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주하는 남아 있는 세포들이 담긴 플라스틱 튜브를 모두 꺼내 냉동고 앞 바닥에 둔 바구니 속 뜨거운 물이 담긴 비커에 떨어뜨렸다.삐이-삐이-삐이-냉동고의 온도가 올라갔다는 알람음이 울었다.“어. 알았어. 금방 할게.”주하가 -70℃ 냉동고의 육중한 문을 닫았다. 시선이 바닥의 비커로 향했다. 뜨거운 물 위에 떠 있는 검지 두 마디 크기의 투명한 플라스틱 튜브 속에는 몇천개의 세포들이 있었다.‘저 튜브 하나로도 2~3명에게는 주입할 수 있는 시키 바이러스가 있어.’약한 바이러스긴 하지만.얼어있던 세포들이 녹으면서 핏빛처럼 붉어졌다.주하는 냉동고의 온도 표시가 다시 내려가는 것을 확인했다. 그런 뒤 비커를 들고 세포 배양실로 향했다. 6개월의 시간을 거쳐 겨우 어렵사리 만든 세포주였다. 하지만 더는 악용될 가능성을 지워야 했다. ‘주라헬은 이걸로 시우를 협박하는 데 쓰겠지.’클린벤치의 투명한 유리창을 부드럽게 밀어 올린 뒤, 석션기를 작동시켜 비커 안의 흐물거리게 녹아내린 세포들을 빨아들여 흔적도 없이 지워 버렸다.사용했던 플라스틱 튜브와 뚜껑은 흰 폐기물 상자 안의 주황색 비닐에 넣고, 그 위로 다른 폐기물을 올렸다.박스를 밀봉하고 폐기 날짜를 오늘도 적었다.***실험을 정리하고, 오피스로 돌아와 노트북을 가방에 넣었다.“안녕. 진아찌.”“어. 월요일에 봐.”연구동 밖으로 나오자, 유진욱이 차를 몰고 와 앞에 세웠다.“어? 아빠가 해?”“그동안 네 엄마가 고생했잖아.”“음… 불안한데.”주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아빠가 과연 지리를 알까? 하도 외국물만 드셔서요.”주하는 농담을 던지며 뒷자리에 올라탔다.“아이코. 그래도 우리 딸 하나 집에 못 데려다줄까요.”“아빠! 진아가 고맙대. 과자 줬는데, 먹어볼래?”“아니, 몇 개 안 되는 걸 왜 나눠 줘.”“우리 진아는 그런 아이거든요. 네 개나. 엄마 아빠도 맛을 보시지요.”주하는 조수석의 세나에게 과자 두 개를 건넸다. 과자
“그거 나에게 몇 개만 넘겨라. 그 값으로 주연을 보내게.”“안돼!! 윤진아!!”주하의 절규를 뒤로 하고, 연화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외투에 숨겨 온 손바닥만 한 소형 TNT 장치 몇 개를 꺼내 안전장치를 풀고, 진아의 손에 넘겼다. 겨우 움직이는 손가락 하나로도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마치 처음부터 진아를 위해 가져온 것처럼.“어차피 나가지도 못해…. 그러니까 내 소원 성취하게…눈 감아 줘. 다음에 만나면, 다음이라는 기회가 있다면, 그땐 진짜 친구 되자. 바보 주하.”연화는 주저앉으려는 주하를 이끌고 나왔다. 복도에서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맞은편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연화가 주하를 끌어 등 뒤에 있던 방으로 몸을 숨겼다.또각또각.마더와는 다른 구두 소리였다.“호랑이가 없으니, 개나 여우나 다 왕 노릇이네.”진아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진짜 어이없어.” 주하와 연화가 가까이 있다는 걸 들키지 않게 하려는 듯, 진아는 일부러 주연을 자극했다. “그런다고 네가 가주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닌데!”구두 굽이 진아쪽으로 거칠게 달려갔다. “저년이!!! 너 오늘 죽었어.”주연은 두 사람이 근처에 숨어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자백제도 소용없으니 진짜 죽었어!!”얼마 후,쾅!!폭발음 소리가 들렸다. 폭발과 함께 건물이 흔들렸다. 연화와 주하는 서둘러 자신들이 들어온 길로 빠져나왔다.“얼마나, 얼마나!!! 더 그렇게…!”울분이 터져 나오자 주하는 참을 수가 없었다. “사람을 도구로 써야 끝나는데!!! ”백연화가 입술을 깨문 채 묵묵히 그녀를 안아 줬다. “그렇게도 살려고 했는데. 왜 ….”***주하에게는 생생하게 겪은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진아에게는 아직 모르는 미래였다. 어쩌면 겪지 않아도 될 미래.목숨을 버리기로 했던 진아의 모습을 주하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때 놓쳐버린 온기가 너무 아쉬웠는지, 지금 품 안의 따뜻한 온기
