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그때였다. 대공저의 정문에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와 기사들의 구령 소리가 침실 안까지 스며들었다. 그건 정돈된 공포이자, 거부할 수 없는 질서의 등장이었다.“황태자 전하께서 당도하셨습니다!”엘라엔은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르세인이 왔다. 그는 자신이 가장 무너져 있을 때, 자신의 가장 연약한 틈새를 논리로 메우려는 것이 분명했다.엘라엔은 깨진 거울 조각을 손에 꽉 쥐었다. 날카로운 단면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붉은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녀는 통증보다 더 큰 공포를 느끼며 굳게 닫힌 문을 응시했다. 르세인은 곧 이 방 안으로 들어와 자신의 우울을 난도질할 것이 분명했다.베르제 대공저의 복도를 울리는 구둣발 소리는 규칙적이고 단호했다. 공작 부부의 환대도, 귀족들의 겁에 질린 시선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마침내 엘라엔의 침소 앞에 멈춰 선 르세인은 문 앞을 가로막고 선 하르만과 루시안을 내려다보았다.하르만은 주먹을 꽉 쥐었으나 르세인의 눈에 서린 서늘한 살기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르세인은 거침없이 문고리를 돌렸다.방 안은 얼음장 같은 냉기와 지독한 적막뿐이었다. 르세인은 침대 밑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깨진 거울 조각을 쥐고 있는 엘라엔을 발견했다. 그녀의 하얀 손가락 사이로는 검붉은 피가 새어 나와 대리석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그 처참한 광경을 목격한 르세인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건 동정심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완벽한 수집품에 흠집이 난 것에 대한 극심한 불쾌감이었다. “영애. 이 무슨 추태입니까.”르세인은 다가와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피가 흐르는 손을 거칠게 낚아채 깨진 거울 조각을 빼앗아 던져버렸다. 조각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구석으로 처박혔다.엘라엔은 초점 없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루비빛 눈동자는 이미 눈물조차 말라 황폐한 사막 같았다. “…할아버지는 제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분이었어요. 황태자 전하… 왜 이곳까지 와서 제 슬픔까지 제 마음대로
베르제 대공저의 복도에는 검은 의복을 입은 조문객들의 구둣발 소리만이 낮게 울렀다. 죽음은 평등하다지만 제국의 거목이 쓰러진 자리에 남은 파장은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진심 어린 애도의 시간이었으나, 라안느 공작 부부에게 이곳은 무너진 잔해 속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재계산해야 하는 냉혹한 전장이었다.엘라엔이 식음을 전폐하고 침소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대공저의 별채에서는 날 선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라안느 공작 에드먼은 창밖으로 내리는 진눈깨비를 응시하며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서늘한 한숨을 내뱉었다. “베르제 대공께서 이 시기에 숨을 거두실 줄은 몰랐군. 황태자비 책봉 직후라니. 타이밍이 지독하게 좋지 않아.”에드먼의 목소리에는 슬픔 대신, 르세인과의 혼사가 지연된 것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이 서려 있었다. 그에게 블러드 대공은 그저 자신의 딸을 황궁으로 보내는 길을 가로막은 거대한 장애물일 뿐이었다.“제 말이 그 말이에요, 공작. 반디아 부인들이 뒤에서 뭐라고 수군거리는지 아세요? 길조가 아니네 어쩌네 하며 입방아를 찧고 있다고요! 공작, 지금 엘라엔이 저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당신도 알잖아요.”이사벨라는 신경질적으로 손수건을 비틀어 쥐었다. 그녀는 화려한 보석 대신 검은 베일을 썼지만 그 아래 감춰진 눈동자는 슬픔 대신 조급함으로 가득했다.이사벨라에게 이곳은 공작의 전처가 나고 자란 기분 나쁜 공간일 뿐이었다.죽은 대공 또한 자신을 라안느 가문의 안주인으로 단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던 오만한 노인이었으니 그녀에게 애도란 사치였다.“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조문을 오신다는데도 방 안에서 꼼짝도 안 하다니요. 귀족들이 뒤에서 뭐라고 하겠어요? 제 엄마를 닮아 몸이 약해 빠졌다고 비웃을 게 뻔하다고요.”이사벨라는 제 엄마라는 단어를 뱉으며 입술을 뒤틀었다.그녀는 엘라엔의 생모가 가졌던 그 고결한 혈통에 늘 자격지심을 느꼈다. 이제 그 혈통의 뿌리인 블러드 대공이 사라졌으니, 이사벨라에게 남은 목표는 엘라엔을 하루빨리 황
