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밤새 내리던 비가 멈추자, 세상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해졌다.새벽빛이 유리창에 스며들어 카페 바닥을 부드럽게 적셨다.나리는 커피 머신을 닦으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하루가 시작되는 소리가 익숙했지만, 오늘은 그 익숙함조차 낯설었다.“선배.”문이 열리고 수경이 들어왔다.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시간이었다.“이 시간에?”“그냥… 집에 있으니까 더 답답해서요.”“그 마음 알아.”“어제 찍은 사진 봤어요.”“응.”“선배 표정이 달라 보였어요.”“달라?”“예전보다 조금… 편안해졌어요. 아니면, 조금 놓은 것 같기도 하고.”그 말에 나리는 잠시 멈췄다.“놓은 게 아니라, 그냥 손에 힘을 잠깐 뺀 거야.”“그게 다르나요?”“달라. 놓는 건 끝을 인정하는 거고, 힘을 빼는 건 버티는 거니까.”수경은 그 말을 곱씹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선배가 이렇게까지 사람의 마음을 세밀하게 읽는 이유가,아마 자신이 그만큼 부서져본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선배.”“응.”“이젠 선배도 누군가한테 기대도 돼요.”“그게 말처럼 쉽지 않아.”“제하 씨는요?”“그 애는 너무 오래 나를 봤어. 그런 사람한테 기댈 순 없지.”“왜요?”“그 사람은 내가 아닌 나를 사랑하니까.”그 말이 떨어지자, 수경의 눈빛이 흔들렸다.“선배… 그 말은 조금 잔인한데요.”“그래. 잔인한 거 알아.”“그래도 제하 씨는…”“알아. 그게 문제야. 알고도 모르는 척해야 하는 게 제일 어렵거든.”그녀는 조용히 웃었다.웃음은 무너진 마음 위에 덮인 마지막 체온 같았다.그 미소가 아파서 수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정오 무렵, 제하가 들어왔다.햇살이 그의 어깨 위에 닿았다.빛을 등에 업은 사람처럼 보였다.“촬영 자료 정리하다가 커피 생각나서.”“그 변명 너무 오래 썼다.”“그래도 통하잖아.”“그건 내가 착해서 그렇지.”그의 웃음은 여전했다.하지만 그 안에 묘한 조심스러움이 있었다.그는 그녀의 표정을 훔쳐
새벽 공기가 희미하게 차가웠다.카페 문틈으로 스며든 바람이 나리의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었다.그녀는 커피를 내리며 한 모금 향을 들이켰다.그 향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언제부턴가 커피 냄새가 사람 냄새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어디선가, 누군가와 함께 마시던 기억이 아직 몸에 남아 있어서일지도 몰랐다.“너 다시 사랑해도 돼.”제하의 말이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그 단순한 문장이 이상하게 자주 떠올랐다.그 말은 허락이 아니라, 마치 위로처럼 혹은 약속처럼 들렸다.“선배.”수경의 목소리가 들렸다.문이 열리며 부드러운 종소리가 울렸다.“오늘도 이른 출근이네요.”“이제 거의 살다시피 하지.”“잠은 좀 잤어요?”“글쎄… 눈은 감았는데 마음은 못 잤어.”그녀의 말에 수경이 살짝 웃었다.“그건 선배답네요.”“그게 나한텐 칭찬일까?”“그럼요. 선배는… 늘 다치더라도 누군가를 이해하는 쪽을 택하잖아요.”“이젠 좀 덜 아프고 싶긴 해.”“그래도 완전히 안 아플 순 없어요.”“그건 네 말이 맞다.”둘 사이의 대화는 짧았지만, 그 안에는 무언의 위로가 오갔다.수경은 여전히 선배의 마음을 완벽히 알 수 없었지만,그녀가 지금 어떤 파도 속을 건너고 있는지는 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수업은 어때?”“오늘은 학생들한테 이런 질문을 던져보려고요. 사랑과 회복, 둘 중 하나만 택해야한다면 뭐가 더 어렵나요?”“좋은 질문이네.”“선배는요?”“나한테는… 회복이 더 어려워.”“왜요?”“사랑은 그냥 오는데, 회복은 노력해야 하거든.”“그 말, 오늘 제 수업에서 써도 돼요?”“써. 근데 인용은 하지 마.”“그럼 제 말인 척 쓸게요.”“그게 더 자연스럽지.”둘은 웃었다.그 웃음은 따뜻했지만, 나리의 마음 어딘가에는 여전히 파도가 잔잔히 출렁이고 있었다.점심 무렵, 제하가 카페로 들어왔다.흰 셔츠 위에 회색 코트를 걸친 채,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찍어도 돼?”“오늘은?”“그냥 공기 좀 찍으려고.”“공기를?”“응.
