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살아온 모든 시간이 차례로 떠올랐다.
태어나 보니 난 부모 없는 고아였다.
10살이 될 무렵 초동들과 함께 궁정에 팔려 왔다.
궁정 문 앞에서 내 할머니란 분은 나를 판 은화 세 푼을 갖고 도망치듯 달아났다.
울고 매달리는 나를 뿌리치며 달려가던 뒷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궁정에서 시녀들의 심부름꾼이 되어 그녀들을 보조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천한 신분이지만 우리는 서로 따뜻한 한마디를 나누며 그것에 기대어 살았다.
왕이 나를 품지 않았다면 내 아이는 귀한 누군가의 집에 태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 또한 단두대 앞에 서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억울한 죽음에 마음이 무너져 내릴 뿐.
죽음 앞에서 떨어진 눈물 한 방울.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 한 방울이 떨어지는 순간.
푸른빛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빛.
날 위로하는 듯했다.
어디선가 내 억울함을 대변하는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누구의 소리일까?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들리는 외침인가?
그런데….
칼날이 떨어질 시간이 훨씬 지났다.
이미 죽었을 지금.
생각이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사후에도 생각할 순 있구나.’
단두대 상판 칼날이 움직이지 않고 머리 위에 그대로 서 있었다.
죽은 게 아니었다.
시간이 멈췄다.
휘둥그레질 틈도 없이 광장을 덮친 빛줄기에 눈이 희미해졌다.
감싸듯 끌어올리는 손길.
내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며 빛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갔다.
그 속에서 단 하나의 바람만 품었다.
나와 내 아들을 살려 달라고.
무고한 피를 쏟게 한 저들에게 기필코 복수하겠노라고.
빛이 시야를 덮은 사이.
광장의 칼날과 군중.
왕과 왕비.
단두대가 모두 사라졌다.
두리번대며 주위를 살피던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울음이 들려왔다.
작고 미약하지만, 생명을 움켜쥔 희미한 울음….
소리 나는 쪽으로 몸이 순식간에 휘리릭 옮겨졌다.
아이를 낳았던 산청에 서 있는 나.
방은 여전히 피 냄새가 진동했고, 바닥은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강보 속 작은 떨림이 보였다.
“아들…?”
어미에게만 보여주고 감추었던 그 은빛.
전설 속 예언.
왕국을 무너뜨린다는 루미엘.
내 아들이 분명했다.
“오! 이런….”
아이가 죽기 전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건 신이 내게 준 기회이며 두 번째 생이었다.
이번 생에도 내게서 아이를 빼앗으려 한다면, 그 대가는 왕좌부터 시작될 것이다.
회귀 이전의 삶은 내 선택이 아니었지만.
지금부턴 내가 선택한 삶의 시작이었다.
단두대 위에서 끝내 품어보지 못한 작은 생명.
아이의 체온이 내 살을 파고들며,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 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다짐이 깊숙이 자리 잡았다.
내 아들이 루미엘이란 사실을 들키면 또다시 아이를 잃게 된다.
이번엔 더욱 처참하게….
사실 내겐 예언도 전설도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간절함뿐이었다.
나는 이 아이의 어머니니까.
곧장 몸을 일으켰다.
아직 피가 멎지 않았지만,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과거의 기억이 나를 이끌며 차가운 이성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방으로 뛰어가 서랍 깊숙한 곳에 숨겨 둔 은화 꾸러미와 지하통로 열쇠를 꺼냈다.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열쇠.
이것이면 지하통로 문을 열 수 있다.
이 은화를 모아두던 순간이 스쳤다.
혹시 모를 날을 대비해 조금씩 숨겨 놓던 지난날의 내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강보에 싼 아이를 천으로 단단히 묶고 품에 안은 채, 방을 나섰다.
시녀들이 바삐 오가는 소리에 시간의 흐름이 돌아온 것을 알 수 있었다.
왕비 생일 잔치 준비로 모두가 분주한 지금이 탈출을 위한 기회였다.
어스레한 새벽빛이 궁 전체로 번지고 있었다.
날이 더 밝기 전에 빠져나가야 한다.
복도로 나오자, 차가운 바람이 살갗에 스몄다.
궁의 아치형 천장이 은은한 회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나는 앞만 보고 미친 듯이 뛰었다.
발소리가 돌바닥에 부딪히며 새벽을 울렸다.
시끄러운 소리가 신경 쓰였지만, 속도를 늦출 수 없었다.
궁은 더 낯설었고, 매번 오르내리던 복도조차 처음 보는 길처럼 느껴졌다.
저벅저벅.
