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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그 색이 더 어울리오

Author: 아람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9 08:35:58

이틀 뒤, 무겸은 약속한 시각보다 조금 일찍 서씨 상단에 도착했다.

예령이 이층에서 내려왔을 때 그는 마차 곁에 서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는 정하셨습니까?”

“예령 낭자가 잘 아는 곳으로 가시오.”

“저한테 맡기시는 겁니까?”

“오늘은 그러려고 왔소.”

예령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마차에 올랐다.

황도에서 비단으로 이름난 상점은 서씨 상단과 오래 거래해 온 곳이었다.

주인은 예령을 보자 반갑게 맞이하다가 뒤이어 들어온 무겸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큰공자님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입어야 한다고 하더군.”

무겸의 말에 주인의 시선이 예령에게 향했다.

예령은 괜히 헛기침하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탁자 위에 비단이 하나씩 펼쳐졌다.

붉은빛이 도는 것부터 짙은 남색, 검은빛이 섞인 자색까지 색이 다양했다.

예령은 손끝으로 천의 결을 확인했다.

“이건 너무 밝습니다.”

“그럼 이쪽은 어떻습니까?”

주인이 짙은 자색 비단을 펼쳤다.

예령은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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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겸이 지팡이 없이 조정에 들었다는 소문은 반나절 만에 황도를 한 바퀴 돌았다.이튿날 아침, 예령이 서씨 상단에 들어서자 행수들의 얼굴이 전과 달랐다. 다리를 저는 큰공자에게 아가씨를 보냈다며 뒤에서 안타까워하던 이들이었다. 그런데 그 큰공자가 두 발로 걸어 대전에 들었고, 폐하께서 내리려던 병부의 자리까지 물렸다는 이야기가 돌자, 저마다 예령에게 허리를 한 번 더 굽혔다.예령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곧장 장부부터 펼쳤다. 급한 일이 따로 있었다.“황도 곡물 시세가 밤사이 두 할이나 올랐습니다.”늙은 행수 하나가 난감한 얼굴로 아뢰었다.“정북장군께서 북방으로 가신다는 소문이 돌자, 곡물상들이 일제로 값을 올렸습니다. 그중 가장 많이 사들인 곳이…….”“태성상단이겠지요.”행수가 고개를 숙였다. 예령은 장부를 넘겼다. 짐작한 일이었다. 황기문은 북방에서 곡식값을 세 배로 올렸다. 황도에서 곡식을 싣고 올라가려는 길목까지 막으려 드는 것은 당연했다.그때 곡물상 하나가 상단에 들어섰다. 서씨 상단과 오래 거래해 온 자였다. 황도 곡식 값이 어디까지 오르는지 보려고, 예령이 어제 행수를 시켜 값을 물어 두었던 곳이었다.“물으신 곡식 값 말입니다. 한 섬에 은자 두 냥 반은 받아야겠습니다. 요즘 같은 때에 이만하면 싼 편이지요.”예령은 그자를 올려다보았다. 엊그제까지 한 냥 반이던 곡식이었다.“고맙지만 황도 곡식은 필요 없습니다.”“예?”“서씨 상단의 남쪽 창고에서 곡식을 내어 운하로 올려 보내라 일러 두었습니다. 황도를 거치지 않고, 곧장 북쪽 나루로요. 어제 오후에 이미 배가 떠났습니다.”곡물상의 얼굴이 굳었다. 행수들 사이에서 누군가 헛웃음을 삼켰다.“그리고 이제부터 서씨 상단은 황도에서 곡식을 사지 않습니다. 파실 때 참고하시지요.”곡물상이 허둥지둥 물러갔다. 늙은 행수가 예령을 다시 보았다. 아버지가 북방 거래의 전권을 딸에게 넘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반신반의하던 얼굴이, 그제야 조금 풀렸다.예령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음

  • 이번 생은 그의 형을 선택했다   101화. 지팡이 없는 걸음

    새벽, 예령이 회랑으로 나섰을 때 무겸은 이미 채비를 마치고 서 있었다.검은 관복에 허리띠를 단단히 맨 차림이었다. 곧게 편 어깨 아래로 옷자락이 흔들림 없이 떨어졌다. 늘 곁에 있던 것이 보이지 않았다. 지팡이는 그의 손에 들려 있지 않고, 품에 안긴 채였다.그가 그것을 그녀에게 내밀었다.“맡아 주시오.”예령은 지팡이를 받아 들었다. 보기보다 묵직했다. 오래 쥐어 온 손잡이는 반들반들 닳아 있었고, 그 위에 검은 매가 날개를 펴고 있었다.삼 년 동안 그는 이 지팡이에 기대는 척하며 세상의 눈을 속여 왔다. 오늘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돌려받으실 날이 있습니까?”“없기를 바라오.”그는 그 말만 남기고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지팡이 소리 없이. 마당을 쓸던 하인이 빗자루를 떨어뜨렸고, 물동이를 이고 가던 하녀가 그 자리에 굳었다. 예령은 그 등을 대문이 닫힐 때까지 보았다.전생의 그는 끝내 조정에 돌아가지 못한 사람이었다. 다리를 다쳐 밀려난 장남. 그녀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도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오늘, 그 기억이 처음으로 어긋나고 있었다.어젯밤 장부에 적은 한 줄이 떠올랐다.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던 걸음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따라갈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였다. 조정은 여인이 들어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예령은 지팡이를 두 손으로 쥐었다가, 곧 장호를 불렀다.“북방으로 갈 수레를 알아봐 주세요. 스무 대요. 곡식은 서씨 상단 창고에서 내고, 역참마다 말 먹일 여물까지 셈해 두세요. 진가상회에는 오늘 안으로 서신을 보내 주시고요. 열흘 뒤 황도를 떠나 보름 안에 닿겠다고요.”장호가 고개를 숙였다. 예령은 서실로 가 장부를 펼쳤다. 굶는 병사들에게 곡식을 대는 일이라면, 태성상단보다 한 걸음 먼저 움직여야 했다.그가 제 싸움을 하러 갔다면, 그녀도 제 일을 해야 했다.같은 시각, 황궁.아침 조회를 앞두고 대전 앞뜰에는 관리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진북후부 장남이 정북장군의 교지를 받았다는 소문이 벌써 돌고 있었

