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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일비당
순화사.

유경서의 제안을 연기준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날 밤 장주와 우휘는 멀리서 온 향객으로 위장해 꽤 많은 은자를 내고 당당히 절 안에 머물게 되었다.

그들이 머무는 승방은 그녀의 경방에서 작은 정원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그들이 여기서 지내니 그녀도 한결 편해졌다.

유은진이 다시 찾아와 행패 부릴 것에 대비하고 있었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조용했고, 유은진은 다시 오지 않았다.

대신 옆 승방에서 아침을 먹던 연기준이 밥상을 엎으며 성질을 부렸다.

“이 황자도 유 가문에 청혼했다고? 유정우가 자기 여식을 그에게 주기로 했단 말이냐?”

“전하, 노여움 푸십시오.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유 장군이 누구의 혼사를 정한 것인지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우휘가 급히 그를 위로했다.

“네 생각엔 누굴 시집 보낼 것 같으냐?”

연기준은 얼굴을 붉히며 되물었다.

“그,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우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모르는 척했고, 옆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장주는 참지 못하게 한마디 했다.

“아가씨께서 전하의 은인이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좋아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것이 여인입니다. 그분 때문에 흙탕물에 발을 담그실 생각입니까?”

연기준은 자기 무릎을 내려다보며 한동안 침묵했다.

‘좋아한다고? 겨우 며칠 만에, 어떻게 좋아하게 될 수 있는가!’

그는 그저 자신이 희롱당했다고 느꼈을 뿐이다.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오히려 협박하고 노예처럼 부리려 했으니, 억울하고 분해서 이러는 것이다! 다 나으면 반드시 본때를 보여줄 것이다! 복수하기 전까지 시집가면 안 되지! 시집가서 뒷배라도 생기면, 내가 당한 굴욕을 어떻게 갚겠는가?’

장주와 우휘는 은밀히 눈빛을 교환했다.

그를 잘 타일렀다고 생각한 순간, 연기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는 부로 돌아가 예물을 준비해라. 즉시 유 가문에 청혼하러 가야겠다!”

“네?”

두 호위무사는 동시에 소리쳤다.

“내일 내가 청혼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거든, 내 앞에 나타날 생각 마라!”

“전하.”

우휘는 정신을 차리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네, 즉시 거행하겠습니다.”

하지만 장주가 우휘의 말을 끊고 팔을 잡아끌어 승방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문밖에서 우휘는 장주의 손을 뿌리치고 불만스럽게 노려보았다.

“뭐 하는 거야? 나 아직 할 말 남았다!”

장주는 곱상한 얼굴을 굳히고 그를 쏘아보았다.

“이것은 전하의 일생일대 대사다. 무슨 말을 하려고? 설마 혼사를 막으려는 거냐?”

“난….”

“여인의 손 한 번 못 잡으시는 분께서 이제 겨우 마음에 두신 여인이 생겼다는데, 잘되는 꼴을 그리도 못 보겠느냐?”

“그렇네.”

우휘는 장주의 말이 일리 있다고 여겼다.

“됐어, 빨리 돌아가자. 왕비를 태자나 이 황자에게 빼앗기면 우리 목이 달아날 거다!”

장주는 우휘의 아둔함을 타박하며 산 아래로 밀었다.

“가자, 가!”

진국장군부.

유정우는 서재에서 유은진과 어떻게 하면 유경서가 이 황자의 청혼을 받아들이게 할지 의논하고 있었다.

그런데 집사, 복린이 갑자기 들어왔다.

“대장군, 진왕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진왕부?”

유정우는 의아해하며 집사를 쳐다보았다.

“진왕 전하께서는 남쪽으로 순시 나가지 않았더냐? 언제 돌아온 것이지?”

“아니요, 진왕 전하께서 오신 게 아니라 진왕부 사람들이 왔습니다. 예물을 잔뜩 들고 와서 큰 아가씨께 청혼하러 왔다고 합니다!”

복린이 급히 설명했다.

“뭐라고? 진왕 전하께서 경서에게 청혼을?”

깜짝 놀랐던 유정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은진도 놀라서 물었다.

“아버지, 진왕 전하라면 이 황자의 황숙이 아닌가요? 처를 잡아먹는다지요? 진왕부에 들어간 여인들은 죄다 미쳐버렸다는 소문이 있잖아요! 큰언니가 어떻게 진왕 전하의 눈에 든 것이죠?”

유정우는 눈썹을 찌푸렸다. 화가 난 건 아니었지만, 안색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가보자!”

