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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Author: 꼬마 구름
늦은 밤, 진국장군부의 수강원.

태부인을 안심시키기 위해 심안영은 오늘 수강원에서 태부인과 함께 자기로 했다.

태부인은 연세가 많아 몸도 예전 같지 않은데다 이번 심안영의 일로 놀라고 걱정한 탓에 밤잠도 설치고 심신이 지쳐 있었다.

그러다 오늘 심안영이 무사히 돌아오고서야 그녀는 비로소 잠에 들 수 있었다.

평온하게 잠이 든 태부인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심안영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이 순간의 따뜻함이 자신에게는 너무 소중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가족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느낌이다.

잠시 뒤 심안영은 이불을 걷고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걸치고 살금살금 방을 나섰다.

작은 부엌 아궁이 위에는 아직도 약이 데워지고 있었는데 이 약은 심안영이 직접 준비한 것이었다.

약을 마신 후 심안영은 수강원을 떠나 곧장 서문으로 향했다.

그녀는 사방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후 가볍게 담을 넘어 밖으로 빠져나갔다.

전생에 심안영은 서경율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책략을 꾸몄기에 서경율과 숙비의 비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들 손에는 위 신의라는 인물이 있으니 궁중 태의들이 서경율의 손을 치료하지 못하면 그들은 분명 위 신의를 불러 치료하게 할 것이다.

시간을 대략 계산해 보면 위 신의는 이미 궁에 다녀왔을 것이다.

위 신의는 의선곡 출신으로 의술도 아주 뛰어나지만 독과 구술, 생명으로 생명을 치환하는 금술에 능해 파문을 당한 인물이다.

그러다 숙씨 가문에 넘어가 숙비의 수하가 되어 그녀의 명령을 따라 움직여왔다.

그의 의술로 서경율의 손을 완전히 치료할 수는 없지만 고통을 덜어주는 건 가능했다.

전생에서도 그는 독과 구술로 서경율을 위해 많은 사람을 해쳤다.

서경율에게 고통을 주고 훗날의 불안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지금 선수를 쳐서 숙비와 서경율의 조력자인 위 신의를 제거하는 것은 아주 필요한 일이다.

생각이 정리된 심안영은 목적지를 분명히 하고 곧장 위 신의가 머무는 황성 서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뒤에 누군가가 따라붙은 것을 감지했다.

놈은 대여섯 명으로 경공이 아주 뛰어난 자들이었다.

“하하...”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누가 보낸 자들인지 알 수 있었던 심안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서경율이 중상을 입었는데 그 어미인 숙비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기에 친정인 숙씨 가문의 힘을 빌려 복수하려 드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고작 이 정도 인원으로?

심안영은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리더니 몸을 돌려 서쪽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밤은 이미 깊었고 골목은 좁고 어두웠다.

심안영은 그 안에서 숨을 죽인 채 몸을 숨겼다.

잠시 후, 그녀를 쫓아온 자들이 골목 안으로 들어왔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라졌다!”

“흩어져서 찾아. 그 계집을 놓치면 안 된다.”

“무공에 능한 계집이니 조심하거라.”

간단한 말을 주고받은 뒤, 그들은 각자 흩어져 골목 안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때 한 놈이 심안영 가까이에 다가오자 그녀는 재빨리 은침을 뽑아 놈의 견정혈을 찔렀다.

상대는 반응도 못 하고 그대로 쓰러졌고 손에 쥐고 있던 검은 이미 심안영의 손에 들어왔다.

“저기다!”

“잡아! 절대 도망가면 안 된다!”

“숨은 붙여둬라. 취춘루에 데려가야 한다.”

“알겠다.”

나머지 몇 명이 소리를 듣고 심안영에게 달려들었고 심안영은 그들이 말한 취춘루라는 단어를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

그곳은 여인의 옥 같이 부드러운 팔이 수많은 사내의 베개가 되고 탐스럽고 붉은 입술이 만인의 욕망이 되는 곳이다.

위세 높은 숙비와 숙씨 가문이 여인을 괴롭히는 수단이 이렇게 천박하다니.

