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변현민은 포기하지 않고 거실로 달려 나갔다.
“엄마? 엄마!”
집 안을 이리저리 찾아봤지만 심지우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변현민은 심지우가 정말 떠났다고 확신했다.
그녀가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두고 떠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변현민은 너무 화가 나서 소파 위에 있던 심지우가 사준 장난감들을 모조리 내던졌다.
서재에 있던 변승현이 소란스러운 소리에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거실은 이미 엉망진창이었고 그 와중에 이혼 합의서도 소파 아래로 밀려들어 가 있었다.
변승현은 찌푸린 얼굴로 주방 쪽을 훑어보며 물었다.
“엄마는 어디 갔어?”
“그 사람은 제 엄마 아니에요!”
변현민은 화가 난 목소리로 외쳤다.
“아들이 아픈데 말도 없이 그냥 가버리는 사람이 어디 엄마예요? 난 싫어요! 다시는 그 사람 엄마라고 안 부를 거예요!”
순간 멈칫한 변승현이 뜻밖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갔다고?”
“네!”
화를 다 쏟아낸 변현민은 곧 억울한 감정이 북받쳐 올라와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나쁜 엄마! 날 버린 거예요? 예쁘고 착한 새엄마 생겨도 그 사람 싫다고 한 적 없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래요? 으앙... 나쁜 엄마! 나쁜 여자!”
변승현이 다가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리 화나고 속상해도 그렇게 함부로 말하면 안 되지.”
“왜요?”
변현민은 변승현의 품에 안겨 작고 여린 어깨를 들썩이며 울먹였다.
“엄마가 예전처럼 절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요. 아빠, 혹시 새엄마가 생겨서... 지우 엄마가 저 버리려는 거예요?”
변승현은 아이를 꼭 안은 채 소파에 앉아 휴지를 뽑아 눈물을 닦아줬다.
“지우 엄마가 요즘 좀 바빠서 그래. 네가 승희 엄마를 만나게 됐다고 해도 예전처럼 널 아끼는 건 똑같아.”
변현민이 코를 풀쩍 이며 물었다.
“진짜예요?”
“당연하지. 아빠는 거짓말 안 하잖아.”
변승현의 말에 변현민은 조금씩 안정감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심지우가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랐다.
몸이 아파서 밥맛도 없을 때 심지우가 끓여준 죽은 참 향긋하고 맛있었다. 그는 매일 심지우가 죽을 끓여줬으면 했다.
“아빠, 저 지우 엄마가 보고 싶어요.”
잠시 고민하던 변승현이 말했다.
“죽 다 먹고 엄마 보러 가자.”
그 말을 들은 변현민의 눈이 반작 빛났다.
“진짜요? 좋아요!”
...
심지우는 남호 팰리스를 나와 곧장 작업실로 향했다.
3일 뒤면 엄마가 출소하는 날이었고 열흘 남짓이면 설날이었다.
새집의 생활용품은 이미 다 준비해 뒀고 내일은 가사도우미가 와서 청소를 해주기로 했다.
작업실엔 내일 납품해야 할 복원 작업이 하나 남아 있었다.
심지우는 작업이 끝나면 바로 연차를 써 엄마를 데리고 여행을 떠날 계획이었지만 지금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심지우는 배를 쓰다듬으며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혔다.
이 아이를 어떻게 할지 그녀는 아직 결정 내리지 못했다.
‘만약 변승현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일까? 현민이한테 다정하니 우리 아이에게도 똑같을까?’
생각할수록 심지우는 자신이 우스워졌다.
‘변승현이 변현민에게 잘해주는 건 주승희 때문이겠지.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니까.’
심지우는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감쌌다.
‘정신 차려, 더 이상 허황된 꿈 꾸지 마. 스스로 상처받지 말자.’
똑똑.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심지우는 고개를 들며 감정을 추슬렀다.
“들어오세요.”
우영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우 언니. 현민이가 왔어요.”
심지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아픈데 어떻게 온 거야?”
“변 변호사님께서 작업실 앞까지 데려다주고 가셨어요. 저보고 안으로 안내하라고 하셨고요.”
