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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일비당
“쿨럭, 쿨럭!”

장주는 기침을 하다가 웃음을 참으며 팔꿈치로 우휘를 쳤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왜, 내가 틀린 말 했나?”

우휘는 옷이 꽉 끼어 가슴팍이 훤히 드러난 연기준을 가리키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잘 봐, 전하께서 입으신 옷이 누구의 것인지? 상처를 아가씨가 치료했고, 옷도 전하의 것이 아니니, 전하께서 몸을 다 보였단 소리 아니냐? 여인 손 한 번 잡아본 적 없으신 분의 몸을 여인이 만졌으니, 정조를 잃으신 거지!”

장주는 어깨를 들썩이며, 애써 웃음을 참으려고 했다.

“다 지껄였느냐?”

연기준이 이를 갈면서 말했다.

다행히 방 안이 어두웠던 덕에, 시커멓게 변한 그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다.

우휘는 연기준의 날카로운 눈빛에 즉시 고개를 숙였다.

“전, 전하, 놀리려던 것이 아니라, 그저, 그저….”

“닥쳐라!”

연기준은 낮게 호통치며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말했다.

“썩 꺼지거라!”

“네.”

우휘는 잽싸게 바닥에서 일어나 토끼처럼 밖으로 튀어 나갔다.

“노여움을 푸십시오. 상처 덧나십니다.”

장주는 웃음을 참으며 달랬다. 불똥이 자신에게 튈까 봐 얼른 화제를 돌렸다.

“다른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오늘 밤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돌아가서 내 짐을 챙겨서 이곳으로 오너라.”

“여기 머무르시겠습니까?”

장주는 방 안을 다시 훑어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여긴 아가씨의 방인 듯한데, 혹 두 분께서….”

“내 몸을 다 봤으니, 책임지라고 할 것이다. 안 될 거 있느냐?”

연기준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아.”

장주의 눈가와 입꼬리가 떨렸다.

‘아가씨에게 반하신 거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쁠 것도 없었다.

그녀는 진국장군부의 적녀로, 자신의 주군과 꽤 잘 어울렸다.

‘하지만….’

장주는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급히 말했다.

“기억하십니까? 이 황자께서 유 장군의 여식을 연모한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설마 조카와 여인을 다투시려는 건가?’

연기준의 몸이 살짝 굳었다. 어두운 방이라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움직임 정도는 보였다.

장주는 불안한 마음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곧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연모? 연모한 지가 몇 년인데, 진심이었다면 이 여인이 아직도 이곳에 있겠느냐?”

장주는 고개를 숙이고 코를 만지작거렸다.

‘괜히 주군의 화 돋워봤자 고생하는 건 나니까 입을 다물자.’

“밤이 깊었으니, 쉬십시오. 짐을 챙겨서 동트기 전에 오겠습니다.”

“그래.”

평정심을 잃은 연기준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한편, 홍이가 밥 가져올 시간에 맞춰 절로 돌아오던 유경서는 오늘 사뭇 달랐다.

승방에 사내가 있다는 생각에 여러 곳의 대접을 거절하고 음식을 싸서 서둘러 돌아왔다. 하지만 바쁜 업무 탓에 절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닭이 울 시각이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방 안에 늘어난 두 검은 그림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누구요?”

“내 수하들이오.”

“수하도 있었어요?”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연기준을 쳐다보았다.

“장주와 우휘라고 합니다. 저희 주인님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오늘부터 저희는 주인님과 함께 아가씨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장주와 우휘는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고, 유경서는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참 애쓴다. 저렇게 긴 말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하다니.’

그녀는 말없이 탁자로 가서 등불을 켠 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둘 다 스무 살 남짓 되어 보였는데, 장주는 마른 체격의 선비 같았고, 우휘는 피부가 검고 장주보다 체격이 건장해 보였는데 좀 우직해 보였다.

그녀는 문 뒤의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좁은 곳에 저들까지 다 지내게 할 셈인가요?”

“저들은 갈 데가 있으니 신경 쓸 것 없소.”

연기준은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말했다.

“다행이네요.”

유경서는 다시 두 사람에게 말했다.

