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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일비당
부인할 수 없었다. 이 황자 또한 눈을 즐겁게 하는 미남이었다.

맑은 눈, 하얀 피부, 무엇보다 귀한 것은 소탈한 행동거지였다. 차갑고 화려한 태자와 비교하면, 이 황자는 부드러운 햇살처럼 친근함을 느끼게 했다.

“언니, 이 황자께서 언니를 얼마나 아끼시는지 보세요!”

옆에 있던 유은진이 유경서의 팔짱을 끼며 친근하게 말했다.

“이 황자께서 성 밖에서 돌아오시자마자 언니가 순화사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오셨어요. 마침, 언니한테 먹을 거 가져다주러 가는 길에 만나서 같이 올라온 거예요.”

유경서는 무표정하게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너무 가까이 붙지 마. 너한테 병이라도 옮기면 난 죄인이 돼.”

장님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그녀가 유은진을 싫어한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유은진의 안색이 좋지 않게 변했다. 하지만 연용태가 보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금세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연용태에게 말했다.

“황자 전하, 곧 점심때인데 오늘은 절에서 식사하시는 것이 어떠세요? 마침, 먹을 걸 좀 가져왔으니, 절에 부탁해 채식 반찬 몇 가지 더해서 드시는 게 어떨까요?”

“나는.”

“네가 모시고 식사하거라. 난 약 때문에 다른 건 못 먹어.”

유경서는 차갑게 거절하며 연용태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연용태는 화내기는커녕 오히려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경서야, 네 모습이 참으로 마음 아프구나. 이대로는 안 되겠다. 나와 함께 경성으로 돌아가자. 어의에게 제대로 진찰받게 해주겠다.”

그 말에 유경서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짐짓 괴로운 척 기침을 했다.

“쿨럭, 쿨럭. 호의는 마음만 받겠습니다. 제 병은 워낙 희귀하여 어떤 약으로도 고치기 힘들 것입니다. 별일 없으시다면 일찍 돌아가 주십시오.”

그녀는 꿈에도 몰랐다.

태자 말고도 이 황자도 그녀에게 마음이 있을 줄은.

원래 인기 있는 건 자랑스러워할 일이었다. 21세기 사회에서도 그녀는 인기를 즐겼다. 하지만 그때도 연애할 생각은 없었고, 하물며 이 낯선 세상에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녀는 연용태에게 절을 하고 몸을 돌려 정자를 나갔다.

“언니!”

“경서야!”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척 고개도 돌리지 않고 승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연용태는 끈질기게 쫓아와 방문 앞에서 그녀를 막아섰다.

“네가 이러니 더욱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게다가 여긴 너무 누추하고 부릴 사람도 별로 없지 않으냐? 내게 별원이 하나 있으니, 거기로 가서 요양하는 게 어떻겠느냐?”

“감사합니다.”

유경서는 예의 바르게 무릎을 굽혀 인사하며 정중히 거절했다.

“비록 이곳이 누추하나 참으로 조용합니다. 며칠 지내다 보니 익숙해졌습니다. 게다가 아버님께서 저를 위해 하신 일일 텐데,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걱정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이곳으로 보낸 게 정말 너를 위함이라 생각하느냐?”

연용태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갑자기 차가워졌다.

“만약 정말 너를 위한다면, 명의를 찾아 병을 고치게 하고 사람을 더 보내 보살폈어야지. 여길 보아라, 이게 요양할 곳이냐?”

유경서는 그가 자신을 위해 불평해 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족에게 학대받고 있다는 말만 안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골치 아팠다.

맹세코 그녀는 지금 상황에 아주 만족하고 있다. 방해하는 사람 없어 편하고, 몰래 사업도 할 수 있으니까.

경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오히려 번거로웠다!

‘태자는 혼인하자고 하고, 이 황자는 이사 가라고 하고, 이 황족들은 평소에 할 일이 그렇게 없나? 왜 내 앞에서 알짱거리는 거야?’

“언니, 이 황자께서 정말 언니 걱정 많이 하셔요. 이 황자께서 여기서 같이 계시는 건 어때요? 언니는 경성으로 가기가 불편하고, 이 황자께서는 언니가 걱정되니, 여기 남으신다면 일석이조 아니겠어요?”

어느새 뒤따른 유은진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유경서는 지금 아픈 척하는 것만 아니었다면, 당장 유은진의 뺨을 후려갈겼을 것이다.

