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새벽 다섯 시 반. 해가 완전히 떠오르기 전, 도시는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조용했다.창문을 타고 들어온 옅은 빛이 커피 머신의 유리 표면에 스며들었다.나리는 커피콩을 갈며 소리를 들었다.그 규칙적인 마찰음이 마치 심장의 박동처럼 들렸다.그녀의 손끝엔 여전히 일의 감각이 남아 있었다.이제는 이별 전문가가 아니라감정 회복 컨설턴트로 불렸지만, 일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사람의 마음을 듣고, 그 마음이 부서지지 않게 조심스레 만지는 일.그녀는 커피를 내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이제 진짜, 시작이네.”혼잣말 같았지만, 그 목소리는 묘하게 단단했다.문이 열렸다.“그 말, 나한테 한 거야?”제하였다.그는 늘 그렇듯 가볍게 웃으며 들어왔다.“네가 와도 놀랍지가 않네.”“이제 우리 같이 일하잖아.”“그 말 아직 어색해.”“곧 익숙해질걸.”그는 카운터 위에 노트북과 카메라를 올려놓았다.“오늘 일정은?”“의뢰자 한 명. 퇴직 후 관계 재정립 컨설팅.”“누구야?”“부부.”“이혼이 아니라?”“같이 살고 있지만, 감정이 다 식어서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할지 모르겠대.”그의 눈빛이 묘하게 바뀌었다.“그거 어렵겠네.”“그래도 해야지.”“그럼 내가 촬영할게.”“오늘은 기록하지 말자.”“왜?”“감정이 너무 생생할 때는 기록보다 온기가 먼저 필요하니까.”그녀의 말이 유난히 따뜻했다.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쓴맛이 입안에 천천히 번졌다.“너 말이야.”그녀가 불쑥 말을 꺼냈다.“응?”“요즘 너무 조용해.”“조용한 게 나쁜 거야?”“아니. 근데 네가 나한테 말을 아낄 때는 그게 오히려 더 크게 들려.”“그럼 지금부터는 말 좀 많아질 수도 있겠다.”“왜.”“같이 일하면, 서로의 숨소리까지 들어야 하니까.”그녀는 피식 웃었다.“넌 여전히 말이 잘하네.”“연습 많이 했거든.”“누구한테?”“너한테.”그녀는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다.그 미소가 커피 향보다 더 짙게 남았다.그
영상이 끝났을 때, 조명이 켜지기 전까지 관객석은 한동안 숨을 죽이고 있었다.공기 속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여운이 떠돌았다.한 사람의 삶이, 한 직업의 의미가,한 여자의 마음이 그대로 스크린 위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나리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마지막 장면에서 천천히 사라지는 걸 지켜봤다.마치 스스로에게 이별을 고하는 장면 같았다.조명이 켜지고 박수가 터졌다.그 소리가 너무 크게 느껴져서,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건 떨림이 아니라,오랜 시간 감춰왔던 자신이 세상에 드러난 순간의 감각이었다.“축하해.”제하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그의 눈가도 젖어 있었다.“너무 멋있었어.”“나한테 이건 좀 버거워.”“왜.”“이건 나의 직업 이야기라기보다 나라는 사람의 고백 같아서.”“그게 사람들이 가장 원했던 거야. 진짜 이야기.”그녀는 고개를 숙였다.“진짜를 보여주는 게 늘 옳을까?”“적어도 오늘은 그랬어.”사람들이 그들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감동 받았어요.”“이별을 다르게 보게 됐어요.”“그 장면, 너무 좋았어요.”