그들을 바라보는 심안영의 눈은 얼음처럼 싸늘한 것이 마치 지옥에서 온 아수라 같았다.

그녀는 왼손에는 은침을, 오른손에는 검을 들었는데 두 손은 완벽하게 서로 호응하며 거대한 기세를 풍겼다.

심안영은 홀로 놈들 사이를 오가며 싸웠는데 그녀가 지나가는 곳마다 피안개가 자욱하고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일각 후.

그 짧은 시간에 그녀는 혼자 여섯 놈을 모두 저승길로 보냈다.

놈들을 처리한 후, 심안영은 위 신의에게 바로 가는 대신 마대와 수레를 구해 여섯 구의 시신을 마대에 넣고 수레에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숙비와 숙씨 가문이 그녀에게 선물을 보냈으니 이젠 그녀가 답례를 보낼 차례였다.

그녀는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수레를 밀어 곧장 숙씨 가문으로 향했다.

숙부 대문 앞.

시신들을 수레에서 내려 한 줄로 가지런후 눕힌 후 불쏘시개를 꺼내 수레에 불을 붙이자 순식간에 불길이 번져 주위가 훤히 밝아졌다.

심안영이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높이 던지자 여섯 자루의 칼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 ‘숙’자가 새겨진 숙부 대문의 현판에 깊숙이 꽂혔는데 그 위에 모여든 여섯 자루의 칼끝이 살기를 뿜어냈다.

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숙씨 가문 사람들에게 다음번엔 단순히 부하 몇 명이 죽는 걸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 반드시 숙씨 가문 전체를 칠 거라는 경고를 날렸다.

모든 걸 마친 심안영은 숙부의 대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곧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리고 누군가 문을 열려고 하자 그녀는 바로 돌아섰다.

이내 대문을 열었던 문지기 하인은 눈앞의 광경에 질겁해 비명을 지르며 허둥지둥 기어들어가 보고했다.

숙씨 가문 사람들이 속속히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분노로 가득 찬 그들의 외침과 고함이 대문 밖을 가득 채웠는데 이는 마치 전쟁터처럼 소란스러웠다.

서재 안도 마찬가지였다.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 책상이 뒤집히는 소리, 찢어질 듯한 욕설이 방 서재 안을 가득 채워 당장이라도 지붕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심안영의 짓이다. 그 망할 계집, 간이 배밖으로 나왔어! 이건 우리 숙씨 가문에 대한 도발이야! 변방에서 자란 촌년이 사황자의 눈에 띈 걸 복으로 생각해야지 은혜도 모르고 사황자를 다치게 하질 않나, 우리 사람들까지 죽이다니. 죽고 싶어 환장했군.

이대로 넘길 수는 없다! 어서 사람을 보내라! 내일 아침 일찍 궁에 들어가 숙비마마께 이 소식을 고해야 해. 절대 그 계집을 가만두어선 안 된다!”

“마마께서도 뭔가 준비하셨을 겁니다. 숙비마마가 그 천한 계집을 결코 가만히 두지 않으실 겁니다.”

심안영은 이 대화를 듣지 못했지만 숙씨 가문 사람들이 얼마나 분노했을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기에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체하지 않고 떠나려는 그때, 문득 뒤쪽 담장 위에 있는 검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상대는 검은 두루마기를 두르고 있었고 커다란 갓은 그의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어두운 그늘에 숨어 있는 탓에 정체를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심안영은 그의 존재를 여태 감지하지 못했다.

이건 곧 상대가 무공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기척을 감추는 데도 능하다는 걸 의미하기에 이런 사람과 정면으로 붙게 된다면 결코 만만치 않을 상대임이 분명했다.

심안영은 손에 쥔 은침을 더욱 꽉 쥐었다.

이때, 그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더니 두루마기와 갓을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서경연이었다.

그는 담장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심안영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눈을 마주치는 순간 심안영은 놀람과 경계가 섞인 표정을 지었고 서경연은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장난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심안영, 우리 또 만났구나. 어찌 이런 우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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