아침 햇살이 유리창을 타고 천천히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온 빛이 카페의 테이블 위를 부드럽게 덮었다.나리는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잔의 열기가 손바닥을 지나 심장으로 번졌다.그녀는 오래 전 잃어버린 감정을 손끝으로 더듬듯 느끼고 있었다.그녀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어젯밤의 대화가 맴돌았다.“너, 다시 사랑해도 돼.”제하의 그 말. 그 단순한 한 문장이 밤새도록 마음 안에서 부서지고 다시 이어졌다.“선배.”문이 열리고 수경이 들어왔다.“오늘도 일찍 오셨네요.”“잠이 안 와서.”“어제는 좀… 힘들었죠?”“응. 조금 흔들렸어.”“상담자 때문이에요?”“그 사람 때문이기도 하고… 나 때문이기도 하지.”수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선배는 늘 강해 보이는데, 가끔은 너무 강해서 슬퍼요.”“그게 무슨 말이야.”“힘들다고 말하는 게 약한 게 아닌데, 선배는 늘 끝까지 혼자 참잖아요.”“누가 그러라고 했거든.”“누가요?”“온유.”그 이름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공기가 미묘하게 바뀌었다.수경은 말없이 선배를 바라봤다.그녀의 눈빛은 평소보다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오래된 슬픔이 스며 있었다.“그 사람은 나한테 강한 사람이 돼달라고 했어. 자기 대신, 세상 앞에서 울지 말라고.”“그럼 지금은요?”“지금은 모르겠어. 이제 울어도 될 것 같기도 해.”그녀는 고개를 숙였다.커피 위로 빛이 일렁였다.그 순간 문이 열렸다. 제하였다.“둘 다 여기 있었네.”“왔어?”“응. 커피 향이 문 밖까지 나더라.”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담담했지만, 눈빛은 평온하지 않았다.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흔적이 그의 눈가에 깊게 남아 있었다.“어제…”나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어제 한 말 기억해?”“응.”“그 말… 왜 했어?”“진심이니까.”“그게 진심이었어?”“나리야.”“대답해.”그녀의 목소리는 단단했지만,속에서는 이미 모든 감정이 파도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제하는 잠시 숨을 골랐다.그리고
“온유라는 이름, 들어본 적 있죠?”그 한마디가 공기를 멈춰 세웠다.나리는 순간 손끝이 얼어붙은 것처럼 굳었다.그녀는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탁자 위에 놓인 펜만 바라봤다.그 펜촉 끝에서, 오래전에 꺼내지 못한 숨이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상담실에 앉아 있던 하유진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그 사람이… 제 첫사랑 이름이었어요.근데 이상하죠?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름만 들으면 아직도 심장이 반응해요.”나리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그녀의 시선이 유진의 눈을 스쳤다.그 순간, 시간의 결이 흐트러졌다.‘온유’그 이름은 여전히 그녀의 세계 안에서 유효했다.“이상한 건 아니에요.”나리는 겨우 목소리를 냈다.“사람은 사랑을 끝낼 때, 이름부터 내려놓는다고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에요.”“그럼… 선생님도 그런 이름 있죠?”그녀는 웃으려 했지만, 입술이 떨렸다.“있어요. 아직도 입 밖으로 꺼내면, 마음이 흔들리는 이름이요.” 유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이름이 아직 선생님 안에 사는 거네요.”“응. 그 사람은 떠났는데, 그 사람이 만든 내가 아직 남아 있어서요.”그 말이 끝나자 둘 사이에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유진의 눈동자가 젖어들었고, 그녀의 손끝이 천천히 무릎 위로 떨어졌다.“그럼 저도 괜찮은 거죠?”“그럼요. 괜찮아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했던 기억은 아무리 오래돼도, 부끄럽지 않아요.”나리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녀의 목소리 속엔 알 수 없는 떨림이 묻어 있었다.그건 아직 끝나지 않은 사람의 목소리였다.상담이 끝나고 문이 닫혔다.나리는 의자에 앉은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온유.’그 이름이 귓가에서 계속 맴돌았다.몇 년이 지나도, 그 이름은 여전히 같은 온도로 그녀 안을 파고들었다.그녀는 눈을 감았다.그때의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바닷가, 바람, 그리고 온유의 목소리.“나리야, 언젠가 내가 사라져도, 네가 날 떠올릴 때 웃었으면 좋겠어.”그 말이, 지금 와서 잔인하게 느껴졌다.‘난 아직 그 말을
