었어? 여긴 어떻게 들어왔냐고.""내 두통약을 찾으러 왔다.""뭐?""지금 기분이 좋지 않으니, 얌전히 비키는 게 좋을 거야."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나도 똑같이 헛웃음을 터뜨렸다.두통약을 찾으러 왔다니, 나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이 자식이 뭐라는...?"퍽!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카시안의 주먹이 남자의 얼굴을 정확하게 가격했다."커헉!"주먹에 맞은 남자는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카시안은 쓰러진 남자를 한 번 내려다보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목을 가볍게 털었다.그러자 뒤에 있던 남자들이 동시에 무기를 꺼내 들었다."이 새끼가!""죽고 싶나?""잠깐, 잠깐만요!"나는 묶인 채로 다급하게 소리쳤다."저 사람 카시안 백작님이에요! 귀족이라고요!""그래서 뭐 어쩌라고!"남자 하나가 소리치며 카시안을 향해 달려들었다.카시안은 상대가 휘두르는 칼을 가볍게 피한 뒤, 그대로 남자의 팔을 붙잡고 비틀었다."아악!"콰당!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고꾸라졌다."...와우."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그동안 성격 더러운 얌전한 귀족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잘 싸웠다.남자들은 하나둘 카시안을 향해 달려들었다.하지만 카시안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다가오는 남자의 공격을 피하고, 팔을 꺾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뜨
카시안 백작의 저택에서 생활한 지도 벌써 열흘이 지났다.나는 카시안의 식사 준비를 위해 시장을 돌아다니며 필요한 식재료를 하나씩 바구니에 담고 있었다."야채는 이 정도면 됐고...고기랑 과일만 사면 되겠다."나는 바구니 안을 확인하며 시장 안쪽으로 걸어갔다.그때였다."와하하하!"콰당-!갑자기 어린 남자아이가 내 옆을 쌩 달려가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아이는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렸다."으아아앙!!"아이가 넘어져 울고 있었지만, 시장 사람들은 누구 하나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그저 지나가다가 한 번씩 힐끔 바라볼 뿐이었다.나는 그 광경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아이에게 다가갔다."괜찮니?""흐어엉...아파요..."아이의 무릎에서는 피가 주르륵 흘러나오고 있었다."잠깐만 기다려. 누나가 안 아프게 해줄게."나는 아이를 조심스럽게 앉힌 후,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그리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손바닥에 침을 뱉고 아이의 무릎에 올렸다.그 다음, 아이의 시선을 끌기 위해 한 손을 허공에서 요란하게 움직였다."짜라라라란~ 슈우우우욱! 호롤라이유!!"잠시 후, 조금 전까지 아이의 무릎에 선명하게 남아 있던 상처가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어?"아이는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보더니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누나! 안 아파요!"나는 슬쩍 손을 거두며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잘 됐다. 이제 혼자 일어날 수 있겠지?"아이는 씩씩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를 향해 활짝 웃었다."누나 고마워요!""그래. 이제 뛰어다닐 때 조심해.""네!"아이는 해맑게 대답한 뒤,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다시 달려가기 시작했다."아, 저러다 또 넘어지면 어쩌려고."나는 아이가 여자에게 달려가 손을 붙잡는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고기부터 사러 가 볼까?"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시장 안쪽으로 걸어갔다.고기를 파는 가게는 시장
카시안의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두 손으로 입을 꽉 막아 버렸다."접근 금지! 일정한 거리 유지하세요!"나는 발걸음을 딱 멈추고 경계 태세를 갖췄다.책상에 앉아 관자놀이를 짚고 있던 카시안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지금 뭐 하는 짓이지?""뭐 하긴요. 제 입술을 지키는 중이죠.""......""저번에는 방심해서 당했지만, 두 번 다시 기습 뽀뽀 따위는 안 당할 거예요. 그러니까 미리 말씀드리는데 저한테 이상한 짓 할 생각은 아예 접으세요!"카시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착각하지 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서 부른 것뿐이다.""그거 봐요! 또 제 입술을 노리고 부른 거잖아요!""...네 입술 말고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카시안의 대답에 나는 기가 막혀 숨을 헉 내쉬었다.그럼 여태까지 내 입술이 두통을 낫게 해줬다고 믿는거야?반은 맞고 반은 틀리긴 한데 어쨌든.나는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리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후후,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방법이 있죠. 굳이 제 앵두같은 입술에 닿지 않아도 약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요!""...약이라고?"카시안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그럴 만도 하겠지.제국의 유명한 의사들도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고, 신성력을 사용한다는 사람들까지 두통을 고치지 못했다고 들었으니까."어떤 약이지?""그냥...진통제에요.영업 비밀이라 자세하게 말씀드릴 수 없지만, 딱 10분만 시간을 주세요! 금방 만들어 올 테니까!"나는 카시안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후다닥 방을 빠져나왔다.주방으로 뛰어 들어간 나는 서둘러 따뜻한 차를 한 잔 끓였다.그리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찻잔을 들었다. "...어쩔수 없어, 아이린. 뽀뽀하는 것 보다 100배 나아. 그러니 수치심 가질 필요 없어."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린 뒤, 찻 잔에 침을 퉤 뱉었다.그리고 티스푼으로 차를 열심히 저었다."으
