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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주인 없는 거래소

Author: 아람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27 09:31:09

서쪽 상단을 나서자마자 예령은 곽진의 사람 하나를 불렀다.

“큰공자님께 전해 주세요. 증서는 태성상단에 있고, 지금 그리로 간다고요.”

사내가 말을 달려 떠나는 것을 보고서야 그녀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혼자 움직이지 말라던 말을 어기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어디로 가는지는 알렸으니까.

태성상단의 황도 거래소는 서문에서 멀지 않았다.

며칠 전 장호가 매듭 찬 사내를 따라왔던 그 건물이었다. 앞문은 멀쩡한 상점처럼 번듯했다. 비단 휘장 너머로 저울과 장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예령이 안으로 들어서자 일하던 사람들의 손이 하나둘 멈췄다.

“서씨 상단 아가씨라더니…….”

“소문보다 훨씬 고우시네.”

낮은 수군거림이 휘장 사이로 번졌다. 옅은 푸른빛 옷에 머리를 단정히 올린 차림이었다. 꾸민 데 없는 흰 얼굴에 길고 맑은 눈매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기에 충분했다.

예령은 그 시선들을 개의치 않고 곧장 계산대로 향했다.

“진북후부의 빚 증서를 이곳에서 사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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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번 생은 그의 형을 선택했다   88화. 주인 없는 거래소

    서쪽 상단을 나서자마자 예령은 곽진의 사람 하나를 불렀다.“큰공자님께 전해 주세요. 증서는 태성상단에 있고, 지금 그리로 간다고요.”사내가 말을 달려 떠나는 것을 보고서야 그녀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혼자 움직이지 말라던 말을 어기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어디로 가는지는 알렸으니까.태성상단의 황도 거래소는 서문에서 멀지 않았다.며칠 전 장호가 매듭 찬 사내를 따라왔던 그 건물이었다. 앞문은 멀쩡한 상점처럼 번듯했다. 비단 휘장 너머로 저울과 장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예령이 안으로 들어서자 일하던 사람들의 손이 하나둘 멈췄다.“서씨 상단 아가씨라더니…….”“소문보다 훨씬 고우시네.”낮은 수군거림이 휘장 사이로 번졌다. 옅은 푸른빛 옷에 머리를 단정히 올린 차림이었다. 꾸민 데 없는 흰 얼굴에 길고 맑은 눈매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기에 충분했다.예령은 그 시선들을 개의치 않고 곧장 계산대로 향했다.“진북후부의 빚 증서를 이곳에서 사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기한 몫을 갚으러 왔어요.”계산대의 사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나이가 지긋한 서기였다. 그는 예령의 얼굴과 옷차림을 천천히 훑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아가씨께서 직접 빚 셈을 하러 오셨습니까. 혼례를 앞두신 분이 이런 험한 일까지.”“험한 일일수록 제가 직접 하는 게 확실하거든요. 남의 손을 거치면 숫자가 자꾸 틀어져서요.”서기의 입가가 씰룩였다. 유덕수의 일은 황도 상인들 사이에 이미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증서라면 저희 상단주께서 직접 보관하고 계십니다.”“그럼 상단주를 뵙지요.”“공교롭게도 어제 북방으로 떠나셨습니다. 나흘 뒤에나 돌아오실 겁니다.”“북방 어디로 가셨는지는요?”“그것까지는 저도…….”서기가 말끝을 흐리며 슬그머니 장부를 덮었다.나흘 뒤. 빚 기한은 사흘 뒤였다.예령은 웃음이 날 뻔했다. 너무 뻔해서였다.그리고 그제야 황기문이 노리는 게 무엇인지 보였다. 북쪽 농지와 병기 창고. 북방으로 가는 길목에 거점을 박아 두려는 것이다. 오늘 아침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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