“치이, 잘생긴 건 인정하네. 크크큭”“주하야, 능력도 중요해. 그리고 너를 아끼는 것도.”“그래도 리안은 오빠야. 가족이지.”아직 아드리안의 이름도 꺼내지 않았는데 주하가 먼저 선을 그었다. 진욱은 그저 마른세수했다.“하아, 진짜….”시우가 등장한 뒤로 오래전부터 설계한 계획들이 조금씩 어긋나는 기분이었다.“네가 안 온다고 하니 리안이 들어온다는데?”“어?!”“오면 다시 상담하자고. 주기적으로 리안과 만나봐.”“아빠, 리안 오빠는 내 주치의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뭐, 상관없지.”진욱은 속내를 감춘 채 창밖으로 지나가는 건물들을 바라봤다. 조금 전의 불안이 조금은 가셨다. 시작은 다들 그렇게 하니까.***주하가 다니는 설화 대학교 정문에 들어서자, 진욱의 표정이 굳었다. 그의 동물적 감각으로 유리창 너머에서 자신들을 향한 시선이 느껴졌다.한쪽 입꼬리가 아주 얇게 올라갔다.어이가 없네. 이렇게 지켜본다고?그래서 다행인 건가.주화병원에 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볼 수 있었다.세나가 연구동 앞에 차를 잠깐 세우자, 뒷좌석에 있던 주하가 내리려 했다. 진욱의 걱정 어린 한마디가 나왔다.“짐은 빨리 챙기고.”“어. 노트북만 챙겨올 거야.”“이것도 가져다줘.”진욱은 공항에서 산 평범한 과자 상자를 내밀었다.무심한 척 건네며 덧붙였다.“네가 병원에 있는 동안, 고생했을 테니….”“…어. 아빠 고마워. 챙겨줘서.”“네 친구인걸.”주하는 상자를 잠깐 내려다보다 품에 끌어안고 연구동으로 걸어갔다.칩 이식을 받은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연구동 문을 통과하는 주하에게는 4년 만에 돌아온 이곳이었다. 그저 발걸음이 가벼웠다. 진심으로 이곳이 그리웠다.오피스에 들어서자 윤진아가 보였다. 살아있는 진아였다.살아있는 진아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오랜만에 반갑게 이름을 불렀다.“윤진아!!”주하는 성큼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자
“다행이네. 네게 줄 것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라도 네가 내 곁에 있다면 기쁜걸.”“넌….넌, 변함없이 날 사랑했어. 날 위해 뭐든지 하는…그런 사람이잖아. 변함없이 날 기다려준…. 그러니까. 사과하지 마.”“사랑해. 유주하.”“…시간을 줘. 말…할게.”“응. 기다릴게.”시우가 따뜻한 입술로 주하의 볼에 맺힌 눈물이 지워졌다. 그가 포근하게 웃자, 주하도 그제야 따라 웃었다. 확실한 건, 주하가 미래를 알고 있는 것.그 미래 속에 주라헬에게 제 목숨을 빼앗겼다는 것.무엇보다 ‘시작이 달랐다’는 말이 신경 쓰였다.시우는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피 맛이 번졌지만, 주하가 두려운 일을 겪었다는 생각에 더 괴로웠다.***시우가 주하의 손을 잡고 다시 원래 병실로 내려왔다. 병실에서는 정리를 마무리하던 유진욱이 주하를 보고 반겼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시우를 보자 곧 경계심이 치밀었다.“주하야, 어디 갔다 온 거야?!”딸아이의 젖은 눈가를 발견한 유진욱은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울었어?!!”