나리는 미소를 지었지만,그 안에는 낯섦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그녀는 평생 누군가의 이별을 설계해왔지만,정작 자신의 이야기가 세상에 보여지는 건 처음이었다.제하가 그녀를 바라봤다.“괜찮아?”“응.”“거짓말.”“응, 거짓말.”“그럼 솔직하게.”“살짝 무서워.”“무슨 게.”“사람들이 나를 알아버린 게.”그의 손이 조심스레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이제 숨지 마.”“익숙해서 그래. 늘 그림자 속에서 일했으니까.”“이젠 빛 아래에서도 괜찮아.”“그래도 너무 밝으면 눈부셔.”“그럼 내가 그늘 돼줄게.”그녀는 미소를 지었다.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가슴에 남았다.시사회가 끝난 다음 날, 기자들의 연락이 이어졌다.‘이별 전문가 신나리, 실제 존재 인물?’‘사랑의 끝을 설계하는 여자, 진짜였나?’‘다큐 속 그녀는 허구인가, 실존인
카페 안의 공기가 따뜻했다.봄의 마지막 잔향이 남아 있는 듯,햇살이 유리창을 타고 테이블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나리는 커피를 내리며 향을 맡았다.오늘은 유난히 커피 향이 달게 느껴졌다.어제보다 조금 더 살아 있는 기분.그게 요즘 그녀가 매일 느끼는 작은 변화였다.“선배.”문이 열리며 수경의 목소리가 들렸다.여전히 그녀의 말투엔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다.“오랜만에 카페 냄새 맡으니까 이상하죠?”“응. 아직 손끝에 익숙하긴 해.”“오늘은 강의 없어요?”“쉬는 날이에요. 그냥, 커피가 마시고 싶었어요.”나리는 반가운 듯 웃었다.“잘 왔네.”“근데… 여전히 여전하네요.”“뭐가?”“이 공간이요. 사람 냄새가 진해요.”수경의 눈빛이 카페 구석구석을 훑었다.그녀는 천천히 이어 말했다.“저, 사실 내일부터 연구휴직이에요.”“그래?”“조금 멀리 다녀오려고요. 일단 도쿄로.”“도쿄?”“네. 일본에서 감정치유 워크숍이 있어서요.3개월 정도.”그녀의 미소는 단단했다.“잘 됐다. 너한테 꼭 필요할 것 같았어.”“선배 덕분이에요. 저도 이제 제 감정의 언어를 만들어보고 싶어서요.”“그 말 멋지다.”“선배가 시작하게 한 거잖아요.”그 짧은 대화 안에 세월의 온도 같은 게 느껴졌다.둘 다 서로를 향한 존중이 깊었다.이젠 스승과 제자가 아니라, 같은 길 위의 사람들로.수경이 자리를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엔 제하였다.손에 들린 USB가 보였다.“오늘 시사회 준비했어.”“드디어 완성했네.”“응. 편집 다 끝났어. 근데 네가 봐줘야 돼.”“내가?”“이건 우리 팀 이야기잖아.”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오늘 끝나면 같이 봐.”오후 3시. 나리는 지현의 두 번째 상담을 시작했다.카페 한쪽 구석, 따뜻한 조명이 내려앉은 자리였다.지현은 지난번보다 훨씬 차분해 보였다.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깊은 어둠을 품고 있었다.“그 후로 어떤 변화가 있었어요?”“요즘, 그 사람의 꿈을 자
햇살이 부드럽게 창문을 스쳤다.이른 오전의 카페는 고요했다.에스프레소 머신이 예열되며 내는 낮은 진동음이 공기 속에서 잔잔하게 퍼져나갔다.나리는 그 소리에 맞춰 리듬을 타듯 천천히 커피를 내렸다.테이블 위에는 작은 노트북 한 대와 그녀가 손으로 직접 적은 메모들이 흩어져 있었다.‘감정 회복 컨설팅 1호 의뢰자 - 이지현(35).이별 후 8개월, 직장인, 미완의 감정 상태.’그녀는 노트를 덮었다.그 이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미묘하게 저렸다.‘이제 진짜 시작이네.’