뒤에서 누군가 쫓아 오는 소리.
기둥에 재빨리 몸을 숨긴 나는 심장이 굳어 버린 듯 꼼짝 할 수 없었다.
뒷모습으로 보아 궁의 순찰을 맡은 자였다.
그자는 이리저리 살피며 수상한 흔적을 찾으러 주위를 서성거렸다.
그가 기둥 앞까지 다다랐을 때 아이가 조금씩 버둥대기 시작했다.
울음이라도 터뜨리면 모든 게 끝이었다.
아이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온 신경이 쏠렸다.
아주 미세한 떨림에도 심장이 반응했다.
살아남는 것이 먼저였기에 아이의 입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아가, 미안해. 조그만 참아.’
단두대 위에서 느꼈던 절망이 되살아났다.
칼날이 내려오기 직전.
왕의 무표정한 얼굴.
왕비의 미소가 선명히 떠오르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이번에는 달라. 널 결코 죽게 두지 않을 거야.’
그의 걸음 소리가 나를 옥죄며 사내의 거친 호흡이 코 앞에서 멈췄다.
‘제발, 제발!’
신성이 힘의 근원과 통치의 나침반이라면.어미는 신께서 인간계에 내려보내신 수호천사였다.루미엘은 서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황제의 화려한 제복 대신.평소 잘 입지 않던 수수한 복장을 챙겨 입었다.황금색 망토를 벗어 던지고 낡은 외투를 걸친 루미엘.제국을 다스리는 통치자를 잠깐 내려놓고 평범한 아들로 돌아가겠다는 무언의 선언이었다.“오늘 밤은 황궁을 비우겠습니다. 제국의 기밀을 다루는 일이니 내 행방을 묻지 마십시오.”“폐하! 위험합니다. 호위병은 데려가셔야 합니다.”“호위는 필요 없습니다. 나는 오랜 시간 뵙지 못한 가족을 만나러 가는 길이니까요.”근위대장의 당혹스러운 만류조차 홀로 떠나는 아들의 걸음을 잡지 못했다.가족이라는 단어를 뱉는 입가에 진정한 행복이 피어올랐다.루미엘은 근위대장 만류를 뒤로하고 황궁 비밀 통로를 이용해 빠져나왔다.숲으로 향하는 걸음은 행복했지만.조심스러웠다.날개를 펼치면 순식간에 숲에 도달할 수 있는 아들.굳이 황야를 가로지르는 긴 여정을 선택했다.발밑 땅을 밟으며 어미 영혼을 엮어 이룩한 인간계 평화를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고통과 번영이 뒤섞인 제국의 흙을 직접 밟는 것.황제가 어미를 향한 경배의 방법이었다.어미가 닦아놓은 제국의 길.어떤 마음으로 이 땅 백성을 사랑했는지 하나하나 느끼고 싶었다.마을마다 활짝 웃는 아이들 얼굴과 비옥하게 일궈진 들판을 지날 때마다.어미가 지키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뼛속 깊이 깨달았다.사랑은 이 땅의 거름이 되어 황제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고 있었다.며칠 밤낮을 걸어 루마레스 숲에 다다른 아들.숲의 정령들은 싱그러운 향기로 환영하고 있었다.루마레스 숲은 오래전부터 아들을 기다려 온 것처럼,걸음에 맞춰 꽃잎을 흩날리고 나뭇잎이 노래하며 지친 황제의 여정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입구에서 걸음을 멈춘 루미엘.작은 오두막집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았다.오두막 창가에 비친 그림자는 너무 평화로웠다.아들이 지켜주려 했던 평범한 행복을 마주한
고개를 돌려 카일을 보았다.내 눈동자 속에 카일의 얼굴이 비쳤다.기억을 잃었지만.무의식 깊은 곳에서 그가 짊어졌던 10년의 그리움과 헌신을 감지했다.그의 눈동자 속에는 내가 지워버린 지난 십 년의 눈물.마침내 되찾은 오늘에 대한 경외가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영혼조차 그의 헌신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카일 뺨에 손을 올렸다.“두려워하지 마세요. 이제 잃어버릴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우리한텐 이 숲이랑, 오늘 저녁 먹을 수프. 그리고…. 당신이랑 나밖에 없으니까.”내 손길이 닿자, 그의 뺨 위로 뜨거운 온기가 전해졌다.오직 현재의 행복에만 집중하려는 우리만의 작은 약속.카일은 내 손을 자기 뺨에 댔다.차원의 회랑에서 나를 놓쳤던 순간의 악몽.비로소 완전히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더는 놓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오직 지금, 이 순간.