“안 그래도 밥이 모자라는데, 두 사람까지 끼면 다 같이 굶어 죽을 뻔했습니다.”

우휘는 그녀를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유 가문의 아가씨신데 설마 굶겠습니까?”

유경서는 손을 저어 그들에게 일어나라고 한 뒤, 방 안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여기 연금됐어. 비록 장군부 아가씨지만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태자한테 시집가고 싶어 안달이 났지. 근데 태자는 그 아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굳이 나랑 혼인하겠다고 하니, 아버지께서 그 아이를 태자비 만들려고 내가 병들었다고 소문내고 여기다 가둬놓은 거야.”

이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그들을 믿어서가 아니었다. 말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어제 태자가 절에 왔을 때, 연기준은 이미 그녀와 태자의 대화를 다 들었다.

“유 장군께서 아가씨를 태자에게 시집보내기 싫어한다면, 안 가면 그만 아닙니까?”

우휘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고, 유경서는 입술을 다물고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휘는 그녀의 차가운 태도를 못 본 척 계속 웃으며 물었다.

“아가씨, 태자에게 시집 안 가시는 건 마음에 둔 분이 있어서입니까?”

그 말에 유경서는 눈을 흘기며 그를 쏘아보았다.

“뭐 하자는 거야?”

우휘가 입을 열려는 순간, 문 뒤에서 낮고 차가운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우휘는 등이 뻣뻣해지며 웃었다.

“아닙니다. 그냥 궁금해서 여쭤본 겁니다.”

장주는 옆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그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만하거라. 두 분께서 쉬시게 방해하지 말자.”

그들이 문밖으로 잽싸게 사라지는 것을 보던 유경서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무슨 말이야? 우리 둘이 쉬는 걸 방해하지 말라니?’

그녀는 문 뒤의 남자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눈을 감은 채 아무것도 못 들은 척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 쪼그리고 앉았다.

그의 다리 옆에 보따리가 하나 더 늘어 있었다. 묻지 않아도 두 사람이 가져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왜 그쪽을 데리고 가지 않은 건가요?”

그녀의 질문에 연기준은 눈을 떴고, 그윽한 눈빛이 드러났다. 깊은 연못처럼 빠져들 것 같았다.

“계약을 맺었으니, 약속을 지켜야지.”

“신용은 있나 봅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구한 보람이 있습니다. 상처나 잘 치료하세요. 돈 다 벌어주면 나도 섭섭지 않게 대우해 줄 테니.”

유경서는 짐짓 그의 눈빛을 피하며 말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정신을 차릴수록 기세도 강해지는 것 같았다.

분명 고용주는 자신이지만, 그와 눈이 마주치면 괜스레 조심스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와 최대한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적으로 돌리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듯했다.

연기준은 대꾸하지 않고 다시 눈을 감았다.

사실 떠나려면 언제든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친 몸으로 경성에 돌아가는 건 불편했다.

만일 그를 의도적으로 노리는 자들에게 발각되면, 그들은 그가 병든 틈을 타 목숨을 노릴 것이다. 경성에 돌아가 문제를 자초하느니, 그녀 곁에 머물며 상처를 치료하는 편이 나았다.

유경서는 다리 옆의 보따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뭐죠?”

“옷.”

“그쪽 거예요?”

그가 눈을 뜨지 않자, 그녀는 손을 뻗어 보따리를 열어보았다.

확실히 옷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터질 듯한 야행복을 입은 그를 보며 무심히 말했다.

“왜 수하들에게 갈아입혀 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깜빡했소.”

그녀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대가 좀 갈아입혀 주시오.”

그녀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얼마 후, 등불이 꺼지고 방은 어둠에 잠겼다.

유경서는 침상 가에 서서 헐렁한 바지를 손에 쥔 채, 침상 위의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이봐요, 협조 좀 하지 그래요? 자꾸 굼뜨게 굴면 밖으로 던져버릴 거예요!”

“움직일 수가 없소.”

남자는 허리를 굽히려고 시늉하다가 이내 신음을 냈다.

“움직이지 마요!”

