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날 밤, 저녁 식사가 끝난 뒤 나는 집 밖으로 나왔다.
오늘 하루 종일 제대로 된 일을 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괜히 마음이 찜찜했다. 결국 약초도 제대로 캐지 못했고, 돈이 될 만한 것도 거의 가져오지 못했으니까. "하아." 나는 마당에 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나에게 다가왔다. "멍멍!" "마리, 내 기분 풀어주려고?" "멍." "아이참, 얼굴은 핥지 말라니까?" 나는 마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렇게 마리와 장난을 치며 놀고 있는데 갑자기, 콰직! 멀리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뭐지?" 마리 역시 그 소리를 듣고 순식간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크게 짖기 시작했다. 장난을 칠 때 내는 짖음도 아니었고, 누군가를 반기며 내는 소리도 아니었다. 무언가를 경계하고 있었다. "마리?" 나는 마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밭 쪽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어둠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커다란 몸집과 거칠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멧돼지?" 녀석은 우리 밭 한가운데에서 농작물을 마구 짓밟고 있었다. 잘 자라던 채소들이 녀석의 거대한 발밑에서 짓이겨졌고, 흙은 사방으로 튀었다. "이게 어디서!" 나는 서둘러 괭이를 들고 앞으로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마리가 먼저 움직였다. "멍멍!!" "안돼, 마리!" 내가 말릴 틈도 없이 마리는 멧돼지를 향해 달려갔다. "멈춰! 위험해!" 하지만 이미 늦었다. 마리는 멧돼지를 향해 맹렬하게 짖으며 달려들었고,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멧돼지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꾸웨엑!" 멧돼지의 거친 울음소리가 밤공기를 찢었다. 하지만 마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마리는 멧돼지의 공격에 크게 나뒹굴었지만,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멧돼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멍! 멍멍!" "이게 무슨 소란이냐?" "어머, 세상에..." 뒤늦게 나온 아버지와 어머니도 멧돼지와 마리가 싸우는 장면에 크게 놀라셨다. 마리는 멈추지 않고 끝까지 멧돼지를 물고 늘어졌다. 잠시 후, 멧돼지는 거칠게 몸을 흔들며 다시 숲 쪽으로 몸을 돌렸다. 멧돼지가 돌아가는걸 보고 마리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마리?" 나는 숨을 멈춘 채 마리에게 서둘러 달려갔다. "마리!! 왜 그래, 정신 차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마리를 안았다. 마리는 옆구리에 큰 상처를 입고 피를 뚝뚝 흘리며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피?" 어둠 속에서도 알 수 있을 만큼 많은 피였다. "이런, 멧돼지 엄니에 당했어." "이걸 어째...아이린, 그만 마리를 보내줘야 겠구나." 부모님은 눈물을 흘리는 내 어깨를 토닥여 주며 돌아섰고, 나는 마리를 품에 꼭 끌어안은 채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제발...안 돼." 마리는 내가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낸 가족 같은 존재였다. 이렇게 허무하게 가족을 잃는다고? 나는 마리를 더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평소라면 신에게 기도하는 일 따위 거의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신...흑...이시여. 흑..." 내 목소리는 엉망이었다. 눈물과 콧물 때문에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신이시여, 제발요." 나는 두 눈을 감고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흑...마리를...흑흑...살려주세요..." 목이 메어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 마리...흑...살려주세요...흑..." 당연하게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평생 기도 한 번 제대로 하지 않던 평민의 부탁을 신이 그렇게 쉽게 들어줄 리가 없었다. 나는 마치 곧 죽을 것처럼 숨이 약해진 마리에게 얼굴을 파묻었다. "마리! 제발! 죽지마! 흐어엉..." "멍." 나는 순간 울음을 그치고 고개를 들었다. "마리?" 그리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조금 전까지 죽어가던 마리의 몸이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피를 흘리고 있던 상처가 조금씩 아물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리? 훌쩍...이게 어떻게 된거야?" 마침내 상처는 마치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처럼 완전히 사라졌다. "......?" 