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왜 지금이냐?
-다른 사람 생겼냐?
-결혼식 취소에서 오는 비용은 어떻게 할 거냐?
-그의 부모님께는 누가 연락하냐?
“답은…”
“지금이 아니면 더 늦어져요.”
민하가 스스로 정리해 나갔다.
“다른 사람은 없고, 서로의 미래를 지키기 위한 결정이고,
비용은 제가 감당할 몫은 감당하고 최대한 정중히 협의할 거고,
그의 부모님께는 직접 연락드릴 거예요.”
나는 마지막 줄을 굵게 밑줄 그었다.
“좋아. 두 번째, 공통 지인. 단체 채팅방은 잠시 알림 꺼두고,
개인 연락만 정중히 응대. ‘우리 둘 다 괜찮다’는 메시지를 통일해서.”
“문장은 이런 게 좋을까요? 오래 고민했고,
서로의 미래를 위해 정중히 인사드려요.
저희는 각각의 자리에서 잘 지내겠습니다.”
“완벽해. 세 번째, SNS. 오늘 밤 비공개 전환,
내일 오후쯤 사진 정리. ‘삭제’ 대신 ‘아카이브’로.”
“응.”
“네 번째, 물건 분배. 집 열쇠와 중요한 서류는 오늘 전달 완료.
선물과 기념품은 보관한 뒤 한 달 후 다시 보기.
그때도 마음이 같다면 나누거나 돌려주기.”
“한 달 유예.”
“맞아. 급히 비우면 구멍이 크게 남아.”
민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
흰 김이 여전히 잔의 입구에서 얇게 피어올랐다.
“나리 씨.”
“네,:..”
“오늘 이 장면… 제가 평생 잊을 것 같지 않아요.
근데 이상하게 그게 싫진 않아요.”
“사람은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보다,
가장 단정했던 순간을 더 오래 기억해요.
오늘 우리는 단정했어요.”
“단정.”
그녀가 그 단어를 한 번 더 흉내 내듯 입술로 굴렸다.
“좋다.”
문을 열고 나갈 때, 제하가 바깥에서 들어오다가 우리를 맞닥뜨렸다.
그는 상황을 한눈에 읽고, 내게 시선을 한 번 주고는 민하에게 따뜻하게 인사했다.
“수고하셨어요.”
민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차… 더 마실래요?”
제하가 제안했다.
“괜찮아요.”
민하가 웃었다.
오늘은 혼자 걸어가고 싶어요.
혼자 걷는 법을 다시 배우고 싶거든요.”
“집까지 가는 길, 위험한 구간만 위치 찍어줘요.”
제하가 자연스럽게 꺼낸 말은 돌봄이었지만 간섭이 아니었다.
“알겠어요.”
민하는 자신의 휴대폰을 열어 몇 좌표를 나에게 전송했다.
우리는 서로 확인 표시를 보냈다.
문이 닫히자 카페 안쪽 공기가 잠시 비어졌다가,
이내 원래의 향으로 채워졌다.
나는 카운터 뒤에 서서 빈 잔을 정리했다.
제하가 옆으로 와서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숨 좀 쉬어.”
“쉬고 있어.”
“표정이 백 가지 생각을 하고 있어.”
나는 웃으며 컵을 닦았다.
“그 중 아흔아홉은 일이야.”
“하나는?”
“미확인 번호.”
제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알고 있었다. 며칠 사이,
그 메시지들이 내 호흡의 리듬을 잠깐씩 어그러뜨렸다는 걸.
“확실히 해볼까?”
“어떻게.”
“가상번호 추적을 바로 하긴 어렵고,
패턴을 보자. 발신 시간, 간격, 메시지 톤. 그리고..”
“그리고?”
“네가 그 번호를 봤을 때 얼굴이 어두워지는 정도.”
“그건 데이터 아니잖아.”
“나한테는 데이터야.”
나는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났다.
“네가 이렇게 사람을 오래 본다는 게 가끔은 무섭다.”
“네가 나를 오래 믿어준 덕분이야.”