유경서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참으며 낮게 소리쳤다. 그리고 몸을 굽혀 그의 두 발을 바짓단에 각각 끼워 넣었다.

그녀는 점점 후회되었다.

‘괜히 근로 계약서는 써가지고, 이건 수하를 들인 게 아니라 상전을 모신 꼴이네!’

그녀의 불만이 극에 달한 것을 느꼈는지, 연기준은 꽤 협조적인 모습을 보이며, 허리띠는 스스로 묶었다.

지금 원망스러운 마음이 그 어떤 것보다 컸던 그녀는 눈앞의 절세 미남의 조각 같은 몸매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병풍으로 작은 공간을 만들고 이불을 바닥에 깔았다.

바닥에 그의 잠자리를 마련하려던 그때, 단정히 앉아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측간에 가고 싶소.”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그를 쏘아보았다.

“같이 가주시오.”

부끄러운 기색없이 쾌활하게 말하는 그의 태도에 그녀는 화가 났다.

“왜, 똥통에 빠질까 봐 겁나요? 다리를 다친 거지, 다리가 없는 건 아니잖아요. 똥 싸러 간다고 안 죽어요!”

‘결정했다. 내일 수하들이 오면 데려가라고 해야겠다! 이 골치 아픈 남자, 반품해야지!’

남자는 그녀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마치 그녀보다 더 불만스럽다는 듯이.

“바지까지 갈아입혀 줄 생각이었군?”

그의 능청스러운 말에 그녀는 뒷목을 잡았다.

유경서는 오늘, 유난히 어제보다 더 피곤했다.

오후에 늘 낮잠을 잤던 그녀는 홍이가 아침을 가져온 후부터 쭉 잠을 잤다.

방 안의 남자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하여 홍이가 가져온 밥과 어젯밤 싸 온 음식들도 몽땅 떠넘겼다.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점심때가 되기도 전에 홍이가 문밖에서 그녀를 불렀다.

화들짝 놀란 그녀는 눈을 번쩍 떴다. 창밖의 하늘을 보니 아직 밥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큰 아가씨, 이 황자께서 밖에서 뵙기를 청합니다. 둘째 아가씨도 같이 오셨습니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유은진이 찾아온 건 이상할 게 없었다.

어제 태자가 다녀갔으니 가문 사람들을 통해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황자가 찾아온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유경서의 전생 기억에서는, 이 황자와 인사나 나누는 사이였다.

‘갑자기 유은진과 함께 나타나다니,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이지?’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문밖을 향해 말했다.

“정원에서 기다리시라 해라. 금방 나가마.”

홍이가 대답하고 물러갔다.

유경서는 침상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고 옷매무새를 다듬다가 곁눈질로 병풍을 보았다. 그가 깨어 있든 말든 개의치 않고 낮은 목소리로 당부했다.

“얌전히 있어요, 소리 내지 말고.”

“이리 와 보시오.”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병풍 너머 작은 공간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한 그녀는 불만을 억누르고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이 황자를 좋아하는가?”

“누가 그래요?”

그녀는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태자한테 시집가기 싫어하는 것이, 이 황자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아니면?”

“아니면은 무슨! 이놈 아니면 저놈한테 시집가야 하는 건가요? 시집 안 가면 죽기라도 한 답니까?”

그는 이단아 보듯 탐구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경서는 어깨를 으쓱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사내대장부가 이렇게 남의 뒷얘기에 관심이 커질 줄은 몰랐네요. 내 부하가 된 정을 봐서 알려주는데, 내 인생에 혼인은 없을 거예요. 앞으로 무슨 소릴 듣든 나와 관련된 혼인 이야기는 전부 개소리라고 여기면 됩니다. 웃어넘기면 될 일이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그의 눈빛이 이내 밝아졌다.

“개소리가 무슨 뜻이오?”

“음.”

유경서는 멈칫했다. 그제야 자신이 선을 넘는 단어를 썼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정색하며 설명했다.

“개가 말을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헛소리라는 뜻이에요.”

연기준은 얇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고, 그녀를 바라보던 눈빛이 다시 어두워졌다.

