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노을의 막이 내리자 강가의 색은 금빛에서
서서히 은빛으로 변해갔다. 해가 사라진 자리에는
가로등의 둥근 불빛이 달처럼 하나씩 매달렸고,
바람은 저녁 내내 같은 방향으로 불면서
물결의 가장자리를 은근히 뒤집었다.
우리가 마지막 장면을 찍기로 정한 벤치는 낮 동안
데워진 온기를 겨우 지키고 있었고, 검은 난간에는 누군가 남겨둔
손바닥만 한 물 얼룩이 느릿하게 마른 흔적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그 벤치 앞에 서서, 혹시라도 흐트러질지 모를 표정을 고쳐잡았다.
오늘, 누군가의 삶이 새로운 방향으로 꺾인다.
그러니까 모든 움직임이 과하지 않게, 그러나 선명해야 했다.
민하는 먼저 도착해 있었다. 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밀어 넣고,
한쪽 어깨에만 걸친 코트깃을 매만지며 숨을 천천히 정리했다.
달빛이 켠 가로등 아래에서 그녀의 얼굴은 낯설게 맑아 보였다.
울 준비를 하는 얼굴이 아니라, 다짐을 마친 사람의 표정이었다.
나는 가까이 서지 않았다. 오늘은 내가 그녀의 그림자가 되어야 했다.
그림자는 몸을 앞서지도 뒤처지지도 않는다.
빛의 각도를 맞춰 서 있을 뿐이다.
멀리서 달려오는 발소리가 강둑을 가볍게 두드렸다.
익숙한 보폭, 균일한 호흡. 도윤이었다.
그는 러닝을 마친 뒤라 숨이 조금 가빴지만,
걸음을 멈추는 위치를 정확히 잡았다.
벤치에서 두 걸음쯤 떨어진 곳. 우리가 어제 정리해둔 거리였다.
그는 물병을 들어 목을 축이고,
약간의 침묵을 두른 채 민하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유난히 춥네.”
그가 먼저 입을 연 말은 감상에 가까웠다.
이런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차가운 공기는 대체로
사람을 진실 쪽으로 데려간다. 민하는 짧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아무 말도 보태지 않았다. 한 박자, 두 박자, 침묵이 부풀었다가 줄어들었다.
나는 그들의 어깨선과 시선의 높이를 번갈아 보았다.
언젠가부터 알게 된 사실인데, 헤어짐의 문장은 얼굴보다
어깨에서 먼저 떨어진다. 기댈 곳을 잃은 몸이 가장 먼저 알아듣는다.
도윤이 물병의 뚜껑을 닫는 소리가 작게 났다.
“요즘… 조금 달라졌어.”
그의 목소리는 단정했고, 자책과 의심이 섞이지 않은 톤이었다.
좋은 징조였다. 누군가를 비난하지 않고도 끝낼 수 있는 사람,
상처가 흉터로 번질 확률이 낮다.
“달라진 건 나도 알아.”
민하가 조용히 대답했다.
“근데 그게 나만의 일이었으면 좋겠어.”
그 순간 바람이 지나가며 그녀의 머리칼을 살짝 들어올렸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멈추었다.
지금은 어떤 말도 더해선 안 된다.
장면은 이미 스스로 진행 중이었으니까.
도윤이 눈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들었다.
“우리… 많이 노력했지.”
민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진짜 많이.”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는 끝을 말하지 않았다. 말을 완성하지 못하는 사람은
대개 마음속에서 이미 결론을 본 사람이다.
완성의 순간을 소리로 옮기는 일이 버거울 뿐이다.
나는 벤치 뒤편 난간에 몸을 살짝 기대었다.
등 뒤 철이 차갑게 등뼈를 타고 올라왔다.
“도윤아.”
민하가 먼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소리의 끝이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나는 그다음을 아는 사람이었지만,
그 문장을 그녀의 입술로부터 빼앗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사흘 n밤을 들여 그 말의 무게를 고르고,
종이에 적었다 지웠다, 다시 적었다.
그러니 마지막 어조까지 그녀가 소유해야 했다.