마레즈나의 화려했던 등불이 꺼진 자리를 채운 것은 뼛속까지 시린 겨울을 닮은 적막이었다.베르제 대공 블러드의 부고는 제국의 모든 화려함을 잿빛으로 덮어버렸다.제국의 수도 카르네티아를 벗어나는 마차의 바퀴가 거친 흙길을 구를 때마다 겨울의 삭풍이 창을 두드렸다.루비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급하게 걸친 검은 드레스는 엘라엔의 피부 위에서 겉돌았다.제국의 거대한 거목. 베르제 대공의 죽음은 그녀가 쌓아 올린 모든 야망과 방어기제를 단숨에 무너뜨리는 직격 타였다.베르제 대공저의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엘라엔을 맞이한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조문객들의 행렬이 아니라 가문 전체를 뒤덮은 거대하고도 무거운 침묵이었다.대접견실 중앙, 차갑게 식은 대리석 제단 위에 누워 있는 블러드를 마주한 순간 엘라엔은 자신이 준비해온 모든 가면이 죄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하… 할아버지…!”엘라엔은 비틀거리며 제단 앞으로 달려가 엎어졌다. 차가운 대공의 손을 부여잡았으나 늘 뜨겁게 자신을 가르치던 그 온기는 어디에도 없었다.“일어나 보세요……. 저를… 저를 더 가르쳐 주셔야죠. 이 지옥에 저를 혼자 두고 어딜 가시는 거예요!”루비빛 눈동자에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눈물이 대공의 굳은 손등 위로 떨어졌다.엘라엔은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통곡했다. 르세인 앞에서도, 황후 앞에서도 단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던 그녀는 수많은 눈이 도사리는 장례식 한가운데서 처절하게 무너져 내렸다.그건 사교계의 영악한 꽃이 아닌, 유일한 버팀목을 잃은 가련한 여인의 절규였다.옆을 지키던 블러드의 아들들, 즉 엘라엔의 외삼촌들이 다급히 엘라엔을 부축했다. 전장을 누비던 강인한 사내들이었으나 조카의 처절한 오열 앞에서는 그들 역시 눈시울을 붉힐 뿐이었다.“엘라엔…. 진정해라. 이런 네 모습을 보시면 마음 편히 떠나지 못하실거야.”“놔주세요, 삼촌. 저는 이제…! 이제 누구를 의지하나요!”엘라엔은 삼촌들의 품 안에서 발버둥 치다 끝내 정신을 잃었다. 극도의 심리적 압박과 말로 표현 못
왈츠의 선율이 서서히 잦아들고, 르세인이 엘라엔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마지막 동작을 마무리했을 때였다. 연회장 정문을 지키던 황실 근위대 기사들이 일제히 창을 바닥에 내리쳤다. 콰앙!커다란 금속음이 홀의 분위기를 뒤흔들었다. 그 소리는 이 제국의 진정한 안주인이자, 르세인의 위대함을 설계한 황후 로잘린의 등장을 알리는 고귀한 굉음이었다.연회장의 황금 문이 활짝 열리자, 시린 바람과 함께 찬란한 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황후 로잘린은 제국의 국교에서 묘사되는 승리의 여신 그 자체였다.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태양빛을 녹여 짠 듯한 황금 실로 뒤덮여 있었고, 머리 위에는 수많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황관이 위태로울 만큼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엘레니르의 영광이시여!”귀족들은 일제히 무릎을 굽혔다. 엘라엔 또한 르세인의 옆에서 예의를 갖췄다.황후의 발걸음이 대리석 바닥을 울릴 때마다 그녀가 두른 최고급 모피 망토가 바닥을 쓸며 위압감을 자아냈다.황후는 단상 위로 올라가 르세인과 엘라엔 앞에 섰다. 그녀의 시선은 아들인 르세인에게 머무는가 싶더니, 곧바로 엘라엔의 목에 걸린 푸른 사파이어로 향했다.“참으로 아름답군요, 라안느 양. 황태자가 고른 루비와 내가 하사한 사파이어가 제국의 운명을 노래하고 있어.”황후의 목소리는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 우아했으나 그 안에는 거역할 수 없는, 지고의 권위가 서려 있었다.그녀는 엘라엔의 손을 잡아 부드럽게 일으켜 세웠다.“오늘, 이 자리에서 선포합니다. 라안느 양은 이제 황태자의 정식 약혼녀이자, 엘레니르 제국의 차기 안주인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이 결합은 신의 논리이자 제국의 축복이니라.”황후의 선언이 떨어지자 연회장은 환호성과 박수 소리로 터져 나갈 듯 진동했다.르세인은 만족스러운 듯 엘라엔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그녀를 자신의 소유물로서 대중 앞에 전시했다.엘라엔은 그 열기 속에서 가면 같은 미소를 지었지만 속으로는 대공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그녀는 지금 제국에서 가장 행