짧은 대화였지만, 그 안에는 오랜 시간 쌓인 신뢰가 묻어 있었다.
그는 더 묻지 않았고, 나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우리 사이엔 불필요한 말의 여백이 있다.
그 여백이 일을 한층 더 안전하게 만든다.
밤 열한 시가 가까워졌을 때, 민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부모님께 말씀드렸어요. 울지 않았고, 길게 말하지도 않았어요.
내일, 그의 부모님께도 연락드릴게요.
-잘했어요. 오늘은 따뜻하게 씻고, 휴대폰은 멀리, 잠은 길게.
-네. 고마워요. 나리 씨.
짧은 고백처럼 ‘고마워요’가 남았다.
일의 결산서에서 가장 소중한 항목은 언제나 이 한 줄이었다.
문을 닫고 불을 끄려던 찰나,
휴대폰이 책상 위에서 불빛을 토했다.
화면에는 또다시 이름 없는 번호.
보고 싶다.
세 번째였다. 같은 문장, 같은 길이,
같은 시간대. 제하가 옆에서 내 화면을 힐끗 보고,
아무 말 없이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메모를 남겼다.
“패턴 맞네.”
“장난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는 마지막에 장난기 없는 미소를 얹었다.
“내일 아침까지 네가 답하지 않으면,
네가 ‘독’이라고 판단하고 멈출 확률이 높아.
그때도 오면… 그땐 진짜야.”
“진짜면?”
“그때 가서 생각하자.”
길어지는 하루의 끄트머리,
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천장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카페의 천장엔 작은 금속 레일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조명은 서로의 빛을 잠깐씩 나눠 가지며 공간을 밝혔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마음을 안정시켰다.
빛이 나눠질수록 그림자는 얇아진다. 이별도 그러하길.
나눠질수록, 각자의 그림자가 옅어지길.
문을 잠그고 나서야 바깥 공기가 몰려왔다.
겨울에 가까워진 냄새였다. 귀밑이 시릴 만큼 차가운데도,
오늘만큼은 견딜 만했다. 강 쪽을 향해 짧게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는 마음, 미안하지 않은 미래를 선택해준 사람에게 보내는 인사.
그리고 아직 내 안에서 끝나지 못한 과거에게도 작은 인사.
나는 여기서 일하고, 또 기다린다.
기다림은 사랑의 다른 이름일 때가 많지만,
이제는 일의 일부로만 남았으면 좋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신호에 걸려 잠시 멈춰 섰다.
맞은편 횡단보도에 서 있는 여자아이가 엄마의 손을 쥔 채
신발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끈이 풀리면 묶으면 되고,
매듭이 너무 크면 한 번 더 가늘게 잡아당기면 된다.
길 위에는 사실 그렇게 간단한 문장들이 많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여러 겹의 감정으로 덮어두고 돌아다닐 뿐.
현관문을 열고 어두운 집 안으로 들어오면서,
나는 오늘의 장면을 마음속에서 한 번 더 돌려보았다.
민하의 웃음, 도윤의 고개, 손바닥 안에서 접힌 포토 부스,
그리고 바람. 어떤 것도 과장되지 않았다. 고요한 뜨거움만 있었다.
그 온기면 충분했다.
씻고 나와 침대에 누웠을 때, 텅 빈 방에 파도
소리 비슷한 히터의 숨이 퍼졌다.
눈을 감자, 오래전 웨딩숍의 조명 대신 오늘의 가로등 불빛이 떠올랐다.
그 빛을 따라, 내일 할 일의 목록을 다시 속으로 읊었다.
민하, 그의 부모님, 지인, SNS, 한 달 후 재점검.
그리고 미확인 번호에 대한 원칙. 답하지 않는다.
내 쪽에서 호출하지 않는다. 그러나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두려움은 이별을 흐리게 만든다.
잠이 내려오기 직전, 제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내일 오전 여덟 시, 민하 보호동선 체크. 점심,
새 의뢰인 상담. 장소 카페 B. 이름 오수경.
새로운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낭창한 모음이 많은 이름. 나는 짧게 오케이를 보내고
휴대폰을 엎어놓았다.
