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거실 분위기는 숨 막힐 정도로 무거웠다.문중엽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는 저울질하고 있었다.“할아버지, 당시 분명 말씀하셨죠. 강찬 씨 일은 제가 맡아서 진실을 밝혀내라고요.”그런데 이제 진실이 눈앞에 드러나자 문중엽은 망설이고 있었다.성하린은 우스웠다.그리고 문강찬이 안쓰러웠다.그동안 문강찬이 문산그 룹을 위해 만들어낸 가치가 얼마나 컸던가.하지만 그것조차 결국 이른바 혈육의 정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문성환은 다급해졌다.“성하린, 너랑 문강찬은 이미 이혼했잖아.”그는 일부러 그 사실을 강조했다.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문강찬은 성하린에게 잘해준 적도 없고, 오히려 깊은 상처만 줬는데 왜 아직도 문강찬 편을 드는지 알 수 없었다.성하린은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그녀와 문강찬은 이미 이혼했고, 그녀 역시 이런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들은 그녀의 아이들을 해쳤다.“우리에겐 공동의 아이가 있어요. 성지우라고 해요.”이혼했어도 두 사람을 이어주는 끈은 여전히 존재했다.문중엽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문서현은 느릿하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 아이는 성씨 성이잖아.”성하린은 문서현과 문성환이 어떤 태도를 보이든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문중엽에게 물었다.“저와 단둘이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그제야 문중엽이 고개를 들었다.“서재로 가자.”“아빠.”문서현이 말리려 했다.하지만 문중엽은 무심하게 딸을 한 번 바라볼 뿐, 흐릿한 눈동자 속에는 싸늘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문서현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서재 안.문중엽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하린아, 네 뜻은 알고 있다.”성하린은 창가로 걸어가 바깥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제 뜻을 알고 계시면서도 결국 그 사람을 감싸시겠다는 거군요. 그렇죠?”“나는 내가 죽을 때 곁을 지켜줄 사람이 있었으면 한다.”“그런 아들을 두고 계시니, 어르신 돌아가시기 전에 저랑 지우가 먼저 죽겠어요.”성하린은 비웃듯 입꼬리를
문성환도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증거도 증인도 다 있는데 아직도 변명해?”문중엽이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들고 문성환을 내리쳤다.문성환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아빠, 오빠는...”“너는 입 다물어.”문중엽이 딸을 노려봤다.문서현은 더는 말을 하지 못했다.문성환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아버지, 전 그냥 그 애가 병원에 좀 더 오래 있길 바랐던 것뿐이에요. 죽일 생각은 없었어요.”겁에 질린 그는 결국 모든 걸 털어놓기 시작했다.문서현이 말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다행히 그녀는 미리 문성환에게 입단속을 시켜두었고, 문성환도 그녀를 끌어들일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하지만 연기는 해야 했다.“오빠, 정말 오빠가...”그녀의 충격받은 하는 모습을 보며 문성환은 주먹을 꽉 쥐었다.지금 와서야 자신이 문서현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아버지.”문성환은 무릎을 꿇은 채 아버지를 올려다봤다.“제가 순간 욕심에 눈이 멀었어요. 잘못했어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나한테 기회를 달라고 하는데, 너는 강찬에게 기회를 줬느냐?”문중엽이 엄하게 호통쳤다.너무 흥분한 탓에 다시 기침까지 터져 나왔다.“문씨 가문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은 강찬이었어. 그런데 네가 그 아이를 죽였어. 그럼 이제 누가 그 자리를 대신할 건데? 아니면 네가 그 자리를 감당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 이 멍청한 놈아!”문중엽은 속이 뒤집힐 정도로 화가 났다.어쩌다 이렇게 자기 잘난 줄만 아는 멍청한 자식을 낳았는지 한탄스러웠다.문성환은 고개를 숙인 채 꾸중을 들으며 감히 대꾸조차 못 했다.그저 아버지가 화를 다 내고 나면 일을 적당히 덮어주길 바랐다.하지만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성하린이 나타났다.성하린은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문중엽의 꾸짖는 소리를 들었다.답답함과 분노, 그리고 깊은 무력감이 섞인 목소리였다.그녀는 문가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문중엽이 한참을 꾸짖다가 지친 듯 멈추자, 그제야 문서