나는 그 신기한 광경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상처가 아문 마리의 옆구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또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마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내 품에서 떨어지더니 눈물 콧물 범벅인 내 얼굴을 핥았다. 그제서야 난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하하, 마리! 이게 꿈은 아니지? 가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방금 신에게 기도했다. 마리를 살려달라고. 그리고 마리는 살아났다. "...신이 내 기도를 들어준 거야? 설마...내가...성녀?" "멍멍!" 아니, 말도 안 된다. 그럴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진짜 신이 내 기도를 들어 줬다면? 그래서 마리가 살아난 거라면? "...그럴 가능성도 있잖아? 어떻게 생각해, 마리?" "멍멍멍!" "...맞는거 같지? 분명 내 기도로 살아난 거지? 아, 어쩜 좋아." 그날 밤,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했다. 어쩌면 난 보통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정체를 숨겨야 할지 밝혀야 할지 밤새 고민했다. 결국 기회가 있을때 정체를 밝히기로 결정하고 잠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성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 그날 밤, 내가 했던 고민은 정말 쓸데없는 고민이었지."제대로 찾아 왔군."갑작스럽게 찾아온 불청객의 등장에 남자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나 역시 묶인 채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그리고 문가에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카시안 백작님?"문을 박살내고 들어온 것은 분명 카시안이었다.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깔끔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얼굴만큼은 평소보다 훨씬 더 차가워 보였다."넌 뭐야?""여긴 어떻게 들어왔지?"남자들은 갑자기 나타난 카시안을 경계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 남자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카시안의 앞을 막아섰다."야, 못 들었어? 여긴 어떻게 들어왔냐고.""내 두통약을 찾으러 왔다.""뭐?""지금 기분이 좋지 않으니, 얌전히 비키는 게 좋을 거야."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나도 똑같이 헛웃음을 터뜨렸다.두통약을 찾으러 왔다니, 나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이 자식이 뭐라는...?"퍽!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카시안의 주먹이 남자의 얼굴을 정확하게 가격했다."커헉!"주먹에 맞은 남자는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카시안은 쓰러진 남자를 한 번 내려다보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목을 가볍게 털었다.그러자 뒤에 있던 남자들이 동시에 무기를 꺼내 들었다."이 새끼가!""죽고 싶나?""잠깐, 잠깐만요!"나는 묶인 채로 다급하게 소리쳤다."저 사람 카시안 백작님이에요! 귀족이라고요!""그래서 뭐 어쩌라고!"남자 하나가 소리치며 카시안을 향해 달려들었다.카시안은 상대가 휘두르는 칼을 가볍게 피한 뒤, 그대로 남자의 팔을 붙잡고 비틀었다."아악!"콰당!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고꾸라졌다."...와우."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그동안 성격 더러운 얌전한 귀족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잘 싸웠다.남자들은 하나둘 카시안을 향해 달려들었다.하지만 카시안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다가오는 남자의 공격을 피하고, 팔을 꺾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뜨
카시안 백작의 저택에서 생활한 지도 벌써 열흘이 지났다.나는 카시안의 식사 준비를 위해 시장을 돌아다니며 필요한 식재료를 하나씩 바구니에 담고 있었다."야채는 이 정도면 됐고...고기랑 과일만 사면 되겠다."나는 바구니 안을 확인하며 시장 안쪽으로 걸어갔다.그때였다."와하하하!"콰당-!갑자기 어린 남자아이가 내 옆을 쌩 달려가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아이는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렸다."으아아앙!!"아이가 넘어져 울고 있었지만, 시장 사람들은 누구 하나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그저 지나가다가 한 번씩 힐끔 바라볼 뿐이었다.나는 그 광경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아이에게 다가갔다."괜찮니?""흐어엉...아파요..."아이의 무릎에서는 피가 주르륵 흘러나오고 있었다."잠깐만 기다려. 누나가 안 아프게 해줄게."나는 아이를 조심스럽게 앉힌 후,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그리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손바닥에 침을 뱉고 아이의 무릎에 올렸다.그 다음, 아이의 시선을 끌기 위해 한 손을 허공에서 요란하게 움직였다."짜라라라란~ 슈우우우욱! 호롤라이유!!"