등 뒤로 이불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오늘의 끝은 내일의 시작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우리의 일은 늘 그랬다. 누군가의 마지막 인사를 견고하게 닫으면,
또 다른 누군가의 문이 조용히 열린다.
“미안하지 않은 내일.”
나는 그 말을 소리 내지 않고 한 번 더 반복했다.
이 말이 내게도, 그녀에게도,
내일 만날 이름에도 같은 의미이길 바라면서.
그리고 아주 천천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아침시간. 센터 문 앞엔 아무도 없었다.그런데 바닥 위엔 낡은 열쇠 하나와 짧은 쪽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잠시, 숨 좀 고를게.' - 나리그 두 줄이 전부였다.수경은 한참 동안 그 글을 읽었다.글씨는 익숙했지만, 그 문장이 낯설게 느껴졌다.‘숨 좀 고른다는 게… 얼마나 긴 건데요, 선배.’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렸다.“선배가 떠난 게 아니라… 잠시인 거죠.”스스로에게 반복해서 말했다.하지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때마다 점점 그 확신이 희미해졌다.그날 오후, 수경은 평소처럼 상담 일정을 진행했다.하지만 대화의 흐름이 자꾸 어긋났다.“그 사람과의 관계가 이제 끝났다는 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요.”의뢰인의 말에, 수경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그 마음, 잘 알아요.”“정말요?”“네. 누군가가 떠났다는 사실보다 그 사람이 더 이상 내게 설명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더 괴로우니까요.”의뢰인은 잠시 멈췄다.“그 말… 선생님 이야기 같아요.”그녀는 미소 지었다.“그럴 수도 있죠.”상담이 끝나자, 하연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수경 선배… 오늘, 말투가 조금 다르셨어요.”“다르게 들렸어?”“네. 예전엔 ‘정리’하던 말투였는데, 오늘은… ‘기억’하는 말투였어요.”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박혔다.‘기억하는 말투… 그건 나리 선배가 늘 하던 방식이었는데.’저녁, 센터 불이 꺼지고, 수경은 나리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그녀의 손끝이 책상 표면을 천천히 더듬었다.서류의 각, 컵 자국의 흔적, 메모지 위의 희미한 글씨 자국.“이게 다 선배가 있었던 증거네요.”그녀는 낮게 말했다.책상 위에 놓인 작은 수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수첩 표지엔 볼펜으로 꾹 눌러 쓴 글자가 있었다.“이별은 늘 사람의 목소리로 남는다.”그 문장을 읽는 순간, 수경의 눈이 흔들렸다.‘이건… 나한테 남긴 말 같아요.’그녀는 천천히 책을 덮었다.그리고 손끝으로 그 문장을 쓰다듬듯 쥐었다.그 순간, 문이 열렸다. 제하였다.“아직 있었네.”“그
센터의 오후는 유난히 조용했다.비도, 바람도, 소음도 없었다.그런데 그 정적이 오히려 불안했다.나리는 창문 쪽 책상에 앉아 손에 든 펜을 돌리고 있었다.펜촉이 종이 위를 긁을 때마다 짧고 건조한 마찰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책상 위에는 그녀가 직접 쓴 서류 한 장이 놓여 있었다.[운영 위임서]서류 상단에는 수경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그녀는 그 글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이제 됐다.”그 목소리는 무언가를 끝내려는 사람의 어조였다.문이 열렸다. 수경이 들어왔다.손에는 의뢰인 리스트가 들려 있었다.“선배, 이번 주 일정 정리했어요.다음 주부터는 심리치료 협력팀도 같이 붙을 예정이에요.”“그래? 잘 됐다.”“네. 이제 시스템이 완전히 자리 잡은 것 같아요.”그녀는 종이를 내려놓고 미소 지었다.하지만 나리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 있었다.“수경아.”“네?”“잠깐 앉을래?”“왜요?”“할 얘기가 있어.”수경은 잠시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나리는 펜을 내려놓았다.“이건… 내가 써둔 서류야.”“무슨 서류요?”“센터 운영 위임서. 앞으로 네가 이 팀을 맡는 게 맞을 것 같아서.”순간, 공기가 멎었다.수경의 얼굴이 단단히 굳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난 잠시 내려놓으려 해.”“왜요?”“이젠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잖아.”“그게 이유예요?”“그래.”수경은 손으로 서류를 집어 들었다.그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이걸로 끝이에요?”“끝이라기보단… 잠시 멈춤.”“선배는 늘 그 말을 하죠. 잠시 멈춘다, 쉬겠다 근데 선배한테 잠시는 결국 끝이잖아요.”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수경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선배, 이 팀… 선배가 만든 거잖아요. 근데 왜 아무 말도 없이 내려놔요?”“내려놓는 게 아니라, 넘기는 거야.”“같은 말이에요.”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왜 항상 혼자 결정해요? 우린 팀인데, 늘 마지막 순간엔 선배 혼자였어요.”“누군가는 책임져야 하잖아.