성지우와 진건우는 성하린의 약점이었다.그녀는 예전에 아이들이 납치당했던 일을 떠올렸다.사실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그래서 문중엽이 문강찬의 일을 조사해 달라고 했을 때 승낙했다.“그때 지우가 납치된 일도 그 사람들과 관련 있어.”문강찬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이번엔 두 아이를 그냥 놔줬지만 다음번에도 그럴까? 다음에도 손을 봐줄 거로 생각해?”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성하린의 마음을 깊게 찔렀다.성하린은 누가 범인인지 짐작하고 있었지만 증거가 없었다.그녀 혼자서는 아이들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었다.문강찬은 재촉하지 않고 그녀가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기를 기다렸다.2분쯤 지나서야 성하린은 마침내 고개를 들어 문강찬을 바라봤다.“꼭 나여야 해?”그에게는 분명 더 많은 선택지가 있을 터였다.“너 말고는 못 믿겠어.”문강찬은 단호했다.결국 성하린은 승낙했다.감동한 문강찬이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 맞추려 했지만, 성하린은 피했다.그녀의 눈빛은 차갑고 감정이라고는 전혀 없었다.“우리 관계는 협력 관계일 뿐이야.”그녀는 미리 선을 그었다.문강찬은 순순히 받아들였다.“내가 경솔했어.”그는 먼저 손을 놓아주고 그녀를 거실 안으로 들인 뒤, 문을 열어 오창윤을 들여보냈다.성하린을 마주한 오창윤은 조금 어색해했다.“성하린 씨.”문강찬이 말했다.“오창윤, 하린이 곁에 경호원 한 명 붙여.”“한 명이요?”“정확히는 두 명이지. 하지만 한 자리는 내가 맡을 거야.”문강찬은 성하린을 직접 곁에서 지켜야 했다.오창윤은 이해하고는 서둘러 준비하러 갔다.심지어 집안의 고용인들까지 내보냈다.지금 모든 사람의 눈에는 문강찬이 이미 죽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다.그리고 식사는 오창윤이 직접 가져다주기로 했다.성하린은 그런 배치에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성하린은 무심히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처리해야 할 서류들을 넘겨봤다.문강찬은 그녀의 옆에 앉아 조용히 내용을 설명해 주었
성하린은 창밖을 바라봤다.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그 질문은 오 비서님이 묻는 거예요? 아니면 그 사람이 시킨 거예요?”오창윤은 표정이 굳었다. 놀라기도 하고 찔리기도 한 그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성하린 씨...”성하린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오 비서님이 준 서류에 표기한 그 상세한 메모들은 전부 그 사람이 직접 적은 거죠? 제 말이 틀렸나요?”오창윤은 할 말을 잃었다.차는 해오름 앞에 멈춰 섰다.성하린은 차에서 내려앉으러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잠시 서 있었다.어제까지만 해도 그를 위해 눈물 흘렸다는 생각이 들자 스스로가 우스워졌다.그는 그녀를 완벽하게 속이고 있었다.그 상세한 메모를 보지 못했다면 아마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문강찬은 죽지 않았고, 모든 건 그가 일부러 꾸민 일이었다.그녀는 발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짐을 챙겨 떠날 생각이었다.하지만 막 들어서자마자 뒤따라 들어온 남자가 품에 끌어안았다.문가의 어스름한 불빛 아래, 남자의 얼굴에는 감춰지지 않는 미소가 떠올랐다.“하린아.”성하린은 그를 알아봤다.아침에 함께 나갔던 운전기사였다.그는 계속 그녀의 곁에 있었다.성하린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 차갑게 올려다봤다.“재밌어?”문강찬은 그녀를 더 꼭 끌어안았다.“일부러 숨기려던 건 아니었어.”사실 그는 적당한 때가 되면 그녀에게 말할 생각이었다.다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린아, 미안해.”그는 사과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은 달콤함으로 가득했다.그녀가 자신을 위해 울어줬다는 건 마음속에 아직 자신의 자리가 있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성하린은 손으로 그의 몸을 밀어내며 최대한 거리를 두었다.그녀는 이미 다 눈치챘다.그래서 일부러 문도윤과 식사했고, 오창윤에게도 서류 이야기를 꺼냈다.문강찬은 생각보다 훨씬 침착하지 못했다.“살아 있다면 이런 일은 직접 처리해.”그녀에겐 그럴 자격도 의무도 없었다.문강찬의 손가락이 그녀의 눈가를 스쳤다.