‘유은진, 내가 네 수작을 모를 줄 알고? 이 황자랑 엮어서 풍문을 만들려는 거잖아. 소문이 조금이라도 나면 내 명예는 실추될 것이고, 태자가 싫어할 것이니! 내 물론 태자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바라긴 하지만, 너처럼 뻔뻔한 년이 명예를 더럽히게 놔둘 순 없지!’

“네 동생의 말도 일리가 있다. 내가 남는 것이….”

유은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연용태가 냉큼 맞장구쳤다.

“그건 안 됩니다.”

유경서는 화를 억누르며 그의 말을 끊고 유은진을 흘겨보았다.

“내 일을 언제부터 네가 결정한 것이냐? 내 명예를 실추시키고 싶은 거니?”

“오해예요, 그저 언니를 위해서 그런 겁니다!”

유은진은 금세 억울한 척 해명했다.

“혼자 여기 있으면 심심할 테니까, 말동무라도 있으면 몸도 빨리 나을까 해서 그런 겁니다.”

유경서는 대꾸하기도 싫어, 무표정하게 연용태에게 말했다.

“별일 없으시면 그만 돌아가십시오.”

연용태는 그녀가 진심으로 화난 것을 알아차리고, 더 이상 고집 피우지 않았다.

“그러면 여기서 푹 쉬거라. 더 방해하지 않겠다. 다음에 향 피우러 올 때 들리겠다.”

유경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눈치는 있네.’

연용태는 떠나기 전 그녀를 말없이 응시했다. 아쉬움과 걱정 어린 눈빛이었다.

유경서는 그가 멀어지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려 유은진에게 차갑게 쏘아붙였다.

“안 꺼져?”

연용태가 없으니, 유은진도 본색을 드러냈다.

“정말 주제도 모르고 날뛰네요! 이 황자께서 이렇게 마음을 쓰시는데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니! 좋은 말로 할 때 굽히세요.”

“왜, 또 질투 나니?”

유경서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럴 만도 하지. 이 황자는 나를 좋아하고, 태자는 나 아니면 안 된다고 하니. 당대 최고의 황자 둘이 동시에 나를 찍었으니, 이것이 알려지면 천하의 여인들이 배 아파할 것이다!”

“유경서!”

유은진은 이를 갈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유은진이 그녀를 이렇게 적대하는 것은, 유 가문의 적녀 신분 때문에 경성의 귀공자들이 개미 떼처럼 그녀에게 들러붙기 때문이었다!

유경서는 그걸 제일 잘 알기에 유은진을 자극했다.

“유은진, 잘 들어. 어제 태자 전하께서 내가 죽더라도 내 위패를 태자부로 들이겠다고 선언하셨어.”

“뭐요? 태, 태자 전하께서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눈을 동그랗게 뜬 유은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니까 착하게 좀 살아.”

유경서는 손을 뻗어 혐오스럽다는 듯 그녀를 밀어내고 팔짱을 낀 채 턱을 치켜들었다. “네가 착하게 굴면, 내가 아버지 뜻대로 네가 태자부에 들어가는 것에 힘써줄 수도 있어. 하지만 계속 이렇게 사흘이 멀다고 내 눈에 거슬리게 굴면, 다음에는 태자 전하의 제안을 거절 안 할지도 몰라. 내가 진짜 청혼 받아들이면, 아버지도 어쩔 수 없을걸.”

유은진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고, 손에 쥔 손수건은 날카로운 손톱에 찢어졌다.

“썩 꺼져. 또 방해하면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병이 다 나았다고 해버릴지도 모르니.”

유경서는 얼굴을 굳히고 유은진을 쫓아냈다.

유은진은 분에 겨워 유경서를 노려봤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태자가 그녀의 위패를 들이겠다는 말을 들으니, 한없이 원통했다.

유은진은 결국 분노에 차서 절을 떠났다.

유경서는 방문 앞에 서서 정원 문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태자 하나로도 골치 아픈데, 갑자기 다정다감한 이 황자까지 튀어나오다니. 이젠 정말 떠나야겠다!’

그녀는 몸을 돌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여가려던 찰나, 안에 있던 사람 때문에 깜짝 놀랐다.