나를 만지고 있다는 사실만이 그의 세상을 가득 채웠다.저녁이 되자 오두막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루마레스 숲의 평온한 일상은 매일 조금씩 쌓여가고 있었다.굴뚝에서 피어오른 하얀 연기는 밤하늘 별자리 사이로 스며들며.우리만의 작은 낙원을 조용히 가리키고 있었다.제국은 황제 루미엘 통치 아래 번영했지만.세상 그 누구도 이곳에 나와 카일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역사가 우리를 기록하지 않아도.숲의 나무들과 흐르는 냇물은 우리 사랑을 알고 있었다.타인의 시선에서 사라진 카일과 나.고귀한 사랑을 보상으로 얻었다.고요한 숲의 서사는 영원히 모두에게서 잊히길 바랐다.기억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상관없었다.내가 누구든.무엇이든.우리가 함께 있는 것만으로 감사했기 때문이다.기억의 조각들이 없어도.오늘의 나로 카일 곁에 머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나의 삶은 더할 나위 없이 기적이었다.루마레스 숲의 평화가 깊어져 갈 무렵.황궁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황제 루미엘은 이제 대륙에서 가장 강인하고 사려 깊은 통치자로 자리
나와 카일이 루마레스 숲에 정착하고 계절이 두 번 바뀌었다.숲의 녹음은 짙어졌고 어느새 텃밭에는 직접 심은 작물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었다.봄의 새싹이 여름의 뜨거운 생명력으로 치솟더니.결실의 계절이 주는 묵직한 풍요가 오두막 주변을 감쌌다.지난 계절의 흉터는 숲의 초록빛으로 덮였고.우리의 일상도 자연의 섭리처럼 조용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여전히 과거를 기억하지 못했다.하지만.숲의 삶에는 누구보다 밝았다.어느 나무 열매가 잘 익었는지.어떤 약초가 상처를 치유하는지.알고 있었다.이전부터 숲의 정령들과 삶을 나누던 사람처럼.나는 손끝 감각만으로 숲이 주는 선물을 찾아내었다.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으나.손과 발이 기억하는 숲의 언어들이….나를 완벽한 이곳의 주인으로 이끌고 있었다.카일은 그런 나를 보며 가끔 옛일을 회상하는 듯 슬픈 눈빛을 짓곤 했다.섭정 시절.제국의 정세를 꿰뚫어 보던 날카로운 통찰력이 이제는….숲의 생태계를 읽는 지혜로 변해 있었다.아니….난 처음부터 루마레스 부족이었나보다.그는 가끔 내 눈빛에서 한 나라를 호령하던 섭정의 위엄과 차가운 이성을 보곤 했다.하지만 이제 그것은….소중한 이와 함께 하는 지혜가 되어 나를 지탱하고 있었다.“카일, 오늘은 냇가 근처에 아주 귀한 버섯이 났어요. 저녁에 수프를 끓여 먹으면 좋겠어요.”바구니를 들고 오두막 문을 열며 맑게 웃었다.늘 가까이에서 지키는 카일.나와 한시라도 떨어져 있기 싫어하는 사내의 수줍은 행동임을 알 수 있었다.나의 웃음소리가 숲의 정적을 깨뜨릴 때마다.카일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그에게 있어 나를 지키는 행위는 되찾은 생을 향한 가장 간절하고도 부드러운 구애였다.“마리안, 너무 깊은 곳까지 가지 마십시오. 지난번처럼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요.”“걱정도 많으셔라. 당신이 있잖아요. 당신이 함께 있는데 내가 왜 길을 잃어요?”장난스럽게 웃으며 카일의 팔을 덥석 잡았다.카일은 흠칫 놀라며 굳어버렸지만.이내 내 손을 다정하게
“이제부터 내 이름은 마리안으로 할게요.”“네?”“당신이 날 처음 봤을 때, 부른 이름, 맞지요?”“아…. 네!”“난 그 이름이 맘에 들어요. 날 마리안이라고 불러도 좋아요.”“네. 그럼, 당신을 이제부터 마리안이라고 부르겠습니다.”“네. 특별히 허락하는 거예요. 난 당신이 마음에 드니까요.”“네…? 하하하!”“왜 그렇게 웃는 거죠? 내가 뭘 잘못했나요?”“아…. 아닙니다. 아주 잘하셨습니다.”“카일 공!”“저…. 저도 이름만 불러주시면 안 될까요?”“뭐…. 어렵지 않죠. 카~일!”“하하!”“하하하!”그와 눈이 마주치자, 내 몸의 모든 세포가 격렬히 반응했다.난 느꼈다.우리는 사랑하는 사이였음을.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었음을.그리고 지금,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갑자기 다가온 그의 입술.