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살아온 모든 시간이 차례로 떠올랐다.
태어나 보니 난 부모 없는 고아였다.
10살이 될 무렵 초동들과 함께 궁정에 팔려 왔다.
궁정 문 앞에서 내 할머니란 분은 나를 판 은화 세 푼을 갖고 도망치듯 달아났다.
울고 매달리는 나를 뿌리치며 달려가던 뒷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궁정에서 시녀들의 심부름꾼이 되어 그녀들을 보조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천한 신분이지만 우리는 서로 따뜻한 한마디를 나누며 그것에 기대어 살았다.
왕이 나를 품지 않았다면 내 아이는 귀한 누군가의 집에 태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 또한 단두대 앞에 서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억울한 죽음에 마음이 무너져 내릴 뿐.
죽음 앞에서 떨어진 눈물 한 방울.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 한 방울이 떨어지는 순간.
푸른빛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빛.
날 위로하는 듯했다.
어디선가 내 억울함을 대변하는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누구의 소리일까?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들리는 외침인가?
그런데….
칼날이 떨어질 시간이 훨씬 지났다.
이미 죽었을 지금.
생각이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사후에도 생각할 순 있구나.’
단두대 상판 칼날이 움직이지 않고 머리 위에 그대로 서 있었다.
죽은 게 아니었다.
시간이 멈췄다.
휘둥그레질 틈도 없이 광장을 덮친 빛줄기에 눈이 희미해졌다.
감싸듯 끌어올리는 손길.
내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며 빛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갔다.
그 속에서 단 하나의 바람만 품었다.
나와 내 아들을 살려 달라고.
무고한 피를 쏟게 한 저들에게 기필코 복수하겠노라고.
빛이 시야를 덮은 사이.
광장의 칼날과 군중.
왕과 왕비.
단두대가 모두 사라졌다.
두리번대며 주위를 살피던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울음이 들려왔다.
작고 미약하지만, 생명을 움켜쥔 희미한 울음….
소리 나는 쪽으로 몸이 순식간에 휘리릭 옮겨졌다.
아이를 낳았던 산청에 서 있는 나.
방은 여전히 피 냄새가 진동했고, 바닥은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강보 속 작은 떨림이 보였다.
“아들…?”
어미에게만 보여주고 감추었던 그 은빛.
전설 속 예언.
왕국을 무너뜨린다는 루미엘.
내 아들이 분명했다.
“오! 이런….”
아이가 죽기 전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건 신이 내게 준 기회이며 두 번째 생이었다.
이번 생에도 내게서 아이를 빼앗으려 한다면, 그 대가는 왕좌부터 시작될 것이다.
회귀 이전의 삶은 내 선택이 아니었지만.
지금부턴 내가 선택한 삶의 시작이었다.
단두대 위에서 끝내 품어보지 못한 작은 생명.
아이의 체온이 내 살을 파고들며,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 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다짐이 깊숙이 자리 잡았다.
내 아들이 루미엘이란 사실을 들키면 또다시 아이를 잃게 된다.
이번엔 더욱 처참하게….
사실 내겐 예언도 전설도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간절함뿐이었다.
나는 이 아이의 어머니니까.
곧장 몸을 일으켰다.
아직 피가 멎지 않았지만,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과거의 기억이 나를 이끌며 차가운 이성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방으로 뛰어가 서랍 깊숙한 곳에 숨겨 둔 은화 꾸러미와 지하통로 열쇠를 꺼냈다.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열쇠.
이것이면 지하통로 문을 열 수 있다.
이 은화를 모아두던 순간이 스쳤다.
혹시 모를 날을 대비해 조금씩 숨겨 놓던 지난날의 내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강보에 싼 아이를 천으로 단단히 묶고 품에 안은 채, 방을 나섰다.
시녀들이 바삐 오가는 소리에 시간의 흐름이 돌아온 것을 알 수 있었다.
왕비 생일 잔치 준비로 모두가 분주한 지금이 탈출을 위한 기회였다.
어스레한 새벽빛이 궁 전체로 번지고 있었다.
날이 더 밝기 전에 빠져나가야 한다.