“미안하지 않은 미래야.”
말이 공기 중에 놓인 순간, 강물이 파문을 하나 밀어 올렸다.
도윤은 그 말을 이해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뭔가를 애써 붙들던 표정이 눈에 띄게 풀렸다.
“나도… 그런 것 같아.”
그의 미간에 얇은 주름이 생겼다가 곧 사라졌다.
“네가 나 없이도 잘 살 거라는 믿음,
그리고 내가 너 없이도 괜찮을 거라는 믿음
그 둘이 같이 있어야 하는데… 요즘은 한쪽만 있어.”
민하가 미소를 지었다.
울음이 아니라 미소였다는 사실이 이 장면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고마워. 이렇게 말해줘서.”
침묵이 한 번 더 내려앉았다. 이번엔 따뜻했다.
서로의 손을 잡지도 않았고, 오래된 약속을 주고받지도 않았다.
대신 각자 주머니에서 작은 것들을 꺼냈다.
민하는 집 열쇠에 달린 동그란 토끼 키링을 떼어 그에게 건넸고,
도윤은 지갑 속에 보관하던 포토 부스를 꺼내 건넸다.
장난스럽게 뽀뽀 흉내를 내던 사진 속 두 사람은 젊고 쾌활했다.
민하는 사진을 잠시 바라보다,
조심스레 접어 자신의 코트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부모님께는 내가 말할게.”
도윤이 먼저 책임을 가져갔다.
“아니, 내가 할게.”
민하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오늘은 내가 끝까지 하고 싶어.”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에게 박수를 보냈다.
선택의 완결성. 이별의 품질을 결정하는 건
이 작은 문장들이다.
그들은 악수를 하지도, 어설픈 포옹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단지 서로를 바라보고, 동시에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예의를 지키는 마지막 인사였다.
그 다음, 도윤이 먼저 몸을 돌려 둔치를 걸었다.
멀어지는 등 뒤로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지워졌다 다시 생겨났다.
몇 걸음 가다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한 번 들어 보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민하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울음이 오려는 찰나, 그녀는 숨을 고르고 입술을 꼭 다물었다.
오늘의 약속. 울지 않기.
나는 그제야 그림자의 자리를 떠났다.
벤치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 그녀 옆에 섰다.
“잘했어요.”
민하는 나를 한번 보고, 늘 그러듯 짧게 웃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덜 아프네요.”
“아픈 건 내일 올 거에요.”
나는 솔직했다.
“대신, 흉터는 남지 않을 거에요.”
“그게 제일 좋네요.”
그녀는 주머니에 넣어둔 사진을 한 번 더 만졌다.
“이건… 버리지 않을래요
우리가 웃었던 시간이 거짓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은 삭제하는 게 아니라 보관하는 편이 더 오래 안전해요.
다만 서랍을 바꾸면 돼요.”
“어떤 서랍인데요?”
“추억 서랍. 미련 서랍 말고.”
우리는 강변을 따라 느리게 걸었다.
발밑에서 작은 자갈이 미끄러지며 소리를 냈다.
싸늘한 공기가 얼굴을 차갑게 할수록 정신은 오히려 맑아졌다.
일정표의 두 번째 페이지를 꺼낼 때가 됐다. 후폭풍 관리.
카페로 돌아와 따뜻한 차를 두 잔 받아 들고,
우리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창밖에는 여전히 강바람이 잔무늬를 그리며 지나갔다.
나는 노트를 펼치고, ‘사후’라는 페이지를 넘겨 항목별로 체크를 시작했다.
“첫 번째. 부모님.”
“내가 말할게.”
“방식은요?”
“솔직하게. 길게 말하지 않고. 두 분 앞에서 울지 않기.”
“좋아. 예상 질문 리스트를 적자.”
나는 펜을 움직였다.