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날 어루만지는 사내의 몸짓이 낯설지 않았다.참는 건 불가능했다.아니….참고 싶지 않았다.오랜 시간 서로를 원하고 있었음을 내 몸의 반응으로 알 수 있었다.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나가 된 그와 나.따듯한 그의 속살이 내 것에 닿았다.깊은 신음이 터져 나오며 다시 헤어지지 말 것을 서로에게 몸짓으로 말하고 있었다.언약식.그렇게 우리는 우리만의 예식을 치르고 있었다.“당신이랑 있으면 마음이 편해요. 꿈에서 당신을 매일 봤어요.”스치듯 내뱉은 한마디.가슴 깊은 곳이 아려왔다.기억의 창고는 닫혀 있었지만.영혼의 파동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십 년이라는 시간….서로의 꿈속에서 헤매던 마음이 이제야 실체로 닿아 엉킨 실타래를 풀고 있었다.기나긴 밤을 건너 마침내 서로를 알아본 영혼과 육체의 대화였다.벅차오르는 이 기분.기억은 지워졌어도 마음의 결은 그대로였다.거친 운명이 갈라놓았던 인연.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희열이 밀려들었다.우린 옷매무새를 여미고 밖으로 나갔다.텃밭은 카일이 정성껏 일구어 놓은 덕에 작은 채소들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오두막을 둘러싼 푸른 숲은 다시 생기를 찾
루마레스 숲의 오두막은 고요했다.카일은 나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혔다.그의 손길은 마치 갓 피어난 꽃잎을 다루듯 섬세하고 경건했으며.십 년의 기다림 끝에 찾아온 연인을 다시 잃을까 숨죽이고 있었다.거친 숨결마저 조심스레 삼키는 그 침묵 속에서,잃어버린 세월의 무게가 아스라이 스쳐 갔다.“카일이라고 했지요?”“네!”“이곳은 너무 편해요. 그리고…. 당신도.”내 입술 끝에서 흘러나온 나직한 고백.긴 어둠의 시간을 통과해 온 영혼이 본능적으로 감지한.가장 평온한 안식처를 향한 응답이었다.깊은 이끌림이 메마른 가슴을 부드럽게 적셨다.카일의 미소를 본 나.피곤함에 밀려 잠이 들었다.내 곁을 떠나지 않고 밤새워 지킨 카일.창가로 스미는 달빛마저 조심스레 머문 밤.사내는 나의 숨소리를 들으며….십 년간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함에 감사했다.창백한 달무리 아래서 그는 몇 번이고 나의 손을 조용히 쓸어내렸다.날이 밝자 천천히 눈을 뜬 나.낯선 천장을 두리번거리다 이내 곁에 앉은 카일을 발견했다.아침 햇살보다 더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카일.그의 존재는 낯섦이라는 불안을 걷어내고.그곳에 오래 머문 연인처럼 나를 감싸 안았다.마치 어제도 그제도 이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온기였다.“아….!”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작은 감탄사.어젯밤 꿈이 현실이었음을 확인하는 안도였다.그리고….마주한 사내에 대한 호기심이었다.잔잔한 수면에 일렁이는 물결처럼.이름 모를 감정이 가슴속에서 피어올랐다.몸을 일으키려 하자, 서둘러 나를 부축한 카일.내 손을 잡은 카일의 굳은살 박인 손을 내려다보았다.기억은 없었지만.손길에서 전해지는 다정함에 가슴 한구석이 벅차올랐다.오랜 세월 품어온 결연함이 그 거친 손끝에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사내의 거친 손이 닿는 곳마다 따스한 전율이 번져나갔다.“여기는 어디인가요? 저를 혹시 아시나요?”이제 막 세상을 품게 된 삶에 대한 가장 근원적이고 애틋한 탐색이었다.사라진 기억의 조각
처음 사랑했던 그 모습 그대로.아무런 가식없는 소박한 차림새는 나를 카일의 가장 순수한 기억 속 연인으로 돌려놓았다.시간은 우리 처음 사랑했던 그곳에 고스란히 멈춰 있었다.“마리안…. 정말 당신입니까?”그의 목소리는 형용할 수 없는 전율로 갈라졌고.십 년이라는 시간을 단숨에 뛰어넘은 그 물음은 공허한 숲의 메아리가 되어 진심을 울렸다.메아리는 숲을 돌고 돌아 우리의 간절함을 대지 깊숙이 새겨넣었다.사내의 떨리는 손이 뺨에 닿는 순간.너무 따뜻했다.10년 동안 그토록 갈구했던 인간의 체온이었다.얼어붙었던 영혼을 바닥까지 녹여버릴 듯한 뜨거운 열감이 전해져 왔다.천천히 눈을 떴다.부드럽고 따스한 살결.꿈이 아닌 현실이었다.시야로 밤하늘의 별빛보다 더 찬란한 눈동자가 닿았다.10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내 눈동자는 여전히 맑고 고요했다.