문득, 카운터 옆에 놓인 카메라가 눈에 들어왔다. 제하의 것이었다.그녀는 카메라를 손에 들어 조심스레 무게를 느꼈다.렌즈를 바라보는 순간, 어제와 오늘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졌다.그때, 문이 열렸다.“좋은 아침.”제하였다.회색 티셔츠 위에 가벼운 셔츠를 걸친 모습,머리카락엔 아직 아침 햇살이 얹혀 있었다.“일찍 왔네.”“네가 불렀잖아.”“커피 마시러 온 줄 알았는데.”“오늘은 일하러 왔어.”“일?”“감정 회복팀, 제1조. 감독 겸 조력자.”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누가 그런 직함을 줬대.”“나.”“자기 임명?”“응. 자격은 충분하잖아.”그의 농담 같은 말투 속에 어딘가 단단한 진심이 묻어 있었다.그녀는 눈을 돌리며 작은 숨을 내쉬었다.“그래, 그럼 오늘은 일 파트너네.”“좋아. 그럼 회의하자.”“회의?”“첫 의뢰자 브리핑.”그녀가 메모를 건네자, 제하는 그것을 잠시 읽었다.“이지현 씨… 8개월째 후유증 상태.”“응. 헤어진 이유는 단순했는데, 마음이 아직 거기서 멈춰 있대.”“단순한 이유?”“서로에게 맞지 않았다. 그 말 뒤에 숨어버린 감정들이 문제지.”“그래서 우리가 나서는 거고.”“응. 이제부터는 ‘이별을 견디는 법’이 아니라 다시 사랑할 수 있는 법을 알려줄 거야."그녀의 말이 끝나자, 제하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그 말, 너한테도 해당되는 거 아냐?”그녀는 눈을 깜빡였다.“무슨 뜻이야.”“너도 아직
“버리진 않아도 돼. 그냥, 자리를 옮기면 되잖아.”그의 말이 묘하게 따뜻했다.나리는 그 말의 의미를 금세 알아차렸지만,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쓴맛이 혀끝을 스쳤다.그 쓴맛이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제하야.”“응.”“수경이 떠나니까, 이 공간이 좀 다르게 느껴져.”“어떻게.”“공기가 느려진 것 같아.”“그건 우리가 말을 아껴서 그래.”“말을 아끼는 게 나쁜 건가.”“아니. 사람이 서로를 알아갈수록 말은 점점 줄어들잖아.”“근데 그게 무서워.”“왜.”“말이 줄면 마음도 멀어질까 봐.”“아니. 그건 오히려 가까워진다는 뜻이야.”그녀는 잠시 눈을 들었다.그의 눈빛은 평소보다 따뜻했고, 어딘가 불안했다.마치 오래 기다린 사람처럼 지금 이 순간조차 놓칠까 봐 조심스러운 사람처럼.“넌 왜 그렇게 날 잘 알아.”“모르겠어. 그냥, 네 표정 보면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더라.”“그건 안 좋은 거야.”“왜.”“숨길 여유가 없어지니까.”그녀는 시선을 돌렸다.창문 밖에는 아직 이른 새벽의 어둠이 깔려 있었다.그 어둠 속에서 거울처럼 반사된 두 사람의 얼굴이 나란히 있었다.그녀는 손을 들어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짝 짚었다.“이상하지.”“뭐가.”“이렇게 조용한데, 자꾸 심장이 시끄러워.”그 말에, 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대신 조용히 그녀의 앞에 컵을 밀었다.그 안엔 그녀가 좋아하던 진한 블렌드 커피가 담겨 있었다.“마셔. 오늘은 좀 달게 타봤어.”“너답지 않게.”“가끔은 변해봐야지.”그녀는 커피를 들었다.입술이 잔에 닿는 순간 그의 시선이 살짝 흔들렸다.그 사소한 동작 하나에도 마음이 요동쳤다.“달다.”“괜찮아?”“응. 근데 너, 왜 이렇게 조용해졌어.”“그냥, 네가 너무 예뻐서.”그녀는 웃었다.웃음이 잠깐 흘렀다가 이내 잦아들었다.그 말이 장난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이런 말 쉽게 하지 마.”“쉽게 안 했어.”“그럼 어렵게 한 거야?”“응.”