월요일 아침, 센터의 유리문이 열렸다.그 문을 밀고 들어온 나리는 잠시 멈춰 섰다.익숙한 공간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딘가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책상 배치가 바뀌었고, 하연의 자리 옆엔 새 화분이 있었다.벽에는 새 문구가 붙어 있었다.“이별은 관계의 끝이 아니라, 나의 회복의 시작이다.”그 문장은 나리의 말이었다.그녀가 한 인터뷰에서 했던 말.그 말이 인용되어, 이제는 팀의 좌우명처럼 벽에 걸려 있었다.그녀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내 말인데, 이젠 내 말 같지가 않네.’“선배!”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수경이었다.활기찬 얼굴, 단정히 묶은 머리, 단정한 셔츠. 그녀의 손에는 스케줄표가 들려 있었다.“돌아왔어요?”“응.”“정말요?”“그렇게 놀랄 일이야?”“아니요. 그냥… 조금 더 쉬실 줄 알았어요.”“쉬는 게 체질에 안 맞더라.”둘은 짧게 웃었다.그 웃음은 따뜻했지만, 묘하게 낯설었다.오전 회의가 열렸다.회의 테이블엔 수경, 하연, 그리고 제하가 앉아 있었다.나리가 오랜만에 그 자리에 앉자, 공기 속에 살짝 긴장감이 감돌았다.“그동안 내가 없을 때 많이 바빴지?”나리가 조용히 물었다.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방송 나가고 나서 문의가 폭주했어요. 상담은 예약제로 돌렸고, 의뢰인 선정 기준도 새로 세웠어요.”“어떤 기준?”“긴급성, 지속 기간, 감정 회복 가능성 세 가지를요.”“그건 나한테도 말해줬어야지.”“보고는 드리려 했는데, 선배가 휴식 중이었으니까요.”나리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말보다 묘한 정적이 먼저 흘렀다.그 정적 속에서, 제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좋은 시스템이네. 효율도 생겼고, 팀의 밸런스도 맞아가고.”“고마워요.”수경이 미소 지었다.그 미소가 나리의 눈에 스쳤다.낯설 만큼 자신감이 있었다.나리는 자료를 넘기며 말했다.“효율이 나쁜 건 아니지만, 우린 효율을 위해 일하는 팀은 아니야.”“알아요. 그래서 상담 시간을 줄이지 않았어요. 대
하루 종일 흐린 날이었다.햇빛 대신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고, 잔잔한 먼지가 공기 중을 떠다녔다.나리는 카페 창가 자리에서 커피를 식혀가며 앉아 있었다.한 모금 마실 때마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그녀는 며칠째 휴식 중이었다.일정표엔 아무 일정도 없었다.대신 마음속에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이제는 정말…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은데.”그녀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익숙한 발소리, 하지만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혹시… 신나리 씨 맞으시죠?”낯선 여자의 목소리였다.그녀는 고개를 들었다.마주 선 얼굴은 너무 익숙했다.“저… 기억하시겠어요?”“혹시…”“3년 전, 남편과의 이별을 의뢰했던… 정윤서예요.”시간이 멈춘 듯했다.그 이름은 오래된 상자 안에 묻어둔 기억 같았다.“윤서 씨…”“이렇게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그녀의 미소는 어딘가 밝고, 또 어딘가 슬퍼 보였다.둘은 카페 구석자리에 앉았다.창밖엔 흐린 빛이 퍼져 있었다.“그날 이후, 저 많이 달라졌어요.”“그래요?”“처음엔… 아무것도 못 했어요. 숨 쉬는 것도 버거웠고,당신이 해준 말들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어요.”“제가 무슨 말을 했죠?”“사랑은 끝나도, 사람은 남아요. 그 말이요.”나리는 그 문장을 듣는 순간, 심장이 미세하게 움찔했다.그 말은, 그녀가 너무도 자주 꺼내던 문장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 낯설었다.“그 말 덕분에… 제가 살아 있었던 것 같아요.”“그건 제 말이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 선택한 생이에요.”“아니에요. 그 말이 없었으면 저는… 그때 진짜로 끝났을지도 몰라요.”윤서의 목소리가 떨렸다.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그래서… 감사했어요. 근데 요즘엔 또 무서워요.”“무서워요?”“그 말이 저를 너무 오래 붙잡고 있어서요.이제는 그때의 이별조차 제 삶의 일부가 돼버린 것 같아요. 그래서 새로 시작이 안