온유의 호흡이 날이 갈수록 가늘어졌다. 침대 옆에 앉아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숨결. 그 미약한 숨소리를 붙잡으려는 듯 나는 한순간도 손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손끝에서 느껴지던 미약한 힘조차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병실 창가에선 새벽빛이 희미하게 들어와 벽을 적셨다. 바깥 세상은 또 하루를 시작하려 했지만, 이 방 안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차가운 기계음만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듯 일정하게 울려 퍼졌다.제하는 매일같이 병원을 오갔다. 퇴근하자마자 달려와 내 곁에 앉고, 아무 말 없이 옆에서 시간을 채워줬다. 그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나는 이미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곁에 기대는 순간마다 죄책감이 엄습했다.그날 밤, 그는 내게 조용히 말했다.“나리야, 네가 붙잡고 있는 게 사랑인지, 두려움인지… 스스로도 구분 못 하고 있는 것 같아.”나는 그의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사랑이든 두려움이든 상관없어. 지금은 그냥 곁에 있어야 해.”“근데 넌 점점 사라지고 있어. 네 얼굴에서 빛이 없어지는 게 보인다.”그의 목소리는 날카로웠지만, 동시에 절절하게 떨려 있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온유의 손을 더 세게 쥐었다.수경은 그 어느 때보다 조용히 나를 지켜주었다. 예전처럼 나를 밀어내려는 기색은 사라지고, 대신 작은 것들을 챙겼다. 새 수건을 가져다주고, 의자에 담요를 덮어주며, 내가 쓰러지지 않도록 뒤에서 받쳐주었다.하루는 그녀가 병실 밖으로 나를 불러 세웠다.“언니, 저… 이제야 알겠어요. 언니가 왜 이별을 대신해주는 일을 하는지.”나는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말했다.“사람이 가장 무너질 때가 바로 사랑을 놓아야 할 때잖아요. 언니도 지금 그걸 겪고 있죠. 근데 언니는 남들을 위해선 그 과정을 만들어주면서, 정작 자기 이별은 못 하고 있어요.”그녀의 말은 깊은 곳을 찔러왔다. 나는 대답 대신 침묵했다.온유의 상태는 급격
창문 너머로 어스름한 빛이 스며들고 있었지만, 병실 안은 한층 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기계음은 여전히 규칙을 잃은 채 불규칙하게 울려 퍼졌고, 침대 위의 온유는 힘겹게 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의 눈은 반쯤 감긴 채로 떨리고 있었고, 손끝은 더 이상 온기를 품지 못한 듯 차갑게 굳어가고 있었다.나는 그의 곁에 앉아 손을 꼭 잡았다. 떨림이 멎은 손을 붙잡고 있자니, 마치 이미 이별이 시작된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는 속삭였다.“온유야, 듣고 있지? 네가 숨 쉬고 있는 한, 난 여기 있어. 눈을 감아도, 내 목소리 기억해줘.”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난 1년 동안 내가 붙들고 있던 희망은 이렇게 위태로운 선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제하가 들어와 내 옆에 앉았다. 그의 얼굴은 밤새 지켜본 듯 지쳐 있었지만, 눈빛만은 단단했다.“나리야, 잠깐이라도 눈 붙여. 네가 쓰러지면… 이 자리, 아무도 지킬 수 없어.”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아니면 안 돼. 내가 놓는 순간, 그는 혼자가 되잖아.”“넌 혼자 아니야.” 제하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네 옆에 나도 있어. 그걸 왜 잊어.”그의 말에 심장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내가 대답을 하면, 그건 곧 온유를 향한 배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잠시 뒤, 수경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손에 작은 보온병을 들고 있었다.“언니, 따뜻한 차 좀 드세요. 눈이 너무 퀭해요.”나는 놀란 듯 그녀를 바라봤다. 지난날의 배신이 떠올랐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분노할 힘이 없었다. 그녀는 내 옆에 보온병을 놓으며 말했다.“저도 알아요. 제가 저지른 일이 어떤 건지. 근데… 지금은 그걸 사과하는 것보다, 언니 옆에 있어 주고 싶어요. 그래도 돼요?”나는 한참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의자에 앉았다.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새벽을