복도로 나오자, 차가운 바람이 살갗에 스몄다.
궁의 아치형 천장이 은은한 회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나는 앞만 보고 미친 듯이 뛰었다.
발소리가 돌바닥에 부딪히며 새벽을 울렸다.
시끄러운 소리가 신경 쓰였지만, 속도를 늦출 수 없었다.
궁은 더 낯설었고, 매번 오르내리던 복도조차 처음 보는 길처럼 느껴졌다.
저벅저벅.
뒤에서 누군가 쫓아 오는 소리.
기둥에 재빨리 몸을 숨긴 나는 심장이 굳어 버린 듯 꼼짝 할 수 없었다.
뒷모습으로 보아 궁의 순찰을 맡은 자였다.
그자는 이리저리 살피며 수상한 흔적을 찾으러 주위를 서성거렸다.
그가 기둥 앞까지 다다랐을 때 아이가 조금씩 버둥대기 시작했다.
울음이라도 터뜨리면 모든 게 끝이었다.
아이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온 신경이 쏠렸다.
아주 미세한 떨림에도 심장이 반응했다.
살아남는 것이 먼저였기에 아이의 입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아가, 미안해. 조그만 참아.’
단두대 위에서 느꼈던 절망이 되살아났다.
칼날이 내려오기 직전.
왕의 무표정한 얼굴.
왕비의 미소가 선명히 떠오르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이번에는 달라. 널 결코 죽게 두지 않을 거야.’
그의 걸음 소리가 나를 옥죄며 사내의 거친 호흡이 코 앞에서 멈췄다.
‘제발, 제발!’
뜨거운 눈물이 나도 모르게 흘렀다.“그건 그분만이 아실 테지요. 당신을 믿고 루미엘님을 맡기셨으니 이 신물은 당신이 잘 간직하십시오.”엘레나 목소리엔 오랜 유산을 건네는 무게가 담겨 있었다.루마레스 사제들에게 전해 내려오던 붉은 돌은 루미엘 어머니를 위한 보호석.어느 순간에도 루미엘을 지키라는 일종의 명령과도 같은 표징이었다.돌을 손에 쥐는 순간.삶은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그래. 어떤 어려움이라도 반드시 이겨낼 거야. 주어진 운명이라면….’가장 밑바닥 삶이었던 나..한낱 궁의 시녀였던 내가 반신반인 루미엘의 어머니라니….회귀는 신이 준 선물이며 또 다른 복수의 서약이었다.하찮은 자를 들어 귀한 존재로 옮기시는 오묘한 그분의 뜻.단두대의 차가운 칼날, 왕의 침묵, 피로 젖은 궁의 돌바닥.그 모든 고통은 돌고 돌아 나를 이 자리로 이끌었다.신이 준 두 번째 삶.그 삶의 목적은 분명했다.아들, 루미엘을 지키고 세상을 바꾸는 것.***지하 신전은 작은 창으로 밖을 볼 수 있었다.바위벽 사이에 뚫린 틈으로 하늘빛이 스며들었다.불안에 떨던 숲 사람들을 위로하는 푸른 빛과 아이 눈동자에서 뿜어 나오는 은빛이 지하 신전 모두의 마음을 평온케 했다.좁은 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카일의 모습을 찾기 위해서.전장의 소리와 가끔 모르가나의 소름 돋는 음성이 들렸다.날카로운 웃음소리.피를 부르는 주문.숲 밖 어딘가에서 흘러 들어왔다.닫힌 숲의 문은 하늘로 큰 장막을 걸쳐놓은 듯 견고했다.보이지 않는 장막이었지만, 흑마법사조차 쉽게 건드릴 수 없는 보호막이었다.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또 다른 이적이 우리 앞에 펼쳐졌다.닫힌 문이 스스로 틈을 벌려 루마레스 전사들을 빨아들이고 다시 굳게 닫힌 것이다.그렇게 숲은 허락된 이들만 품고 다른 자들은 토해냈다.구석에 웅크려 앉은 내 얼굴에 아이의 손이 스쳤다.작지만 따뜻한 손길이 어미를 안심시켜 주려는 듯했다.그때였다.지하 신전 문을 열고 부족의 전사들이