유경서는 속내를 알 수 없는 그의 날카로운 눈빛을 담당하기 어려웠다. 피부와 뼈를 뚫고 오장육부까지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어깨 위의 머리카락을 정리하여 아무렇게나 뒤로 넘기고 문을 열고 나갔다.

어제의 그 정자였다.

유경서는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으로, 이 황자, 연용태에게 예를 올렸다. 하지만 무릎을 굽히기도 전에 연용태가 다가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여긴 경성이 아니니, 경서 너는 예의 차릴 것 없다.”

친근하게 그녀를 부르는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전에, 이 황자와 친했었나? 왜 기억이 없지?’

“안색이 어찌 이리 나쁜 것이냐? 대체 무슨 병이기에, 이 지경이 된 것이냐? 왜 경성의 의원에게 보이지 않고 여기 와 있는 것이냐?”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근심 어리게 쳐다보는 잘생긴 얼굴을 마주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겉으로 예의 바르게 답했다.

“걱정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어릴 때부터 괴이한 병을 앓았는데, 요즘 병이 다시 도졌습니다. 아버님께서 이미 의원에 데려갔으나, 의원이 요양해야 한다고 하여 이곳으로 보내셨습니다.”

연용태는 병색이 완연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분개했다.

“그 큰 장군부에 조용한 곳 하나 없단 말이냐? 굳이 이곳까지 와야 했단 말이냐? 내 경성을 떠난 지 반년 만에, 네가 병마에 시달려 이리 초췌해질 줄이야!”

유경서는 자기 얼굴을 만졌다. 자신의 몰골을 알고 있었다.

어제 태자를 속이려고 일부러 화장했고, 아직 세수하지 않았기에 상태가 좋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좀 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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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대위에 오르기 전에, 연기준에게 주어진 것은 두 선택뿐이다. 죽거나, 황조부께서 남긴 보물을 내놓거나! 한편, 유경서는 외딴 작은 촌락에 도착했다. 유경서는 앉아 있는 방 안을 둘러보며 젓가락을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은 남자에게 물었다. “돈을 내고 집까지 빌린 건데, 왜 좀 더 넓은 곳으로 빌리지 않은 거예요?”이곳이 나빠서 불평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방 하나짜리 집은 한없이 작았기 때문이다. 집주인은 그가 은자 한 덩이를 주자, 기뻐하며 아들 내외의 집으로 옮겨갔다. 주인의 며느리 삼이는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가져다 주었고, 방 안의 베개와 이불도 새것으로 갈아두었다.그들이 여기에 머물게 된 것은, 경성을 나서자마자 누군가에게 추적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쫓는 사람들을 따돌리기 위해, 몰래 마차에서 내려 북쪽으로 도망쳤고, 장주와 우휘는 마차를 계속 몰아 남쪽으로 향했다.연기준을 상처를 입었던 탓에, 그녀는 임시방편으로 이 마을에 잠시 머물기로 했다. 이곳에서 요양하면서, 장주와 우휘를 기다리기로 했다. 은자 한 덩이를 지불하고도 이토록 협소한 집을 얻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바깥에 붙은 측간까지 더해 보아도 겨우 십여 평방 남짓할뿐, 바닥에 이불 한 채 펼 자리조차 없었다!연기준은 무심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작을수록 사람들의 눈에 띄기 쉽지 않지.” “여기서 자지 말고, 아무 데나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서 자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요?”연기준은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그녀의 밥그릇에 놓았다.“백 년 뒤면 결국 한 구덩이 무덤에서 함께 누울 터인데, 무엇이 그리 급하단 말인가?”“당신.” 유경서는 하마터면 그의 얼굴에 피를 토할 뻔했다.“많이 먹어두게.” 연기준은 그녀의 불만스러운 표정을 보지 못한 듯, 턱으로 그녀 앞의 밥그릇을 가리키며 그녀의 몸을 훑었다. “몸에 살집이 없더군.”유경서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였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가슴을 내밀고 허리에 손을 얹