잠시 후, 조금 전까지 아이의 무릎에 선명하게 남아 있던 상처가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어?"아이는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보더니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누나! 안 아파요!"나는 슬쩍 손을 거두며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잘 됐다. 이제 혼자 일어날 수 있겠지?"아이는 씩씩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를 향해 활짝 웃었다."누나 고마워요!""그래. 이제 뛰어다닐 때 조심해.""네!"아이는 해맑게 대답한 뒤,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다시 달려가기 시작했다."아, 저러다 또 넘어지면 어쩌려고."나는 아이가 여자에게 달려가 손을 붙잡는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고기부터 사러 가 볼까?"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시장 안쪽으로 걸어갔다.고기를 파는 가게는 시장
카시안의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두 손으로 입을 꽉 막아 버렸다."접근 금지! 일정한 거리 유지하세요!"나는 발걸음을 딱 멈추고 경계 태세를 갖췄다.책상에 앉아 관자놀이를 짚고 있던 카시안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지금 뭐 하는 짓이지?""뭐 하긴요. 제 입술을 지키는 중이죠.""......""저번에는 방심해서 당했지만, 두 번 다시 기습 뽀뽀 따위는 안 당할 거예요. 그러니까 미리 말씀드리는데 저한테 이상한 짓 할 생각은 아예 접으세요!"카시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착각하지 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서 부른 것뿐이다.""그거 봐요! 또 제 입술을 노리고 부른 거잖아요!""...네 입술 말고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카시안의 대답에 나는 기가 막혀 숨을 헉 내쉬었다.그럼 여태까지 내 입술이 두통을 낫게 해줬다고 믿는거야?반은 맞고 반은 틀리긴 한데 어쨌든.나는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리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후후,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방법이 있죠. 굳이 제 앵두같은 입술에 닿지 않아도 약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요!""...약이라고?"카시안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그럴 만도 하겠지.제국의 유명한 의사들도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고, 신성력을 사용한다는 사람들까지 두통을 고치지 못했다고 들었으니까."어떤 약이지?""그냥...진통제에요.영업 비밀이라 자세하게 말씀드릴 수 없지만, 딱 10분만 시간을 주세요! 금방 만들어 올 테니까!"나는 카시안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후다닥 방을 빠져나왔다.주방으로 뛰어 들어간 나는 서둘러 따뜻한 차를 한 잔 끓였다.그리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찻잔을 들었다. "...어쩔수 없어, 아이린. 뽀뽀하는 것 보다 100배 나아. 그러니 수치심 가질 필요 없어."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린 뒤, 찻 잔에 침을 퉤 뱉었다.그리고 티스푼으로 차를 열심히 저었다."으
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훨씬 일찍 눈을 떴다.평소 같았으면 이불 속에서 조금 더 뒹굴거렸겠지만 오늘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오늘 아침부터 카시안 백작의 저택에서 일하기로 했으니.나는 미리 준비해 둔 옷가지 몇 벌을 작은 가방에 넣었다.백작의 저택에서 숙식까지 제공한다고 했으니까 당장 필요한 물건은 많지 않았다.부모님과 마리에게 다녀 온다는 인사를 한 뒤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백작 저택까지 가는 길은 이미 한 번 와 봤기에 어렵지 않았다.문제는 저택에 가까워질수록 괜히 심장이 두근거린다는 것이었다.카시안 백작.잘생긴 외모에 그렇지 못한 성격을 가진 재수 없는 놈!내 입술을 두번이나 훔친 변태 자식!"아니, 오늘부터는 돈 많은 내 고용주일 뿐이야. 그러니 흥분하지 말자."나는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어느새 저택 앞에 도착한 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문을 두드렸다.똑똑.잠시 후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가진 집사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온화하게 미소를 지었다."오셨습니까? 백작님께 말씀은 전해 들었습니다.""안녕하세요!"나는 밝게 인사하며 허리를 숙였다.집사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식으로 인사 드리지요. 제 이름은 에드먼입니다. 이 저택의 집사로 일하고 있습니다.""저는 아이린이에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에드먼 아저씨!"내 말에 에드먼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저를 아저씨라고 부르시는 겁니까?""네. 이상한가요?""아닙니다. 편하신 대로 부르십시오."나는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에드먼은 곧바로 몸을 돌렸다."들어오시죠."나는 그의 뒤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먼저 내가 지낼 방을 안내 해준 에드먼은 몇 벌의 하녀복을 나에게 건네 주었다."옷은 사이즈벌로 있으니 아무거나 골라 입으셔도 됩니다.""네, 알겠습니다.""그럼 옷 갈아 입고 나오시죠. 기다리겠습니다."나는 방으로 들어가 사이