제단 주위 돌에 새겨진 고대 문양이 하나둘 빛을 잃었다.“왕의 피를 이어받은 남아와 그 어미를 내어주면 조용히 가겠다.”“당장 나가거라. 그들은 신께 보호받는 자들이다.”모르가나는 커다란 검은 천을 펼쳐 나를 향해 돌진했다.뛰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아이 눈을 가리고 전속력으로 뛰었다.그가 불타는 나무를 내게 던졌다.불길이 내 앞에 떨어졌지만, 그 불을 밟고 미친 듯이 달렸다.발밑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옷자락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났다.“겨우 도망친 게 여기더냐? 더 멀리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갔어야지.”뒤따르는 그를 피해 달리다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다.“안돼! 또 내 아들을 잃을 수 없어.”다시 일어서자, 불길이 에워싸며 그 앞을 모르가나가 막아섰다.검은 천이 하늘을 가리며 우리를 덮쳤다.“마리안 님!”카일의 외침이었다.날아오른 그가 검은 천을 자른 후 모르가나를 공격했다.초인적인 힘을 다해 그곳을 빠져나올 때, 누군가 팔을 잡아당겼다.엘레나였다.“숲을 닫아라.”그녀의 마지막 외침과 함께 땅이 요동치며 숲의 문이 닫혔다.“카일! 카일과 전사들이 아직 저기 있어요.”카일과 루마레스 전사들은 숲의 문이 닫히는 순간에도 흑마법사들과 혈투를 벌였다.하지만.문이 닫히며 그들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보랏빛 연기가 나무 사이로 번지며 검은 재가 흩날렸다.“카일!”목이 찢어질 듯 외쳤지만,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이대로 그를 보내선 안 된다. 아직 은혜도 갚지 못했는데….’엘레나가 팔을 다시 세게 잡아끌었다.“지금은 그를 찾을 때가 아닙니다. 루미엘님을 지켜야 합니다. 숲의 문을 닫기 전 흑마법의 불길이 들어왔습니다.”그녀의 손끝은 놀랍도록 힘이 강했다.잔가지와 덩굴을 헤치며 숲의 깊숙한 심장부로 향했다.폭발음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불길은 숲의 살점을 태우며 바람을 타고 번져왔다.“신의 제단으로 가야 해요. 그곳만이 안전합니다.”엘레나의 목소리는 급박했다.모두 엘레나를 따라 긴박하게 이동했
누군가의 손이 아이 목덜미를 슬쩍 훑고 지나갔다.인간의 형체가 아닌 괴물.차원 회랑에서 본 그자였다.희귀한 물체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웅크려 앉았다.“저리 가거라. 신의 법에 따라 루미엘님과 어머니를 이제부터 보호할 것이다.”그자는 숲의 경계를 맡은 소금쟁이 요정이라 했다.엘레나의 손짓 하나로 그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다.채찍 맞은 상처에서 흐른 피가 옷을 적시며 아이의 강보까지 흥건했다.“루미엘님을 제게 주시지요.”“네?”“안심하십시오. 이분은 의원이십니다.”깊은 숲에 들어서며 더욱 짙어진 약초 냄새.나무를 엮어 만든 의원의 집은 생각보다 단출했다.말린 약초가 차곡히 채워진 선반.구석엔 물을 데우는 화로가 있었다.조심스레 아이를 둘러싼 천을 풀었다.아들도 온몸으로 탈출을 도운 듯 땀이 흥건했다.“루미엘님은 건강하십니다. 잘 보호하셨습니다.”의원 한마디에 긴장이 풀리며 주저앉았다.“감사합니다.”참았던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며 죽음의 끝에서 살았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의원은 아이를 깨끗한 흰옷으로 입힌 후 푹신한 침상에 올려놓았다.엘레나는 아이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이번엔 의원이 내게 다가왔다.그의 얼굴이 심각함으로 물들었다.“마리안 님, 상처가 아주 깊네요.”의원은 피에 젖은 옷을 벗기고 천으로 상처를 누른 후 약초를 붙였다.피가 멎어 가는 것을 확인하자 작은 사발을 내밀었다.“드세요.”따듯한 사발 속 달인 약은 씁쓸했지만, 어떤 꿀보다 달콤하게 느껴졌다.고개를 들자, 카일이 문에 기대 서 있었다.그의 손등에 굳은살과 겹겹이 얽혀 있던 상처는 신기하게도 깨끗해져 있었다.“덕분입니다. 당신이 나와 아이를 살려 주셨습니다.”카일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여기까지 온 건 신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난 그저 그분의 명령대로 루미엘님과 당신의 탈출을 도왔을 뿐입니다.”바깥에서 요란한 휘파람 소리가 울렸다.타는 냄새와 함께 연기가 밀려오자, 카일이 황급히 밖으로 나갔