늦은 새벽, 창문을 두드리던 빗소리가 잦아들 무렵이었다.나리는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모니터엔 수십 통의 메일이 켜져 있었고,각기 다른 이름의 사연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남편이 떠난 지 6개월이 지났어요.”“이별을 예쁘게 마무리하고 싶어요.”“다시는 사랑하지 않게 도와주세요.”문장마다, 낯선 얼굴들이 그녀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마치 그 모든 문장들이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다.“이젠… 이걸 다 감당할 자신이 없는데.”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커피잔을 손에 쥐었지만, 잔 안의 액체는 이미 식어 있었다.그녀의 손끝도 마찬가지였다.아침이 되자, 센터는 평소보다 일찍 소란스러워졌다.전화벨 소리, 프린터 돌아가는 소리,그리고 하연의 빠른 발걸음이 얽혀 있었다.“수경 선배! 오늘 오전에 새 의뢰 두 건 더 들어왔어요.”“두 건?”“하나는 3년 연애 후 결혼 직전 파혼, 하나는 불륜 관계 정리 요청이래요.”“둘 다 오늘 안에 미팅 잡히겠네.”수경은 서류를 들고 정신없이 움직였다.“하연, 일정 다시 재조정해. 기존 예약자 중 긴급 아닌 사람은 내일로 미뤄.”“네!”그녀는 일의 흐름을 따라 움직이면서도, 어딘가에서 ‘불안한 정적’을 느꼈다.나리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 빈 의자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선배는 오늘도 안 오시는 거죠?”“응. 이틀째.”그녀는 대답했지만,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았다.“이럴 때일수록 내가 중심 잡아야 해.”그녀는 그렇게 되뇌었다.그 시각, 나리는 집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아무 약속도 없었고, 오랜만에 일정표가 비어 있었다.하지만 그 ‘비어 있음’이 낯설었다.그녀는 핸드폰을 꺼내다, 이내 화면을 껐다.“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햇빛이 가볍게 떨어지고, 나무 사이로 새들이 오갔다.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이런 평범함이, 이렇게 어렵게 느껴질 줄은 몰랐네.”머릿속엔 수경과 제하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둘 다 잘하고 있겠지.’그 생각에 미소가
방송이 나간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센터 전화는 끊이지 않았다.메일함은 ‘상담 요청’ 제목으로 가득 찼고,SNS에는 ‘이별을 도와주는 사람들’이라는 해시태그가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선배, 오늘만 스무 통이에요.”수경이 노트북을 열어보이며 말했다.“다 신규 문의예요. 근데 진짜로 다 받아도 될까요?”나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시선은 멍하니 창가 쪽에 머물러 있었다.“선배?”“응.”“괜찮아요?”“괜찮다는 말, 요즘은 쉽게 못 하겠네.”그녀는 커피잔을 들었지만,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잔 위로 미세한 김이 맴돌았다.그 김조차 무겁게 느껴졌다.“이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야.”“그럼 어떻게 해요?”“줄여야지. 선택을 해야 해.”“누굴요?”“우릴 믿고 연락한 사람들 중, 지금 당장 가장 절실한 사람만.”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그 대신, 나머지 사람들에겐 답장을 꼭 보내줘. 당신의 마음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문장으로.”그 말이 끝나자 수경은 화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답장 하나에도 온도를 담을 줄 아는 사람, 그게 나리다.’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점심 무렵, 제하가 센터에 들어왔다.