그의 시선이 주하 옆의 시우에게 향했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더 화가 났다.저 녀석 때문에 주라헬이 주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어떻게 주라헬에게서 지웠는데.어떤 희생으로 우리가 주하를 지켰는데!!주하는 그런 생각을 알 리 없는 얼굴로 가볍게 말했다. “먼지가 들어가서 그랬어.”“유주하 너!”“왜 죄 없는 시우를 노려보고 그래!”주하의 목소리에 투정이 묻어났다.얼마나 나에겐 귀한 사람인데.그러면서도 다시 눈물이 날 것처럼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유진욱은 어이가 없었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다가가기만 해도 긴장하던 주하가 시우와는 스스럼없이 손을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가슴이 먹먹했다.수장이 다가갈 때는 그리 선을 긋더니.진욱은 천천히 다가가 주하의 눈가를 닦아주었다.“아이코, 먼지가 또 들어간 모양이네.”그러면서 시우를 노려보자, 그는 얕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하긴 내
“그건 내가 너에게 알려준 적이 없거든. 아직은….”주하가 저도 모르게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현무 가의 가주들은 대대로 또 다른 이름이 있어. 그 이름 안에는 비기가 있어서 함부로 말을 하지 않지. 특히….”시우는 여전히 떨고 있는 주하의 뺨에 손길이 닿았다.“연인에게만큼은.”시우의 평온한 말과 다르게 주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왜?!”“그 이름을 알려 준다는 건. 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는 말이거든.”순식간에 주하의 눈망울에 물기가 가득 차올랐다.“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그 이름을 아는 연인이 시간을 돌릴 수 있는 거라.”간신히 잡고 있던 눈물이 기어이 떨어져 나와 옆으로 흘러 내려갔다.‘그럼…넌!! 그때부터 나를 두고 가려고 한 거야??!!!’그때의 시우에 향한 야속한 원망이 치밀어 올랐다.왜! 우리를 두고 가는 그런 결정을 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보통은 평생을 모르고 지내.”시우의 손끝이 주하의 눈물을 살며시 닦았다.“시련을 이긴 후계자에게 축복의 의미로 선대 가주가 알려주거든. 그 이름은 몇 대 동안 발휘된 적이 없어.”시우는 주하의 손을 맞잡았다.“그런데 네가…. 네가 아주 자연스럽게 꺼내길래.”그가 주하의 손등에 제 입술을 붙였다. 주하는 숨겨왔던 가장 큰 비밀을 들킨 기분이었다. 놀란 표정을 숨기려 그를 노려보며 일부러 차갑게 말을 꺼냈다.“네가 잘못 들은 거라면?”“그 이름을 잘못 들었더라.”여전히 경계하는 주하를 보며 시우가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그럴 수도 있지. 그렇지만 현무가 가주인 내 앞에서는 그저 흘러나온 말로 넘길 수 없거든.”그의 눈빛은 다정하게 휘어졌지만, 주하의 귓가에는 제 죽음과 숨겨온 가문의 비기를 어찌 알았는지 서늘하게 추궁하고 원망하는 속삭임으로 들렸다.“…….” 주하는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우의 손에 잡힌 제 손을 빼냈다. 그리고 제 위에 있는 시우를 두 손을 밀쳤다.하지만
시우가 주하의 혀를 제 혀와 깊이 얽으며 달콤한 타액을 삼켰다.질척하게 얽혀들던 혀가 아쉽게 떨어지자, 두 사람의 입술 사이로 투명한 타액선이 길게 늘어지다 툭 하고 끊어졌다.시우가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대고 조용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