푸슁ㅡ 슁ㅡ그자가 날 향해 칼을 휘두른 바로 그때.갑자기 화살이 쏟아졌다.왕비 친위대는 우수수 말에서 떨어졌고 말들은 재빨리 어디론가 도망쳤다.검이 부딪히는 소리, 욕설, 짐승의 포효가 뒤엉켰다.켜켜이 쌓여 작은 더미를 이룬 친위대 시체.호위병 몇몇은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미안합니다. 우리가 너무 늦었나 봅니다.”지하통로 사내였다.같은 무리로 보이는 여러 명과 함께였다.포박 줄을 끊는 사내의 손.피로 얼룩져 있었고 매캐한 냄새까지 났다.“감…. 사합니다.”사내는 우리를 말에 올린 후, 뒤에서 감싸 안았다.이상한 느낌이 날 사로잡았다.억센 손의 보호를 받으며 이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겠단 생각이 스쳤다.사내에게 느낀 처음 감정이었다.왕비 친위대를 전멸시킨 사내와 부족들은 우릴 데리고 숲으로 향했다.‘이 사내는 누구이며, 그의 부족은 왜 우리 목숨을 구하려는 걸까?’여러 생각이 머물렀다.숲으로 들어가는 순간,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마리안 님.”‘잘 못 들었겠지. 이 낯선 곳에 나를 아는 이가 있을 리 없지.’바람이 부드럽게 뺨을 스쳤다.뒤돌아보니 말발굽 자국이 흔적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빽빽한 나무들이 아침 빛을 베어내며 이슬 품은 솔 향기가 코끝에 닿았다.“휴! 이제 살았다.”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을 때 누군가 또 한 번 나를 불렀다.“마리안 님!”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이 소리는 왕궁 산청, 해산의 고통이 몰려올 때 들었던 음성이었다.‘환청을 두 번씩이나 듣다니….’정신을 가다듬었다.잔뜩 긴장한 나를 사내가 안심시켜 주었다.“마리안 님, 이곳은 우리 루마레스 부족이 지키는 숲입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루마레스? 오래전 왕국을 통치했다는 그 부족 말입니까?”“그렇습니다. 흑마법사들 공격받기 전 우리 부족이 루미엘님을 도와 왕국을 통치했지요.”“모두 멸족된 게 아니었습니까?”“숲을 지키며 루미엘님 환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루미엘.신의 피를 가진 완벽한 통치자.예언대로라면 은빛
칠흑의 어둠을 지나고 보석이 가득한 공간에 다다랐을 때.톱니바퀴 사이로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인간의 언어와 닮았지만, 뜻을 알 수 없는 소리였다.그 음성을 듣는 순간.이곳이 말로만 듣던 신들의 길.선택받은 자만이 통과할 수 있다는 차원 회랑임을 알 수 있었다.갑자기 나타난 검은 실루엣.흠칫 놀라 숨을 멈췄다.주위를 빙빙 돌던 그와 함께 차원 회랑이 사라지며 불길에 휩싸인 통로가 보였다.인간 영역으로 돌아온 우리를 기다린 건.불덩이였다.‘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 한다. 끝까지….’내 마음을 누군가 읽은 듯 갑자기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고, 허벅지까지 불어난 물로 불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짙은 음영을 띈 하늘.나무둥치 사이로 차오른 새벽이 빛을 퍼뜨렸다.