병풍 뒤에 숨어 있어야 할 남자가 문 앞에 꼿꼿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얼굴은 어찌나 어두웠는지, 살기가 느껴졌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은 싸늘했다. 수많은 얼음 화살이 그녀를 향해 날아오는 듯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며 그를 올려다보고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들켜서 칼 몇 방 더 맞고 싶은 거예요?”

연기준은 그녀의 어둡고 병색 짙은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말았다.

‘이 여인, 이렇게 추한 꼴을 하고도 사내들을 꼬이게 한다니, 조금만 정상적이었으면 경국지색의 요물이 되었겠구나.’

“비켜요, 길 막지 말고! 기분 안 좋으니까, 건드리지 마요!”

유경서는 등 뒤로 문을 닫고 퉁명스럽게 그를 지나쳐 갔다.

탁자 옆 방석에 앉은 뒤에도, 남자는 여전히 뻣뻣하게 서 있었고 그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

“거기 서서 뭐 하는 거예요? 이리 와요, 상의할 게 있으니.”

연기준은 몸을 돌려 차가운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가 내려다보았다.

유경서는 고개를 들고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고 싶었다.

‘이게 부하의 태도야? 빚 받으러 온 저승사자구먼!’

“요 며칠 시끄러울 것 같으니 여기 계속 있을 순 없어요. 그쪽 부하들 시켜서 절 관리인한테 말 좀 해보세요. 멀리서 온 향객이라고 하고 방 하나 얻을 수 있는지 알아보세요.”

“그다음엔? 이 황자와 밀회라도 즐길 생각인가?”

“밀회?”

유경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헛소리에요? 내가 그 사람들 피하는 거 몰라요? 그리고 내가 누구랑 뭘 하든 그쪽이랑 상관없는 것 같은데요.”

눈빛이 싸늘해진 연기준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난, 난 왕족들을 싫어하오.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가 그들과 어울리는 게 꼴 보기 싫다는 건가요?”

그의 해명을 알아들은 그녀는 바로 눈을 흘겼다.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지, 왜 인상을 쓰는 거예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나한테 불만 있는 줄 알 거예요! 그리고 나도 그 사람들 피하고 있었거든요?”

그의 해명을 이해할 순 있었다. 누구나 권세가에게 아부하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그녀만 해도 권력 있는 자제들과 엮이는 걸 정말 싫어했으니.

연기준은 대꾸하지 않고 슬쩍 그녀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유경서는 문밖을 향해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 때문에 바깥 사업 진도가 늦어졌다. 이삼일 안에 처리하려고 했는데, 이젠 불가능해졌다. 거기다 이 황자까지 끼어들었고, 오늘 보여준 지극정성을 보니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은데. 계획을 다시 짜서 떠나야겠는걸.’

진국장군부.

유은진이 또 순화사에 갔다는 소식에 유정우는 집사를 시켜 그녀를 불러오게 했다.

유은진은 그를 보자마자 억울한 일을 당한 고양이처럼 유정우의 발치에 쪼그리고 앉아 울먹였다.

“아버지, 태자 전하께서 큰언니를 찾아가셨어요. 게다가 큰언니가 죽더라도 위패를 들이겠다고 하셨대요. 아버지, 저는 어떡해요? 태자부에 못 들어가는 건가요?”

의자에 위풍당당하게 앉아 용맹한 기운을 뿜어내던 유정우는 여식 앞에서만큼은 눈매가 한없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여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온화하게 말했다.

“은진아, 조급해하지 마라. 오늘, 이 황자도 네 언니를 만나러 갔다지?”

유은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은 모르지만, 이 아비는 알고 있다. 이 황자는 어릴 때부터 네 언니를 연모해 왔으니, 네 언니를 설득해 이 황자에게 시집보내면 된다. 그리하면 태자 쪽은 해결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큰언니는 이 황자를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 오늘, 이 황자께서 큰언니를 다른 곳으로 옮겨 요양시키겠다고 했는데도 싫다고 했어요! 오히려 저를 꾸짖으면서 쓸데없이 참견한다고 했는걸요.”

유은진은 입을 삐죽거리며 억울해했다.

“혼인 대사는 부모가 정하는 것이거늘, 언제부터 제 맘대로 결정했더냐?”

얼굴이 어두워진 유정우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유은진을 집으로 데려온 후, 장녀는 딴사람이 된 것 같았다. 늘 규율을 지키고 말수 적던 여식은 갑자기 기고만장해진 것도 모자라 말대답도 꼬박꼬박했다. 심지어 아버지인 자신 앞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대들 뿐 아니라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지!’

