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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Author: 쌍춘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4 08:39:25

"...그럼 그렇지. 내가 성녀일리가 없지."

카시안 백작의 저택에서 쫓겨난 뒤, 며칠이 지났다.

그날 이후 나는 한동안 깊은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처음에는 분명 자신 있었다.

내 기도로 마리의 상처가 완벽하게 아물었고, 내 손가락 역시 거짓말처럼 나았으니까.

그래서 나는 당연히 내가 성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손가락을 베어내고 기도했더니 놀랍게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우연이었나?'

나는 피가 살짝 새어나오는 손가락을 보며 그 날의 일은 전부 우연이라고 결정 내렸다.

"...하아, 너무 큰 착각을 해 버렸어."

나는 피 묻은 손가락을 대충 씻어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카시안은 분명 귀족을 우롱한 죄, 신성 모독죄를 들먹였다.

본래대로라면 지금쯤 난 감옥에 있어야 했겠지.

"하지만! 지금까지 별일 없는거보니 그냥 넘어가 준다는 소리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애써 카시안 백작의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물론, 첫 키스의 기억은 내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았지만.

적어도 며칠 동안은 아무 생각 없이 지냈다.

--------------

다시 며칠 후.

나는 수확한 농작물과 약초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등에 메고 도시로 향했다.

저번엔 카시안 백작의 저택으로 곧장 달려가는 바람에 공 쳤으니,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모두 팔아 버릴 생각이었다.

"오늘은 집중해서 다 팔아야겠어."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시장에 도착하자마자 평소 나와 안면이 있던 상인 아주머니가 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아이린! 이제 왔구나!"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무슨 일 있어요?"

"있지! 얼른 광장으로 가 봐!"

나는 바구니를 내려놓으려다 그대로 멈췄다.

"광장에는 왜요?"

"네 얼굴이 거기 아주 크게 붙어 있거든."

"...제 얼굴이?"

나는 아주머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내 얼굴이 광장에 붙어 있다고?

"아니, 며칠 전부터 카시안 백작님이 직접 여기까지 와서 널 찾더라니까?"

"...카시안 백작님이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는 불길한 기분을 애써 떨쳐내며 광장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벽 앞에 도착한 순간,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벽 한가운데에 커다란 종이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분명 내 그림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조금 어설픈 그림이기는 했지만, 누가 봐도 나를 그린 것이 분명했다.

나는 잠시 멍하니 벽보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 아래에 적힌 글을 읽었다.

[이 여자는 이 벽보를 확인하는 즉시 카시안 백작의 저택으로 올 것.]

그 아래에는 더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이 여자의 행방을 알고 있는 자는 즉시 카시안 백작의 저택으로 알릴 것. 사례는 충분히 지급함.]

"......"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얼굴을 급히 가리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사람들은 벽보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있었을 뿐, 바로 옆에 서 있는 내가 그 여자라는 사실까지는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도시 한가운데에 내 얼굴을 그려 놓고 사람들에게 내 행방을 찾고 있다.

이건 누가 봐도 날 잡겠다는 거잖아!

그 인간, 이제와서 왜 이러는건데?

나는 황급히 머리를 숙이고 천천히 광장에서 멀어졌다.

'일단 도망쳐야 해.'

결심을 내린 나는 그대로 시장으로 돌아가려던 것도 포기했다.

농작물?

약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잡히면 무슨 벌을 받을지 모르니.

나는 바구니를 등에 멘 채 사람들이 많은 길을 피해 도시의 출구를 향해 걸었다.

처음에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걸었다.

그러다가 광장이 점점 멀어지고, 도시의 성문이 보이기 시작하자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그리고 성문이 거의 눈앞에 보였을 때였다.

이제 막 도망쳤다는 안도감을 느낄 때 쯔음,

덥석!

누군가 뒤에서 내 손목을 강하게 붙잡았다.

"어마악!!"

나는 화들짝 놀라 그대로 비명을 질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설마 들킨건가?

"이거 놓으세요!"

나는 붙잡힌 손목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상대의 힘은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자, 잠깐만요! 누구신데 이러시는 거냐고요!"

"...조용히 좀 해."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순간 몸에 힘을 풀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를 붙잡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그대로 얼어붙었다.

저, 저 재수없는 얼굴은?

"...카시안 백작님?"

카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내 손목을 잡은 채 주변을 한 번 살피더니, 갑자기 나를 골목 안쪽으로 끌고 들어갔다.

"아잇, 이 손 좀 놓으라고요! 아파 죽겠네! "

"......"

"날 어디로 끌고 가는 가죠? 이제와서 죄를 묻겠다는 건가요? 참나, 뒤끝이 아주 기가막히시네요?"

"...입 좀 다물고 따라와."

카시안에게 끌려간 곳은 다름아닌 그의 저택이었다.

"설마, 날 지하 창고에 가두려고요? 하! 귀족이면 일반 시민을 막 가두고 그래도 되는 거에요?"

"...넌 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저번에 백작님이 직접 저를 지하 창고에 가두라고 했잖아요!"

카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나를 끌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기도해."

"......?"

"저번처럼."

나는 카시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결국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도를 하라고요?"

"그래. 두 번 말하게 하지마."

"싫은데요?"

내 말에 카시안은 잠시 나를 노려보았다.

"잔말 말고 기도나 해. 사례금은 충분히 줄 테니."

"아니, 하고 싶어도 못 한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지?"

"그게...그러니까..."

나는 카시안에게 예전 마리의 상처를 치료한 일, 내 손가락의 상처가 아문 일을 설명했다.

"...그래서 난 내가 성녀...인 줄 알았죠. 하지만 그건 우연이었어요. 봐요, 지금 제 손가락 상처가 낫지 않잖아요."

나는 상처 투성이인 내 손가락을 카시안에게 보여 주었다.

카시안은 잠자코 내 얘기를 듣더니, 갑자기 어깨를 들썩였다.

"...푸흡...성녀...푸흐흡."

"웃지 마요! 아무튼 기도해도 소용없으니 전 이만 가도 되겠죠?"

내가 막 돌아서려던 찰나, 카시안이 웃음을 멈추고 내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 정말 네가 키우던 개가 살아났고, 네 손가락 상처가 아물었단 말이지?"

"전 거짓말 안 해요!"

카시안은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내 손가락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러다 천천히 관자놀이에서 손을 뗐다.

"손가락에 상처가 났을 때, 뭘 했지?"

"뭘 하긴요, 당연히 기도했지."

"기도 한 다음."

"그야 당연히..."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피가 나니까 입으로 빨았죠."

내 말을 들은 카시안은 갑자기 피식 웃어 보였다.

"그래, 대충 알겠군."

"...뭘 알았다는 거죠?"

"난 분명 그때 네가 해준 기도로 두통이 잠시 멈췄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며칠 전부터 다시 두통이 시작 되더군."

"하!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죠? 그것도 다 우연일 뿐이에요."

"우연인지 아닌지, 시험해 볼 가치는 있겠어."

"...시험이라니 뭘 하려고..."

"눈 감아."

"......?"

카시안은 갑자기 한 손으로 내 눈을 가렸다.

그리고 곧,

쪽.

"......?!"

순간, 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카시안의 입술이 다시 한번 내 입술에 닿았다.

"음, 역시."

카시안은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짧게 중얼거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입술을 손으로 가린 채 뒤로 물러났다.

"뭐, 뭐, 뭐, 뭐 하는 짓이에요?"

이, 이 미친놈이!

갑자기 뽀뽀는 왜 하고 지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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