말을 마친 그는 황급히 서재에서 빠져나왔다.

세간의 소문은 차치하고라도, 청혼하러 온다는 것 자체가 진왕답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기가 너무 공교로웠다.

‘하필 이때 청혼을 한다니. 만일 황숙이 친조카와 여인을 두고 다툰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조정이 발칵 뒤집힐 일이다!’

유은진은 바로 따라나서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이를 갈았다. 그녀의 눈에는 질투와 증오가 가득했다.

‘원통해! 원통해! 정말 원통해! 유경서 그 천한 것이 감히, 옥연국에서 가장 존귀한 사내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다니! 적녀라고? 까놓고 말해서 진국장군부와 아버지를 믿고 까부는 거잖아! 그 천한 것만 없으면 내가 진국장군부의 유일한 여식이 될 것이고, 그 사내들도 나만 바라볼 텐데! 이해가 안 돼, 어떻게 독을 썼는데, 죽지 않은 거지? 분명 성공했는데 어떻게 살아난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독을 더 써서 확실하게 죽여야 했는데!’

얼마 후 순화사까지 찾아온 유정우에 유경서는 적잖게 놀랐다.

“어머, 무슨 바람이 불어 아버님께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제가 죽었나 살았나 확인하러 오셨습니까?”

“너!”

유경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유정우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그는 얼굴을 굳히고 손가락질하며 따져 물었다.

“언제 진왕 전하와 눈이 맞았느냐?”

“눈이 맞다뇨? 진왕 전하와요?”

유경서는 영문을 몰라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심상치 않은 유정우의 모습은 마치 그녀가 엄청난 부정한 짓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유은진을 태자비로 만들겠다고, 아버님께서는 기어이 저를 더럽히시려는 겁니까? 유 가문 체면이 땅에 떨어져도 상관없다는 건가요?”

“이 괘씸한 것이, 어디서 함부로 입을 놀려!”

유정우가 팔을 번쩍 쳐들었고, 그녀는 재빨리 몸을 피했다.

그녀는 웃음을 거두고 차가운 얼굴로 그를 혐오스럽게 노려보았다.

“제가 틀린 말 했습니까? 아니면 정곡이라도 찔렸습니까?”

지난 반년 동안 겪은 일들 때문에, 그녀는 소위 아버지라는 사람을 존경할 수 없었다!

게다가 유 가문 큰 아가씨는 이미 유은진에게 독살당했다.

죽었으니, 유 가문과의 모든 인연도 다 끝난 셈이다.

21세기의 영혼인 그녀는 비록 유경서의 몸은 빌렸지만, 유 가문의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 유정우의 눈치를 보며 휘둘릴 명분이 없었다.

유정우는 때리지 못하자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

“말해라, 진왕 전하와 무슨 사이냐? 왜 그분께서 네게 청혼을 한단 말이냐?”

유경서는 눈썹을 찌푸렸다.

‘진왕과 무슨 사이이긴? 아무 사이도 아닌데! 진왕이 성격이 괴팍하다는 소문만 들었지, 얼굴도 모르는 판에 무슨 사이냐니?’

하지만 그녀는 진왕이란 인물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현 황제의 친동생이자 선황의 막내아들로, 현 황제와는 스무 살 차이가 나고 심지어 태자보다 한 살 어리다고 했다.

태자의 청혼은 그녀도 이해가 되었다. 그녀의 아버지인, 유정우의 병권이 걸린 문제였기에.

‘하지만 진왕은 왜? 역시 병권 때문인가?’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항렬이 다른 황숙과 조카가 한 여인에게 청혼했다는 것이다.

‘이 무슨 막장 드라마인가?’

그녀의 머리가 복잡해지던 찰나, 유정우가 차갑게 말했다.

“이 황자께서도 친히 예물을 보내셨다. 네게 지극정성이니, 네가 승낙만 하면 그분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다!”

“뭐라고요? 이 황자도요?”

유경서는 갑작스러운 이 황자의 청혼 소식에 펄쩍 뛸 뻔했다.

“어떻게 하겠느냐?”

유정우는 뒷짐을 지고 서서 위압감을 뿜어내며 위협적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당장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도 욕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간신히 이성을 붙잡았다.