성하린은 문중엽이 문강찬의 일을 자신에게 맡긴 건 문서현과 문성환을 경계하고 있다는 말이라 생각했다.그래서 그녀의 대답에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는 문서현과 문성환을 힐끔거렸다.문강찬이 사라진 지금, 가장 유력한 후보는 바로 저 두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문서현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어딘가 차가운 기색이 섞여 있었다.“성하린 씨도 잘 알고 있군요. 어르신이 굳이 성하린 씨를 부르지만 않았어도 여긴 성하린 씨를 반기지 않았을 거예요.”그녀는 성하린이 들고 있는 서류를 바라봤다.생각해보면 답은 뻔했다. 오창윤이 미리 준비를 해줬으니 저렇게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성하린은 미소를 지으며 문서현의 도발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그럼 직접 할아버지께 말씀하시죠.”그녀의 뒤에는 어르신이 계셨다.문서현이 더는 말하지 못하자 문성환이 분위기를 풀며 말했다.“성하린 씨, 서현이는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에요. 다들 더 나은 미래와 발전을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거예요.”성하린은 서류만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순간, 회의실 문이 열리며 문도윤이 들어왔다.그는 성하린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성하린, 정말 너였구나.”문서현이 눈살을 찌푸렸다.“아는 사이야?”문도윤은 우아하게 두 손을 펼쳤다.“제가 전에 말했던 아주 재능 있는 조향사가 바로 이 사람입니다. 성하린 씨, 연구개발팀에 합류하지 않을래요?”그의 열정적인 권유에 성하린은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문도윤은 다시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지우는 잘 지내? 본지도 오래됐네. 그 꼬마가 나한테 전화도 안 해.”겉으로 보기엔 성하린과 문도윤은 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았다.성하린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의 말에 맞장구쳤다.“지금은 오빠가 생겨서 나보다도 오빠만 따라다녀.”문도윤은 한숨을 쉬었다.“정 없는 꼬마 같으니.”성하린은 시간을 확인하고 말했다.“같이 식사할래?”“좋아.”두 사람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듯
“조사에 결과에 따르면, 경찰은 약물이 잘못 투여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어요. 아마 간호사가 교대하는 과정에서 약을 잘못 바꾼 것 같아요.”‘약을 잘못 바꿨다고?’성하린은 그 결과를 인정할 수 없었다.“강찬 씨가 있던 병실은 최고급 병실이었어요. 다른 환자도 없었는데 간호사가 어떻게 약을 잘못 준비하겠어요?”오창윤도 생각해보니 확실히 이상했다.하지만 현재의 초기 조사 결과는 그랬다.“조제부터 주사까지, 약물을 접한 사람을 전부 조사했어요?”성하린이 물었다.“전부 조사했어요. 아직은 수상한 점이 발견되지 않았고요.”오창윤은 서류를 성하린에게 건넸다.“그리고 그룹 고위층도 전부 이 일을 알게 됐어요. 상황이 좋지 않아요.”성하린은 눈썹을 치켜들었다.“그건 회장님께 가서 말씀드려야죠.”그녀는 거래 하나만 해도 수백억 원이 오가는 상장 그룹을 관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오창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회장님께서 모든 결정을 성하린 씨께 맡기라고 하셨습니다.”성하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야. 