휴대폰을 쥔 손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간호사의 급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환자분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보호자분 빨리 오셔야 합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가방을 집어 들고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심장은 비명을 지르듯 요동쳤고, 발걸음은 도로를 내달리면서도 제자리만 맴도는 것처럼 무거웠다.병원에 도착했을 때, 복도는 긴박한 공기에 휩싸여 있었다. 의료진들이 바쁘게 오가고, 환자 가족들의 울음소리와 신음이이곳저곳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온유의 병실로 향했다.문이 열리자, 그곳은 작은 전쟁터 같았다. 산소호흡기의 경고음이 불규칙하게 울려 퍼졌고, 간호사들이 그의 몸에 새로운 주사를 꽂으며 의료기기를 조정하고 있었다. 침대 위의 온유는 창백한 얼굴로 눈을 반쯤 감은 채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온유야!”나는 비명을 지르듯 그를 불렀다. 그러나 그는 내 목소리에 대답하지 못한 채 눈만 간신히 떴다. 마치 멀리서 나를 바라보는 것처럼 초점 없는 시선이 흔들리고 있었다.의사가 나를 붙잡아 물러서게 했다.“지금은 치료가 우선입니다. 환자분 상태가 불안정해요.”나는 눈물을 삼키며 뒤로 물러났다. 두 손은 떨려 의자 팔걸이를 붙잡아도 진정되지 않았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긴박한 움직임이 잠시 가라앉고, 간호사들이 물러났다. 모니터의 불안한 파형은 다시 일정한 리듬을 찾아가고 있었다. 의사가 무거운 얼굴로 다가왔다.“위험한 고비를 넘겼습니다. 하지만 언제 다시 이런 상황이 반복될지 알 수 없습니다.가족분께서는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그 말은 곧,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는 선언이었다. 나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병실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온유는 힘겹게 눈을 떴다. 내가 곁으로 다가가 손을 잡자, 그는 미약하게 웃었다.“또… 울었지?”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울지 말랬잖아. 근데 어떻게 안 울어? 이렇게 힘
저녁 공기가 유난히 무거웠다. 하루 종일 카페에 앉아 서류를 정리했지만, 글자들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의뢰인의 사연을 읽다가도 눈앞에 병실의 온유가 겹쳐지고, 커피 향 사이로 스며드는 수경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책상 위에 놓인 펜을 몇 번이나 굴리다가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카페 문이 열리며 낯익은 여자가 들어왔다. 지난주 상담을 의뢰했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다급한 얼굴로 내 앞에 앉았다.“저, 언니랑 상담했던 거 있잖아요. 그거… 남편이 알게 됐어요.”나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알게 됐죠?”“여기서 일하는 분이 직접 남편에게 가서 말을 했대요. 제가 이별을 고민한다고. 그래서 지금 상황이 엉망이에요. 저… 어떻게 해야 하죠?”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누군가 우리 쪽 정보를 흘린 게 분명했다.나는 급히 제하를 불렀고, 수경은 잠시 뒤 카운터에서 다가왔다. 그녀는 모르는 척 놀란 얼굴을 지으며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의뢰인의 눈물이 터졌다. “당신이 말했죠? 내 남편한테!”공기는 단번에 얼어붙었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수경을 바라봤다. 그녀는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네. 제가 말했어요.”순간 숨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하가 목소리를 높였다.“수경, 너 제정신이야? 우리가 뭘 지켜왔는지 알잖아. 어떻게 이런 배신을 할 수 있어?”그러나 수경의 얼굴엔 후회가 없었다. 오히려 눈빛은 더 단단히 굳어 있었다.“저는 더 이상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는 게 싫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알리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언니는 요즘 제 역할도 제대로 못하잖아요. 다 흔들리고 있잖아요.”그녀의 말은 내 심장을 정면으로 찔렀다. 의뢰인은 울음을 터뜨리며 카페를 나가버렸다. 남겨진 우리는 그 자리에서 서로를 노려보았다.밤이 깊어 카페에 세 사람만 남았을 때, 제하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수경, 오늘로 끝이야. 넌 이제 이 일에