"...지금 저를 희롱한 건가요? 이건 명백히 범죄라고요!"나는 얼굴이 빨개진 채 카시안을 노려보았다.카시안은 내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오히려 상쾌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귀족을 우롱한 죄는?""...그게 지금 무슨 상관인데요?""감히 평민이 귀족의 무릎을 꿇게 했었지, 아마?""아니, 그러니까 그건...""이걸로 쌤쌤이군."쌤쌤?이 미친놈이 장난하나!"이거 경비대에 고소할 거예요!""...마음대로 해.""뭐라고요?"카시안은 정말 태연하게 내 말을 흘려들으며 다시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그리고 의자에 앉아 서랍을 열더니 안쪽을 잠시 뒤적였다.잠시 후, 카시안이 서랍 안에서 작은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그리고 작은 주머니를 내 발밑으로 던졌다.나는 얼떨결에 그것을 주워 들었다."뭔데요 이건!""열어 봐."나는 카시안을 노려본 뒤 조심스럽게 주머니를 열었다.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확인한 순간, 두 눈이 커졌다."......!"주머니 안에는 반짝이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이게 다 뭐예요?""오늘 사례금.""사례금?""그래. 덕분에 두통이 사라졌으니까."그 순간, 재수 없게 앉아 있는 카시안의 후광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나는 곧바로 카시안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감사합니다, 백작님!""......""백작님은 정말 마음이 넓으신 분이셨군요?""방금 전까지 나를 고소한다더니?""제가요? 에이, 설마요.""......"카시안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나는 최대한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손바닥을 비벼댔다."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내일부터 이곳에서 일해.""네?"나는 금화 주머니를 꼭 쥔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여기서 일하라고요?""그래.""제가 왜요?""보수는 넉넉하게 지급하지.""...넉넉이라 하심은...?"카시안은 또 굽신거리는 내 모습을 보고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릴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일당으로
"...그럼 그렇지. 내가 성녀일리가 없지."카시안 백작의 저택에서 쫓겨난 뒤, 며칠이 지났다.그날 이후 나는 한동안 깊은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처음에는 분명 자신 있었다.내 기도로 마리의 상처가 완벽하게 아물었고, 내 손가락 역시 거짓말처럼 나았으니까.그래서 나는 당연히 내가 성녀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다시 손가락을 베어내고 기도했더니 놀랍게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그저 우연이었나?'나는 피가 살짝 새어나오는 손가락을 보며 그 날의 일은 전부 우연이라고 결정 내렸다."...하아, 너무 큰 착각을 해 버렸어."나는 피 묻은 손가락을 대충 씻어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카시안은 분명 귀족을 우롱한 죄, 신성 모독죄를 들먹였다.본래대로라면 지금쯤 난 감옥에 있어야 했겠지."하지만! 지금까지 별일 없는거보니 그냥 넘어가 준다는 소리겠지?"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나는 애써 카시안 백작의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머릿속에서 지웠다.물론, 첫 키스의 기억은 내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았지만.적어도 며칠 동안은 아무 생각 없이 지냈다.--------------다시 며칠 후.나는 수확한 농작물과 약초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등에 메고 도시로 향했다.저번엔 카시안 백작의 저택으로 곧장 달려가는 바람에 공 쳤으니,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모두 팔아 버릴 생각이었다."오늘은 집중해서 다 팔아야겠어."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시장에 도착하자마자 평소 나와 안면이 있던 상인 아주머니가 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아이린! 이제 왔구나!""안녕하세요 아주머니. 무슨 일 있어요?""있지! 얼른 광장으로 가 봐!"나는 바구니를 내려놓으려다 그대로 멈췄다."광장에는 왜요?""네 얼굴이 거기 아주 크게 붙어 있거든.""...제 얼굴이?"나는 아주머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내 얼굴이 광장에 붙어 있다고?"아니, 며칠 전부터 카시안 백작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