비가 그친 아침, 카페 앞 도로가 거울처럼 반짝이고 있었다.밤새 내린 빗물이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아 햇살이 바닥에 부서지며 눈부시게 흩어졌다.나리는 커피를 내리며 천천히 유리창 밖을 바라봤다.습기를 머금은 공기 속에서 사람들의 움직임이 느리게 이어졌다.그녀는 컵을 내려놓았다.손끝에 남은 미묘한 떨림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사랑은 다시 시작하려 하면 늘 이렇게 몸이 먼저 알아차리네.’그녀는 조용히 웃었다.그 웃음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마음을 달래기 위한 작은 숨이었다.문이 열렸다.“선배.”수경의 목소리가 들어왔다.어깨 위로 얇은 베이지색 카디건이 걸려 있었다.“오늘따라 일찍 왔네.”“오늘은 그냥… 오고 싶었어요.”“커피 줄까?”“괜찮아요. 향만 맡아도 좋아요.”수경은 카운터에 팔꿈치를 괴고 서서 조용히 선배를 바라봤다.그녀의 시선엔 말하지 못한 감정이 엉켜 있었다.“선배.”“응?”“사람은요, 언제 제일 조용해지는 걸까요.”“모르겠는데.”“저는… 이별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였을 때인 것 같아요.”그 말에 나리는 커피잔을 닦던 손을 멈췄다.잠시 후, 고개를 들었다.“무슨 일 있어?”“아니요. 그냥 요즘 그런 생각이 들어요.”“수경아.”“네.”“이별이 꼭 누군가와의 관계만을 말하는 건 아니야. 때론 자기 자신과의 이별일 수도 있어.”“그게 더 무서울 것 같아요.”“맞아. 그건 익숙한 나를 놓아야 하니까.”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의 손가락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선배는요?”“나?”“요즘은 어떤 상태예요.”“글쎄… 살아있다고 느껴.”“그거면 충분한 거죠?”“지금은 그게 제일 큰 일이야.”그녀의 말에 수경은 잠시 웃었다.그 웃음이 조금 쓸쓸하게 보였다.나리는 그 표정을 본 순간 묘하게 마음이 불안해졌다.“수경아.”“응?” “너 요즘 표정이 달라. 무슨 생각 많지?”“그냥요. 사람이 언젠가 자리를 비워야 할 때가 있잖아요.”“그게 지금이야?”“아직은 아니에요.
밤이 오기 전부터 가슴이 답답했다. 해가 질 무렵부터 집안 공기가 서서히 달라졌다. 환하게 켠 불빛조차 어둠을 몰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어둠이 더 또렷하게 형체를 드러내는 듯했다. 나는 창문을 닫고 커튼을 드리운 뒤에도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등 뒤에 시선이 따라붙는 듯한 감각이 사라지지 않았다.제하는 현관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손에는 작은 칼이 쥐어져 있었고, 눈은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단 한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수경은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녹음기를 올려놓고, 작은 불빛이 깜빡거릴 때마다
밤이 지독하게 길었다. 아무리 불을 환히 켜두어도, 집 안 구석구석에 웅크린 그림자는 마치 살아 있는 듯 꿈틀거렸다. 나는 거실 바닥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은 채 창문을 응시했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창백했고, 눈동자 속엔 피로와 두려움이 엉켜 있었다. 잠깐만 눈을 감으면 온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리.” 낮고 서늘한 울림이 귀와 가슴을 동시에 찔렀다.제하는 현관문 옆에 앉아 있었다. 그는 새벽 내내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한 듯, 그러나 의식은 또렷해 보였다. 손에 들린 주머니칼을 무심히 굴리며 창밖을 주시했
새벽이 그렇게 흘러갔다.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한 나는 커피잔을 손에 쥔 채 창가에 서 있었다. 검은 액체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아무런 온기도 전해지지 않았다. 밤새 들렸던 그 목소리“곧, 만나게 될 거야.” 는 여전히 귓가를 맴돌았다. 단순한 위협이라기보단, 예고에 가까운 울림이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는.제하는 거실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고, 수경은 작은 담요를 둘러쓴 채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었다. 그들의 숨소리가 고르게 이어지는 동안에도
그날 새벽,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린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창밖에서 들려온 그 한마디. “…나리.” 아직도 귓가에서 울리고 있었다. 바람 소리에 섞여 흘러나온 것 같기도 했고, 내 이름을 선명히 또렷하게 부르는 듯도 했다. 귀를 틀어막아도 잦아들지 않았고, 오히려 가슴 속에서 메아리처럼 퍼졌다. 분명 착각일 거야. 그렇게 되뇌면서도 손끝은 식어 있었고, 심장은 멈추지 않고 쿵쾅거렸다.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두 다리가 휘청거렸다. 부엌으로 가 물을 마시며 한참이나 싱크대에 매달려 있었다. 찬물이 목을 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