태자의 청혼은 이치대로라면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그 영광을 유경서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는….

“아버지, 큰언니는 우리 말은 듣지도 않아요. 만약 이 황자에게 시집 안 가겠다고 하면 어쩌죠?”

유은진은 울먹이며 고개를 숙이고 눈가를 훔쳤다.

유정우는 안타까운 듯, 유은진의 어깨를 토닥였다.

“얘야, 내가 경서 어미를 부인으로 맞은 것은 생명의 은혜를 갚기 위함이었다. 남들은 우리가 금슬이 좋은 줄 알지만, 사실 나와 네 어미야말로 진정으로 마음이 통하고 사랑했단다. 하지만 불쌍한 네 어미는 내가 밖에서 전쟁을 치르는 동안 병사하고 말았지. 걱정하지 마라, 앞으로 이 아비가 너희 남매에게 못 해준 것을 다 보상해 줄 테니. 태자비 자리도 반드시 네게 쥐여주겠다.”

“아버지, 저를 이리 생각해 주시니 참으로 기쁩니다.”

유은진은 그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저와 오라버니는 추위에 떨며 늘 배가 고프게 지냈어요. 괴롭힘도 많이 당했지요. 다들 부모 없는 불쌍한 것들이라고 욕했어요. 하지만 이렇게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 곁에 있으니, 하늘에 계신 어머니도 편히 눈감으실 거예요.”

유정우는 가슴 아픈 얼굴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다 지난 일이다. 앞으로 너희 남매는 이 아비가 지켜주겠다. 누구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게다!”

그녀를 달래기 위해 몇 마디 덧붙였다.

“잠시 후에 복린을 시켜 이 황자를 모셔 오게 하겠다. 네 언니 혼사를 의논해야겠다. 아비를 믿어라. 반드시 너를 보란 듯이 태자부에 시집보내주마.”

‘태자 전하께서 굳이 유경서를 고집하는 건 적녀 신분 때문이겠지. 그러니 경서의 혼사를 먼저 확정 지으면, 나를 포섭하기 위해선 은진이를 부인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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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대위에 오르기 전에, 연기준에게 주어진 것은 두 선택뿐이다. 죽거나, 황조부께서 남긴 보물을 내놓거나! 한편, 유경서는 외딴 작은 촌락에 도착했다. 유경서는 앉아 있는 방 안을 둘러보며 젓가락을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은 남자에게 물었다. “돈을 내고 집까지 빌린 건데, 왜 좀 더 넓은 곳으로 빌리지 않은 거예요?”이곳이 나빠서 불평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방 하나짜리 집은 한없이 작았기 때문이다. 집주인은 그가 은자 한 덩이를 주자, 기뻐하며 아들 내외의 집으로 옮겨갔다. 주인의 며느리 삼이는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가져다 주었고, 방 안의 베개와 이불도 새것으로 갈아두었다.그들이 여기에 머물게 된 것은, 경성을 나서자마자 누군가에게 추적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쫓는 사람들을 따돌리기 위해, 몰래 마차에서 내려 북쪽으로 도망쳤고, 장주와 우휘는 마차를 계속 몰아 남쪽으로 향했다.연기준을 상처를 입었던 탓에, 그녀는 임시방편으로 이 마을에 잠시 머물기로 했다. 이곳에서 요양하면서, 장주와 우휘를 기다리기로 했다. 은자 한 덩이를 지불하고도 이토록 협소한 집을 얻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바깥에 붙은 측간까지 더해 보아도 겨우 십여 평방 남짓할뿐, 바닥에 이불 한 채 펼 자리조차 없었다!연기준은 무심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작을수록 사람들의 눈에 띄기 쉽지 않지.” “여기서 자지 말고, 아무 데나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서 자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요?”연기준은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그녀의 밥그릇에 놓았다.“백 년 뒤면 결국 한 구덩이 무덤에서 함께 누울 터인데, 무엇이 그리 급하단 말인가?”“당신.” 유경서는 하마터면 그의 얼굴에 피를 토할 뻔했다.“많이 먹어두게.” 연기준은 그녀의 불만스러운 표정을 보지 못한 듯, 턱으로 그녀 앞의 밥그릇을 가리키며 그녀의 몸을 훑었다. “몸에 살집이 없더군.”유경서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였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가슴을 내밀고 허리에 손을 얹