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훨씬 일찍 눈을 떴다.평소 같았으면 이불 속에서 조금 더 뒹굴거렸겠지만 오늘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오늘 아침부터 카시안 백작의 저택에서 일하기로 했으니.나는 미리 준비해 둔 옷가지 몇 벌을 작은 가방에 넣었다.백작의 저택에서 숙식까지 제공한다고 했으니까 당장 필요한 물건은 많지 않았다.부모님과 마리에게 다녀 온다는 인사를 한 뒤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백작 저택까지 가는 길은 이미 한 번 와 봤기에 어렵지 않았다.문제는 저택에 가까워질수록 괜히 심장이 두근거린다는 것이었다.카시안 백작.잘생긴 외모에 그렇지 못한 성격을 가진 재수 없는 놈!내 입술을 두번이나 훔친 변태 자식!"아니, 오늘부터는 돈 많은 내 고용주일 뿐이야. 그러니 흥분하지 말자."나는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어느새 저택 앞에 도착한 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문을 두드렸다.똑똑.잠시 후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가진 집사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온화하게 미소를 지었다."오셨습니까? 백작님께 말씀은 전해 들었습니다.""안녕하세요!"나는 밝게 인사하며 허리를 숙였다.집사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식으로 인사 드리지요. 제 이름은 에드먼입니다. 이 저택의 집사로 일하고 있습니다.""저는 아이린이에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에드먼 아저씨!"내 말에 에드먼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저를 아저씨라고 부르시는 겁니까?""네. 이상한가요?""아닙니다. 편하신 대로 부르십시오."나는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에드먼은 곧바로 몸을 돌렸다."들어오시죠."나는 그의 뒤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먼저 내가 지낼 방을 안내 해준 에드먼은 몇 벌의 하녀복을 나에게 건네 주었다."옷은 사이즈벌로 있으니 아무거나 골라 입으셔도 됩니다.""네, 알겠습니다.""그럼 옷 갈아 입고 나오시죠. 기다리겠습니다."나는 방으로 들어가 사이
"...지금 저를 희롱한 건가요? 이건 명백히 범죄라고요!"나는 얼굴이 빨개진 채 카시안을 노려보았다.카시안은 내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오히려 상쾌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귀족을 우롱한 죄는?""...그게 지금 무슨 상관인데요?""감히 평민이 귀족의 무릎을 꿇게 했었지, 아마?""아니, 그러니까 그건...""이걸로 쌤쌤이군."쌤쌤?이 미친놈이 장난하나!"이거 경비대에 고소할 거예요!""...마음대로 해.""뭐라고요?"카시안은 정말 태연하게 내 말을 흘려들으며 다시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그리고 의자에 앉아 서랍을 열더니 안쪽을 잠시 뒤적였다.잠시 후, 카시안이 서랍 안에서 작은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그리고 작은 주머니를 내 발밑으로 던졌다.나는 얼떨결에 그것을 주워 들었다."뭔데요 이건!""열어 봐."나는 카시안을 노려본 뒤 조심스럽게 주머니를 열었다.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확인한 순간, 두 눈이 커졌다."......!"주머니 안에는 반짝이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이게 다 뭐예요?""오늘 사례금.""사례금?""그래. 덕분에 두통이 사라졌으니까."그 순간, 재수 없게 앉아 있는 카시안의 후광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나는 곧바로 카시안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감사합니다, 백작님!""......""백작님은 정말 마음이 넓으신 분이셨군요?""방금 전까지 나를 고소한다더니?""제가요? 에이, 설마요.""......"카시안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나는 최대한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손바닥을 비벼댔다."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내일부터 이곳에서 일해.""네?"나는 금화 주머니를 꼭 쥔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여기서 일하라고요?""그래.""제가 왜요?""보수는 넉넉하게 지급하지.""...넉넉이라 하심은...?"카시안은 또 굽신거리는 내 모습을 보고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릴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일당으로
"...그럼 그렇지. 내가 성녀일리가 없지."카시안 백작의 저택에서 쫓겨난 뒤, 며칠이 지났다.그날 이후 나는 한동안 깊은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처음에는 분명 자신 있었다.내 기도로 마리의 상처가 완벽하게 아물었고, 내 손가락 역시 거짓말처럼 나았으니까.그래서 나는 당연히 내가 성녀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다시 손가락을 베어내고 기도했더니 놀랍게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그저 우연이었나?'나는 피가 살짝 새어나오는 손가락을 보며 그 날의 일은 전부 우연이라고 결정 내렸다."...하아, 너무 큰 착각을 해 버렸어."나는 피 묻은 손가락을 대충 씻어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카시안은 분명 귀족을 우롱한 죄, 신성 모독죄를 들먹였다.본래대로라면 지금쯤 난 감옥에 있어야 했겠지."하지만! 지금까지 별일 없는거보니 그냥 넘어가 준다는 소리겠지?"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나는 애써 카시안 백작의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머릿속에서 지웠다.물론, 첫 키스의 기억은 내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았지만.적어도 며칠 동안은 아무 생각 없이 지냈다.--------------다시 며칠 후.나는 수확한 농작물과 약초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등에 메고 도시로 향했다.저번엔 카시안 백작의 저택으로 곧장 달려가는 바람에 공 쳤으니,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모두 팔아 버릴 생각이었다."오늘은 집중해서 다 팔아야겠어."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시장에 도착하자마자 평소 나와 안면이 있던 상인 아주머니가 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아이린! 이제 왔구나!""안녕하세요 아주머니. 무슨 일 있어요?""있지! 얼른 광장으로 가 봐!"나는 바구니를 내려놓으려다 그대로 멈췄다."광장에는 왜요?""네 얼굴이 거기 아주 크게 붙어 있거든.""...제 얼굴이?"나는 아주머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내 얼굴이 광장에 붙어 있다고?"아니, 며칠 전부터 카시안 백작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