할아버지께서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사실 성하린 씨,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룹 운영 시스템은 이미 안정적으로 자리 잡혀 있어서 당장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오창윤은 성하린을 안심시키려 했다.“다만 이사회 사람들 앞에는 직접 모습을 드러내셔야 해요.”문강찬을 대신해서 말이다.성하린은 지금 작은 향수 회사를 직접 운영하고 있었기에, 경영이라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점점 체감하고 있었다.그녀는 얼굴을 내밀 자격조차 없는 자신의 처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오창윤이 서류 한 부를 건넸다.“이건 문 대표님이 생전에 결재하셨던 문서예요. 몇 군데 수정이 필요한 부분이 있는데, 전부 표시해 두었어요. 그때 가서 보고 질문만 하시면 돼요.”성하린이 눈썹을 치켜들었다.“꼭 제가 가야 해요?”지금 그녀는 문강찬의 전처라는 입장으로, 그를 한 번 보러 와준 것만으로도 이미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
‘약혼식... 그래, 성예빈과 약혼할 예정이었지...’진윤슬은 고개를 숙이고 담담하게 대답했다.“네...”입맛이 없어 대충 몇 숟갈 먹고 수저를 내려놓았다.가정부가 약탕을 한 그릇 가져왔다.“이건....”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윤슬은 그릇을 받아 두 모금 만에 다 마셔버렸다.여현식이 처방해준, 몸을 덥히고 기혈을 보하는 약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쓴맛이 혀끝에서 터지듯 퍼지며 위에까지 밀려들어 왔고, 속이 뒤집히는 듯한 고통에 진윤슬은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했다.입안에는 시고 쓴 맛만 남고 위장은 텅
성예빈은 다가가 그녀의 팔을 끼었다.“향 테스트하느라 밤새웠다면서. 오빠가 걱정해서 절대 깨우지 말라고 했어.”진성국은 가정부들에게 진윤슬을 안아 거실 소파에 눕히라고 지시했다.진윤슬은 마침 성예빈의 그 말을 들었다.문강찬이 진세린을 아끼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니 지금 ‘기절한 상태’라서 다행이었다.진세린은 이제야 발견한 듯 말했다.“언니는 왜 이래요?”성예빈이 대신 설명하자 진세린은 놀란 듯 입을 가리며 눈시울을 붉혔다.“오빠, 미안해. 언니가 그런 줄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그녀는 잠시 멈췄다가 말을 다시
그가 본 광경은 충격적이었다.늘 고고하고 만인의 위에 군림하던 문중엽이 자기 어머니 앞에서 한없이 몸을 낮추고 있었고, 심지어 지나칠 정도로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진성국의 기억 속 어머니는 그저 평범하고 온화하며 현숙한 여인이었을 뿐이었다.‘문중엽이 어머니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걸까?’순간 마음이 복잡해졌다.요즘 진씨 집안이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집안의 노소를 막론한 여자 셋이 모두 문씨 가문과 얽혀 있었다.잠시 더 지켜보던 그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가 문중엽이 나가는 걸 확인한 뒤에야 병실로 들어갔다.들어가자마자
“진윤슬은 어디 있어? 그 더러운... 왜 아직 안 와?”최민경은 입에 올리려던 무례한 단어를 삼켰다.이전에도 진윤슬 때문에 문강찬이 그녀의 카드 한도를 제한했던 터라 이제는 속으로만 욕할 뿐이었다.시선을 돌리다 멀리 있는 진세린을 본 그녀는 못마땅하게 말했다.“오늘은 우리 집안 내부 연회잖아. 쟤는 왜 여기 있어?”사람을 불러 진세린을 내쫓으려 했지만 문강찬이 막으며 담담히 말했다.“제가 불렀어요.”그는 종업원이 든 쟁반에서 술 한 잔을 집어 한 모금 마시고 나서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최민경은 아들의 표정을 살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