  • 음흉한 진왕의 덫에 걸리다   제26화

    유경서는 생각지도 못한 도움에 크게 감동했다. “장주, 고마워.”장주는 연기준에게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아가씨, 모두 주인님께서 시키신 일입니다. 감사할 거면 주인님께 하셔야죠.”유경서는 맞은편 남자를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쪽이 이렇게까지 세심히 배려해 주실 줄은 몰랐네요.”연기준은 싸늘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 “우리는 이미 부부의 정을 나눴고, 그대 일은 곧 나의 일이다.”유경서는 너무 어색한 나머지 쥐구멍으로라도 숨고 싶었다.가능하다면, 정말 그와 솔직하게 터놓고 말하고 싶었다. 서로 맞지 않다고.그녀의 출신은 말할 것도 없고, 단순히 두 사람의 성격만 봐도 맞지 않았다. 하물며 습관, 가치관, 인생 목표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혼인을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시집갈 생각은 없었다. 종일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그녀가 전생에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보였다. 저런 사람과 같이 지내면 얼마나 답답할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에 훤했다소위 말하는 달콤하고, 웃음 넘치고, 행복한 생활은 그녀와 인연이 없는 것 같았다. 동궁.첩자가 가져온 소식에 연용화는 매우 놀랐다. “경성을 나섰다고? 혼자 나가더냐?”첩자는 말했다. “분명 혼자 경성을 나섰습니다.”연용화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이것은 분명 유인하려는 계책이다! 그렇지 않다면, 필시 다른 음모가 있는 것이다!”늘 행방이 묘연하던 진왕이 대놓고 경성을 나서는 것은, 그의 행동 방식에 어긋났다.게다가 그는 이미 진왕과 유경서가 한 객잔에 함께 있는 것을 목격했다. 두 사람은 분명 마음을 나눴을 것이다. 현재 상황으로 볼 때, 진왕은 혼사 준비에 힘써야 마땅했다. ‘이런 시기에 유경서를 내버려두고 경성을 떠나다니? 무슨 속셈이지?’무언가 생각난 듯, 연용화는 첩자에게 물었다. “유 가문은 무슨 움직임이 있느냐? 유정우가 유경서를 잡아들였느냐?”첩자가 답했다. “여전히 거리에서 아가씨를 찾고

  • 음흉한 진왕의 덫에 걸리다   제25화

    혜씨는 그녀를 재촉하지 않은 채 조용히 탁자 위 그릇들을 거두었다.결국 유경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뒷문에 이르자, 정말로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거칠게 수염을 기른 마부 둘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순간 그녀는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변장하고 뭐 하려는 거야?”장주는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일단 마차에 타시죠. 가면서 이야기하겠습니다.”유경서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날려 마차에 올라탔다.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싸늘한 눈빛을 지닌 그와 시선이 맞부딪혔다. 깊고 어두운 그 눈은 마치 어떤 것도 통과시키지 않을 심연 같았다.그녀는 좀처럼 담담하지 못했다. 그와 피부를 맞댄 후에는, 겉으로는 아무리 태연한 척해도, 마음속은 혼란스러웠다.“그, 상처는 좀 어때요?” 그녀는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걱정하는 척 물었지만, 속으로는 그가 자초한 일이라고 중얼거렸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면모와 절제력이 있었더라면, 상처가 터지지는 않았을 것이다.“괜찮다.” 연기준은 차갑게 답했다.유경서는 갑자기 그의 차가운 입술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입술은 왜 그래요? 입이 헌 거예요?”그녀가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녀의 말에 연기준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개한테 물렸다!”유경서는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어쩌다가 개한테 물린 거예요?”누가 들어도 그녀의 웃음은 장난스러운 놀림이 분명했다.하지만 그 방자한 웃음소리가 연기준의 귀에 꽂히는 순간, 그는 설명하기 어려운 수치와 분노가 뒤섞여 치밀어 올랐다.그는 입술을 꽉 깨물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험한 기운을 느낀 유경서는 갑자기 웃음을 멈췄다. “왜 그래요? 내가 문 것도 아니잖아요! 자기 입으로 말해놓고, 왜 나한테 그래요!”연기준은 주먹을 꽉 쥐었고, 손가락 마디에서 소리가 났다.그는 화가 난 듯 고개를 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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