  • 이번 생은 그의 형을 선택했다   100화. 북으로

    교지는 해가 기울기 전에 진북후부에 닿았다.병부의 사자가 대청 앞에서 두루마리를 펼쳤다. 며칠 전 관직을 권하러 왔던 바로 그 사자였다. 두루마리를 읽는 동안에도 그의 눈은 자꾸 무겸의 지팡이로 향했다. 진북후부의 장자 한무겸을 정북장군으로 삼는다. 변경의 군을 수습하고 군량의 흐름을 바로잡으라. 관직을 내리는 임명과 함께, 열흘 안에 황도를 떠나라는 기한이 붙어 있었다.병부 사자의 권유라면 몸을 핑계로 물릴 수 있었다. 그러나 황명으로 내린 교지는 달랐다.무겸은 지팡이를 짚은 채 교지를 받았다. 두루마리를 쥔 손에 힘줄이 섰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사자가 물러가자 진북후가 오래 그를 보았다.“가겠느냐.”“가야지요. 병사들이 굶고 있습니다.”진북후는 더 묻지 않았다. 병부의 원외랑이 이 명을 누구보다 먼저 청했다는 것을, 대청에 있던 세 사람은 모두 알고 있었다. 진북후가 짧게 한마디를 보탰다.“원외랑이 무슨 속셈이든, 진북후부의 장자가 등을 보일 수는 없다.”그날 밤, 성 동쪽 집 서실에는 늦도록 불이 켜져 있었다.책장 둘째 칸에는 어느새 서신이 세 통 꽂혀 있었다. 예령은 아래 칸에 아버지의 주판을 올려 두고, 북방으로 가는 길이 그려진 지도를 탁자 위에 펼쳤다. 황도에서 진가상회까지, 진가상회에서 백운상회까지. 수레가 발견된 동쪽 고갯길에는 붉은 먹으로 점을 찍었다.문가에서 기척이 났다. 무겸이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지도 위의 붉은 점에 닿았다.“이건 무엇이오.”“북방으로 갈 길입니다.”“누가.”예령은 붓을 내려놓고 그를 올려다보았다.“제가요.”무겸의 얼굴이 굳었다. 그가 서실 안으로 들어와 탁자 맞은편에 섰다.“그곳은 울란이 움직이고, 태성상단이 길목을 쥐고, 병부가 나를 보내려 안달이 난 곳이오. 그대를 노릴 자들이 황도보다 몇 배는 많을 거요.”“그래서 가야 합니다.”예령은 지도 위의 붉은 점을 짚었다.“이 고갯길에서 우리 상단 사람 셋이 사라졌습니다. 아직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진가상회는 만나 보겠

  • 이번 생은 그의 형을 선택했다   99화. 지나가는 길

    동이 트기 전, 회랑 건너편에서 문 여닫는 소리가 났다.예령은 이미 깨어 있었다. 창을 조금 열자 어스름 속에 무겸의 등이 보였다. 곽진이 끄는 말 곁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이었다. 지팡이를 짚고 있었지만, 이 시각 이 집에는 그를 지켜볼 눈이 없었다. 걸음은 곧았다.무천이 황도를 떠나는 날이었다.말발굽 소리가 골목 끝으로 멀어졌다. 예령은 한참 동안 창가에 서 있었다.어젯밤 회랑에서 제가 돌려준 대답이 떠올랐다.‘약조에 있는 일입니다.’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그의 옆얼굴이 밤새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따라가도 되는 걸까. 그가 부른 것도 아니었다. 예령은 창틀을 쥔 채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다 무천의 얼굴을 떠올렸다. 전생에 그녀를 감옥에 버려두고 다른 여인의 처소로 가던 사람. 그 사람이 황도를 떠나는 모습을, 그녀도 제 눈으로 보고 싶었다.“연화야. 가마를 준비해 다오. 조용히.”진북후부 후문 앞에는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짐이라고는 궤짝 두어 개뿐이었다. 하인 넷이 마차 곁을 지키고, 곽진이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예령은 골목 모퉁이에 가마를 세우게 했다. 더 가까이 가지는 않았다.진북후는 끝내 후문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떠나는 아들을 배웅하지 않는 것이 아비가 내린 마지막 벌인 듯했다.후문이 열리고 무천이 나왔다. 하룻밤 사이에 얼굴이 몰라보게 수척했다. 화려하던 옷차림 대신 수수한 여행복이었다.마차 곁에 무겸이 서 있었다. 배웅하러 나온 얼굴이 아니었다. 무천이 정말로 이 문을 나서 황도 밖으로 가는지, 제 눈으로 확인하러 온 얼굴이었다.무천이 걸음을 멈췄다. 비웃음이 입가에 떠올랐다.“배웅까지 나오셨습니까, 형님.”“배웅이 아니다. 네가 떠나는 걸 보러 왔다.”무겸의 목소리에는 어떤 온기도 섞여 있지 않았다.“조씨 가문 영지까지 곽진의 사람이 따라갈 것이다. 가는 길에 누구를 만나는지, 누구에게 서신을 보내는지 전부 내게 올라온다.”무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형님은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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