‘곧 경성을 떠날 텐데, 지금 유정우와 척을 지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혼사를 승낙하는 척해서 잠시 평화를 얻고, 돈 챙겨 도망갈 시간을 버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다만 누구를 약혼자로 고르느냐, 이것이 문제로구나. 일단 태자는 제외해야겠지, 유정우 부녀의 보복이 두려우니까. 게다가 이미 여자가 있는 남자는 나도 싫어. 아무리 감정 없는 혼인이라고 해도 다각 관계는 질색이다. 이 황자와 황숙인 진왕? 이 황자가 다정해 보이긴 하지만, 진왕은 웃어른이다. 조카며느리보다는 숙모 자리가 훨씬 낫지 않은가! 따지고 보면 태자보다 윗사람인 셈이니! 무엇보다 진왕을 택하면 태자가 나를 미워한다 해도 황숙인 진왕이 막아줄 테니 무서울 게 없지 않은가!’

“결정했느냐?”

“진왕 전하요.”

“확실하냐?”

유정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네.”

유경서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결정했으니, 이 아비는 진왕 전하에게 답을 주고 날을 잡으마.”

유정우가 순화사까지 온 것은 그녀의 답을 듣기 위해서였다. 목적을 달성하자 그는 더 머무르지 않고, 곧장 떠나버렸다. 걱정하는 말 한마디 없었다.

유경서는 경멸 어린 시선으로 멀어지는 유정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었던 그녀는 옆 승방에 묶고 있는 세 사람이 생각나, 담을 넘어 옆 승방 문 앞으로 날아갔다.

그녀가 오자 우휘는 열정적으로 그녀를 안으로 모셨다. 방석을 깔아주고 차를 올리며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연기준에겐 별 호감이 안 갔지만 부하들은 맘에 들었다. 장주는 의술까지 뛰어나, 곁에 두면 이득일 것 같았다.

연기준과만 계약했으나, 덤으로 유능한 부하 둘을 얻었으니 이런 남는 장사가 어디 있겠는가.

“아가씨, 유 장군께서 오셨다면서요?”

우휘가 바닥에 앉아 말을 걸었다.

그녀는 우휘가 남들처럼 유정우를 숭배하는 줄 알고, 별 불만 없이 대답했지만, 불편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래.”

“유 장군께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가씨를 데려가시려고요?”

“아니.”

“그럼, 유 장군께서….”

“시집가라고 협박하러 왔다.”

그녀는 무심하게 답하면서,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며칠 뒤에 딴 데로 갈지도 몰라.”

“딴 데로요? 경성으로 안 가십니까?”

우휘는 멀지 않은 곳에서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연기준을 쳐다보았다.

예상대로 연기준은 눈을 번쩍 뜨고 그녀를 쏘아보았다.

장주가 다가와 의아한 듯 물었다.

“아가씨, 무슨 일입니까? 왜 딴 데로 가십니까?”

그녀는 이들의 정체는 알지 못했지만,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며칠 전 태자와 이 황자의 청혼 사실을 연기준에게 들킨 마당에, 이제 와서 숨길 순 없다고 여겨 솔직히 털어놓았다.

“사실 태자, 이 황자, 그리고 황숙 진왕까지 동시에 유 가문에 청혼을 했어. 난 진왕 전하를 택했고.”

“푸.”

우휘가 놀란 듯 소리를 내자, 장주가 급히 그의 입을 틀어막고 연기준 쪽으로 밀쳤다. 유경서에게 등을 돌린 채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이 멍청이야, 웃긴 왜 웃어. 아직 아가씨께선 주군께서 진왕 전하인 줄 모른다고!’

우휘는 그의 거친 행동에 불만을 품고 따지려다가 옆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고개를 돌리자, 연기준이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선, 우휘는 그제야 큰 실수를 한 것을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의심스럽게 그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래?”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방금 우휘가 웃으려던 거 같은데? 뭐가 웃겨서?’

장주는 그녀에게 다가와 계속 물었다.

“아가씨, 진왕 전하께 시집가기로 하셨다면서, 왜 떠나시려는 겁니까? 도망가시면 진왕 전하께서 가만두지 않을 텐데요.”

“진왕 전하한테 시집간다는 건 시간 벌기용일 뿐이다. 태자 전하의 강요를 막으려고 진왕 전하의 이름을 빌린 거지.”

“하하하.”

장주는 어색하게 웃으며 남몰래 연기준의 눈치를 살폈다.

얼굴이 흙빛이 된 연기준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독기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유경서는 자기 생각에 빠져 그의 반응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잠시 후, 그녀가 밖으로 나가려 하자, 장주가 급히 그녀를 막아섰다.

“아가씨, 도망가시는 이유를 안 알려줬습니다만?”