세상의 풍파를 잊은 눈동자에는 오직 눈앞의 사내를 담아낼 여백만이 남아 있었고,그 맑음은 카일 가슴을 더욱 아릿하게 찌르고 있었다.지나온 세월의 무게가 무색할 만큼 순수한 시선.빤히 바라보았다.낯선 사람이었다.하지만 내 손이 본능적으로 그의 손을 꽉 쥐었다.이름도.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이에게 영혼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기억의 창고는 닫혀 있었으나,영혼에 새겨진 감각은 지워지지 않은 본능으로 그를 향해 손을 뻗어 운명의 끈을 다시 움켜쥐었다.비록 머리는 기억하지 못해도 심장은 이미 그를 알아보고 있었다.“...누구…. 세요?”낯선 이방인을 대하듯 조심스럽고도 호기심 어린 물음….우리의 서사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기억을 모두 잃어버렸다.천계를 다녀온 자가 겪는 기억 삭제.내게도 해당했다.가혹한 운명이 남긴 피할 수 없는 대가였다.천계의 신성한 불꽃이 육체를 거치는 동안 과거의 흔적은 타올라 사라졌지만.가장 소중했던 인연의 씨앗만은 살아남아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내 영혼 깊은 곳에 각인된 존재의 흔적.지워지지 않았다.세상의 어떤 섭리도 끊어내지 못한 강력한 인연의
제단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시간의 흐름을 알려 주었다.인간과 신의 영역.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는 착각이 든 것도 그 음성으로 인함이었다.신전 가장 밑바닥, 지혜의 샘이 있어 멀리까지 물을 길으러 갈 필요도 없는 곳.세상에서 가장 안전지대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숲 밖을 자유로이 왕래하는 소금쟁이 요정이 궁의 소식을 가끔 전해 주었다.앙리 왕은 지병인 우울증과 불면증이 심해졌고 더 이상 여자를 찾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별궁이 불타 폐쇄됐고 왕비는 계속 나와 아들을 찾으려 혈안이 돼 있다고 했다.바깥 세계와 차단된 생활에
뜨거운 눈물이 나도 모르게 흘렀다.“그건 그분만이 아실 테지요. 당신을 믿고 루미엘님을 맡기셨으니 이 신물은 당신이 잘 간직하십시오.”엘레나 목소리엔 오랜 유산을 건네는 무게가 담겨 있었다.루마레스 사제들에게 전해 내려오던 붉은 돌은 루미엘 어머니를 위한 보호석.어느 순간에도 루미엘을 지키라는 일종의 명령과도 같은 표징이었다.돌을 손에 쥐는 순간.삶은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그래. 어떤 어려움이라도 반드시 이겨낼 거야. 주어진 운명이라면….’가장 밑바닥 삶이었던 나..한낱 궁의 시녀였던 내가
제단 주위 돌에 새겨진 고대 문양이 하나둘 빛을 잃었다.“왕의 피를 이어받은 남아와 그 어미를 내어주면 조용히 가겠다.”“당장 나가거라. 그들은 신께 보호받는 자들이다.”모르가나는 커다란 검은 천을 펼쳐 나를 향해 돌진했다.뛰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아이 눈을 가리고 전속력으로 뛰었다.그가 불타는 나무를 내게 던졌다.불길이 내 앞에 떨어졌지만, 그 불을 밟고 미친 듯이 달렸다.발밑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옷자락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났다.“겨우 도망친 게 여기더냐? 더 멀리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갔어야지.”
누군가의 손이 아이 목덜미를 슬쩍 훑고 지나갔다.인간의 형체가 아닌 괴물.차원 회랑에서 본 그자였다.희귀한 물체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웅크려 앉았다.“저리 가거라. 신의 법에 따라 루미엘님과 어머니를 이제부터 보호할 것이다.”그자는 숲의 경계를 맡은 소금쟁이 요정이라 했다.엘레나의 손짓 하나로 그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다.채찍 맞은 상처에서 흐른 피가 옷을 적시며 아이의 강보까지 흥건했다.“루미엘님을 제게 주시지요.”“네?”“안심하십시오. 이분은 의원이십니다.”깊은 숲에 들어서며 더욱 짙어진 약초 냄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