“오, 엘라엔! 이 얼마나 완벽한 모습이니!”화려하게 치장한 공작 부인 이사벨라가 방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녀는 엘라엔의 드레스에 박힌 루비들을 만지며 황홀경에 빠진 듯했다.이사벨라에게 오늘은 반디아 연맹 부인들의 머리 위에서 군림할 수 있는 대관식과 같았다.“오늘 밤이면 제국의 모든 귀족이 네 앞에 무릎을 꿇겠지. 네 아버지도 이미 대연회장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황실 근위대를 직접 보내셨지 뭐니. 마레즈나 전체가 황태자 전하의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고!”이사벨라는 들떠서 긴 말을 쏟아냈지만 엘라엔은 그 목소리를 잡음처럼 흘려보냈다. 이사벨라의 욕망은 너무나 투명해서 오히려 저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가야겠어요, 어머니. 황태자 전하께서 기다리실 테니.”엘라엔은 차갑게 미소 지으며 부채를 펼쳤다. 부채의 깃털이 초겨울의 서늘함을 가르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그녀가 방을 나서는 순간, 복도에 도열해 있던 르세인의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높이 치켜들며 경례를 올렸다. 거대한 중앙 홀은 오늘 밤 제국의 모든 빛을 삼킨 듯 화려했으나 그 화려함은 살을 에는 한기보다 더 예리하게 날이 서 있었다.대리석 바닥 위로 쏟아지는 수십 개의 샹들리에 불빛은 연회장을 가득 채운 귀족들의 탐욕스러운 시선과 부딪혀 날카로운 파편으로 부서졌다.엘라엔은 거대한 황금빛 문 앞에 멈춰 섰다. 무거운 문이 열리기 직전, 그녀는 마지막으로 가슴속 가장 깊은 방에 빗장을 걸었다. 그곳에는 가을 내내 묻혀온 카시안의 온기가 숨겨져 있었다. 이제 문이 열리면 그녀는 누구의 진심도 침범하지 못할 완벽한 거울이 되어야 했다.육중한 문이 양옆으로 밀려나며 전례관의 외침이 홀의 정적을 갈랐다.“라안느 공작가의 영애, 엘라엔 폰 라안느 입장입니다!”홀을 메우고 있던 귀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엘라엔은 천천히 계단 위에서 발을 뗐다. 그녀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루비가 수없이 박힌 드레스 자락이 물결처럼 일렁이며 바닥을 훑었다. 귀족들의
대공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섞인 듯 거칠었다. 엘라엔은 무릎을 굽혀 블러드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했다.“황후 폐하의 총애를 거절할 명분이 없었어요. 할아버지. 아시다시피 전하께서는 이제 황태자가 되셨으니까요….”베르제 대공은 마른 기침을 토해내며 엘라엔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의 눈이 엘라엔의 루비빛 눈동자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건 혈육을 향한 걱정이라기보다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집념에 가까웠다.“잘 듣거라, 엘라엔. 황태자 전하는 감정조차 논리로 치환해버리는 정교한 기계와 같은 분이다. 너를 얻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네가 아름다워서가 아니야. 자신의 세상을 비춰줄, 흠집 없는 유일한 거울이 필요하기 때문이지.”블러드의 손가락이 엘라엔의 뺨을 타고 내려와 목에 걸린 사파이어를 거칠게 움켜쥐었다.“황태자 앞에서는 진심을 보이지 말거라. 사랑이라는 그런 비논리적인 단어는 그분에게 네 약점을 잡아달라고 구걸하는 꼴일 것이니. 너를 소유하려 할수록 넌 그분이 보고 싶어 하는 모습으로 네 속을 텅 비워내야 해.”엘라엔은 숨을 들이켰다. 블러드의 말은 카시안이 주었던 위로와는 정반대의 지점에 있었다. 그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버리고 오직 권력의 정점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계가 되라는 선언 같았다.“네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지하실을 파거라. 그리고 그곳에 너의 진실한 증오와 설렘을 가두어둬. 황태자에게는 오직 그분이 설계한 완벽한 황태자비의 껍데기만을 보여주는 거다. 그분이 네 영혼까지 가졌다고 착각하게 만들 거라. 착각이 깊어질수록 그분은 네가 만든 논리의 덫에 스스로 발을 담글 테니까.”블러드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낮게 읊조렸다. “소유당하는 척하며 그분의 세계를 잠식하거라. 사냥감이 사냥꾼의 목을 물어뜯는 유일한 방법은 사냥꾼의 품속으로 가장 깊숙이 파고드는 것뿐이다. 잊지 말거라. 베르제의 핏줄은 굴복하는 법을 배우지 않아. 오직 굴복시키는 법만을 배울 뿐이지.”블러드의 가르침은 엘라엔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