우영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캐릭터 배낭을 멘 변현민이 뛰어 들어왔다.
“엄마!”
심지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아빠는?”
“아빠는 일이 있어서 절 돌볼 수가 없대요. 저도 엄마가 보고 싶었고요.”
변현민은 고개를 들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심지우를 바라보았다.
심지우는 변승현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를 다시 데려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변승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일부러 이러는 게 분명해.’
심지우의 얼굴에 짜증이 역력히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본 변현민의 눈가가 붉어지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혹시 저 귀찮아졌어요? 제가 싫어졌다면 저 그냥 갈게요.”
그 말과 함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마음이 약해진 심지우는 얼른 아이를 안고 조심스레 달랬다.
“싫어한 적 없어. 다만 엄마가 요 며칠 너무 바빠서 아직 아픈 너를 잘 못 챙겨줄까 봐 걱정돼서 그래.”
“저 이제 열도 안 나요.”
변현민은 심지우의 손을 자기 이마에 얹으며 말했다.
“엄마, 진짜로 열없죠? 저 얌전히 있을게요. 엄마 일 방해 안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저 쫓아내지 마요.”
변현민이 애교를 부리자 심지우는 결국 한숨을 쉬며 타협했다.
그녀는 아직 뜨거운 아이의 뺨을 만지며 말했다.
“엄마가 끓여준 죽은 먹었어?”
“먹었죠!”
변현민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한 그릇 다 비웠어요!”
“약은 챙겼고?”
“당연하죠!”
아이의 손이 배낭을 가리켰다.
“엄마가 사준 장난감이랑 책도 전부 가져왔어요!”
심지우는 그의 코끝을 톡 건드렸다.
“넌 어쩜 단 한 번도 그 책을 잊은 적이 없어? 자, 아직 아프니까 침대에 누워서 쉬어. 엄마는 일해야 해.”
“네!”
변현민은 배낭을 품에 안고 방긋 웃으며 휴게실로 들어갔다.
심지우는 아이의 사려 깊고 착한 모습에 괜히 미안해졌다.
현민이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부모에게 의지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본능이겠지. 주승희와 재회했어도 여전히 나를 엄마를 보는 거야.’
아이에게 괜한 감정을 내비친 건 자신이었다.
심지우는 핸드폰을 들어 쇼핑 앱을 열었다.
그녀는 며칠 전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동화책과 두뇌 발달에 이로운 장난감들을 전부 주문했다.
‘올해 설에 현민이는 변승현과 주승희와 함께 변씨 가문에서 보내겠지. 오늘 주문한 물건들은 새해 선물로 주면 되겠어.’
...
심지우는 자정이 넘도록 작업했다.
휴게실로 돌아왔을 때 변현민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 옆으로 다가가 이불을 들추자 현민이가 손에 꼭 쥐고 있는 전화 손목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한 브랜드의 리미티드 제품으로 무려 몇백만 원이나 하는 제품이었다.
‘주승희가 사준 거겠지.’
그녀 역시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듯해 보였다.
그 사실은 변현민에게 좋은 일이었다.
심지우는 이 상황을 정확히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마냥 아무렇지 않다고 할 수는 없지만 변현민과 주승희가 점점 가까워지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걸 막을 수도 없고 막을 자격도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아이가 자신을 필요로 할 때 곁을 지켜주는 것뿐이었다.
심지우는 손목시계를 아이 쪽 머리맡에 내려놓고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두 시쯤 심지우는 팔 안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불을 켜보니 변현민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체온을 재보니 39.8도였다.
그녀는 서둘러 해열제를 먹였지만 30분이 지나도 열은 떨어지지 않았다.
심지우는 급히 옷을 갈아입고 아이를 안은 채 병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변승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연결되지 않았다.
응급실에서 진료를 받고 나니 내려진 진단은 급성 폐렴이었다.
변현민은 입원해서 수액을 맞으며 치료를 받아야 했다.
입원 수속을 마친 뒤 심지우는 다시 변승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엔 전화가 연결됐다.
그런데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주승희였다.
“지우 씨, 죄송해요. 승현 씨는 샤워 중인데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