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우는 연초에 작업실 옆 해월도 아파트 단지에 집 한 채를 구입해 두었다.
평수는 42평 정도로 방이 세 개 있었고 그녀와 어머니가 각자 하나씩 쓰고 남은 작은 방 하나는 서재로 개조했다.
풀옵션 아파트였지만 인테리어는 따로 디자인 회사를 통해 새로 꾸몄다.
석 달 전 모든 공사가 마무리되어 바로 입주할 수 있는 상태였다.
짐을 새집에 옮긴 뒤 심지우는 작업실로 향했다.
작업은 새벽까지 이어졌고 그녀는 거의 한계에 다다른 몸을 이끌고 휴게실로 돌아왔다.
대충 씻고 침대에 누운 뒤 그녀는 눈을 감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
하지만 그날 밤 잠은 고르지 못했다.
많은 꿈을 꾸었지만 눈을 뜨고 나니 어떤 내용도 기억나지 않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며 욕실로 들어가 씻고 나왔을 때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핸드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변승현이었다.
심지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마 변현민 때문이겠지.’
이미 이혼을 결심한 이상 얽히고설킨 관계는 단호히 끊어내야 했다.
심지우는 변현민은 결국 주승희의 친아들이니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그의 의존도도 주승희에게 옮겨갈 것으로 생각했다.
옷을 갈아입고 핸드폰을 가방에 넣은 뒤 그녀는 병원으로 향했다.
...
병원 산부인과 고은미의 개인 진료실.
“마지막 생리일과 초음파 결과를 기준으로 보면 지금 임신 5주 차야.”
고은미는 검사 결과지를 심지우에게 건넸다.
심지우는 그것을 받아 들고 흑백의 초음파 사진에 시선을 고정했다.
마음 한구석이 조여왔다.
“그리고 이건...”
고은미는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쌍둥이인 것 같아.”
순간 심지우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고은미를 바라봤다.
“확실해?”
“아직 5주밖에 안 돼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7주쯤 돼서 심장이 확인되면 그때는 확정이야. 그리고 이런 경우 대부분 이란성 쌍둥이야. 혹시 알아? 한 쌍의 남매일 수도 있어.”
심지우는 손에 든 검사지를 꼭 쥐었다.
하얗게 질린 입술은 끝내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고은미는 그녀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자기 뱃속의 아이가 쌍둥이일지도 모른다고 하는데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이 아이들은 심지우와 변승현의 아이였다.
심지우가 변승현을 얼마나 깊이 사랑해 왔는지 고은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무려 5년이었다.
고은미는 이 세상에서 심지우 같은 여자를 찾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감사하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심지우는 언제 이혼을 언급할지 모르는 변승현의 옆에 머물며 사랑했으니 말이다.
이 결혼 생활 동안 심지우의 사랑은 비참하면서도 깨어있었다.
하지만 변승현은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이 결혼 생활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조금 더 생각해 볼게.”
심지우는 고개를 들고 고은미를 바라봤다.
“결정하고 다시 알려줄게.”
그녀의 붉어진 눈동자에는 눈물을 머금고 있었고 암담함도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고은미는 마음이 아팠다.
“그래. 12주 전까지 결정하면 돼.”
“알았어.”
심지우는 결과지를 가방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 임신한 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알았어.”
고은미에게 다른 진료도 있었기에 심지우는 바로 진료실을 나섰다.
산부인과를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온 심지우가 고개를 든 순간 병원 입구에서 들어오는 변승현과 변현민을 마주쳤다.
변현민의 이마에는 해열 패치가 붙어 있었다.
심지우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변현민은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엄마다!”
변승현도 그녀를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엄마!”
변현민이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며 부르자 변승현은 아이를 안은 채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심지우는 정말 진심으로 변현민을 아꼈다.
그의 이마에 손을 대자 열이 제법 있었다.
“왜 갑자기 열이 난 거예요?”