창밖에는 부드러운 비가 내리고 있었다.잔잔하게 떨어지는 빗소리가 유리창에 닿아 부서질 때마다, 그 소리가 마음의 어딘가를 건드렸다.나리는 책상 위에 놓인 메모지를 바라보고 있었다.오늘의 상담 예약자, 이름 하유진.나이는 서른둘, 직업은 플로리스트.그녀의 상담 사유는 짧았다.“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게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어요.”그 문장 하나에 이미 모든 감정이 담겨 있었다.나리는 손끝으로 그 문장을 천천히 문질렀다.종이 질감이 거칠게 느껴졌다.이상하게 그 한 줄이, 오래전에 자신이 썼던 일기장 한 구절과 닮아 있었다.‘사랑이 끝났는데, 왜 아직도 그 사람이 내 안에 사는 걸까.’그녀는 눈을 감았다.한동안 잊고 있었던 온유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듯했다.“나리야, 사람은 사랑을 끝낼 수 없대. 그저 다른 모양으로 옮겨 심는 거래.”그 말이 이상하리만큼 지금의 상담 내용과 겹쳐졌다.문이 열렸다.“선배.”수경이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었다.“오늘도 상담 있어요?”“응.”“얼굴이 좀… 긴장돼 보여요.”“그냥 평소보다 비슷한 이야기를 들을 것 같아서.”“비슷한 이야기요?”“과거 얘기.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 말이야.”수경은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선배는 그런 이야기에 아직도 흔들리세요?”“흔들리지 않으면 사람 아니지.”“근데 선배는 그런 걸 다 이겨낸 줄 알았어요.”“그럴 리가 있나. 이별은 한 번 겪는 게 아니라, 살면서 계속 새로 배우는 거야.”그녀의 말에 수경은 고개를 숙였다.“맞아요. 저도 아직 배워가는 중이에요.”“그래, 그게 사는 거니까.”나리는 커피를 내렸다.수경이 떠난 뒤에도, 그녀는 한참 동안 그 잔을 들고 서 있었다.커피 향이 유난히 진하게 느껴졌다.마치 오래된 기억이 다시 피어오르는 듯한 냄새였다.상담실 문이 열렸다.하유진이 들어왔다.길게 묶은 머리, 작은 눈동자, 손끝에 남은 꽃가루 냄새.그녀의 손에는 작은 조화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안녕하세요.”“어서 오세요. 편
오전 공기가 차분했다.봄이 한창이었지만, 햇살이 유난히 부드럽게 내려앉았다.나리는 커튼을 반쯤 걷고, 창문 너머로 사람들의 발소리를 들었다.출근하는 직장인, 손잡고 걷는 연인,서로 다른 속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유리창 너머로 흘러갔다.그녀는 문득 생각했다.‘나는 언제부턴가 다른 사람들의 끝만 봐왔구나.’그 생각이 스스로에게 낯설게 느껴졌다.이제는 누군가의 시작을 도와야 할 때였다.책상 위에는 작은 노트북과 상담용 노트, 그리고 첫 번째 상담자의 메모가 놓여 있었다.“그 사람은 떠났지만, 마음은 아직 여기 있습니다.”그 문장을 읽을 때마다, 나리는 오래전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누군가를 떠나보내고도 그 사람이 남긴 감정의 그림자 속에서 허우적대던 시간들.그때 문이 열렸다.“선배.”수경의 목소리가 들렸다.밝은 베이지색 재킷에 가벼운 향수가 스쳤다.“오늘 상담 있어요?”“응, 오후에 한 건.”“아직 긴장돼요?”“긴장보다… 좀 이상한 기분이야. 새로운 일을 하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냄새가 계속 나.”“그건 아마 선배 마음이 아직 그때에 머물러 있어서일 거예요.”“그럴지도.”나리는 미소를 지으며 수경을 바라봤다.예전엔 늘 무언가를 두려워하던 후배가 이제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말들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요즘 강의는 어때?”