그의 앞에서 확실히 물어보지 않으면, 그녀가 가고 난 뒤 자신과 우휘에게 화풀이할 게 뻔했던 장주가 다급히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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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흉한 진왕의 덫에 걸리다   제26화

    유경서는 생각지도 못한 도움에 크게 감동했다. “장주, 고마워.”장주는 연기준에게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아가씨, 모두 주인님께서 시키신 일입니다. 감사할 거면 주인님께 하셔야죠.”유경서는 맞은편 남자를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쪽이 이렇게까지 세심히 배려해 주실 줄은 몰랐네요.”연기준은 싸늘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 “우리는 이미 부부의 정을 나눴고, 그대 일은 곧 나의 일이다.”유경서는 너무 어색한 나머지 쥐구멍으로라도 숨고 싶었다.가능하다면, 정말 그와 솔직하게 터놓고 말하고 싶었다. 서로 맞지 않다고.그녀의 출신은 말할 것도 없고, 단순히 두 사람의 성격만 봐도 맞지 않았다. 하물며 습관, 가치관, 인생 목표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혼인을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시집갈 생각은 없었다. 종일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그녀가 전생에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보였다. 저런 사람과 같이 지내면 얼마나 답답할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에 훤했다소위 말하는 달콤하고, 웃음 넘치고, 행복한 생활은 그녀와 인연이 없는 것 같았다. 동궁.첩자가 가져온 소식에 연용화는 매우 놀랐다. “경성을 나섰다고? 혼자 나가더냐?”첩자는 말했다. “분명 혼자 경성을 나섰습니다.”연용화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이것은 분명 유인하려는 계책이다! 그렇지 않다면, 필시 다른 음모가 있는 것이다!”늘 행방이 묘연하던 진왕이 대놓고 경성을 나서는 것은, 그의 행동 방식에 어긋났다.게다가 그는 이미 진왕과 유경서가 한 객잔에 함께 있는 것을 목격했다. 두 사람은 분명 마음을 나눴을 것이다. 현재 상황으로 볼 때, 진왕은 혼사 준비에 힘써야 마땅했다. ‘이런 시기에 유경서를 내버려두고 경성을 떠나다니? 무슨 속셈이지?’무언가 생각난 듯, 연용화는 첩자에게 물었다. “유 가문은 무슨 움직임이 있느냐? 유정우가 유경서를 잡아들였느냐?”첩자가 답했다. “여전히 거리에서 아가씨를 찾고

  • 음흉한 진왕의 덫에 걸리다   제25화

    혜씨는 그녀를 재촉하지 않은 채 조용히 탁자 위 그릇들을 거두었다.결국 유경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뒷문에 이르자, 정말로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거칠게 수염을 기른 마부 둘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순간 그녀는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변장하고 뭐 하려는 거야?”장주는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일단 마차에 타시죠. 가면서 이야기하겠습니다.”유경서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날려 마차에 올라탔다.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싸늘한 눈빛을 지닌 그와 시선이 맞부딪혔다. 깊고 어두운 그 눈은 마치 어떤 것도 통과시키지 않을 심연 같았다.그녀는 좀처럼 담담하지 못했다. 그와 피부를 맞댄 후에는, 겉으로는 아무리 태연한 척해도, 마음속은 혼란스러웠다.“그, 상처는 좀 어때요?” 그녀는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걱정하는 척 물었지만, 속으로는 그가 자초한 일이라고 중얼거렸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면모와 절제력이 있었더라면, 상처가 터지지는 않았을 것이다.“괜찮다.” 연기준은 차갑게 답했다.유경서는 갑자기 그의 차가운 입술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입술은 왜 그래요? 입이 헌 거예요?”그녀가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녀의 말에 연기준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개한테 물렸다!”유경서는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어쩌다가 개한테 물린 거예요?”누가 들어도 그녀의 웃음은 장난스러운 놀림이 분명했다.하지만 그 방자한 웃음소리가 연기준의 귀에 꽂히는 순간, 그는 설명하기 어려운 수치와 분노가 뒤섞여 치밀어 올랐다.그는 입술을 꽉 깨물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험한 기운을 느낀 유경서는 갑자기 웃음을 멈췄다. “왜 그래요? 내가 문 것도 아니잖아요! 자기 입으로 말해놓고, 왜 나한테 그래요!”연기준은 주먹을 꽉 쥐었고, 손가락 마디에서 소리가 났다.그는 화가 난 듯 고개를 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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