새벽 공기는 병원 복도를 따라 차갑게 흘렀다. 커튼 사이로 흘러드는 회색빛 하늘이 병실을 비추고 있었고, 기계음은 여전히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고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온유의 손을 꼭 잡은 채, 밤을 꼬박 지새웠다.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았지만 손끝은 더 강하게 그를 붙잡고 있었다. 놓는 순간, 다시는 그의 체온을 느낄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조심스레 눈을 뜬 온유가 힘겹게 속삭였다.“나리야… 아직 있었네.”나는 눈물이 고인 채로 웃음을 지었다.“어떻게 내가 널 두고 가겠어. 네가 숨 쉬는 동안은 나도 여기 있어야지.”그의 시선이 잠시 흔들리더니, 아주 미약하게 웃음이 번졌다.“그럼… 오늘 하루는 내가 살아 있다는 게 기적이네.”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기적이란 단어가 너무 아프게 다가와서, 목구멍에 걸린 울음을 삼키며 그의 손만 다시 움켜쥐었다.아침이 되자 제하가 병실에 들어왔다. 밤새도록 피곤했을 텐데도 단정한 차림이었다. 그는 나를 보며 다정하게 물었다.“어제 잠은 좀 잤어?”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온유가 버텨주는 게 더 중요하니까.”그는 한숨을 내쉬며 내 곁에 앉았다. 그 시선에는 걱정과 동시에 결심이 깃들어 있었다.잠시 뒤, 간호사가 들어와 활력을 체크하고 나가자, 제하는 의자에 앉아 조용히 말했다.“나리야, 네 마음 알아. 하지만 너 자신은 어디에 있니? 네가 점점 무너지는 걸 옆에서 보는 게 너무 힘들어.”나는 그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눈을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순간 숨이 막혔다. 그러나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수경이 들어왔다.손에 작은 과일 바구니를 든 수경은 밝게 웃으며 들어왔다.“언니, 조금이라도 드셔야 하잖아요. 힘내시라고.”그녀의 다정한 말투 속엔 이상한 긴장이 숨어 있었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며 바구니를 받아 들었지만, 마음 한쪽이 서늘하게 식어갔다.수경은 침대 옆으로 다가가 온유를 향해 미소 지었다.“처음 뵙겠습니
새벽 공기가 뺨을 스쳤다. 차갑다 못해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했지만, 오히려 몽롱했다. 침대에 몸을 눕히고도 한숨조차 편히 쉬지 못한 채 밤을 지새웠다.제하의 고백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수경의 차가운 눈빛과 온유의 약한 손길이 한꺼번에 얽혀 나를 괴롭혔다.아침이 되어 카페 문을 열자, 익숙한 원두 향이 퍼졌지만 오늘따라 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테이블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려는데, 손끝이 덜덜 떨려 글자가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오늘도 병원에 갈 거지?”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제하가 서 있었다. 그는 늘 그랬듯 단정했지만, 눈빛만은 어제와 달랐다. 더 이상 숨기지 않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나는 대답 대신 억지 미소를 지었다. “조금 늦게 갈 거야. 일이 밀려 있어서.”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 스스로를 속이는 건 나보다 네가 더 아프다는 거 알아?”그 순간 카운터 쪽에서 컵 닦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수경이었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컵을 탁 내려놓더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언니, 오늘은 제가 대신 병원에 가면 어때요? 언니는 카페 보고, 제가 온유 씨 옆에 있어 드릴게요.”말끝에 담긴 날카로운 기운이 공기를 찢었다. 나는 무심히 웃어넘기려 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그건… 내가 해야 할 일이야.”수경은 짧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속엔 알 수 없는 도전이 섞여 있었다.그날 오후, 병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웠다. 문을 열자 온유가 창가에 앉아 있었다. 햇살에 비친 그의 얼굴은 더 말라 있었고, 손등의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웃었다.“왔구나. 오늘은 올까 말까 했는데, 역시 왔네.”나는 그의 옆에 앉아 손을 잡았다. 차가운 온기가 손끝에 스며들자 가슴이 저려왔다.“당연히 와야지. 네가 기다리고 있는데.”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속삭였다.“사실은… 어젯밤 많이 아팠어. 숨도 막히고, 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