카메라 가방을 내려놓고, 손에 들린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방송사 쪽에서 후속편 제안이 왔어.”나리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거절해.”“이유는?”“지금은, 보여줄 게 아니라 버텨야 할 때야.”“그래도 이 반응이면”“제하.”그녀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만으로 대화를 끊었다.그건 말보다 더 명확한 거절이었다.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그 대신 카메라를 꺼내 창가 쪽으로 렌즈를 돌렸다.나리의 옆모습이 프레임 안에 들어왔다.조용한 피로, 그리고 그 속에 묘하게 살아 있는 단단함. 그는 셔터를 누르려다가, 결국 멈췄다.“오늘은 찍지 않을래.”“왜?”“지금의 넌, 기록이 아니라… 사람이야.”“그게 무슨 뜻이야.”“렌즈가 닿으면 깨질 것 같아서.”그 말에 그녀는 짧게 웃었다
별장의 창문은 높고 길게 뚫려 있었는데, 바깥으로 쏟아지는 달빛이 거실 바닥에 칼날처럼 엷은 선을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차갑게 닿는 대리석 바닥 위에 발끝을 세우며 심호흡을 했다. 불빛 하나 깜빡이지 않는 그 집은 지나치게 고요했고, 그 고요 속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들조차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유리잔이 살짝 굴러가는 소리, 벽시계의 초침이 미묘하게 탁탁거리는 소리,그리고 내 심장이 불규칙하게 두드리는 소리까지.“재미있군요.”그가 잔을 들며 말을 꺼냈다. 목소리는 낮고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 안에는 내 반응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불을 켜자마자 현관 앞에 놓인 봉투가 시야를 사로잡았다. 낮에 사무실에서 느낀 팽팽한 긴장감이 아직 식지 않았는데, 마치 그가 내 뒤를 따라와 집 앞까지 스며든 듯한 기분이 들었다. 봉투를 들어 올리는 순간, 종이 사이로 묘하게 습한 냄새가 코끝에 스쳤다. 서랍 속에 던져 넣던 이전 쪽지들과 달리 이번엔 그대로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더 이상 숨길 필요도, 감출 이유도 없다고 내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었다.전등 불빛 아래 봉투를 찢어 열자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당신은 나를 흔들었다. 그러나 마
낯선 쪽지를 발견한 그날 밤, 나는 한참 동안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봉투에 적힌 글씨체는 날카롭고 성급했지만, 분명히 그 사람의 손길이 느껴졌다. 당신이 누군지, 곧 알게 될 거요.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엔 노골적인 위협과 자신감이 뒤엉켜 있었다.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내 정체가 탄로 난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게 무너질 것이다. 단순히 의뢰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별전문가라는 내 일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두려움에 물러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가 더 깊이 걸려들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
창문 너머로 어스름한 빛이 스며들고 있었지만, 병실 안은 한층 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기계음은 여전히 규칙을 잃은 채 불규칙하게 울려 퍼졌고, 침대 위의 온유는 힘겹게 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의 눈은 반쯤 감긴 채로 떨리고 있었고, 손끝은 더 이상 온기를 품지 못한 듯 차갑게 굳어가고 있었다.나는 그의 곁에 앉아 손을 꼭 잡았다. 떨림이 멎은 손을 붙잡고 있자니, 마치 이미 이별이 시작된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는 속삭였다.“온유야, 듣고 있지? 네가 숨 쉬고 있는 한, 난 여기 있어. 눈을 감아도,