변승현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어젯밤에 아이스크림을 조금 먹었어.”
변현민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안절부절못했다.
사실은 주승희가 처음 사준 아이스크림이 아까워서 한 통을 전부 먹어버린 탓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심지우가 알게 된다면 분명 주승희를 탓할 게 뻔했으니 변현민은 솔직히 말하지 못했다.
‘엄마는 연약하니까 심지우가 괴롭히게 두면 안 돼!’
심지우가 더 캐묻기 전에 변현민은 재빨리 손을 내밀었다.
“엄마, 나 안아주면 안 돼요?”
심지우는 순간적으로 팔을 뻗으려다 자신이 임신 중이라는 걸 떠올리고 동작을 멈췄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 몸이 조금 안 좋아서 오늘은 그냥 아빠한테 안겨있자.”
처음으로 안아달라는 부탁을 거절당한 변현민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전에는 아무리 아파도 꼭 안아줬는데 혹시 화난 건가?’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심지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엄마, 나한테 화났어요?”
변현민은 처량한 표정으로 심지우를 바라보았다.
“잘못했어요. 아이스크림 몰래 먹어서 죄송해요. 이제 절대 안 먹을게요.”
심지우는 변현민이 천식도 있고 장도 약했기에 아이스크림을 먹이지 않았다.
의사도 찬 음식과 단 음식은 절대 피하라고 했었다.
변현민에게 설명하려 할 때 변승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엄마는 너한테 화 안 내.”
심지우가 반박할 거라는 의심도 없는 단호한 어조였다.
심지우는 그 말에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입을 꾹 다물었다.
변현민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엄마, 진짜 화 안 났어요?”
심지우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엄마가 어떻게 너한테 화내겠니.”
“그럼 오늘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
변현민의 눈가는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말투에는 처량함이 담겨 있었다.
“아파서 엄마가 끓여준 죽 먹고 싶단 말이에요.”
심지우는 짧은 망설임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
병원에서 진료받은 결과 변현민은 인후염 초기 증세였다.
약을 처방받고 집에서 죽을 먹으며 충분히 쉬면 된다고 했다.
남호 팰리스로 돌아온 변승현은 변현민을 안고 2층으로 향했다.
심지우는 주방으로 향해 죽을 끓였다.
30분 후 심지우는 끓인 죽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아이의 방문은 살짝 열려 있었고 그 안에서 변현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의사 선생님이 약만 먹으면 금방 나을 거라 했어요. 엄마 잘못이 아니에요. 엄마가 아이스크림을 사주지 않았다면 저는 아이스크림이 그렇게 맛있는지 몰랐을 거예요. 그리고 과자랑 막대사탕도 진짜 맛있었어요. 저 그런 간식 처음 먹어봤다니까요?”
심지우의 손이 문고리에서 멈췄다.
“지우 엄마는 화내지 않아요. 오히려 제가 아프다고 속상해하시죠. 지금 아래층에서 저 먹을 죽 끓이고 있어요. 엄마는 몸이 안 좋으니까 며칠 동안 여기 있을게요. 혹시 감기라도 옮으면 안 되잖아요. 걱정하지 마요. 지우 엄마가 나 잘 돌봐줄 거예요.”
문 앞에 서 있던 심지우는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꼭 쥐었다.
‘아이한테 불량 음식을 그렇게 많이 먹이다니!’
그것보다 더 충격적인 건 며칠 사이 변현민이 주승희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이 변현민의 친엄마가 아니어서 자격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키워온 아이가 서슴없이 다른 여자를 엄마라고 부르는 모습을 보자 가슴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려왔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진심을 다해도 결국 이길 수 없는 벽이 존재했다.
심지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외부인이었을 뿐이다.
...
통화를 마친 변현민은 그제야 심지우를 떠올렸다.
방안에서 애타게 엄마를 불렀지만 심지우에게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변현민은 직접 주방으로 내려왔지만 심지우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고 식탁 위에 죽 한 그릇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