출구 위로 들리는 인기척.최대한 조심스럽게 기어 그 지점을 무사히 통과했다.얕아진 수로를 따라 내려가면 궁 외곽.해가 떠오르면 수문 인근 경비가 두 배로 늘어나기 때문에 탈출을 위한 시간은 많지 않았다.드디어 눈앞에 보이는 수문.돌 구조물 아래로 쇠창살이 내려와 있었다.'바깥쪽 나무뿌리 위, 저 틈만 통과하면 된다.'반쯤 부식된 쇠창살을 잡고, 있는 힘껏 벌렸다.“으윽…!”엄청난 힘이 내 몸에서 분출되며 쇠창살이 벌어졌다.'이제 자유다. 아가 우리 이제 살았다.'환한 웃음으로 어미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부신 은빛과 마주친 순간.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그래, 어미가 널 예언대로 왕국을 다스리게 해 줄게.’아이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약속했다.궁정을 빠져나왔다는 안도에 코끝을 스치는 물비린내도 꽃보다 향기롭게 다가왔다.강바닥에는 조개껍데기와 부러진 창끝이 널려 있었다.신발이 찢어져 발바닥을 베였지만 내겐 아픔도 벅찬 환희였다.무사히 강어귀에 다다르자, 한적한 길이 모습을 드러냈다.인적 없는 길.물살이 부서지는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의 고요함.푸드덕 날아가는 새들뿐 아무도 없었다.수문을 빠져나온 뒤.물은 발목 높이로 줄어들었다.고요로 가득 찬 세상.풀잎
철컥.철컥…!찌이익.쇳덩이 부딪히는 소리였다.여러 명이었다.이렇게 많은 사람이…?으그르르…!사냥개의 짖음이 점점 크게 다가왔다.몸이 굳었다.피 냄새와 젖 냄새.둘 중 하나라도 맡으면 끝이었다.돌바닥 위로 가죽 부츠 부딪히는 소리로 보아 왕비 친위대가 맞았다.그들의 둔탁한 걸음으로 바닥이 미세하게 떨렸다.친위대 상의에 부착된 쇠사슬 소리가 요란해서 그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이쪽이다! 개를 끌고 와!”눈앞이 캄캄해지자, 축축한 벽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도 크게 들렸다.아이는 다시 울음을 터뜨릴 듯 떨고 있었다.내 긴장이 아이에게 전염될 것 같아 억지로 침착을 유지했다.“괜찮아. 조금만…. 조금만 참아.”바닥에 몸을 웅크렸다.사냥개의 거친 호흡이 조금씩 가까이 다가왔다.냄새를 쫓는 짐승의 소리.왕비 친위병들의 중얼거림이 발을 묶는 듯했다.“문을 확인해!”“빨리 뛰어!”그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며 지하통로를 뒤흔들었다.추격자의 움직임이 바로 앞에서 멈췄다.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압박이 밀려왔다.“이쪽이다.”크고 거친 남자의 목소리.아이를 더 깊게 품에 감싸 안고 핏기 없는 손으로 벽을 짚으며 숨을 죽였다.어둠에서 낯선 그림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본능적으로 뒤로 조금씩 물러섰다.등골이 오싹해지며 심장이 떨어질 듯 몸이 흔들렸다.그가 천천히 다가오자, 가냘픈 수정 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잘 다듬어진 근육, 전장에서 얻은 것 같은 상흔, 그리고 깊게 팬 칼자국.낯선 얼굴이었다.어둠 속에서 사내의 실루엣이 드러나자, 본능적으로 품 안의 아이를 더 깊이 끌어안고 은빛 눈동자를 가렸다.“살…. 려….”“쉿!”습한 돌벽 사이, 울려 퍼진 목소리는 날카로웠다.손끝에는 식은땀과 피가 엉겨 있었다.망설임 없이 품에서 은화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가진 전부였지만 아들을 살리기 위해선 아깝지 않았다.“왕비가 쫓으라 했습니까? 제발 한 번만 눈감아 주십시오. 저는 죄가 없습니다. 제발 이곳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