  • 음흉한 진왕의 덫에 걸리다   제26화

    유경서는 생각지도 못한 도움에 크게 감동했다. “장주, 고마워.”장주는 연기준에게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아가씨, 모두 주인님께서 시키신 일입니다. 감사할 거면 주인님께 하셔야죠.”유경서는 맞은편 남자를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쪽이 이렇게까지 세심히 배려해 주실 줄은 몰랐네요.”연기준은 싸늘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 “우리는 이미 부부의 정을 나눴고, 그대 일은 곧 나의 일이다.”유경서는 너무 어색한 나머지 쥐구멍으로라도 숨고 싶었다.가능하다면, 정말 그와 솔직하게 터놓고 말하고 싶었다. 서로 맞지 않다고.그녀의 출신은 말할 것도 없고, 단순히 두 사람의 성격만 봐도 맞지 않았다. 하물며 습관, 가치관, 인생 목표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혼인을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시집갈 생각은 없었다. 종일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그녀가 전생에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보였다. 저런 사람과 같이 지내면 얼마나 답답할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에 훤했다소위 말하는 달콤하고, 웃음 넘치고, 행복한 생활은 그녀와 인연이 없는 것 같았다. 동궁.첩자가 가져온 소식에 연용화는 매우 놀랐다. “경성을 나섰다고? 혼자 나가더냐?”첩자는 말했다. “분명 혼자 경성을 나섰습니다.”연용화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이것은 분명 유인하려는 계책이다! 그렇지 않다면, 필시 다른 음모가 있는 것이다!”늘 행방이 묘연하던 진왕이 대놓고 경성을 나서는 것은, 그의 행동 방식에 어긋났다.게다가 그는 이미 진왕과 유경서가 한 객잔에 함께 있는 것을 목격했다. 두 사람은 분명 마음을 나눴을 것이다. 현재 상황으로 볼 때, 진왕은 혼사 준비에 힘써야 마땅했다. ‘이런 시기에 유경서를 내버려두고 경성을 떠나다니? 무슨 속셈이지?’무언가 생각난 듯, 연용화는 첩자에게 물었다. “유 가문은 무슨 움직임이 있느냐? 유정우가 유경서를 잡아들였느냐?”첩자가 답했다. “여전히 거리에서 아가씨를 찾고

  • 음흉한 진왕의 덫에 걸리다   제25화

    혜씨는 그녀를 재촉하지 않은 채 조용히 탁자 위 그릇들을 거두었다.결국 유경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뒷문에 이르자, 정말로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거칠게 수염을 기른 마부 둘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순간 그녀는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변장하고 뭐 하려는 거야?”장주는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일단 마차에 타시죠. 가면서 이야기하겠습니다.”유경서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날려 마차에 올라탔다.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싸늘한 눈빛을 지닌 그와 시선이 맞부딪혔다. 깊고 어두운 그 눈은 마치 어떤 것도 통과시키지 않을 심연 같았다.그녀는 좀처럼 담담하지 못했다. 그와 피부를 맞댄 후에는, 겉으로는 아무리 태연한 척해도, 마음속은 혼란스러웠다.“그, 상처는 좀 어때요?” 그녀는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걱정하는 척 물었지만, 속으로는 그가 자초한 일이라고 중얼거렸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면모와 절제력이 있었더라면, 상처가 터지지는 않았을 것이다.“괜찮다.” 연기준은 차갑게 답했다.유경서는 갑자기 그의 차가운 입술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입술은 왜 그래요? 입이 헌 거예요?”그녀가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녀의 말에 연기준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개한테 물렸다!”유경서는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어쩌다가 개한테 물린 거예요?”누가 들어도 그녀의 웃음은 장난스러운 놀림이 분명했다.하지만 그 방자한 웃음소리가 연기준의 귀에 꽂히는 순간, 그는 설명하기 어려운 수치와 분노가 뒤섞여 치밀어 올랐다.그는 입술을 꽉 깨물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험한 기운을 느낀 유경서는 갑자기 웃음을 멈췄다. “왜 그래요? 내가 문 것도 아니잖아요! 자기 입으로 말해놓고, 왜 나한테 그래요!”연기준은 주먹을 꽉 쥐었고, 손가락 마디에서 소리가 났다.그는 화가 난 듯 고개를 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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