“좋아요. 근데, 한 학생이 오늘 묘한 질문을 했어요.”“어떤?”“‘선생님은 누군가를 완전히 잊은 적 있나요?’라고요.”“그럼 뭐라고 했어?”“잊는 건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말했어요.”“그 답, 괜찮네.”“선배한테 배운 거예요.”“나한테?”“네. 예전엔 선배가 ‘이별은 단절이 아니라 흐름이다’라고 했잖아요.”“그랬었지.”“그 말이 그때는 어려웠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요.”수경은 컵을 들어 커피를 마셨다.그녀의 눈빛이 유리잔에 비쳐 반짝였다.“오늘, 누군가 제 강의 끝나고 이런 말을 했어요. 이별을 배워도 사랑은 여전히 무섭다.그 말 들으니까, 이상하
휴대폰을 쥔 손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간호사의 급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환자분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보호자분 빨리 오셔야 합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가방을 집어 들고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심장은 비명을 지르듯 요동쳤고, 발걸음은 도로를 내달리면서도 제자리만 맴도는 것처럼 무거웠다.병원에 도착했을 때, 복도는 긴박한 공기에 휩싸여 있었다. 의료진들이 바쁘게 오가고, 환자 가족들의 울음소리와 신음이이곳저곳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온유의 병실로 향했다.문이 열
저녁 공기가 유난히 무거웠다. 하루 종일 카페에 앉아 서류를 정리했지만, 글자들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의뢰인의 사연을 읽다가도 눈앞에 병실의 온유가 겹쳐지고, 커피 향 사이로 스며드는 수경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책상 위에 놓인 펜을 몇 번이나 굴리다가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카페 문이 열리며 낯익은 여자가 들어왔다. 지난주 상담을 의뢰했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다급한 얼굴로 내 앞에 앉았다.“저, 언니랑 상담했던 거 있잖아요. 그거… 남편이 알게 됐어요.”나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새벽 공기는 병원 복도를 따라 차갑게 흘렀다. 커튼 사이로 흘러드는 회색빛 하늘이 병실을 비추고 있었고, 기계음은 여전히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고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온유의 손을 꼭 잡은 채, 밤을 꼬박 지새웠다.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았지만 손끝은 더 강하게 그를 붙잡고 있었다. 놓는 순간, 다시는 그의 체온을 느낄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조심스레 눈을 뜬 온유가 힘겹게 속삭였다.“나리야… 아직 있었네.”나는 눈물이 고인 채로 웃음을 지었다.“어떻게 내가 널 두고 가겠어. 네가 숨 쉬는 동안은 나도 여기
새벽 공기가 뺨을 스쳤다. 차갑다 못해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했지만, 오히려 몽롱했다. 침대에 몸을 눕히고도 한숨조차 편히 쉬지 못한 채 밤을 지새웠다.제하의 고백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수경의 차가운 눈빛과 온유의 약한 손길이 한꺼번에 얽혀 나를 괴롭혔다.아침이 되어 카페 문을 열자, 익숙한 원두 향이 퍼졌지만 오늘따라 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테이블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려는데, 손끝이 덜덜 떨려 글자가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오늘도 병원에 갈 거지?”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제하가 서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